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부의 헌금을 지켜보시는 주님 눅21:1-4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감사할만한 일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늘 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를 해야 하지만 일년에 한 날을 정해서 ‘어버이날’이다 해서 특별히 부모님의 은덕을 기억하는 것처럼, 또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매일 사랑해야 되지만 그러나 일년에 한번씩 그들의 생일을 기억해서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하는 것처럼 우리가 늘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야 되지만 청교도들은 일년에 한날을 정해서 온 민족이, 가정이, 교회가, 추수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을 삼았습니다. 나라마다 국가 원수가 태어난 날을 공휴일 만들기도 하고 또 독립한 날을 기념해서 공휴일로 만들기도 합니다 만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을 정해서 공휴일로 만든 민족은 참으로 복 받을 만한 민족입니다. 미국이 이런 면으로 저런 면으로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들의 조상은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책 위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고, 또 동전 위에다 ‘In God we trust\\\'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 이렇게 그들의 믿음을 기록을 하고, 그리고 일년에 한 날을 추수감사절로 정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복을 만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이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되고 그것이 우리의 문화가 돼야 되고 체질이 되어야 하고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왜 주님께서 구약 성경에서 이 중요한 절기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식탁 공동체에 앉게 하셨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같이 예수를 믿지만 가족들이 같이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기회는 식사하는 시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식탁 테이블에 온 가족이 모여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오늘은 유월절이다, 오늘은 초막절이다, 오늘은 이런 날이다, 오늘 우리가 이런 것을 기억하는 날이다. 그래서 오늘날도 유태인 가정이 유월절 식탁 테이블에 모일 때 그 따르는 규례가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질문하게 되어있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딸이 아버지에게 묻게 되어있습니다. ‘아버지여, 오늘 이 저녁이 왜 다른 저녁보다도 다릅니까?’ 그러면 아버지가 자식에게 ‘우리 조상이 애굽의 종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펴신 팔과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내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대답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민족의 역사 가운데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그리고 같이 식사함으로써 믿음이라는 것이 가정을 중심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치고 물려주는 믿음으로 전승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은 온 가족이 교회를 다니더라도 아버지가 다니는 교회가 다르고 어머니 다니는 교회가 다르고 자식들 다니는 교회가 다르고, 함께 식탁 테이블에 모여서 믿음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훈련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이 어렵습니다. 저도 어려워요. 목사인 저이지만, 가족들이 믿음 안에서 함께 모여서 얼굴을 마주 보고, 믿음으로 대화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그래서 이와 같은 경건의 습관은 가정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서 배워야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처음 주일학교를 나가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저는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다녔는데, 저희 반에 모태신앙인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할아버지 때부터 믿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벌써 보면요 주일날 드릴 헌금을 미리 빳빳한 지폐로, 아마 그게 10원짜리 였나, 100원짜리 였나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무튼 지금은 동전만 있지요, 그때는 지폐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빳빳한 지폐로 헌금을 준비해서 오는데, 저는 그걸 볼 때마다 주눅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거든요. 저희 집에 어느 누구도 그걸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본 적이 없으니까 어떻게 그것을 하겠습니까? 이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정 마다 그들의 믿음의 뿌리를 가지고 이어 나가야 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 당대에 예수님을 믿었다면 장차 여러분의 가문에 그러한 믿음의 전통을 만들면 됩니다. 그래서 가장되시는 분들은 선포를 하세요. 자녀들을 모아 놓고 ‘오늘부터 우리 가정은 제사 드리지 않고 추모 예배드린다. 오늘부터 우리는 식사 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밥 먹는다’ 누군가가 앞장 서야 됩니다.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고요, 그리고 그 결과를 책임 질 수 있는 그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추수감사절이라는 것이 미국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한국의 실정에는 좀 안 맞는다. 한국은 9월 달에 벌써 벼농사를 마치는데 어떻게 11월 말을 추수라고 하느냐, 그리고 도시인들에게는 이 추수의 의미가 퇴색되어가고 있다.’ 이런 식으로 지적을 합니다. 일리가 없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요즘에 교회에 대해서 이런 지적, 저런 지적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 보면 새벽기도가 도시인들에게는 안 맞는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맞는 얘기예요. 왜냐하면 도시인들은 밤에 늦게 자니까. 밤에 늦게 자는 사람이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또 심방이 이제 도시인들 아파트 문화에 사는 사람들에게 안 어울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바쁜데 왜 교회에서 심방을 온다고 하느냐 그리고 주일 예배도 이제 주 5일 근무제가 되면서 주일날 여행하는 사람들, 놀러가는 사람들 많으니까 토요일 날 저녁에 주일 예배드리자 다 맞는 얘기예요. 그러나 여러분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남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새벽에 기도를 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른 시간에 기도를 합니까? 아닙니다. 새벽기도를 없애자, 말하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 말은 교회가 기도를 쉬자는 말밖에 안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이런 모든 현대인들의 변한 현실에 맞춰서 교회가 달라져야 된다는 것이 대안은 제안하지 못하고 기도하지도 않고 심방하지도 않고 열심히 모이지도 않고 무얼 하자는 것입니까? 