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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얼굴로 사십니까?
(행6:8-15)
본문 15절에는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마음의 평안이 어찌나 큰지 그 기쁨이 얼굴에까지 배인 사람, 그 평안이 얼굴에 나타나는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천사의 얼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사의 얼굴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1. 부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스데반이 주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따라 복음을 전하다 보니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모함을 받아 결국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 속에 있는 스데반을 보고 성경은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평안하게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소명’때문입니다. 내가 비록 이 땅에서는 고통과 모함을 받고 또 비난 받으며 심지여 돌에 맞아도 나를 통해서 지금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그 의식이 스데반의 얼굴을 그 고통 가운데서도 천사의 얼굴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2.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 대하여 성경은 본문 3절과 10절을 통하여 지혜로운 사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 충만할 뿐만 아니라 지혜가 충만했다고 얘기합니다. 성령충만은 곧 지혜충만입니다. 그래서 엡 5:15 이하의 말씀을 보면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후 성령충만 받은 자들의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아내들아 남편을 존경하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해라. 자녀들아 부모를 공경해라. 부모들아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 종들아, 상전들아...\" 즉‘성령 충만’의 제1의 증거는 \'관계의 충만\'인 것입니다. 성령충만할 때 우리는 천사의 얼굴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은혜에 잠긴 생활을 하십시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입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처들은 우리의 기쁨과 평안을 빼앗고 우리의 얼굴을 어둡게 만듭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이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만 치유가 가능하다고 얘기합니다. \'충만하다\'라는 말은 컵에 물이 철철 넘치는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지혜와 믿음이 충만했고, 성령과 권능이 충만했고, 은혜가 충만했던 스데반처럼 철철 흘러넘치는 그 은혜의 파도에 나 자신을 맡긴다면 내가 지은 죄, 내가 과거에 범한 실수가 아무리 중대하고 크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깨끗케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안에 참기쁨과 참평안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부름 받은 삶을 살기에, 성령 충만함으로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며 살기에,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의 몸을 맡기기에 늘 얼굴이 빛날 수 있는 그런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자아상을 가져라
(잠14:10-30)
사람은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행동이 달라집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영적 성장의 기초입니다. 자아상이 확실치 않은 채 성장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도 그것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격일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나는 이정도 밖에 안 된다.”는 자신에 대한 제한적 믿음을(a limited faith)가지고 있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한계설정은 성장의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기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기대 믿음’을 가지고 열매있는 인생이 되기 위한 비결이 무엇일까요?
첫째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은 타인이 참예하지 못하느니라.”(잠14:10)
마음의 고통은 ‘자기 자신’만이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마음속에 나타나는 결과는 허무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대신 죽게 하실 정도로 나는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2)
인간이 판단하기에 이것이 옳은 길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사망의 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길, 생명의 길은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 자아상을 극복하고 건전한 자아상을 가지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남을 위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불행감이나 삶에 대한 허무감이 든다면 가만히 있지 말고 지금 당장 몸을 움직여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찾아 먼저 행동해 보시기 바랍니다.
셋째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라.” (잠14:30)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시각화를 말 합니다. 인간만이 미래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는 상상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속사람에게 자주 칭찬하고 격려하면 자신의 자아상은 건전하고 유능한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늘 자신을 칭찬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그 믿음대로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강력한 자기 암시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반드시 성공하는 이유는 기도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그림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넷째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잠15:3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인의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것 입니다.신앙의 문제는 내가 못나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거하시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당당한 믿음의 자아상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는 주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
(눅15:11-20)
저는 오늘 여러분과 말씀 중에 자주 듣기도 보기도 했던 말씀 가운데 흔히들 탕자의 비유라는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들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한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아버지는 파멸로 가는 아들의 삶을 새롭게 돌이켰습니다. 바로 이러한 아버지를 소개해 드리려고 한다.
