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극적인 헌금 눅21:1-4 교인들이 모이면 재미있는 말들이 참 많아요. 특별히 여러 교회에 다니는 분들이 어떤 좌석에 모이게 되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누게 됩니다. 은혜스러운 이야기도 있고 어떤 때는 듣기에 거북한 얘기도 있고, 아무튼 이야기들을 우리가 많이 나누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제가 들으니까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말들이 있다고 그래요. 서울 시내에서 어떤 교회가 가장 은혜스러운 교회냐, 또 서울 시내까지 들먹일 필요가 없고 강남에서 어느 교회가 제일 은혜스러운 교회냐, 또 어떤 목사님이 참 말씀이 좋으냐 하고 나눌 때, 그 은혜스럽다 좋은 목사다 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내용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돈 이야기 많이 하지 않는 교회가 은혜스러운 교회다, 그리고 어떤 목사가 좋으냐면 헌금 강요하는 설교를 하지 않는 목사일수록 더 은혜스러운 목사다. 흔히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헌금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느냐 하는 것을 가장 감동적으로 말씀하시는 본문은 아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이상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앞에 둔 마지막 고난 주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얼마나 매일 매일 긴장에 싸여 있는 하루 하루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보면, 매일 성전에 나와서 가르치시지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원수들은 예수님 곁으로 몰려 들어서 이런 시험 저런 질문들을 해 가면서 예수님을 아주 못살게 굴지요, 그렇게 어려운 한 주간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어느 날 몹시 지쳤습니다. 잠깐 쉬기 위해서 선전 마당 한 모퉁이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자리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성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헌금을 하는 상자가 걸려 있는 자리였습니다. 성전 앞 마당에는 나팔 모양으로 만들어 진 헌금상자 13개가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 상자마다 이름이 붙어 있어서, 이것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헌금이다, 이것은 성전을 수리하기 위해서 드리는 헌금이다, 이런 제목들을 붙여 놓은 13개의 헌금함이 달려있는데, 성전에 드나드는 분들이 자기가 원하는 헌금함에 가서 헌금을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헌금통 중의 하나가 있는 옆에 앉아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피곤하셔도 절대로 놓칠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헌금에 자기 자신 전부를 실어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수십 명, 수백 명이 헌금을 하고 지나 갑니다. 어떤 사람은 무지 무지 많은 헌금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정성을 다해서 헌금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도 중요했지만, 주님의 관심을 끌고 주님이 눈여겨 볼 수밖에 없었던 한 사람이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과부였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헌금 상자 옆에 계셨다고 해서 헌금하는 것을 일일이 넣는 것을 가서 보았겠습니까? 아니면 저 사람이 얼마 넣는다, 이야기를 들었겠습니까? 그저 멀리 앉아서 보시는 거죠.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죠. 그는 사람의 마음을 꾀뚫어 보시고 사람이 보지 못하는 은밀한 것을 살피시는 분 아닙니까? 그분이 보실 때 헌금 내는 많은 사람들의 심정을 다 알고 계셨고, 그들이 내는 액수도 알고 계셨고, 그들이 어느 정도 부자요 어느 정도 가난한가를 다 알고 계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푼 정말 재산 없는 빈 털털이와 같은 과부가 헌금을 하는 그것을 주님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을 끌 수 있는 사람, 주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이 절대로 놓치고 지나가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 조그마한 헌금에 정성을 담고 생명을 담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라는 것, 이것을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이 과부를 놓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 과부는 2절에 보니까 두 렙돈을 헌금으로 바쳤다고 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말로 말하면 십 전짜리 두 개를 헌금함에 넣었어요. 예수님이 그 헌금을 아셨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기뻐하셨는지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참으로 말하노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일부러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얘들아 이리와, 내가 너희에게 할 얘기가 있다” 하고는 예수님이 아주 신이 나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과부 있지? 저기 헌금하고 가는 과부. 저 과부는 지금까지 저 헌금상자에 돈을 넣은 모든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헌금을 했다. 내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아니? 저 가난한 과부는 가난한 중에도 자기의 있는”, 뭐요? 4절 끝에, “생활비 전부를 다 넣었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많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일부를 떼어서 헌금한 것에 불과하지만, 저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바쳤으니까, 어떻게 보면 자기 소유 전부를 주님께 드린 것이나 다름이 없어. 그러므로 저 과부는 정말 하나님께 제일 많이 바친 사람이야.” 예수님이 너무 기뻐서 그 과부를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조용히 묵상을 하면, 주님이 기뻐서 제자들에게 그 과부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모르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무리 본인이 피곤해도, 아무리 말할 의욕조차 없을 만큼 마음이 그저 무거워도, 진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그 과부가 예수님에게 다시 새 힘을 갖도록 해주었고, 예수님의 기분을 전환시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 사랑합니까? 참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합니까? 