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 에서 기다리는 아버지

밖에서 기다리시는 아버지/눅15:11-24

밖에서 기다리시는 아버지
눅15:11-24





늦은 시간에 한 남자가 피곤하고 짜증난 상태로 퇴근을 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의 다섯 살 난 아들이 문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빠,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그럼. 궁금한 게 뭔데?”
“아빠는 한 시간에 돈을 얼마나 버세요?”
“그건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냐.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냐?”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아들이 쓸데없는 질문을 하자 아버지가 화가 나서 말했다.
“그냥 알고 싶어서요. 말해 주세요, 한 시간에 얼마를 버세요?” 아들이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네가 정 알아야겠다면 말해주마. 한 시간에 이만 원 정도 번다.”
소년은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아빠, 저에게 만 원만 빌려 주실 수 있어요?”
아버지가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네가 돈을 빌려 달라는 이유가 고작 멍청한 장난감이나 쓸모없는 것을 사려는 거라면, 당장 네 방에 가서 잠이나 자라. 네가 도대체 왜 그렇게 이기적인 건지 반성하면서! 나는 매일매일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있고, 그렇게 유치한 일에 낭비할 시간 따윈 없다.”

아들은 말없이 방으로 가서 문을 닫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질문에 대해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것을 느끼며 앉아 있었습니다. 어떻게 돈을 빌리기 위해 감히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한 시간쯤 지나 마음이 좀 가라앉자 남자는 자신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만 원으로 꼭 사야만 할 뭔가가 있었던 것이겠지. 게다가 평소에 자주 돈을 달라고 하던 녀석도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방으로 가서 문을 열었습니다. “자니?” “아니요, 아빠. 아직 안 자요.”
“내가 생각해 봤는데, 아까는 내가 좀 심했던 것 같구나. 오늘 좀 힘든 일들이 많아서 네게 짜증을 냈다. 자, 여기 네가 달라고 했던 만 원이다.”
소년은 벌떡 일어나서 미소 짓고는 ‘고마워요, 아빠!’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는 베개 아래에 손을 넣더니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꺼냈습니다. 소년은 천천히 돈을 세어 보더니 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돈이 있으면서 왜 더 달라고 한 거냐?” 아버지가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돈이 모자랐거든요. 그렇지만 이제는 됐어요.”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빠, 저 이제 이만 원이 있어요. 아빠의 시간을 한 시간만 살 수 없을까요? 내일은 조금만 일찍 집에 돌아와 주세요. 아빠랑 저녁을 같이 먹고 싶어요.”
아빠와 언제나 함께 식하며 놀고 싶어 아빠를 기다리는 이런 아들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는 아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등장하는 아들이 반대되는 아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가리켜 여러 가지 제목으로 설교를 많이 들었던 말씀입니다. “돌아온 탕자” “잃어버린 아들” “기다리던 아버지” “사랑의 하나님”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 등으로 말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들의 모습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가 젊음을 다 바쳐 모아놓은 재물을 어느 날 철없는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을 챙겨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외국에 가서 가져간 돈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며 허랑방탕하여 다 허비한 다음에 돼지를 키우는 농장에 가서 품꾼으로 있다가 끝내 그곳에서 견디지 못하여 결국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럴 경우 아버지 되시는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이상한 것은 어머니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사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들이 어떻게 되든 돌아오면 받아줍니다. 그러나 엄격한 아버지들은 어머니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비유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어머니를 등장시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아들이 있다면 쉽게 받아들일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좀 유별난 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행동을 보세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에게서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들의 상식 밖의 소원을 들어준 아버지였습니다.
상식이 통하는 삶을 살아야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상식 밖의 일을 하는 사람은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아들의 행동을 보면 상식 밖입니다. 유산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받아야 하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물론 살아 계실 때 분배를 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의 아들을 보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졸라서 받아갔습니다.

