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붙잡힌 헌신의 생활

말씀에 붙잡힌 헌신의 생활/행18:1-11

말씀에 붙잡힌 헌신의 생활
행18:1-11





신학자 K. Barth는 신앙은 열정이고, 헌신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열심하는 그곳에 성령의 역사를 맛 볼 수 있고, 헌신하는 그곳에서 신앙의 진주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붙잡힌 사람들은 한결 같이 열정이 있고 헌신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우주의 질서에서 보면 핵을 중심으로 하여 양이온과 음이온이 서로 끌어들이고 밀어내고 하면서 생명체를 유지하는 자연의 법칙처럼 신앙을 중심으로 하여 열정과 헌신은 끌어드리고, 죄는 밀어내고 하면서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심에 내제하고 있는 죄는 몰아내고, 내 중심에 열정적인 신앙과 헌신적인 신앙을 끌어드려야 할 줄 믿습니다.
헌신은 내 뜻에 맞으면 맞고 내 뜻에 틀리면 틀린것이라고 하는 자기중심의 자세를 포기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눅9:23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믿습니까?

영국에 어떤 농부 부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느 날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를 낳은 것입니다. 흔치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중의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아내가 묻습니다.\\\"두 마리 중 어느 것을 드리지요?\\\" 잠시 생각하던 남편은 \\\"나중에 크면 결정하십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사색이 되어 부엌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아내는 \\\"여보 무슨 일이 있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방금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단 말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가 \\\"아니 어느 것이 하나님의 송아지인지 정해놓지 않았잖아요!\\\" 라고 반문하자 남편은 \\\"아니요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흰 놈이 하나님의 송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런데 바로 그 놈이 죽었단 말이요!\\\"
이게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마음속에는 욕심과 탐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할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 이익에 빠릅니다. 손익에 대한 계산 때문에 헌신하기를 주저합니다. 분명한 것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는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주신 본문의 말씀에서 보여주시는 바울과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의 열심과 헌신을 통하여 은혜 받고져 합니다.

I. 헌신하는 성도들의 생활은 주님을 위한 것이였습니다.
3절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아덴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복음보다는 아덴에 있는 철학자들과의 변론에 심취되어 학문의 논쟁에서 짜릿한 맛을 보았습니다. 아덴 에서 바울은 역시 학문의 대가라고 하는 혼자의 짜릿한 맛으로 만족하고, 인정을 받았지만 복음에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고린도에 돌아와 아덴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아덴의 생활은 주님의 복음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명예를 위한 싸움 이였음을 알고■ 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전하지 않겠다고 하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고전1: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그리하여 바울은 생활 방식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 것은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주님을 위하여 하겠다고 하는 생각 이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곧 바로 믿음으로 연결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교안들도 극 소수였고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후원하는 후원자들이 극소수였던 관계로 복음을 전하는 일과 생활을 해결해야 하는 일을 같이 하여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장막 만드는 기술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원래 명문집안의 자녀였고 최고의 학문을 겸비한 바울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사울 이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의 주님을 만난 후 회심하고 주님의 복음 전하는 일에만 전념하였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끈이 떨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음 전하는 일에 전념하면서도 생활을 책임지게 된 것입니다.
생활을 위한 전념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전념 이였습니다.
우리의 생활자체가 자신의 욕심을 위한 생활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생활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고전10: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금년에는 나에 주신일을 사람을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하기보다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II. 생활 자체가 헌신 이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삶 전체가 헌신의 삶 이였습니다. 마굿간에 탄생하신 자체가 곧 헌신이였습니다. 빌2:6-8■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 고하셨습니다.
공생애의 전체가 모두 헌신 이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들의 죄를 위한 최대의 헌신 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특별히 헌신의 날이 있고 헌신의 시간이 있다기 보다는 삶의 자체가 곧 헌신의 삶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이 잘 기록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생활을 보면 전체적으로 헌신의 생활 이였습니다.
행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어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일조가 아니라 10의 10조를 드리는 헌신으로 능력과 기적이 이루어 졌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태인지 새로워 져야 합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지역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교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역사는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역에도 한 사람의 헌신하는 사람으로 부흥되는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복음에 헌신한 사람들이 소개되어 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과 같은 직업을 가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그리고 자기 집을 교회에 내놓은 디도 유스도, 또 회당장 그리스도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뢰아에서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도 고린도에서 합류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과 함께 헌신된 사람들이 일어날 때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사람이 헌신된 일군들입니다.