날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나를 위해서 그분의 생명까지 바쳐 주셨다는 은혜 앞에 감격합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주님이 기뻐해서 그저 자랑하고 싶어할 정도의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과부를 통해서 배워야합니다. 우리가 세 가지 정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에 대해서 과부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째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은 바친 액수보다 소유하고 있는 재산으로 그 가치가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은 어떤 헌금이냐? 바치는 그 헌금의 액수를 가지고 평가를 하지 말고,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가지고 그 헌금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4절의 말씀 아닙니까? 과부는 아무 것도 없는 중에 있는 것을 다 바쳤죠. 부자들은 많이 가진 것 중에서 일부를 떼어 바쳤죠. 그러면 헌금하는 액수를 볼 때는 과부의 엽전 두 닢은 상대가 안됩니다. 돈 많은 부자들은 번쩍 번쩍한 금화를 몇 개 넣었을 수도 있고, 또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거액을 바친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얼마를 냈느냐는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느 정도의 생활을 하는 사람인데 거기에서 얼마를 내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가치 평가를 할 때 내는 액수에 두지 말고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과 비교하라 그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헌금을 평가하는 기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논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논리입니다. 특별히 예수를 믿어도 좀 재산을 가진 사람은 굉장히 듣기 거북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돈을 가진 사람일수록 그가 내는 헌금은 가진 액수에 비례해서 액수가 너무 보잘 것 없는 액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논리를 가지고 얘기를 하면 굉장히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무엇을 지적하고 있는가를 잘 생각하십시오. 왜 부자가 그렇게 많이 냈는데도 적게 냈다고 합니까? 왜 과부가 그렇게 적게 냈는데도 많이 냈다고 합니까? 그걸 잘 생각하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은 뭐냐, 진짜 많이 낸 사람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요한 원리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헌금을 하셨지만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세요. 내가 가진 재산과 비례할 때 지금 내는 헌금이 정말 정당한 헌금인가? 주님이 기뻐할 수 있는 헌금인가? 내가 평소에 쓰는 돈에 비해서, 내가 먹을 때 투자하는 돈에 비해서, 고급 음식점에 가서 음식 사먹는 돈에 비해서 내가 내는 헌금이 하나님이 기뻐할 만한 액수의 헌금인가? 우리 모두가 살펴보라 그말입니다. 엄밀히 보시는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어요. 하나님 앞에 헌금 바로 하고 선한 일에 써가면서 자녀를 위해서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했더라면 돈을 가지고 자녀를 학교에 넣겠다는 그런 불행한 일은 없었을 것 아니에요. 그렇죠? 저는 그렇게 믿어요.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바로 쓰지 못하니까 불상사들이 일어나지요. 또하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배울 것이 있습니다. 과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은 일반상식을 벗어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일반상식입니까? 과부의 입장에서 생각합시다. 일반상식이 뭡니까? 오늘 저녁에 땔거리가 없어요.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도 몰라요. 겨우 엽전 두 닢이 있어요. 이것으로 뭔가 사 먹어야 저녁에 잠을 잘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상식선에서 볼 때는 엽전 두 닢을 아꼈다가 저녁에 무언가 끼니를 떼워야합니다. 이게 상식입니다. 그 당시의 과부는 너무 너무 비참했습니다. 지금의 과부라는 개념으로 보지 마십시요. 2000년 전의 사회는 여성은 깔보는 사회예요. 여자가 한 번 과부가 되면 도울 사람이 없어요. 그것도 남편이 무슨 유산이라도 많이 남겨 놓았으면 모르지만, 남편이 그저 아무 것도 남긴 것 없이 세상을 떠나고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그야말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처지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과부들입니다. 그러므로 거의가 걸인입니다. 아니면 대개 남의 집에 품꾼노릇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돈 한 푼 한 푼이 아깝습니까 ? 그거 한 푼 한 푼 정말로 피를 말리는 돈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헌금을 할 때는 그래도 저녁에 먹을 것을 살만 한 돈은 남겨 놓고 헌금하는 것이 일반상식이요, 그리고 내일 어떻게 살 것인가 염려도 하면서 헌금하는 것이 일반상식이지, 그냥 뒷일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가 있는 것 전부 바쳐 버리는 것, 이것은 상식이 아니에요. 그런데 과부는 그렇게 바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비현실적입니까? 1년에 한 번 돌아오는 유월절, 유월절이 뭡니까?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그 구원의 은총을 찬양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므로 과부의 생각이 이랬는지 몰라요. 1년에 한 번 있는 유월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내 있는 것 다 바쳐도 시원치 않는데 바치려니 바칠 것이 없고, 그저 내 손에 쥐고 있는 이 엽전 두 닢이라도 몽땅 바침으로써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감사해야 되겠다. 아마 그랬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바쳤어요. 우리는 이렇게 상식에 어그러지는 헌금을 하는 것을 비판을 합니다. 무작정 그냥 갖다 바치는 것, 광신주의에 빠진 사교집단에서나 하는 짓이지 건전한 교회에서 그와 같은 헌금을 강요할 수는 없다. 저도 그건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참으로 감사하는 사람,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 나의 과거도 하나님의 손에 있었지만 나의 장래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은 가끔 미친 짓을 합니다. 그 미친 짓이 뭐냐 하면, 상식에 어그러지는 헌금을 하나님께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면서 가끔 갈등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뭐냐 하면, 헌신과 책임이라는 문제를 놓고 갈등합니다. 