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 적인 삶

종말론적인 삶/욘3:1-5

종말론적인 삶
욘3:1-5





오늘 금년들어 4번째 주일을 맞는데 첫 주일부터 우리앞에 제시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무겁게하는 내용들입니다. 첫 주일에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의 이야기가 소개되었고 두 번째 주일에는 메시아적인 삶을 보여준 세례 요한의 이야기,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간사함이 없는 사무엘과 나다나엘을 보여주어 본 받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한발 더 나아가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도록 권면하는 말씀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나서에는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건짐받은 요나가 니느웨 성으로 가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질 것이니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하면서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라\"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종말론적인 삶을 살지 않으면 망한다는 선포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시에 사는 성도들에게 때 즉 카이로스가 단축되었으니 지금의 삶 그대로는 아니되고 그 반대의 삶을 살라고 권합니다. 이런 삶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교회생활을 하신지가 얼마 아니 되신 분들을 위하여 종말론적이란 낱말의 뜻을 교회 공동체안에서 어떻게 쓰는가를 잠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종말이란 말은 세상의 끝이란 말입니다. 세상의 끝에 대해서는 모든 종교가 나름대로의 교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양의 고유한 사상에도 \"천지개벽\"이란 말이 있는데 이것은 이른바 동양식 종말론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종말론 사상을 유대교에서 받았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종말론이 일찍이 발전했는데 이유는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아 속국이 되고 약소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에 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혔고 그 이후 계속되는 피압박민족으로 내려오면서 종말론이 발전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늘이 저주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일을 기다렸습니다. 내일을 기다린다는 것은 오늘의 세상을 끝마감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빨리 오늘이 끝나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래야 내일이 오니깐요. 그들의 세상의 종말은 따라서 내일의 희망입니다. 이런 사상이 메시아 사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즉 이방 민족이 다스리는 부자유하고 억압된 오늘의 세상을 끝내 줄 메시아가 나타나서 유대왕국을 새롭게 건설할 것이라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종말론과 메시아대망 사상은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자주 나오는 낱말로서 \"주의 날\", \"여호와의 날\"이 있는데 이 날이 다름 아닌 세상의 종말입니다. 주의 날이 오면 원수들을 한 칼로 베어버리고 새 날을 만들 수 있습니다. 주의 날은 그래서 무서운 심판의 날입니다. 의인을 살려내기 위하여 악인을 죽이시는 날입니다. 그래서 아픔속에 오늘을 살던 유대인들은 주의 날을 그렇게도 고대했습니다. 이 날이야 말로 자기네들을 못살게하는 원수들을 없애주시는 해방의 날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주의 날이 메시아대망과 연결되었고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는 예수님의 재림(다시 오심)과 연결되었습니다. 신약에서의 종말론에서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곧 세상의 끝날, 세상의 종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무서운 핍박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오늘의 고난과 아픔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이란 결국 오늘의 이 세상이 끝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온다는 뜻인데 구체적으로 말해서 이 지구촌이 없어진다는 말인가요? 이 물음에 대해서 종말론자들의 해석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동안에 나타났던 종말론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종말은 오늘의 지구촌의 파멸이라는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성경의 징표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지금의 하늘과 지금의 땅이 심판을 받아서 지금의 땅이 불에 타서 완전히 없어진다는 해석입니다. 제법 이름이 널리 알려진 목회자들의 입에서도 거침없이 이런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라디오 방송설교나 글을 통해서 여러분들도 접하고 있는줄 아는데 참으로 위험하고 자의적인 비성경적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고대하던 \"주의 날\"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없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해석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주의 날\" 이 도래하면 세상의 악을 진멸하고 악인을 심판하시는 것이지 지구촌을 불태워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을 하나님이 버리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지키기 위하여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구 개입은 지구의 파괴를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지구의 재창조를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종말, 이 세상의 끝남이 아니라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다시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우주는 선한 것이어서 하나님이 만드시고는 \"좋았더라\"를 연발했었습니다. 창조 이후 인간들의 악이 그의 창조 세계를 무질서하게 만들어 놓았을 때 참다 참다 가끔씩 개입을 하셔서 방향을 조정하고 질서를 잡아놓으시곤 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가 그랬고 바벨탑의 사건이 그런 것입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 등의 자연의 재해도 우주를 조정하시는 하나님의 손길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신의 최고의 작품인 창조의 세계를 인간들이 못 쓰게 만들었다고해서 모두 없애버리시는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인간들이 못쓰게 만들었으면 그 책임은 물으셔서 징벌하시고, 지구촌은 다시 정리하셔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시곤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선한 우주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믿었습니다. 여러 성도님들도 잘못된 종말론자들의 엉터리 해석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우주는 계속적인 수정과 보완의 과정이 계속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 과정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진행될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권하는 말씀은 못된 인간들에 의하여 악하게 되고 무질서하게 되어가는 이 세상에서 종말론적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즉 세상의 악과 무질서를 따라서 살지말고 하나님이 명한 본래의 선한 질서를 따라서 살라는 권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이란 악한 세상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합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다름 아닌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 구약의 본문에서 요나가 니느웨성에 가서 외치는 말씀이 바로 그런 내용입니다. \"이제 앞으로 40일이 지나면 너희에게 종말이 온다. 하나님의 심판이 너희들의 도성 니느웨에게 임한다. 금식을 선포하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참회하라.\" 크게 외쳤습니다. 그 성의 왕과 백성들이 이 말을 듣고 그대로 순종하여 참회함에서 그 성은 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니느웨성 사람들의 종말론적인 삶의 단면을 오늘의 말씀이 보여줍니다. 8절에 보면 사람은 물론 짐승까지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굵은 베를 입고 통곡하면서 자복하였습니다. 이제까지의 악한 길에서 떠났습니다. 악한 세상과 인연을 끊은 것입니다. 평상시의 잘못된 일상의 삶과 단절했습니다. 실로 종말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의 교인들에게 이런 종말론적인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때가 단축하여 졌다. 때가 얼마 아니 남았다.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살아라.\" 바울이 말하는 때란 카이로스인데 이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때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때가 가까왔다는 절박한 의식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개입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인간들이 자기네 마음대로 세상사를 요리할 수 있다고 믿고, 자기도 뒤지지않고 거기에 참여하여 거짓과 불의를 저지르면서 사는 사람과, 하나님의 때를 알고, 하나님이 이 세상사에 개입하고 있음을 믿고 사는 사람하고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 삶의 질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후자의 삶을 종말론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아내가 있지만 없는 것처럼 삽니다. 남편이 있지만 없는 것 처럼 삽니다. 지금 세상적으로는 슬프지만 슬프지 않은 것 처럼 삽니다. 지금 무엇을 가지고 있지만 가지고 있지 않는 자 처럼 삽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 사람의 삶에 개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자에게 악한 세상은 사라졌습니다. 인간들만이 우굴거리는 이 세상은 더 이상 그의 관심이 아닙니다. 그의 마음에는 오직 하나님의 개입이 보입니다. 그는 더 이상 이 세상과 거래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과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알려주는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사도 바울의 교훈은 체험적인 것입니다. 바울 자신이 그렇게 세상을 살았습니다. 과연 그는 자기의 좋은 학문도 직업도 그리스도를 만남에서 다 버렸습니다. 이제까지 그가 거래하던 세상과는 발을 끊었습니다. 그는 종말론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어떤분들은 고린도전서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바울도 착각해서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이라고 알고 이런 말씀을 했다고 오해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과 그 주변의 믿음의 사람들은 비록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재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으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속에 여기 저기서 섬광처럼 빛나는 글귀들에서 바울의 실존적인 종말론을 만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부터 종말론적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의 삶을 하나님의 카이로스에 비쳐가면서 살았습니다.