1. 성경에서는 이 아버지를 인격적인 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떠난다고 했을 때 마음은 몹시 슬프고 인생이 어떠하다는 사실도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쨌든 최종적인 결정은 아들에게 맡겨두는 인격적인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들이 아버지 집을 떠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15장 1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여기에는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내게, 내게……내게 달라’ 이 말에는 자기 뜻대로 인생의 주인이 되기 위해 아버지를 떠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결정을 존중해 주었으며 다시 돌아올 때도 그저 사랑으로 받아주는 인격적인 아버지였습니다.
2. 이 아버지는 조건 없이 아들을 받아주는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나간 때부터 용서하고 문밖에 서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마음에 아픔으로 기억되는 이아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집나간 아들이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다 허비함으로 더 나은 삶을 위해 떠났지만 빈곤과 비참함만이 남게 되었고 결국 아버지에게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 아들을 품에 안고 받아주었습니다.
3. 이 아버지는 탕자를 여전히 아들로 여기고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준 아버지였습니다.
아들은 이미 자기가 죄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들의 자격이 없습니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이 아들을 죄인이나 품꾼의 하나로 여기지 않았으며 이 아들을 여전히 아들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아들은 행복하고 기쁘게 살기 위해 아버지를 떠나 허랑방탕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야망도 젊음도 있었기에 자기 마음먹은 대로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아들의 행복은 아버지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공급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내 행복은 물질에 있지 않습니다. 내 행복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내 행복은 바로 아버지 앞에 돌아갈 때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이 그 결단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사는가는 여러분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꽃과 같은 인생, 열매있는 인생
(요15:1-16)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참 포도나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란 이스라엘 백성 즉 성도를 의미 합니다. (시80:8, 렘2:21, 사5:2) 포도나무는 오직 열매를 위해 존재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열매 없는 포도나무는 찍어 불에 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교훈 삼아 오늘 본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유도 오직 열매를 맺는데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결론은 마지막 16절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열매 맺는 삶을 강조하면서 ‘꽃’과 ‘열매’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꽃’이라는 단어를 약 37번쯤 사용하고 있으며 200번 이상 등장합니다. 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세상 가치를 대변하는데 반해 ‘열매’는 언제나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이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일컫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은 꽃과 같은 인생이 아니라, 열매 맺는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어야 할까요?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나무라면 우리에게 맺혀지는 열매 또한 예수 열매일 수밖에 없습니다.‘예수님 떠나서 나는 어떤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없다.’,‘내게서 예수 빼고 나면 내게 남는 것 아무것도 없다.’라고 고백하며 사는 것이 예수의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입니다.
갈5:22-23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아홉 가지나 나오는데 열매란 말이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열매들이란 모두 한 인격에서 나오는 아홉 가지 다른 맛을 의미하며 아홉 가지 얼굴로 등장하지만 모두 한 가지 예수 열매란 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과실을 기대하시면서도 \"과실을 맺으라\"고 한 번도 명령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몸부림해서 맺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포도 열매를 저절로 맺는 것과 같이,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으면 절로 맺혀지는 성령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때로 나로부터 소중한 것들이 떠나고 떨어져 나가고 잘라져 나갈 때가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농부는 더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 나무 가지를 잘라 주는 전지전정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과 고통 그리고 환란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만 잘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헛된 세상, 허무한 열매에 매이지 말고 예수 열매 구하며 살라는 것임을 기억해야합니다.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안에 있을 때 우리 인생은 반드시 열매 맺어 기쁨 갖는 인생 될 것입니다.
내 삶에 하나님은 몇 등이신가?
