귀한 향유 한 옥합

귀한 향유 한 옥합 /마26:6-13

귀한 향유 한 옥합
마26:6-13





중국선교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던 날, 북경의 날씨는 잔뜩 흐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행기에 탑승할 무렵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빗줄기가 이내 굵어져 버렸습니다. 비행기안에 있던 저희들은 이 비속에서 비행기가 무사히 인천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약간은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비행기가 이륙을 하더니 하늘을 향해 끊임없이 올라갔습니다. 얼마를 올라갔을까? 귀가 멍멍해지고 옆 사람들의 얘기가 잘 들리지 않던 무렵 강한 빛이 조그마한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밖을 보았더니 어느새 비행기는 구름위로 올라왔고 그곳은 너무도 맑게 개여 있었습니다.

구름아래는 천둥을 동반한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는데 구름 위는 그렇게 맑고 깨끗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경험은 백두산에 올라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두산을 가기 위해 숙소에서 나서던 시각, 비가 부슬부슬 내렸습니다. 그런데 저희 일행이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고 잠시 후, 천둥소리와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쳤습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이런 날씨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날씨 속에서는 도저히 백두산 천지를 구경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뭏튼 백두산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비는 계속 내렸습니다.

그런데 먼저 백두산을 다녀온 분들이나 그곳에 있는 분들이 한결같이 \\\\\\\"백두산 아래의 날씨는 이래도 막상 올라가면 화창하게 개일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믿고 백두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할 정도로 정상에 다가갈수록 너무도 맑게 개인 날씨와 그 사이를 뚫고 백두산 정상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정말 감탄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산 아래는 천둥치고 억수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산 위는 그렇게 맑고, 깨끗하고, 화창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이 어떤 내용으로 시작되었습니까?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한바탕 비구름을 몰고 오기 위해 가야바의 집에 모여서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으면 천둥을 동반한 강한 비바람을 몰아치게 할 기세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너무도 평화롭습니다. 주님의 모습은 마치 구름 위에 펼쳐진 맑고 깨끗한 하늘과도 같았습니다. 구름아래는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살인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주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평화롭게 한 가정을 방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시몬의 집에 계십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너무도 의연하고, 여유있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을 향한 무서운 계획을 모르셨기 때문에 한가로이 베다니 시몬의 집을 방문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체념한 상태도 아닙니다. 흔히 삶에 대해 체념했거나 더 이상 살수 없는 환자들을 향해 의사들이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입니까? \\\\\\\"맛있는 것 많이 드시게 하고 마음 편하게 해 드리세요\\\\\\\"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자신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삶에 대해 체념하듯 마지막으로 시몬의 집에 가서 맛있는 것 한번 실컷 먹어보자는 생각으로 그 집을 찾아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사역에 충실하셨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류의 구원자로서의 주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말하기를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할지라도 오늘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요?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는데 한가하게 사과나무나 심고 있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라면 이틀 후에 죽게 되는데 한가하게 남의 집을 방문해서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하며 그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요? 그것도 누군가가 나를 죽이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냥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를 하며 지낼 수 있겠습니까? 도망을 가던지 아니면 사람들을 동원해서 주위를 에워싸게 해서 절대 자신을 잡아갈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해 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인류의 대속을 위한 죽음을 준비하면서 너무도 평화롭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베다니 시몬의 집을 방문한 것과 대속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는 어떤 관계가 있길래 이 집을 방문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이 집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 때문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시몬은 문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의식법에 의하면 문둥병자는 불결하게 여겨져 마을에 내려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는 과거에 문둥병을 앓았지만 예수님에 의해 고침을 받고 지금은 완쾌된 상태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직도 그를 과거 문둥병을 앓았던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기에 \\\\\\\'베다니 문둥이 시몬\\\\\\\'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비교해 볼 때,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나사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인물로 여겨집니다.