III. 헌신은 만남을 축복되게 하십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모를 만납니다. 성장하면서 친구를 만납니다. 장성하여 배우자를 만납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집니다. 완전히 새로워 집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고후5: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그리스도인를 잘 만나야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이기에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내가 말씀에 사로잡힐 때에 만나는 사람은 복이 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축복은 고린도에 와서 사도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만남은 이들 부부의 삶의 방향, 목적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정도 고린도에서 사역을 했을 때, 그 때 가장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갈수록 복음에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 할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5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합니다.”
말씀에 사로 잡힌 사람이란 지식적으로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딤후4: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
고린도에서의 그리스도를 전하는 바울을 보고 말씀에 붙잡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전도할 때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이런 것들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된 첫 번째 사람들이 바로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바울에게서 말씀으로 양육 받으면서 그들의 가슴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찼습니다. 모든 것을 복음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불타 올랐던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이들 부부에게 옮겨가고,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헌신된 마음이 이들 부부의 가슴에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전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하길 원하면 기도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내가 불평하면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을 보면
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고 훈련 받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② 또한 브리스길라 부부는 교회와 교회 지도자, 특히 바울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교회에 헌신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는 것이었고 영적 지도자들에게 헌신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로마의 박해자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고 나자 다시 바울과 함께 로마로 왔습니다.
롬16:3에 보면 바울은 그들을 동역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4절에 계속 말하기를 \\\"저희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이들 부부는 바울의 복음 전도를 돕기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이 말씀 안에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은 신앙의 일꾼들이 많아지는 새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새해가 되었습니다. 말씀에 붙잡힌 헌신을 통하여 주님께 영광이요 나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복을 받는 새해가 되어 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칼럼


제 목 : 부안사태의 진실은 규명되어야한다
내용 : 진실은 규명되어야 한다. 04.1.22 백남운목사

13세기에 이탈리아의 유명한 탐험가였던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는 당시 미지의 세계였던 중국에서 17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자기의 조국 이탈리아로 돌아와 당시의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남해(南海) 등에 관한 기사가 풍부하고 정확하며, 특히 중앙아시아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는《동방견문록》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매우 신기하여 처음에는 유럽인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임종할 때가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친구들은 그에게 다그쳤습니다.
\\\"여보게, 자네는 자네의 책에서 도무지 우리가 믿을 수 없는 황당한 이야기들만 잔뜩 기록해 놓지 않았나? 이제라도 자네가 우리에게 진실을 밝혀주면 좋겠네. 자네가 쓴 모든 내용이 자네의 상상에 의해서 꾸며졌다는 사실을 말일세.\\\" 그 때 마르코 폴로는 \\\"아닐세. 내가 책에 쓴 것은 모두 진실일세. 사실 나는 내가 보고 겪었던 것의 절반도 채 기록하지 못했다네.\\\"
진실을 말하여도 믿지 못하는 일들이 우리지역 부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며 이러한 일들이 하루 속히 마무리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방패장을 반대해온 측에서는 위험시설이고 암 걸리고 임산부가 기형아를 낳고.....하는 문제를 제기함으로 시작하다가 이제는 주민투표를 통하여 부안지역 방패장으로 인한 사태를 마무리 하자고 합니다. 마무리한다는 데는 쌍수를 들고 환영 할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패장은 진실로 지구상에 있어서는 안되는 시설인가?입니다. 진실은 규명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대한 진실을 전하여 주시다가 유언비어죄?에 걸려 십자가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방패장의 안전성은 진실로 안전한가? 아니면 유언비어 인가?가 규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을 투표로 결정한다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문제를 투표 운운하면서 방패장에 대한 진실규명 하는일은 황소 걸음을 걷고 있기에 의구심을 더 하는것입니다.

서울대학교 원자력 교수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절대 안전한 시설이라고 한다면 투표로 결정한다는 것은 더욱더 위험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일방적인 주민 투표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다 다 놓쳐버리는 위험한 일이며 지역 발전을 기대 할 수 없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주민 투표를 실시 할 경우 그 동안 반대해 오신 분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반대표를 던질 것이지만 그 동안 찬성해 온 분들은 일방적인 투표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 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측은 인기을 등에 업고 백지화는 당연한 것으로 투표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를 공격함으로서 투표하지 않은 찬성 측과의 갈등은 더욱더 거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투표로 결정하는 것이라면 정부측, 찬성측과의 합의 후에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투표 이전에 원래의 주장대로 안전성의 문제를 확실하게 다루어 안전하지 못한 지역이라면 쌍수를 들고 반대하여야 하지만 안전성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특별법 제정 후에 새만금보다도 더 많은 부가가치를 산출 할 수 있는 양성자 가속기를 유치하여 지역 경제에 활력소 역할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