자식 이길 부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자신의 몫을 몽땅 달라고 간청한 아들의 소원을 다 들어준 아버지, 못이긴 척 하고 준 것 같습니다. 미리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자식치고 제대로 되는 사람 없습니다.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했을 때 그것을 어디에다 쓰려고 하는지를 묻지 않았겠습니까? 처음에는 아버지를 속였는지 모릅니다. 그것으로 논밭을 사고해서 자신이 미리 독립하겠다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사업을 하여 일찍부터 독립하겠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3절에 보면 “며칠이 안되어 재물을 다 모아서 먼 나라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아버지도 아들이 해외로 나가버릴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식에 늘 속습니다. 알고 속고 모르고도 속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자식이 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없습니다. 속앓이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둘째, 아들이 어떻게 되어서 돌아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계신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아들의 미래를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네가 돈을 갖고 가지만 얼마 못가서 다시 돌아오리라’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르는 아들이 어디에 가서 발을 붙이고 살겠습니까? 상식 밖의 일을 저지른 아들은 실패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자식은 아버지가 가장 잘 압니다. 아들이 스스로 성공할 수 있는지, 아니면 곁에서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성공할 수 있는지를 다 압니다. 아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이상한 버릇이 생겼습니다.

아버지가 집밖을 나가면, 동구 밖 진입로를 뚫어지게 바라봅니다. 혹시라도 아들이 오지 않을까 하여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무 할 일도 없이 밖으로 나가서 그곳에 가서 기다립니다. 날이 저물어 땅거미가 찾아올 때면 일을 해도, 길을 가도 눈은 항상 그곳으로 가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낯선 남자가 등장하면 혹시라도 자신의 아들이 아닌가하여 아들의 이름을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이상한 이름을 들었던 젊은이들이 돌아보면 그때서야 자신의 아들이 아님을 발견하고 발길을 되돌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20절에 보면 “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 아들이 집을 나갈 때 입은 옷과 전혀 다른 남루한 옷을 입고 돌아오는데도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우연히 쳐다본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밤낮없이 아들을 애타게 기다렸기 때문에 먼 발치의 아들의 희미한 모습을 보고도 금방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집안에 계시는 아버지를 만난 것이 아닙니다.

아들이 먼저 ‘아버지!’하고 달려온 것이 아닙니다. 아들은 혹시라도 동네 사람들을 만날까 염려하여 고개를 푹 숙인 채 앞을 바라보지 못하고 터벅터벅 걸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아직도 집까지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아버지가 기다렸기 때문에 금방 아들인 줄 알아보고 ‘내 아들아’하면서 달려갔습니다. ‘언젠가는 네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잘왔다 잘 왔어’하면서 목을 틀어 안고 낯도 제대로 씻지 않고 목욕도 하지 않고 냄새나는 그 얼굴에 입을 맞추며 반가와 어쩔 줄 몰라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 상상이 되지요. 아마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들도 이 아버지처럼 처신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기다리실 때 그냥 막연히 기다린 것이 아니라 항상 아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22절에 보면 아버지가 종들을 향하여 명령을 내렸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옷과 가락지와 신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아들의 체격이 어떻게 변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옷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신발도 준비해 주었습니다. 그것도 제일 좋은 것으로 말입니다. 아들들이여, 아버지는 다 아십니다. 당신의 생각과 행동을 말입니다. 반드시 아버지께로 돌아올 것을. 그리고 준비해 놓고 기다립니다.

셋째, 아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였습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3년 동안 맺어진 해병의 전우관계, 선후배관계도 영원하다고 하다고 하면서 전혀 모르는 사이에도 해병대 근무했다고 하면 통하는 인간들인데 하물며 나의 씨로 태어난 아들, 한 아들은 영원한 아들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아들이 아들임을 포기하고 아버지를 떠났어도 한 번 아들은 영원한 아들입니다. 혹시 아들은 아버지를 영원한 아버지로 여기지 않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아들을 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홧김에 ‘너는 내 아들이 아니야’라고 할지는 몰라도 속마음은 아닙니다.