그 시몬의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7절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이 사람을 가리켜 \\\\\\\'한 여자\\\\\\\'라고만 소개하고 있는 반면,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서는 좀더 자세하게 이 사건과 인물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12장에서는 이 여인이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고, 그녀가 이날 깨트린 향유 한 옥합은 나드 한근에 해당되는 양이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에서는 나드 한근은 3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것으로 소개를 하고 있는데 그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임을 감안한다면 한 노동자의 일년치 임금과 맞먹는 가치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사건이 이 집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물론 돈이 많은 사람들의 경우라면 별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저희가 중국에 머무는 동안 \\\\\\\'요리집\\\\\\\'에 들린 적이 있습니다. 한번에 7-8명이 함께 원탁의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주문하고 식사를 하게 됩니다.
중국이 \\\\\\\'요리천국\\\\\\\'이라는 말처럼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시켜서 먹게 되는데 그렇게 실컷 먹고 막상 계산을 하면 중국 돈으로 300여원정도 나옵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5만원이 채 되지 않는 돈입니다. 사실 우리나라 어디에 가서도 7-8명이 5만원으로, 그것도 요리집에서 먹을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먹으려면 적어도 그 열배에 가까운 돈을 지불해야만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에 사는 어떤 노동자들에게는 그 돈이 한달치 임금에 해당되는 돈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한끼 식사로 쓸 수 있는 돈이 어떤 사람에게는 한달 생활비와 맞먹는 아주 큰 돈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북한주민들과 비교해 본다면 그 돈은 더 큰 돈일 수 있습니다. 사실 재벌들에게는 3백 데나리온이 별로 큰돈이 아닐 수 있습니다. 하루저녁 술값으로 날려 버릴 수도 있는 돈입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3백 데나리온은 엄청나게 큰돈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께 향유를 붓는 이 여인은 재벌이 아닙니다. 돈을 쌓아놓고 어디에 쓸까? 고민하던 사람도 아닙니다. 그녀는 그저 평범한 서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이 향유는 그녀에게 있어서도 굉장한 의미를 지닌 향유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 비싼 향유를 싸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한번 붓고 나면 다시는 쓸 수도 없는 향유를 그저 머리에 부음으로 3백 데나리온을 한 순간에 날려 버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잘 살지도 못하면서 무엇 때문에 그 비싼 향유를 쌌느냐?\\\\\\\" 라고 말입니다. 더구나 \\\\\\\"비싼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쏟아 부어서 결국 엄청난 손실을 가져오지 않았느냐?\\\\\\\"라고 말입니다. \\\\\\\"차라리 구제하는데 사용했다면, 차라리 선교하는데 사용했다면 그렇게 의미없이 그 큰돈을 없애버리지는 않았을텐데\\\\\\\"라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것도 아니면 \\\\\\\"은행에 그 돈을 맡겨두고 이자를 받아서 선한 일에 사용하면 될텐데 그렇게 무식하게 다 써버리느냐?\\\\\\\" 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8절과 9절에 보면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차라리 이 향유를 팔아서 돈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좋았을텐데 왜 이것을 땅에 다 쏟아 부어 버리고 마느냐? 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극히 이성적인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 말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지만 결국 그것은 땅에 쏟아 붓는 행위였습니다. 한번 붓고 나면 그곳에서 또 다른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애아이들 교육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왜 비장애인아이들 만큼 교육에 대해 신경을 쓰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장애아이들에게는 오직 투자만 있고,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비장애인아이들은 교육을 시키면 이 사회에 무언가 도움이 되겠지만 장애인을 교육시키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이 여인에게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향유를 잘만 이용하면 여러 번에 걸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텐데 왜 그렇게 단 한번으로 그 많은 돈을 허비해 버리고 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왜 좀더 경제적이지 못하고, 실리적이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남자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조건을 따지지 않습니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더욱 헌신적으로 모든 것을 쏟아 버립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맹목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말 그대로 맹목적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 그러나 당사자에게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나 계산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300 데나리온이 아니라 3000 데나리온도 있으면 다 드리고 싶은 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그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의 절정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십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도 아깝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사랑에 경제성을 따졌다면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 없습니다. 사랑에 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면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 시각, 베다니 시몬의 집에 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여인을 여러분들은 이해를 하실 수 있겠습니까? 이해하실 수 있으시다구요? 그러면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그 사랑의 고백에 합당하게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젊음도, 여러분의 생활도, 여러분의 자녀도, 여러분의 생각마저도 주님께 아낌없이 그리고 계산하지 않고 드리고 계십니까?

현대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책제목 그대로 \\\\\\\'아낌없이 주는 것\\\\\\\' 때문입니다. 한 소년에게 나뭇잎을 주고, 열매도 주고, 심지어 여행을 위해 배가 필요하다는 소년의 말에 자신을 베어가게 하고, 그리하여 더 이상 줄 것이 없어 밑둥만 남아 있을 때, 이번엔 그 나무에 걸터앉을 수 있도록 휴식처를 제공하면서 행복해 하는 나무의 얘기를 아십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낭비하고 허비하는 일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이 여인이 낭비한다고 생각하는 그 이면에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 스스로를 변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말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면 무슨 계산이 필요하며, 무슨 조건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의 기쁨을 어떤 사람이 알 수 있을까요?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어 본 사람만이 참된 사랑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조건 따지고, 실리 따지고, 경제성 따지는 사람은 참된 사랑의 기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기 전, 어떤 마음의 자세로 나오셨습니까? 무엇을 희생하실 각오를 하고 나오셨습니까? 우리가 흔히 하는 말 그대로 예배 보러 오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늘 성가대는 어떤 곡을 부르냐? 보려고, 목사님은 어떻게 설교하시나? 보려고, 오늘 어떤 사람이 결석했는가? 보려고 오신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주의 전에 나올 때 어떤 것을 희생하기로 결정을 하셨는지 그것이 바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시간이나 물질을 드리는 영적 태도가 여러분이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십니까? 시시하게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말로는 절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을 시시하게 생각할 수 있겠느냐? 라고 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시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시시하게 드리고, 시시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약속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께서 이런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즘 여름 성경학교를 준비하면서 너무 바쁜 하루를 보내고 계시는데 얼마나 바쁜지 본인이 치료를 받아야 할 일이 있는데 그냥 지나쳐 버린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 뒤에 하신 말씀이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정말 아파서 못 견딜 정도면 열일마다 하고 치료받으러 왜 가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웬만큼 견딜만 하니까? 이러지요\\\\\\\"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중요한 분이고, 하나님과의 약속이 중요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 중요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일에 대해 결코 등한히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위해 쓰다가 남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쓸 것 다 쓰고 남는 물질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소중한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여인처럼 아낌없이 드리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는 어떠합니까? 혹시 계산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요모조모 견주어 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

