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그자세

헌금 그 자세
행4:32-35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은 매우 미묘하고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어떤 면에서는 세상의 모든 가치평가 기준이 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돈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돈만 중시하면서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딤전6:10에서 바울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 이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그렇다고 해서 돈을 `가지지 말라`고는 말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곤 합니다

. 오히려 눅16:9을 보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것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인도해 줄 것이라`는 말씀까지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의 세상의 모든 물질을 불의의 재물로 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불의의 재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용하고, 친구되신 주님을 사귀는데 유용하게 쓰라고 하셨습니다. 주님도 돈의 가치나 효용성를 부인하신 것이 아니요, 단지 돈을 잘 사용할 것을 우리에게 권고하신 것입니다.

목사들은 설교할 때에 가끔 곤경에 빠지고 합니다.

왜냐면 헌금을 매주 강조하면 돈을 밝히는 사람, 그래서 돈밖에 모르는 목사로 오해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헌금에 대하여 교훈하지 않으면 성도들이 바른 경제관과 물질관 및 헌금관을 가지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설교하지 않을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현대의 신자들은 `목사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다 알아서 헌금하고 교회 위하여 살아갈 터이니 그저 목사는 성경의 말씀이나 우리에게 가르치고 돈 문제에 관한 한 간여하지 말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는 인상을 받을 때가 참 많습니다.

오늘 성도들이 헌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은혜되고 깨달음이 많기를 바랍니다. 혹 한 심령이라도 헌금 문제때문에 실족하는 영혼이 없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헌금을 많이 하고 적게 하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헌금하느냐가 문제입니다. 헌금에 대하여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이유는, 헌금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면 우리가 과연 예배에 대한 의식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헌금에 대한 바른 교훈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아름다운 신앙생활 모습입니다. 믿는 무리가 모든 물건을 유무상통하고 제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이 서로 나누어쓰는 그야말로 이상향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모습이 꼭 교회에 필요하고도 절박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게 될 때에, 교인도, 교회도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교인들은 모두가 유무상통하다가 스데반의 일로 다 흩어지게 될 때에 교회가 대단히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교회와 교인의 재산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이방교회에게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 하나님 앞에서의 헌금생활에 관하여 대단히 귀중한 것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같이 은혜를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누가 과연 헌금하는 사람입니까?

첫번째 자격: 32절,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사람이 진정 헌금하는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인들은 한결같이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헌금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교인들은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느냐?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기록된 행5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분명히 못박아 말합니다. 행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도 네 땅이었으며 네가 땅을 판 이후에도 그 판 값을 네 임의대로 즉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었으니 네 돈이 아니었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도 분명히 교인들도 자기 소유를 주장할 수 있었고, 자기 재물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사회적 풍토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단 헌금하기로 하였을 때에는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언제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다는 자세가 된 사람들이었기에 우리에게 교훈이 됩니다.

이것은 바로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서`라는 사상을 가진 자만이 헌금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34절을 보면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서` 헌금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오해없이 잘 이해할 필요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하면서, `자신의 현재의 집과 밭을 팔아서라도 헌금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본문의 집과 밭`은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여호와의 주신 기업`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아합 왕에게 `조상의 기업인 포도원을 줄 수 없다`고 주장하다가 죽임을 당한 나봇사건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집과 밭은 여호와께서 주신 생명보다 귀한 기업`입니다. 따라서 예루살렘교인들이 밭과 집을 과감하게 팔았다는 사실은 `새로운 신앙질서`에의 순응을 의미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사람들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애굽에서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애굽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것은 가나안 땅에서의 `집과 밭의 기업`이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교인들도 이제는 `세상`을 포기하고 새로운 `하늘나라의 기업분배`를 바라며 주께 드린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서`라는 사상으로 헌금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헌금하는 사람입니다. 현재의 우리들의 집과 밭을 파는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헌금할 때마다 이런 사상과 바람과 신앙을 가지고 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매,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하다면 나의 것을 기쁨으로 주님께 드린다는 마음으로 헌금하십니까?

내게 있는 것은 진정으로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주님께 드립니다는 자세로 드리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보상받는 헌금하는 자세입니다.

우리 성도들, 얼마를 드리든지간에 이런 자세와 믿음으로 드리시면서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 자격: 33절,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에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진정 헌금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부활에 대하여 분명한 확신이 있는 자가 헌금할 수 있습니다. 예수 부활이 나의 부활이요, 내가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이제 내가 그를 믿으니 나를 구원하여 주시었다는 확실한 은혜를 받은 자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헌금할 수 있습니다.