(잠3:1-10)
오늘 본문의 말씀은 긴 인생을 살았던 솔로몬 왕이 인생의 노년에 그의 아들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인생을 사는 동안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무엇을 내세우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권고와 명령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명령과 약속’이라는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고, 일정한 구조 속에서 한 가지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우선 본문에 나타나는 명령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원어의 구조를 통해서 보면 본문은 5가지 명령이 주어지는데 ①\"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말고 그것을 네 마음 안에 간직하라\"(:1), ②\"사랑과 신실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라\"(:3), ③\"범사에, 네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라\"(:5-6), ④\"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을 멀리하라\"(:7), ⑤\"네 제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9)입니다. 이 다섯 가지 명령의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을 섬기라\"입니다. 즉, 지혜의 왕 솔로몬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과 지금 인생의 자랑거리를 \"하나님의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을 5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명령의 핵심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NIV라는 영어성경은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네가 가는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인식하라\" (In all your ways acknowledge him)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Philips Version’성경은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놓으라.\" (Put God first in everything you do)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하나님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일등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깊은 곳에 두고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삶의 자리들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직장에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하기 전 하나님을 먼저 인정하고, 학생들은 공부하는 일에서도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믿음 생활과 예배는 하나님을 일등으로 놓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몇 등 인생일까? 성경 어디를 보아도 하나님에게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1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실 만큼 사랑하셨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마치 이 세상에서는 사랑할 사람이라고는 단 한사람 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1등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몇 등입니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예수의 흔적이 있는가?
(갈6:14-17)
살아있는 교회는 모든 성도들의 가슴에서 십자가의 보혈이 살아서 꿈틀거립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DNA가 없다면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곧 형식만 남고 교회 흉내만 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래 예수를 믿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예수 없이, 십자가 없이, 영생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전도하지 않아도 아무런 부담도 없고, 가책도 없어지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활력과 감격을 잃었다면 틀림없이 영혼구원에 관심을 상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생명을 잃으면 불신자를 전도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이 십자가의 생명을 잃어버리면 전도의 열정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자랑은 십자가이고 성도의 자랑은 십자가를 전한 흔적이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흔적’이란 말은 원어로 ‘스티그마타’입니다. ‘흔적’이라는 말의 배경은 노예가 도망쳤다 잡히면 불에 달군 인두로 몸에 낙인을 찍음으로 영원한 낙인을 가지게 되는 것에서 유래합니다. 이것은 노예가 어디에 가도 인두로 새긴 낙인이 드러나서 절대로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스티그마’즉 ‘흔적’인 것입니다.
흔적이 새겨지는 순간은 인권이 완전히 박탈당하는 순간이요 내 존재가 없어지는 순간이지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흔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 그리스도의 흔적은 최대의 신앙고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가 나의 주(主)’라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나는 예수의 종이요, 나는 그의 소유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도들이나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킨 분들 같은 흔적은 남기지 못할 지라도 ‘무릎 꿇고 기도한 흔적’은 있어야 하며, 얼굴에는 ‘눈물의 흔적’이 또한 우리의 손에 ‘열심히 교회에 충성한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11월에 있을 예사제가 단순한 교회 행사정도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영적인 전쟁이며 교회의 생명력 DNA를 회복하는 일인 것입니다. 내 심장에 넘어진 십자가를 세우는 일이며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는 좋은 기회입니다. 이 일을 위해 매일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미친 듯이 뛰어다니며 구원할 사람들, 초청할 이들을 찾아보십시오. 몇 사람은 미쳤다는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미치도록 사랑하셨기에 독생자를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영혼 구원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도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할렐루야!