낭비하고 있다는 제자들의 생각에 대해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10절에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자 했던 그녀의 마음을 주님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그런 그녀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주님께 좋은 일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좋은 일에 대한 평가는 주님이 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의 생각은 제자들의 생각과 같은지 모릅니다. \\\\\\\"왜 허비하지, 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텐데…\\\\\\\" 그러나 주님은 그녀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하셨는가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순수하게 주께 드리고자 했던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한 평가로 좋은 일을 했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차라리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좋은 일에 대한 평가는 주께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섣불리 \\\\\\\'이것은 좋은 일, 선한 일, 저런 일은 나쁜 일, 별로 좋지 못한 일\\\\\\\' 하면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를 주님은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11절에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가난한자들을 돌아보지 말라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말입니까?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마음이 있다면 평소에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아니 도와줄 마음이 있다면 얼마든지 돕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그들은 너무도 가까운 우리의 곁에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옥합을 깨트리는 일은 항상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항상 할 수 있는 일과 기회가 사라지면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분명한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고자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할 수 있는 일과 기회를 놓치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회를 놓치면 할 수 없는 일을, 항상 할 수 있는 일과 혼동을 해서 그 일을 행함에 있어 주저함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은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쏟아 부은 일에 대해 \\\\\\\'좋은 일\\\\\\\'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그 일을 좋은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12절을 보면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저는 향유를 붓는 이 여인이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미리 향유를 준비하여 부었다고 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그 사실을 알고 부은 것이 아닐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저 귀한 것을 드리고 싶은 마음에 최선을 다해 드렸더니 주님은 그것이 십자가에서 죽게 될 자신의 장사를 위함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그저 최선의 것을 주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주께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정확한 해답을 완벽하게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내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주께서 명확하게 답을 알려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의무나 책임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하면 안됩니다.

주님은 이 여인의 행동이 자신의 장사를 준비하는 행동이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주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것인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선의 행동은 최선의 결과를 낳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께 행하는 최선의 행동이야말로 주님을 향한 최선의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결과는 주께 맡기고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정을 다 쏟아 붓는 것입니다. 내가 미리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판단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나머지는 주님의 몫입니다. 주께서 판단하셔서 가장 적절하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로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이 행한 행동도 함께 전파될 것이라는 사실은 그녀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축복의 말씀인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존재해 왔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구세주이신 주님을 알고 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주님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안다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또 그분을 영접하여 나의 구세주로 모시는 일은 더욱 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여인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항상 주님과 함께 이 여인이 행한 행동에 대해 전파되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사람들이 산에 있는 돌이나 나무 같은 곳에 자기 이름을 새겨두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자기를 기억하고 알아달라는 뜻입니다. 내가 여기 다녀갔다는 흔적을 남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여인의 행동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무엇입니까?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인의 행동도 기억되어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녀가 여기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남겼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늘 주님과 함께 하고 계십니까? 그분의 이름이 전해지는 곳에 여러분이 행한 행동도 전해지고 있습니까? 어떻게 전해지고 계십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더니 완전히 불한당이로군\\\\\\\"이라는 말을 듣습니까? 아니면 \\\\\\\"저 사람이 믿는 예수라면 나도 한번 믿어보고 싶은데\\\\\\\"라는 말을 듣고 계십니까?

오늘 이 자리에는 무엇 때문에 나오셨습니까? 예배를 보기 위해서입니까? 예배는 드려져야 합니다. 아니 나의 모든 것을 이 예배를 통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귀한 향유 한 옥합이 깨어질 때 나의 자아도 깨어지고, 나의 고집도 깨어지고, 나의 인간적인 자존심도 깨어지고, 나의 모난 모든 부분이 깨어질 것입니다. 옥합을 깨트려야 주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 향유를 주께 부은 이 여인과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의 향유 한 옥합을 깨트려 주께 드리시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