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라임 지파의 종말 삿12:1-7
우리의 기억으로는 80년대 후반까지는 대학생들이 방학이 되면 의례히 가는 행사가 있었는데 본래의 취지는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고 그들을 옳바로 계몽하자는 \'농활\'이 학생들 가운데 단연 인기였습니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여러 동아리들이 삼삼오오 농활을 떠나게 되었는데, 실제로는 농민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았고 때로는 걸리적거리거나 농민들의 손이 한번 더 가야 하는 그런 경우도 있어 점점 농민들 사이에 농활을 반가워 하지 않게 되었고, 또 일부는 의식화 교육을 시킨다고 해서 기피하는 현상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2000년대에 들면서 \'농활\'을 대신한 새로운 젊은이들의 활동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중활\'이라고 합니다. 중소기업체에 가서 산업현장을 실제적으로 체험해 보려는 대학생들의 새로운 의식의 변화인데, 부족한 산업현장의 일손도 보태면서 취업에 앞서 인생의 소중한 경험도 하는 의미에서 바람직한 대학생들의 동아리 활동으로 자리매김을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사람은 어느 시대나 꼭 필요하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걸리적거리고 오히려 손길이 한번 더 가야 하는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에브라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에브라임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실 8장으로 올라가 기드온 시대에서 비롯됩니다. 기드온이 자신들을 침략하고 고통을 주었던 미디안과 싸울 때 모든 지파들이 동참하기를 호소했으나, 가장 큰 지파 중의 하나인 에브라임 지파는 그들을 외면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기드온은 이 에브라임 지파의 도움을 받지 못한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협력으로 하나님께서 너무 사람이 많다고 하실 만큼 많은 사람이 동참을 했고, 줄이고 줄여서 300명의 준비된 사람들로 미디안과 승리한 싸움을 했습니다. 그때에 승리하고 돌아온 기드온에게 에브라임 사람들은 이렇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왜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
그랬던 그 에브라임 사람들이 오늘 12장에서는 입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자 또 시비를 합니다. 그것이 1절의 말씀입니다. \"암몬 자손과 싸우러 건너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쯤 되면 우리는 그들을 \'경계선 인격 장애집단\'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려울 때 얘기 다르고 승리했을 때 애기가 다른것이지요.
어느 목사님께서 충격적이 이야기를 하셨어요. 자기는 성도 가운데 특정인과 상담을 하거나 대화를 할 때는 반드시 녹음기를 가지고 녹음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말인가 했더니 자신과 대화한 뒤 나가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여 목회에 큰 어려움을 겪고 나서는 그 후부터는 예방적인 차원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와 성도가, 목회자와 성도가 믿을 수 없어 녹음기가 필요한 관계라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 에브라임 사람들이 바로 그 주인공들입니다. 번번이 위험과 위기가 다가올 때는 나 몰라라 하다가 이기고 돌아오면 \"왜 불러주지 않았느냐?\"며 시비하는 것이지요.
기드온은 그 분노를 온유한 대답으로 극복했어요.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렇게 겸손으로 나아가니까 에브라임 지파가 더 이상 시비를 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사실 시편 78편에도 에브라임 지파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에브라임 자손은 병기를 갖추며 활을 가졌으나 전쟁의 날에 물러갔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이미 그들은 지파가운데서 외면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지파 중에 가장 큰 지파이고, 병기와 활을 가져 전쟁에서도 가장 도움이 될만한 지파였지만 실제적으론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다는 분노를 견딜 수 없었어요.
4절에서 입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우자\" 에브라임과 길르앗이 싸운 결과 에브라임이 대패를 했습니다. 약 7 - 8만명으로 추산되는 에브라임 지파 중에 무려 42,000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필요할 때 협력을 구할 때가 있습니다. 기드온이나 입다는 암몬이나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자기의 동료요 이웃인 지파들을 불렀습니다. 여선지 드보라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전쟁에 동참할 형제들을 불렀지만 많은 지파들이 외면했었습니다. 강가나 산 위에서 피리를 불며 구경만 하는 지파도 있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많습니다. 하지만 차이는 나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와 여자를 분명히 차이가 나도록 지으셨어요. 그 차이는 개성이요 아름다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차이를 차별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을 역사 래 거의 20세기가 가까워오도록 차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에 아주 신나는 뉴스가 하나 있었지요. 우리 나라 창군 이래 처음으로 여성이 장군이 되는 일이 있었어요.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늘에서 따온다는 별이 여성의 어깨에 자랑스럽게 걸린 것입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어느 지파보다도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힘도 주셨습니다. 권력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받은 축복에 비례해서 헌신하지 못했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만큼만 비례하여 충성해도 정말 인정받는 충성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반비례해서 헌신합니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얘기입니다. 10만원 주셨을 때 만원 십일조 드리는 일은 어렵지 않지요? 별로 고민 안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1.000만원을 주셨을 땐 100만원 십일조 드리려면 이상하게 손이 떨리지요. 나만 괜히 많이 하는 같고 혹은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드니 말입니다.