고후8:4을 보면,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일에 참여하는 자가 어떻게 은혜없이..., 은혜의 체험없이 헌금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오묘하고 자상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큰 지를 깨닫거나 체험한 자가 아니면 진정한 헌금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운데 아직까지 하나님의 은혜, 구원, 사랑, 위대하심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지 못하는 분이 계시면, 헌금하기에 앞서 먼저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마음 문을 여십시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요. 그 다음에 헌금해야 합니다. 은혜받기 위하여 헌금한다는 것은 잘못된 논리입니다.

33절은 예수 부활의 증거에 큰 은혜를 얻은 자가 헌금한 것을 보여줍니다.

성도여 먼저 은혜받으십시요. 먼저 구원을 체험하십시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비로소 헌금할 수 있는 자격있는 사람이 됩니다. 진정한 헌금을 드린 사람의 기쁨이 얼마나 큰 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일에 자기의 물질을 드리면 계산적으로는 물질적 손해가 오고 가계에 빈 곳이 생겨야 마땅한데, 한달이나 일년을 살고 정산해 보면, 오히려 남고, 넘치도록 풍성하게 산 것을 알게 됩니다. 기쁨은 실천한 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런 은혜에 모두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십시요.



2. 진정한 헌금은 어떤 것입니까?

1.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어야 헌금입니다.

`내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라는 生覺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립니다`의 目的을 가지고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 드립니다`는 判斷이 설 때마다 기쁨으로 드리는 것이 헌금입니다.

우리는 이름없는 헌금자를 성경에서 많이 발견합니다.

특히 마21장의 나귀 주인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했습니다.

눅22장의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의 주인이 `유월절 잔치를 위한 큰 다락방을 제공`한 경우도 같습니다.

9절이하,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있느뇨 하라 그리하면 저가 자리를 베푼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예비하라 하신대 저희가 나가 그 하시던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예비하니라`

주님은 하시는 일에 대한 앞 뒤 설명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로부터`라는 생각과, `하나님 영광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목적과,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기 때문에`라는 판단이 바로 서 있었기에, 앞뒤 설명이 없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헌금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헌금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이런 헌금이 비록 액수는 작다고 하여도 크게 역사하는 헌금들입니다. 물질을 드릴 때마다 성도들이여, 귀한 것인데 귀중한 마음으로 드려서 축복받으십시요.



2. 헌금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워 주는 과정까지입니다.

본문 35절의 말씀입니다. 헌금은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오늘 본문에서 보면 헌금자가 구별하여서 그것을 사도의 발 앞에 가져다 두고 사도들이 그것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줄 때까지를 우리는 헌금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헌금자는 헌금의 감시자가 되어지되 헌금을 관리하도록 위임받은 자들의 신앙과 의식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도움이 필요한 자를 물색해 주는 솔선적인 자세까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즘 얼마나 많은 헌금들이 낭비되고 있습니까? 신앙이라는 명목아래 낭비되고, 교회라는 이름아래서 얼마나 많은 헌금이 잘못 사용되고 있습니까? 헌금은 쓰일 때까지의 과정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33-34절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우리가 언제까지 과연 헌금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해 주시는데, `예루살렘교회에는 핍절한 사람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사도들이 나누어 주었기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운데 핍절한 사람이 없어질 때까지 헌금해야 한다 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런 때가 언제 오겠습니까? 그러므로 계속적인 헌금생활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런 헌금을 드려야 복을 받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을 베푸신 의미가 결여되면 헌금이 아닙니다.

헌금을 드릴 때에 반드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푸신 성찬을 기억해야 합니다. 헌금은 성례전적 요소가 다분히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베푸신 그 살과 그 피로 인하여 구원받은 것을 감사하여 몸밖에 드릴 것없어 이 몸 드린다는 심정으로 헌금할 때에 그 헌금이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살을 찢는 그 아픔이 헌금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요, 피를 흘리는 그 고통이 헌금에 수반되어 이 아픔과 고통으로써 하나님을 위하여 내 몸대신 드리는 것이라고 고백이 되어야 진정한 헌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저 아깝지만 다른 사람의 눈이 있기에 헌금한다는 정도는 아예 헌금이라고 할 수가 없는 성질의 것입니다. 헌금함이 성도들의 기쁨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