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생활 과 헌신

헌금생활과 영성/말1:13

헌금생활과 영성
말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최근에 국민일보에 “교회 다니면 富도 따른다” 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의 평안과 구원을 얻으려고 교회에 가는 행위가 부차적으로 경제적 풍요로움까지 뒤따르게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경제학과 조너선 그루버 교수는 최근 ‘종교 시장구조, 종교 참여와 결과-종교는 유익한가’라는 논문에서 “교회 참석 빈도가 배가 되면 가계소득이 9.1% 증가 한다”고 밝혔다. 그루버는 진보적 개신교, 중도 개신교, 보수 개신교, 가톨릭, 유대교 등 특정 신앙을 공유하는 7개 집단에 대해 연구한 결과 이 같은 결론을 얻었다.

이 논문에 따르면 교회 참석률이 높을수록 학력·소득 수준과 혼인율이 높은 반면, 복지지원금 수혜율과 장애·이혼율은 낮다. 그루버는 “신앙심이 강해질수록 일상의 문제들에 대한 스트레스가 줄어들기 때문에 교회에 자주 가는 사람은 노동시장과 결혼시장에서 성공하기 쉽다”고 설명했다.

종교 커뮤니티, 즉 예배를 비롯한 모든 신앙적 교제는 개인에게 사회적 관계망과 구직 기회를 넓히는 장인 동시에, 일종의 ‘정서적 보험’이 기능함으로써 경제적 실패의 위험성도 줄일 수 있다. 또 부모의 독실한 신앙심은 자녀의 학교 진학률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학력 수준을 높이게 된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어렵다’는 말처럼 성경에는 경제적 성공의 위험과 해악을 경계하는 대목이 많지만, 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고 시카고 트리뷴은 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일부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의 문은 소지품이 너무 많을 경우 통과하기 힘들 정도로 작은 예루살렘 성문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에 들어서려면 자기의 소유물을 미련 없이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시카고 제4 장로교회의 존 뷰캐넌 목사는 “예수님은 단지 우리가 자신의 소득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 책임 있게 설명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고 말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말라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 이후, 그리고 다시 종교적인 암흑기가 시작되는 시기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예배와 신앙은 형식만 있었을 뿐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그 내용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가 없고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적이 있습니다. 열매가 없이 땅만 버리는 포도나무는 찍어내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정신보다는 율법의 문자만을 중요시 하였던 유대인들을 역사학자들은 편협한 유대주의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껍데기뿐인 율법주의자들을 보시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러한 이스라엘은 비록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고 모든 것이 회복되었지만 다시 종교적인 암흑시대로 들어갑니다.

오늘 본문은 이 시기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영성을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적인 영성은 헌금생활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신앙인으로서의 기본적인 모양은 가졌지만 하나님이 바라시고 그 마음에 합해 하실만한 내용이 전혀 없었습니다. 다시 본문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라기는 우리에게 십일조에 대한 의무만을 강조한 것 같은데 사실은 우리의 헌금생활 일반에 관한 교훈을 전체적으로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라기를 통하여 헌금생활을 통해 나타나는 신앙인의 영성과 그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 1:8-9)『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존중히 생각하시며 우리의 이름을 당신의 기념책에 기록하기를 원하시며 우리를 당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시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와 같이 뛰게 하고 싶어 하시는데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의 수준이 우리의 헌금생활과 같이 간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것은 헌금의 액수의 많고 적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하는 성도의 진실성과 진정한 믿음의 자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라기의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주목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그리고 이 말씀은 더더욱 주목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헌금을 하는 것이 때로는 어려운 살림여부를 떠나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나 한 번 이상은 느끼고 경험을 합니다. 그래서 헌금에 성의가 없고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이러한 그들에게 준비된 역사는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암흑뿐 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수많은 고난의 역사를 신구약 중간시대에서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래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말 3:16-18)『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그 뿐입니까?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이것이 오늘도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헌금자체가 부담스럽고 번폐스러울 수가 있으나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어쩔 수 없이 물질과 마음은 같이 가는 것이기에 그 물질에 내 마음과 성의와 영성이 담겨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앞서 MIT 교수의 논문제목에서 증명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 다니면 富도 따른다” “신앙심이 강해질수록, 즉 교회에 잘 나가는 사람은 노동시장과 결혼시장에서 성공하기 쉽다”
는 주장을 다시 되새겨 볼 필요는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구약성경에 보면 출애굽을 할 당시에 안식일에 관한 중요한 사건 하나가 발생합니다. 원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 날입니다. (출 20:11)『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 중의 일부는 이 사실을 소홀히 했습니다. (민 15:32-36)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지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이 때 처음으로 안식일을 범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후 안식일을 범한 사람들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가 살아 있다고 해서 산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안식일을 범하지 않고 지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점을 하나의 모범적인 사례로 분명히 교훈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초대교회 당시에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부부가 하나님께 헌금을 작정하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으므로 역시 죽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행 5:3-5)『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처음에는 밭을 판값의 전부를 드리겠다고 작정하였으나 정작 밭을 다 팔고 보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밭을 판값의 일부를 감추고 전부를 드린 것처럼 거짓으로 나머지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것을 사단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인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드리는 사람의 정성과 중심을 보시는 것이지 결코 액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짓과 위선을 싫어하십니다. 계시록에도 거짓말하는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이 사건 이후 헌금생활에 이러한 부정이 있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모두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더 중요한 것은 그가 비록 이렇게 죽지는 않았을지라도 죽은 자와 다를 바가 없고 성 밖에 있는 자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 된다고 해서 좋아하고 안심할 일은 결코 아닙니다. 안식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나 헌금을 속인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단지 본보기로 보여 주셨을 뿐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산자이냐 죽은 자이냐, 내 영성이 건강한지의 여부는 스스로 바른 방향으로 결단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안식일을 잘 지키는 것이나 헌금생활을 통해서 그 사람의 정체성과 영성이 나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의 신앙이 좀 더 진지하고 바르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마음에 합하기를 원하십니다.

헌금은 액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헌금을 많이 하면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바리새인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인정하셨습니다. (막 12:42-44)『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헌금은 액수의 문제가 아니라 드리는 사람이 자기생활의 형편에 따라 드리는 거짓 없는 깨끗한 정성입니다. 그래서 헌금생활 속에 그 사람의 영성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영성은 그 존재가 누구이냐? 그가 어떤 존재이냐?를 결정하는 정체성의 본질을 뜻합니다. 그리고 헌금은 그 개인의 삶을 만드는 씨앗이고 동기입니다.
▣갈멜산의 복된 장마비의 축복은 죄악의 원인을 제거한 것이고 동기, 즉 씨앗을 심은 데서 왔습니다. 그 씨앗은 물입니다. 결과가 먼저가 아니고 동기가 먼저입니다. 그래서 동기가 중요합니다. 이 동기는 그 사람의 영성이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