그래서 큰 인물들이 나올래도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스스로가 하나님의 은혜의 문턱에서 늘 미끄러지는 거예요. 그래서 작은 작은 단계에서 늘 머물러 있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은혜에 곱하기는 못해도 비례는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은혜를 주면 줄수록 반비례로 내려가요. 10만원 번 사람이 추수감사절 만원 하는 거 하고, 100만원 번 사람이 만원 하는 거 하고 어떻게 이것을 같이 볼 수 있어요. 그것을 감사헌금이라고 합니까? 양심의 가책도 안돼요? 자기의 은혜의 수준대로는 가야 됩니다. 그래야 그 단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이 에브라임 지파는 12지파 중에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고, 가장 힘이 있는 지파, 숫자적으로나 위치적으로나 모든 것이 복의 중심이었습니다. 다른 지파가 보기에 부러움의 대상이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헌신의 자리에는 언제나 빠져나갔어요. 여러분 머리 속에 \"아무개 집사가 그 주인공이야\" 이렇게 생각이 된다면 오늘 설교는 헛한 것입니다. \"그래. 이게 바로 내 모습이야. 내가 그랬지\" 은혜는 남들보다 갑절을 받았는데 시간봉사, 물질봉사, 재능봉사, 몸으로 봉사는 언제나 빠져나가려고 했던 나, 그것이 자신이라고 생각되면 오늘 여러분은 수지맞은 거예요. 에브라임 지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의 중심에 있었는데 희생의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았어요.
교회가 힘을 합쳐서 싸우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무슨 일로 싸우나요? 피켓 들고 나가서 저 뭐 데모하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야 하나요? 교회가 싸워야 할 일은 언제나 한가지입니다. 사단과의 싸움, 영적 전쟁에서의 싸움입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사탄, 마귀는 우리의 대상인데 싸움의 대상인데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성경은 그 사탄의 상태를 우는 사자와 같다고 했고, 삼킬 자를 찾아 헤맨다고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이 삼킬 자의 대상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자리에 늘 졸고 있는 사람, 이건 삼킬 자의 대상 아니겠어요?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의 자리에 없는 사람, 헌신해야 하고 충성하고 땀 흘려야 할 자리에 언제나 빠지는 사람, 이 사람들이 바로 사탄의 밥이 되는 것이지요.
왜 그렇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아십니까? 절벽 끝자락에 서있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런 사람은 두 손으로 밀 것도 없어요. 손가락 하나로 툭 치면 떨어지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는 성도의 영적인 연약함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탄 마귀가 찾을 자는 바로 기도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기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사탄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칠 줄 믿습니다. 강한 자가 되야 합니다. 영적 전쟁에서 강한 자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12월 첫 주부터 2주동안 \'2002년 임원들을 위한 사역축제\'가 올해도 계속됩니다. 특별 새벽기도회에 모든 성도들이 나와야 합니다. 물론 임원들은 의무입니다. 모든 임원들이 명찰을 달고 나와서 출석을 체크하셔야 돼요. 올해부터는 임원이 되는 것이 더욱 강화가 되어서 집사님이 되시려면 성가대나 교회학교에서 봉사하고 있는 분 중에서 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집사님들의 수준을 너무 떨어뜨려 놓았어요. 일부 개척교회들이 일꾼 만든다고 정말 쉽게 쉽게 집사님들을 세워놓다가 보니까 집사님들의 수준이 세상 사람들도 얕볼 정도로 인식이 되어 있어요. 저는 영국에서 집사님들의 모습을 보면서 엄청난 도전을 받았어요. \"그래. 성경적인 집사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사도행전에 나와있는 그 집사님들의 모습은 말씀을 증거하고, 기도회를 인도하고, 전도의 열매가 있고, 영혼을 살리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사람들, 바로 그런 분들이 집사님이 되어야지요. 그동안 좀 쉽게 집사님들이 되신 분들은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정말 성경적으로 돌아가야 돼요. \"나는 집사로서 한 해에 정말 몇 사람을 전도했는가? 나는 집사로서 과연 기도의 생활이 어느 정도 되어 있는가? 나는 집사로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성결되게, 순결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점검해야 합니다.