예수 믿고 산다는 것
(롬1:16-17)
종교 개혁가들의 대 헌장이 되었던 본문을 시작하면서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한마디는 힘의 상징이 로마가 아니라 복음이 힘의 상징이라고 하는 것이며 복음이 가져다주는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구원의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하면서도 어떤 때는 구원을 받은 것 같고 어떤 때는 어떠한 방법으로 믿어 구원 받아야하겠다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예수 믿는 갈등이 있는 데 좀 열심을 내고 착하게 사는 듯 할 때는 내가 구원받았지하는 구원의 확신이 있다가도 실수하거나 넘어지며 가끔 범죄 함으로 쓰러지고 신음할 때에 구원을 잃은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때로 쓰러지고 넘어져서 신음하는 그 자리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며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이 복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주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
현대를 지배하는 사상은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다양한 시대 속에서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불교, 샤머니즘, 힌두교 등 각 종교마다 구원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는 독선이요 위선의 종교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세속적인 감언이설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불변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엔 다른 구원의 길이 없느니라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을 수 있으며, 복음이란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3. 복음을 통해 구원의 또 다른 한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은 구원은 모든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1장 12절에 보면 믿는다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실수가 많음에도 또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이 나를 살려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믿음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여러분 가정에 복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이 건설되기를 축복하며 복음으로 이런 기쁨을 누리는 복된 가정, 믿음의 사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즐거움이 있는 인생
(롬5:1-11)
지난 주일부터 저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저의 합니다. 로마서 5장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즐겁게 살아가는 존재로써 행복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말미암아”라는 단어와 “더불어”라는 두 단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화평, 평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 누리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즐거워한다.”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2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느니라.” 3절에 보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11절에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즐거워한다.”는 말을 좀 더 정확하게 분석해 보면 “신이 내 안에 있다”라고 해석이 가능한데 삼위(三位)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예수와 함께 행복을 누리는 것이며 성령과 함께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기에 신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라는 구절을 통하여 ‘성도의 즐거움’란 환난이 없을 때에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환난이 끝난 다음에 즐거워하는 것도 아닙니다. 환난과 고난의 한 가운데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우리는 즐거워 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삶이 성도의 즐거움을 누리며 삶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 참 성숙한 사람들을 보게 되는 데 그 분들의 한결 된 공통점은 고난의 터널을 지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원수가 없고 모든 사람들을 다 사랑하며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그 분들은 삶의 여건에 따라서 변덕부리지 않는 사람들이며 고난 가운데서도 당당히 승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메가라는 시계를 선전하는 걸 보면 언제나 시계바늘이 10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웃는 모습을 형상화 시켜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를 자극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길거리 다니며 웃고만 다녀도 세상이 밝아집니다. 교회에서도 웃고만 다녀도 하나님 앞에 큰 일 감당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며,‘기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고백을 하며, 즐거운 인생으로 사는 믿음의 백성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용서받고 사는 인생
(롬8:1-11)
오늘도 계속되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믿는 자들로부터 기쁨을 빼앗아 가는 갈등’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영생을 얻었는데 아직도 여전히 육의 갈등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죄도 안 짓고 욕심도 없어지고 갈등도 사라져야 하는데 그냥 남아 있습니다. 이런 갈등과 싸움이 계속되는 것은 내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내 안에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구원받았지만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있는 동안 육의 본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싸움과 갈등은 나의 노력, 의지, 방법 등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입니다. 분명히 나의 문제인데 내가 뭔가 해볼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싸움과 갈등이 당연한 것이기에 탄식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롬 8장 1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정죄의식, 패배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깊이 상고하며 예수 안으로 달려 들어가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피하기만 하면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로마서 8장 2절에서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과 2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죄 선언\"입니다.
내 노력으로, 내 의지로 불가능하던 그 일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하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누가 정죄하리요. 성령 안에서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한번 주신 구원은 절대로 실패하지 아니하십니다. 영원한 승리의 자리까지 주께서 반드시 동행하여 주실 것이며 인도하여 주실 것이고 주의 승리가 바로 여러분의 몫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넉넉히 이기며 사는 인생
(롬8:31-39)
바울은 오늘 본문 통하여 5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이 5가지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을 빌어서 우리가 살아가는 넉넉히 이기며 사는 삶의 내용을 우리에게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첫 번째 질문은“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입니다.
이 세상일 때문에 염려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한순간의 실패 때문에 영원히 실패한 사람처럼 포기하거나 절망하거나 낙망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 다면 반드시 우리는 견디고 이기게 될 것입니다.