기독교의 지난 2000년사에 보면 예수님의 재림이 곧 임박했다고 말하면서 이제까지의 일상적인 삶을 정리하고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지내라는 권면으로 설교한 이단자들이 많았습니다. 지난 수년간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이른바 급박종말론자들도 이런식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고는 성도들로 하여금 재산도 팔아치우고 학교생활도 그만 두라고 권했습니다.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고 따르던 순진한 성도들이 재산들을 팔아 그 이단 교단에 가져다 받쳤고 자녀들을 학교에서 퇴학을 시켰습니다. 이런 것을 반대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버리고 이단집단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부지기 수입니다. 많은 가정들이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산산 조각이 났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사건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혹시라도 여러분들의 가족들, 자녀들이 이런 잘못된 이단에 빠져있지 않은지 예의 관심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런 일을 미리 대다 보시고 예수님이 친히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가짜 선지자들이 많이 나와서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미혹을 받지 말라.\" 역사적으로 보면 새 천년을 맞이할 때 마다 이단 종말론자들이 득실거렸다고 합니다. 1000년을 맞이하던 999년에도 구라파에서는 야단들이었다고 합니다. 예수의 재림이 곧 이뤄져서 믁시록에 말한 천년 왕국이 곧 시작된다고 하면서 1000년을 맞는 그 전야에는 모두가 뜬 눈으로 지샜다고 합니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도 급박종말론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서 소 단위 몇백명에서 부터 천명에 이르는 그릅들이 생겨났었습니다. 지금은 어떤 모양으로 자신들의 종말론을 수정하여 신자들을 속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실천하여야 할 종말론적인 삶은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재림과는 상관 없이 바로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 이 세상 한복판에서 종말론적으로 사는 일입니다. 지금이 바로 종말입니다. 여기가 바로 종말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하나님의 때가 임했음을 확신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카이로스안에서 이뤄지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지금 누가 여러분 자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까? 주식시장입니까? 은행의 이자를 조정하는 재경부장관이나 한국은행장입니까? 전 세계의 금융권을 쥐었다 폈다하는 월가입니까? 누가 여러분의 삶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있다면 그 삶은 종말론적입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을 이끌어 간다면 그 삶이 바로 종말론적인 삶입니다. 유명한 신약학의 권위자 오스카 쿨만 교수는 종말은 이미 진행되었고 지금 실현중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재림은 이미 우리가운데 진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시간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미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유한한 인생들이 짧은 백년의 삶속에 이 재림의 날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미 그것을 맛 보았습니다. 지난 2000년간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이 땅에서 맛보았습니다. 종말론적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속에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종말론적인 삶은 바로 이런 삶입니다. 여러분 모두도 이런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