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적 신앙

종말론적 신앙/히13:1-8

종말론적 신앙/히13:1-8
2007-02-02 11:06:00 read : 92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야할 길과 목표 그리고 삶 속에서 어떻게 준비되고 이루어야하는지에 대해 성경은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종말론적 신앙이지요.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선포되고 있고 그 말씀을 순종하고 받아들이고 실천한 신앙의 선조들을 보고 그들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며 성령의 역사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시키고 지키고 따랐는가? 그들의 삶의 현실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말씀의 유력을 가지고 살았는가? 그들이 목표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떤 내용과 원칙으로 세상을 극복하고 살았는가를 알고 그들의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대모데후서 4:1-8 ‘하나님 앞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리어서 자기의 사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여기서 한 모델을 언급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히브리서를 받아들여야 했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소유한 믿음의 선조들은 많습니다. 히브리서11장에 등장하는 믿음의 위인들이 그러하고, 또 이스라엘의 역사가 소유했던 많은 여러 믿음의 위인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그들을 모델로 삼기에는 그들이 지나치게 옛 사람들로서 시대적으로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동시대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한 좀 더 생생하고 직접적인 증인들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을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사도들을 꼽을 수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저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라는 것에 비추어볼 때 저들은 세상을 떠난 자들인 것 같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제일 먼저 순교를 했습니다. 그 다름에 구전에 의하면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다 죽었습니다. 바울도 죽고, 요한도 죽고 다 죽었습니다.

지금 이야기는 순교를 해서 죽었던 생명이 다 해서 죽었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의 일꾼으로서 열심히 살다가 죽은 이 사람들의 기록들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고 다 동일한 신앙과 믿음을 따라 주어진 환경을 믿음으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 승리의 삶이 동일하게 우리에게 나타남을 믿습니까? 그러면 그 결과에만 초점이 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분명히 보아야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삶이 무엇이며 어디를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는가? 이들이 왜 어려움과 고난을 이기면서 주님의 길을 죽음을 무릎 쓰고 걸어갔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제일 기록이 많은 바울을 예로 드는 것입니다.

바울의 전 생애를 지배하는 사상과 원칙이 있다면 디모데후서 4:1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 앞에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은 분명히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고 그 심판에 따른 보상을 반드시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 보상이 어디에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니까 김빠집니까? 이 땅에 보상이 있어야하는데 말입니다. 예수 믿는 것에 안 믿는 사람 조롱하고 업심여기는 사람의 콧대를 꺾어 놓으려면 예수 믿고 복 받은 것을 증명해야 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보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상과 비교할 수 없는 감격의 보상이며 축복의 보상입니다.