2. 두 번째 질문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32)입니다.
나는 독생자하고 맞바꿀 만큼 소중한 존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죽게 하며 우리를 살려내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 무엇에 인색하겠습니까? 우리가 필요하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왜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3. 세 번째 질문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33)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면 죄의 법칙 아래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가 않는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가 짊어져야 할 인생의 짊을 대신 져 주시고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누가 송사하리요.’ 죄는 여러분에게 이미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마귀는 여러분으로부터 모든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4. 네 번째는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34)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정죄하며 송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죄 선언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해 33-34절에서는 3가지 근거를 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살아나셨으며,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십니다.
5. 마지막 다섯 번째 질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35)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3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시는데 이 사랑을 아무도 끊을 자가 없습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실패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당당하게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입으로 증거 되는 삶
(롬10:9-15)
이번 주도 로마서 말씀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으로 ‘입으로 증거 하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신앙이란 우리의 입으로 고백되어지고 삶으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적인 동의의 차원을 넘어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적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복음을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과 두려움도 없이 시인할 때에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을 때에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큰 복입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이처럼 귀중한 일인데 문제는 믿지 아니하고서 어찌 그 이름을 부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대하여 성경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느니라.’ 고 정의 합니다. 듣는 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데 전파하는 자가 없다면 어찌 들을 수 있겠는 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전파(혹은 전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우선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져 받은 구원을 전파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사랑 축제를 위해 기도하며 70일 전도축제 중에 있습니다.
세달 가까이 한 영혼이라도 살려보자고 전도 하고 있습니다. 사근동 지역에 성민교회는 전도하는 교회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전도하는 교회, 즉 생명을 사랑하는 교회라는 말 아닐까요? 오늘 본문 중에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15)라고 기록 한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힘든 중에도 마을 주변 다니며 또한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는 발이 아름답다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조금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족들에게 이웃들에게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복음을 자랑스럽게 시인하며 증거하며 살아가십시오. 찬양하며 인정하고 기도로 주의 복음을 인정하고 증거 합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그것은 자랑스럽게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할렐루야
예수 믿고 산다는 것
(엡1:3-14)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자기 삶의 기준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을 살면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복된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바울 삶의 첫 번째 기준은 영원한 생명 즉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가장 귀하고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고,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 된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어서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믿었습니다.(:7)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잊을 수 없는 분으로 허물과 죄로 이미 심판받아 죽어야 할 자신을 살려 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자녀 삼아 하나님 당신의 일을 하게 한 분이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삶속에서 일어난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선물이 너무 크고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가 가져야 할 기준은 바로 고통과 고난에 대한 개념입니다.
바울은 너무나 극심한 고통과 핍박과 괴로운 일들을 이렇게 받아들였습니다.(:4)
바울은 고난과 고통 저 너머에 아름답게 가꾸어져 주님께서 마음대로 쓰실 수 있는 완성된 자아를 바라보며 고난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과 어려움을 우리 삶에 주시는 이유는 나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과 아픔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포기치 아니하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은 확신이요 약속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세 번째는 바로 우리의 자리 문제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자리에 앉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리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결정되기 때문이지요. 사도바울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을 버리고 끝까지 놓지 않고 머물기를 원했던 자리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자리인 것입니다.(:14)
바울이 서기를 원했던 자리는 주님과 늘 교제가 이루어지고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리였습니다. 즉 기도함으로써 또한 찬송하는 자리로 내 삶을 통해서 여호와를 송축하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봉사하는 자리입니다. 이는 생활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리입니다. 내 삶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리를 바로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비신앙의 사람들은 세상의 복자체가 중요하지만, 신앙의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복이라는 것을 통해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잘못된 기준으로 우리 자신을 보지마시길 바랍니다. 이 땅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하늘의 기준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다 잃어도 구원받은 즐거움으로 다시 시작하는 성민교회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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