우리 역사에 존경받은 정승 중의 한 분이 황희 정승입니다. 그렇게도 유명한 황희 정승에게도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여러 차례 조용한 목소리로 훈계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주색에 빠져 학문을 소홀히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황희 정승은 아들이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오는 것을 보고 친히 문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그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매우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어이 된 일이옵니까? 의관 속대를 하시고 저를 맞아주시다니요?\" 이 때 아버지 황희가 정중히 대답했습니다.

\"네가 아비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 내 집 사람일 수 있겠느냐? 한 집 사람이 아닌 나그네가 집을 찾으매 이를 맞는 주인이 인사를 정중히 차리지 않으면 어찌 예의라 이르겠느냐?\"

이후 황희 정승의 아들은 크게 뉘우치고 행실을 고쳐 학문에 정진했음은 물론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로 타이르고 또 타일러도 도무지 듣지 않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제멋대로 어리석은 짓만 하지만, 사랑으로 온전히 훈계를 한다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진실로 사랑한다면 때로 사랑의 매도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사랑의 매도 훈계도 아닙니다. 다만 아들을 끝까지 참아주고 끝까지 아들로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아들이 출세를 하고 錦衣還鄕(금의환향)을 했든, 실패를 하고 거지꼴로 돌아왔던 상관없이 아들로 맞아 준 아버지의 모습은 존경스럽습니다. 아들들이여, 당신의 아버지는 바로 이런 아버지입니다. 당신이 아들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해도 아버지는 아직도 나를 아들로 삼아주십니다.

21절에 보면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하는 고백이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들은 아버지를 만나면 할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왔습니다. 그 이야기가 뭔가 하면 19절 말씀입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아들의 자격이 없음을 고백하고 그저 집안의 심부름꾼으로 품꾼으로 써 달라고 간청하지만 아버지는 그 아들을 보자마자 다른 말씀, 즉 꾸중하지 않으셨습니다.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아버지께로 돌아왔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꾸중을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잘못했다고 빌고 있는 아이에게는 꾸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와 있는데 꾸중을 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합니다. 꾸중하지 않으시고 받으시는 아버지, 바로 당신의 아버지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넷째, 기쁨에 겨워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재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온 아들을 본 아버지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십니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을 살펴봅시다.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이웃을 초청해서 풍악을 울리며 즐겁게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잔치집 분위기였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기뻤든지 들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는 맏아들을 부를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흥분했습니다. 이북에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아들이나 남편이 있을 때 온 동네가 잔치를 하는 곳을 보았습니다.

세계에 나가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온 아들 딸이 있어도 온 동네가 잔치를 하는데 하물며 잃었다고 생각되는 아들이 살아서 돌아오고,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아들이 아버지 앞에 나타났는데 기뻐하지 않을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면 아버지는 기쁨에 겨워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본문에 등장하는 아들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우리가 여기에서 만나는 젊은이는 재미있는 시간을 갖는 일에 엄청나게 투자를 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내내 돈을 저축했고 마침내는 상속받을 재산까지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행복에 대한 그의 욕구는 쾌락을 누리고 연정을 맛보고 존경을 받는 데 쏠려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산을 긁어모아 인생을 즐기려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시끌벅적하게 흥청망청 살았습니다.

그러나 계획했던 쾌락은 기대만큼 맛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상류생활을 즐기고 있는 동안 심한 기근이 밀어닥쳤습니다. 그는 모든 돈을 탕진하고 친구들한테 버림받고 먹을 것마저 남지 않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그는 돼지우리에서 일하는 더부살이로 들어갔습니다. 그 지경에 이르자 그는 고향집에서는 하인들을 포함하여 모두가 얼마나 넉넉하게 잘 먹고 지내는가를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버지 집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일어나 떠났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는 대단한 각오로 돌아옵니다. 아들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종의 신분으로 받아주기만 해도 좋다는 마음으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부자요 아버지 집에는 종만 되어도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집에 돌아오면서도 아버지에 대해 모르는 것이 몇 가지 더 있었습니다.