여러분 그러므로 한 번 시작한 거룩한 경건의 습관은 우리가 지켜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이렇게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는 많은 이유가 있지만 추수감사절은 특별히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먹을 양식 주신 것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학생들 중에는 생활이 어려운 학생이 많았어요.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씩 그 동네 빵집이 신학교에 식빵을 기증했습니다. 사실 여러분 그 식빵 비싸지 않습니다. 그런데 빵 나눠주는 날을 보면은 학생들이 다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얼굴이 싱글벙글 합니다. 전 그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에 돈 많이 주는 직업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신학교에 들어온 학생들이지만 그래도 빵을 나눠준다 할 때는 다 좋아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나라 전라남도 순창, 담양, 구리군에 이어지는 지역을 한국의 장수벨트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장수하는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 장수하는 분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그들의 특징중의 하나가 81%가 식사하는 시간을 즐긴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식사가 즐거우세요? 장수할 가능성이 많은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건강한 인간입니다. 밥 먹는 시간이 기다려지고 그 시간이 즐거운 것이 건강한 인간입니다. 반대로 식사시간이 싫다, 그건 병든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문질을 죄악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희 보화가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의 영혼과 물질을 분리시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한 것이니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장면을 지켜보셨다고 했습니다. 우연히 보신 것이 아니고 의도적으로 지켜보셨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헌금하는 것만 지켜보신 것이 아니고 그들이 얼마를 헌금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저희 교회에서는 헌금기록을 전산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헌금을 한 내역을 이름별로, 날짜별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 이름을 입력만 하면 언제 얼마를 헌금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익명적으로 헌금한 것을 제외하고. 저희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기록을 남기기 위한 것이고 또 연말정산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거기에 들어가서 성도들의 헌금내역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저의 목회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헌금을 많이 할 수도 있고 적게 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고. 그건 하나님이 아시는 것입니다. 은밀히 하나님이 보시고 복을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저는 교인들이 얼만 큼 헌금하는지를 사실 알고 싶지 않습니다. 민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얼마를 헌금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셨어요. 그러지 않았다면은 이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했다는 것을 알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과부가 얼마 헌금하는지를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이 가난한 과부에 대해서 염려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여성이 가난한 과부인데, 무엇으로 생활을 할까, 집에 먹을 양식이 있을까, 예수님이 염려하시는 거예요. 물론 예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여인의 쓸 것을 채워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관심을 갖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연약한 자에 대해서 권념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본문을 보면 이 과부가 헌금을 할 때 4절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두 렙돈을 헌금할 때 그 두 렙돈이 이 여성이 있는 생활비 전부였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그 사실을 아시면서도 이 여성을 중단시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두 렙돈이 이 여성에게 있어서 마지막 생활비라는 것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럼에도 이 여성이 두 렙돈을 헌금함에 집어넣는 순간에 예수님이 그걸 스톱 시키지 않고 그냥 지켜보십니다. 이걸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왜 그러셨을까? 왜 예수님께서 마음만 족하다, 마음으로도 족하다, 하나님이 받으신 셈 치고 그거 가져가셔서 생활비로 쓰세요.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셨어요. 왜 그렇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이것을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도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실 수가 없는 거룩한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에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거룩한 것입니다. 다윗이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때 백성들 보는 앞에서 기쁨으로 춤을 췄습니다. 그랬더니 사울왕의 딸로서 다윗의 아내가 되었던 미갈이 그것을 보고 다윗을 업신여겼다 그랬어요. 그리고 나중에 다윗이 집에 돌아왔을 때 한 마디 했습니다. ‘계집종들 보는 앞에서 임금이 체통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다윗이 말하기를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 것이다. 내가 계집종들에게는 존경을 받겠지만 그러나 내가 백성들 보라고 춤춘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그건 거룩한 것이요, 사람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의 믿음으로 하는 일에 대해서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 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과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누구관대 이렇다, 저렇다, 하지 말라, 해도 된다,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님은 이 여성이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여성이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이 여성이 복 받을 만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됩니다. 예수님이 이 여성이 복 받기를 원한다고 그 여성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여성이 자기의 믿음으로 스스로 복 받을 만한 그릇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여성이 마지막 생활비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그 여성이 복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서 놀라운 원리를 발견합니다. 