헌신은, ‘나는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 나는 주님이 오늘까지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내가 좀 많이 바치고 싶어’, 그래 가지고 막 드리고 싶은데 또 책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입니다. 그래도 식구가 딸렸는데, 이런 준비도 해야 되고 저런 준비도 해야 되고, 또 가족들이 남에게 꼴사납지 않도록 생활하려고 하면 어느 정도 저축도 해야 되고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님을 위해서 바치자 하는 헌신의 마음하고 내가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책임의식하고, 이 두 개가 갈등을 일으킬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바꾸어서 영생을 얻게 된 이 팔자에는 상식선을 벗어 나는 헌신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의 헌금은 어느 정도의 헌금입니까? 항상 상식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헌금입니까? 늘 주판을 튕겨 가면서 그저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는 수준의 헌금에 지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마 주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실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의 관심을 끌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쉬울 때 주님 앞에 기도할 만한 용기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헌금, 경우에 따라서는 남보기에 미쳤다 할 만큼 드릴 수 있는 헌금이라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꼭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하나 더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헌금은 보상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상, 내가 얼마 헌금했으니 주님이 어떻게 더 축복을 해주실 것이다라는 계산에 의해서 보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헌금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예수님이 한 마디 하셨어야 좋았을 것 같습니다. 과부가 지금 자기 생활비 전부를 바친 것을 주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한 마디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뭐라고 하셔야 할 것 같습니까? “저 과부는 생활비 전부를 바쳤느니라. 오늘 저녁 먹을 것은 내가 책임져 주겠다.”라든가, “지금은 가난하지만 내일 모레쯤 되면 내가 정말로 저 과부가 평생 고생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겠다. 창고가 터지도록 내가 부어 주겠다.” 뭐가 있을 것 같은데 한 마디도 없어요. 우리가 이 점도 주목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헌금 드리는 것은, 물론 주님께 정성을 바치는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있습니다. 저는 그 축복을 믿습니다. 십일조를 정성껏 드리는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성경에 있어요. 저도 그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다 십일조를 제대로 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다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저금통장에 만 원 넣고 십만 원 넣고 계속 쌓아 올려도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것하고는 상대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부어 주시고, 하나님이 저축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낭비하지 않게 도와 주시는 것, 그만큼 여러분이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 정성껏 바치는 자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요. 그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헌금의 정신은, 내가 앞으로 얼마를 받을 것이다라는 기대치를 가지고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 내가 지금까지 누린 하나님의 사랑, 우리 하나님이 지금까지 돌보아 주신 것 감격해서, 이미 받은 은혜에 근거해서 드리는 것이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헌금을 다시 한 번 잘 살펴 보시고, 만약에 복 받기 위해서만 헌금을 하신다면, 물론 좋기는 좋지만 조금 수준이 낮습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하나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저 과부처럼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까마귀가 먹을 것을 갖다 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있는 것 다 하나님께 바쳐 버린 것처럼, 하나님이 나에게 헌금에 대한 보상을 하시던 안 하시던, 지금까지 나를 사랑해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해서 내 있는 것 주님께 드립니다.” 하는 이 마음 가지고 헌금하시기 바랍니다.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좋은 거예요. 오늘 우리는 세 가지를 배웠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입니다. 어떤 헌금입니까? 첫째는 내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에 비해서 부끄럽지 않은 헌금. 여러분의 생활 수준은 다 차이가 있어요. 자기가 소유한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다 자기가 알아요. 거기에 비해서 부끄럽지 않도록 주님께 드리는 것이 바람직한 헌금이다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상식을 벗어나는 헌금도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항상 주판에 계산해서 맞는 헌금이 아니고, 어떤 때는 더 드릴 수도 있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는 것, 이것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셋째는 어떤 보상을 전제하고 드리려고 하지 말고, 받은 은혜에 감격해서 주님 앞에 정성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는 헌금이다 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의 교회 성도들이 믿음이 자라는 것만큼 헌금에 있어서도 성숙하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만큼 드리는 것에 있어서도 남 뒤떨어지지 않는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정성껏 주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서 드리려고 할 때에, 하나님도 여러분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여러분의 생을 책임져 주시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