아버지기 자기에게 쏟고 있는 사랑의 크기를 조금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종으로 삼아달라고 하면 그렇게 할 줄 알았습니다.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깊은 관심과 용서하는 넓은 마음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돌아와 보니 자기가 그동안 생각했던 아버지와 전혀 달랐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버지는 잃었던 아들을 찾은 기쁨에 모든 것을 잊고 용서할 마음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찾았던 진정한 안정과 독립과 애정과 인생의 행복이 아버지 집에 있었습니다.

여기 아들의 모습이 혹시 당신의 모습은 아닙니까? 사실 여기 아들의 모습은 오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잘 믿다가 세상의 것이 좋아 보이고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고 신앙생활이란 자신의 삶을 얽어매는 고리타분한 느낌을 갖고서 뛰쳐나간 성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당신은 여기에 등장하는 아들의 모습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참된 행복은 오직 아버지 집에 있음을 발견하셨습니까?

집을 떠났던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신앙으로 온전히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 품에 안기를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아버지 품에 안긴 자들입니다. 혹시라도 이 자리에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 중에 온전히 아버지 품에 안기지 못한 분 계십니까? 아버지 품에 안겨서 기쁨과 평안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육신의 아버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말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는 상식 밖의 요구사항이라도 들어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이방 나라들처럼 왕을 달라고 했을 때 그것이 좋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가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세워주었습니다. 그래서 생긴 초대왕이 사울 왕이었습니다. 사무엘상8:4-9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상식 밖의 일인데도 들어주시는 하나님, 왜 들어주십니까?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신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도 두고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행동이기 보다는 알고도 그렇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다 아십니다. 우리의 머리털 하나도 세신바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후회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것도 다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기다리십니다. 돌아오기를 말입니다. 계시록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은 당신이 잘못됨을 깨닫고 돌아오기를 기다기고 계십니다. 반드시 너는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들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닐런지요?

비록 방탕한 아들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아들로 삼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이사야 43장에 보면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요나가 일시적으로 사명을 떠났지만 결국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기를 핍박하는 사울을 바울로 받아주신 하나님입니다. 늘 넘어지든 베드로를 수제자로 삼아주신 하나님입니다.

예레미야8:5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원하시는데 백성들은 도아오기를 거절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묻지 않으시고 돌아왔는가를 물으십니다. 오늘 본문의 둘 째 아들을 발견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른 것을 묻지 않았습니다. ‘갖고 간 돈 다 어떻게 했느냐. 그러고도 네가 무슨 낯으로 돌아왔느냐?’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찾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올 때 기쁨에 겨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혼자 기뻐하시지 않고 하늘나라의 천국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종들과 이웃들과 함께 기뻐했습니다. 잃은 드라크마와 잃은 양의 비유에서 보면 죄인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돌아오면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5장 4절 이하에 보면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우리도 어떤 형제자매가 예수 믿고 돌아오면 그 기쁨을 혼자 간직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혼자 기뻐하시지 않는 것처럼 그 기쁨을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십니다. 비록 한 사람이 예수 믿고 돌아온다 해도 교회의 모든 성도가 기뻐 뛰어나가 그를 맞아 들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 돌아올 때 천국에서는 이미 기존 신자들을 통해서 얻는 기쁨 보다는 훨씬 더 큰 기쁨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산부인과에는 아기 울음소리나 웃음소리가 나야 정상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도 항상 잉태하는 기쁨과 출생하는 기쁨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이 주일마다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기쁨을 교회적으로 회복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을 앞두고 잃은 양 찾기를 합니다. 믿다가 낙심한 분들, 등록을 했으나 잘 나오시지 않는 분들, 믿음이 연약한 분들, 예배에 제대로 참석하지 않는 분들을 개인적으로나 구역적으로 총동원해서 잃은 양을 찾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한 영혼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버지가 아들을 향하여 고백한 것처럼 죽었다가 다시 돌아온 아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로 인한 하나님의 기쁨과 우리 모두의 기쁨이 우리교회에 가득하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이런 기쁨의 감격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매 주일마다 있어야 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