성경을 보면 연약한 사람들, 또 불쌍한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결코 동정하시지 않습니다. ‘아이고 불쌍한 것, 아이고 애처로워라.’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쌍한 사람, 연약한 사람이 강하고 담대하고 자신의 믿음으로 일어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미문가의 앉은뱅이가 구걸하고 있을 때 베드로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라’ 명령하지 않았습니까? 앉은뱅이 일어설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에게 명령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라’ 그 말씀을 듣고 앉은뱅이가 순종했더니 그 발과 발목이 힘을 얻고, 일어나 걸으며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되는 일을 해야 됩니다. 내가 해야 되는 일을 하지 않고, 내가 기도가 응답될 만한 조건을 드리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수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늘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네 믿음대로 될 찌어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이 세상 생각으로 하면은 아마 이 여성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가난하니까 도움을 받아야 된다.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라도 베풀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에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 되도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 되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환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해야 되는 일이 있어요. 먼저 베풀어야 되는 것이 있고, 먼저 심어야 되는 것이 있고, 먼저 믿음을 사용해야 될 부분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이 임하게 돼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누가 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그러니까 먼저 주라 그랬어요.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고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 원리입니다. 여러분 물질 뿐만 아니고 모든 것에 똑같은 원리가 적용 됩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감사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을 요구할 수 없는 것처럼, 그건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되죠. 누가 하라고 한다고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저희 아이에게 어른이 뭘 주시면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하다고 그래라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건 부모가 하는 것이죠, 애가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러나와야죠. 사랑이 우러나와야죠. 감사가 우러나와야죠. 그래야 그게 진정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감사도 우리에게 명령하시고요, 사랑도 명령하십니다. ‘남편들아 네 아내를 사랑하라’ 명령 이예요. 그건 권고사항이 아니고 명령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남편들아 네 아내를 사랑하라’ 그랬어요.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 부부는 부부싸움 할 때 성경구절을 인용한데요. 그래서 아내는 남편에게 ‘성경에서 아내를 사랑하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남편은 ‘성경에 아내여 남편에게 복종하라 그랬다’ 부부싸움을 하면서 성경구절을 인용한다고 하는데, 여러분 부부가 서로 복종을 요구한다고 복종을 합니까? 사랑을 요구한다고 사랑을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걸 명령하셨어요. 감사를 명령하셨어요. ‘너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소에 이해하고 있는 사랑이라든가 기쁨이라든가 감사의 개념이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사랑, 수많은 가요에 나오는 사랑, 그러나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사랑이 제한적이고 육신적이고 인간적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그 보다는 거 큽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사랑할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 때에라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면 됩니다. 내가 감사할 이유가 없다, 내가 뭘 감사하느냐, 이렇게 생각이 될 때에라도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 성경 구절을 보면 사실 부자가 감사할 이유가 더 많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절에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 말은 감사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은 사람이 더 많이 감사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발견하는 사실은 돈이 많다고 헌금을 더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재능이 많다고 더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 봉사를 하는 분들이 반드시 더 재능이 많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 중에는 더 재능 많은 분들 많습니다. 음악적인 재능, 미술적인 재능, 여러 가지 행정 경험, 많은 분들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가 부유한 중에, 풍족한 중에 일부를 헌금했지만,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바친 것처럼 하나님은 공평하셔서 세상 적으로는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에 부유하게 하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공평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왜 당신은 봉사하지 않습니까? 변명할 게 없습니다. 나보다 재능이 없고 나보다 더 바쁜 사람도 봉사하고 있는데요, 내가 봉사하지 않는데 대해서 납득할 만한 변명이 없습니다. 내가 감사하지 않는데 대해서 납득할 만한 변명이 없고 사랑하지 않고 인내하지 않는데 대해서 변명할 것이 없습니다. 나보다도 더 적게 받은 사람도 기쁨으로 봉사하고 감사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우리가 눈을 뜨고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일이든, 감사하는 일이든 다 믿음으로 합니다. 그 말은 믿음은 창조적인 능력이 있어서 무에서 유를 창조합니다. 그래서 감사할 만한 이유가 없는 가운데에서 믿음으로 감사하게 될 때 창조적인 역사가 일어나서 정말로 감사할 만한 일이 많이 생기게 됩니다. 기뻐할 만한 이유가 없을 때 믿음을 기뻐하는 거예요.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기쁨의 찬송 부르네’ 하노라면 정말로 기뻐할 만한 일이 생깁니다. 이게 바로 믿음의 창조적인 능력입니다. 여러분 여러울 때 힘든 일이 있을 때 그럼에도 하나님께 믿음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람보다도 더 많이 감사하였다 이렇게 여겨주실 줄로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