2002년을 위한 사역 축제는 그것을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같이 싸우자고 영적인 전쟁에서 힘을 합쳐서 같이 싸우자고 그 싸우는 시간이 언제예요? \'특별 새벽기도회\' 혹은 \'수요기도합주회\'입니다. 언제나 둘러봐도 새벽기도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둘러봐도 수요기도합주회는 보이지 않아요. 영적 전쟁에서 한 사람이라도 기도하고 귀해서 사모하지만 언제나 그 전쟁터에는 보이지 않아요. 그리고 엉뚱한 데 나타나서 뒷북치는 사람들이 있지요. 에브라임 지파 같은 사람들... 한국 교회에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모두 정리 해고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남다르게 주셨어요. 어려울 때, 정말 어려울 때 힘이 되는 사람.. 미국 사람들은 9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이 늘 쓰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I LOVE YOU\" 유치원 아이들도 다 아는 유행어입니다. 그런데 그 유행어가 90년대 후반되면서 바뀌었어요. \"Buy and Hold\" \'Buy\'란 주식을 산다는 의미이고, Hold는 그것을 팔지않고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투기로 주식을 하는 분들은 정말 귀담아 들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주식을 사는 의도가 뭐예요? 그 기업의 자본금을 대주기 위해서 사는 것 아닙니까? 그랬으면 좀 기다려야지요. 가지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5,500원 하면 잽싸게 팔아버리는 거예요. 그럴려니 맨날 텔레비전 앞 아니면 증권 시장 시황 게시판 앞에서 눈이 빠지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주식하는 사람이 주식해서 돈벌었다는 소리를 못 들었어요. 모르긴 해도 우리 성도들 가운데에도 주식해서 돈버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러면 감사헌금을 좀 해야 되잖아요. \"이번에 1,000만원 벌어서 십일조 100만원합니다\" 그래야 이 사람이 주식 투자해서 돈을 번 줄 알 거 아니예요. 그런 사람이 없어요. 맨날 주식 투자해서 망했다는 소리만 들리지.....
미국 사람들이 경제가 어려울 때 주식을 사서 가지고 있는 거예요. 정상적인 가격보다 떨어져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국가를 위해서, 산업을 위해서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있자\" 미국이 강한 거는 저절로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줘야 국가가 강해지고 산업이 강해지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주식을 투자하는 것은 찬성할 일이지만 투기로 하는 것은 저는 앞으로도 계속 반대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남들보다 더 많은 은혜를 입었으나 희생의 자리에서는 언제나 빠져 버리는 에브라임이 되겠습니까? 결국 에브라임은 입다의 분노의 칼에 지파의 절반 이상이 죽었습니다. 사실 입다는 마음 속에 치료되지 못한 분노가 남아있었습니다.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삶 속에 쓴 뿌리가 있었습니다. 자녀 교육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어요. 어릴 때 부모로부터 사랑을 깊이 받아보지 못하면 마음 속에 분노가 남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어느 기회가 되면 폭발합니다. 사회적으로 출세하고, 공부를 해서 체면이 생기면 덮어지지요. 살짝 보자기로 덮어진 것처럼 덮어지지만 그것은 치료되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날 자기가 체면과 자기의 절제의 한계가 도달하는 날, 그 보자기를 집어 던지고 분노가 폭발하게 되는 거예요. 입다의 분노는 에브라임 지파의 절반이 넘는 사람을 죽이게 되었어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분노까지도 내 안에 치유되지 않은 남아있는 분노까지도 치료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식가지고 치료되나요? 대학원 나왔다고 치료가 되나요? 사회적으로 출세해서 체면이 생기면 치료가 되나요?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이 깊이 분노가 잠재하기 마련입니다. 내 안에 가득 가득 찬 쓴 뿌리들을 우리가 치료하기 위해서는 이제 우리는 한 풀이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무엇보다도 십자가가 중심입니다. 십자가 앞에 치료되지 못할 분노가 없습니다. 자기의 옆구리를 찌르는 군사들을 향해서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분노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선과 악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옳고 그른지 가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은 능력이요, 승리인 줄 믿습니다.
지난주에 여러분, 속회공과의 결론이 뭐예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고, 우리들도 그와 함께 승리하여 머리가 되게 하실 줄로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보지 않았습니까? 십자가의 보혈을 믿는 우리이기에 주님이 보혈의 십자가로 승리했듯이 우리도 승리하되 십자가로, 은혜로 승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서 에브라임 같은 사람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 역할을 해서는 안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은 만큼 갑절은 못해도 그만큼은 해야 합니다. 절대로 반비례는 하지 마십시오. 희생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눈물의 기도의 자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반드시 주님이 도우심을 믿고 끝까지 주님과 동행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게 붙이셨으므로 우리가 승리했다고 고백하는 평안의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에브라임의 멸망의 원인을 보며 오늘 우리 자신을 보게 됨을 감사합니다. 실패의 현장에서 다시금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바라보게 하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의 제단에 필요한 존재가 되게 하시고, 연약하고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주님과 더불어서 충성된 일꾼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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