디모데후서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합니다. 왜요? 세상은 하나님나라를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준으로 사는 곳이 아니기에 5절에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 하라’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 편을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편을 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핍박하고 방해하고 하는 것을 감수해야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7절에서는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운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라고 합니다. 이것이 모든 신자의 목표요, 이 세상을 사는 원칙이요, 사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축복이요 감사요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것이 신앙생활에서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현실적인 보상은 없느냐?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이 현실적인 보상이 우리의 목표요 원리요 내용은 아니지만 삶 속에서 나타나는 보상이 있습니다. 이것이 일차적이 아니라 강조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실적인 보상이 자꾸 기대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가 되어버린 것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강조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으면 축복받고, 예수 믿으면 무조건 승리하고, 예수 믿으면 형통하고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크게 쓰임을 받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꼭 이렇게 되어야 되는 이유가 세상에서 무엇인가 누리고 잘 살고 이 곳에서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듣고 박수 받고 하는 것에 초점이 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지금 예수 믿는다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영원한 나라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의 목적에 대해 관심이 없고 우리가 가야할 본향에 대해 관심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왜 믿음의 조상들은 세상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까? 세상을 사는 목적과 원리와 내용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신 그 이유를 알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종말론적 신앙관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에 것을 쫓고 살아가는 것이 영광이요 축복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영원히 산다는 생각은 인간역사의 문명을 형성할 정도입니다. 호주 원주민들은 천국을 서쪽 지평선 넘어 멀리 있는 섬으로 생각했습니다. 고대 필란드인들은 천국을 멀리 동방의 섬으로 여겼습니다. 멕시코인들과 폴리네시아인들은 사람이 죽은 뒤에 자신들이 태양이나 달에 간다고 믿었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죽은 뒤에 자신들의 영혼이 버펄로의 영혼을 사냥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미라들 곁에는 지도가 놓여 있는데 그것은 미래 세계의 안내도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의인이 죽은 후에 극락으로 소풍을 가며 그들의 말은 주변에서 풀을 뜯어 먹는다고 믿었습니다. 로마의 철학자인 세네카는 \'당신이 마지막인지 알고 두려워하는 그 날은 영원히 탄생하는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묘사들이 민족적으로 시대적으로 다르지만 역사 속에 나타난 공통점은 죽음 뒤의 삶이 존재한다는 믿음입니다. 단지 그들이 관심이 없을 뿐이지 모든 문화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본래적인 영원의 개념,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개념이 있음을 인류학이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 뒤에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을 알 수 없어서 상상적으로 죽음 뒤의 삶을 개념화 한 것이지요.
많은 기독교 순교자들의 시신이 묻힌 로마의 카타콤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적혀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알렉산더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 그는 영원한 집으로 들림 받았다.

\' 한 역사가가 기록하기를 \'카타콤 벽화의 천국은 아름다운 자연 배경과 뛰노는 어린아이들, 그리고 잔치를 벌이는 사람들을 그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주후 125년 아리스티테스라 불리는 그리스 사람이 친구에게 기독교에 관해 편지를 쓰면서 왜 이 \'신흥종교\'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이로운 기독교인이 이 세상을 떠나면 그들은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마치 그가 한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가는 것처럼 찬송을 부르고 감사하면서 운구를 한다네\'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3세기 교부였던 키프리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그 날 인사합시다. 그날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세상의 함정에서 해방되고 낙원이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낯선 땅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나 고향땅으로 돌아가길 사모합니다. ...우리의 고향은 낙원입니다.

\' 이런 종말론적 신앙은 철저하게 성경을 기초로 한 고백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21, 23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으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라고 쓰고 있습니다. 죽음 뒤에 주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는 것이 가장 고귀한 축복이지만 남은 사명으로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도 요14:2 \'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의도적으로 생활 속의 물리적인 용어들인 집, 거할 곳, 거처를 실질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은 거하신 곳이 어디인지, 우리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시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우리가 거할 실제적인 장소를 설명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는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천국에 두라고 하시는 직접 명령입니다. 천국을 중심으로 사는 것의 중요성을 놓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음 구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천국에 두고 종말론적 삶을 살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것은 천국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곳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을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고 히브리서 11:16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의 것을 사모한다,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이지요. \'찾으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제테오\'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일반적인 철학적 탐구나 추구\'를 의미합니다. 같은 단어가 눅19:10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와 같이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
리고 마태복음18:12절에 목자가 자기의 잃어버린 양을 찾고, 눅15:8 여인이 잃어버린 동전을 찾으며, 마13:45 상인이 값비싼 진주를 찾을 때에도 이 단어가 동일하게 사용됩니다. 이 말씀은 부지런히 적극적으로 한마음을 품고 찾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바울은 부지런히, 적극적으로, 한 마음을 품고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동사 제테오의 시제는 진행형입니다. \'계속해서 천국을 찾으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오늘 종말론적 삶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빌립보1장에 가시면 왜 사람의 자존심과 비방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복음전함을 가장 우선으로 생각했느냐가 잘 나와 있습니다. 12-17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저들의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사도바울이 큰일을 하자 그를 따르고 편을 더는 무리들도 있었지만 그를 시기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감옥에 갇히게 되자 그의 편을 들던 자들은 바울이 잡혀간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이 복음전함을 중단할 수 없다하여 복음을 열심히 전합니다

. 시기하던 자들은 바울이 감옥에 가자 바울을 모함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였다면 어찌하여 잡혀 감옥에 갔느냐 그것은 하나님이 바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네들이 진짜 하나님의 종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복음을 열심히 전합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바울은 빌립보서 1:18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서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왜 바울은 이런 태도를 보였습니까?

바울은 종말론적 신앙관으로 세상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비방해도 헐뜯어도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데 그것이 영생이란 말입니다. 얼마나 영생이 중요하고 천국이 중요하면 내가 묵사발 되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생명하나가 구원되고 그 생명이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것만큼 기쁨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지요. 내가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더라도 세상과 적이 되더라도 하나님 편에서 떨어지는 일은 하지 않겠다, 그 분이 하신 이 귀하고 복된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싸움인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천국을 소유하는 일에 있어서 무엇과도 양보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고린도후서 11:23-27까지 말씀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느라\' 여기서 얼마나 많이 고생하고 수고했느냐를 보지 마세요. 바울이 이렇게까지 고생하면서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기면서 복음을 포기할 수 없고 복음전하는 일에 방해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에 이를 만큼의 수고하며 복음에 방해 될 수 없었던 것은 그 마큼 하늘나라가 귀하고 복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천국이란 말입니다. 바울이 살아가는 목표 내용 원칙 동기 이런 것들이 세상적인 것과 거리가 먼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왜입니까? 이 땅은 쉬 사라질 곳이요 쌓아놓을 수 없는 곳이요 영원하지 않는 곳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영원한 곳이요 기쁨의 곳이요 본향입니다. 우리는 그 곳에서 실질적으로 지금 있는 모습그대로 아니 광체 나는 모습으로 신비함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을 이 땅의 목숨보다 귀하고 소중하단 말입니다 .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믿음의 선조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종말론적인 신앙을 본받아 살아가는 복된 심령들이 되라는 말이지요.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 중의 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오히려 바울이 매 맞고, 온갖 위험과 위협에 시달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에게 어려움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8-29 \'이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놀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은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다 주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의 어려움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을 얻는 이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일에 실패할까봐 흑암에 앉아 있고 사망의 그늘에 있는 영혼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에 동참하는 일을 방해받을까봐 저들이 미련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까봐 노심초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이 그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생을 얻은 신자들이 천국의 시민이 하나님의 백성이 그토록 귀하고 복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가 언제 감옥에 가는 일 때문에 염려한 적이 있습니까? 매를 맞는 일에 겁먹은 적이 있습니까?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을 외면해 본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단지 성도들이 시험들까봐 하나님의 품을 떠날 까봐 노심초사하고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어느 날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며, 이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어느 날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끝이 아니며 영원한 나라가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보낸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짧은 인생이 그 영원한 나라를 준비하는 기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언제나 마음이 바뀌시는 것입니까? 왜 영원한 나라를 팔아서 지금의 땜질하려고 하는 그런 미련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더 많이 하시느냐 말입니다.
자존심하나가 천국보다 귀하고, 돈이 천국보다 귀하고, 자기 고집이 천국보다 더 귀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세대입니다. 미련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본문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를 보란 말입니다. 그들의 축복이 무엇이며 행복이 무엇이었나를 보란 말입니다. 성경 1독을 통해서 날마다 확인하세요.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거부로도 만듭니다. 그를 구원하고 구원자로 쓰기위해서는 어떤 인물이라도 만듭니다. 왕으로도 만들고 국무총리로도 만듭니다. 어떤 전쟁에서도 승리하게 하십니다.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천국시민으로 만들기 위해 독생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성령을 보내서 지금 어떤 삶이 고상한 삶인지를 날마다 깨닫게 하십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하늘나라의 가장 귀한 것을 우리에게 내어주면서 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바울이 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알고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이며 이 땅의 결말이 무엇이며 우리가 결국 어디에 서야하는지를 깨닫고 하늘나라의 보상을 바라보며 위에 것을 바라보며 사모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복된 삶인지 확인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