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사람, 믿음의 사람 외 14편 설교\"|금요심야설교
주님의 영성교회/ 권다니엘 목사
축복의 사람, 믿음의 사람(히11:1-3)
인간은 누구든지 어떤 힘에 끌려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의 힘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삶의 질과 인생의 승패가 결정됩니다.
인생의 똑같은 위치에 있어도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디에 끌려 사는가가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 명예, 지식, 권력, 쾌락, 재주 증 여러 가지가 우리의 힘이 될 수 있겠지만 너무 이런 것에 끌려 사는 것은 축복이 못 됩니다. 이런 것이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은 자신이 커지고, 자신이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은 교만해져서 반드시 죄를 짓고 타락하여 망하게 됩니다. 즉 인간은 세상 것을 의지하면서 살 때 그런 세상 것이 커질 때 오는 교만을 이길 수 있는 의인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해야 복 있는 삶, 축복 받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 거듭나면 하나님과 동행해야 축복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의 복은 인간이나 세상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73:28)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3-5)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나를 믿지 말고, 인간이나 세상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커질 때 우리가 다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승리하며 나중에 죽어도 천국을 가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며 축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처음이 미약하더라도 나중이 잘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왜 인간이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 때 축복의 사람이 되는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믿음의 특성이 잘 나와 있습니다. 즉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어떻게 축복의 사람이 되는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히11:1-3)
첫 번째, 하나님의 믿음을 가진 자는 복된 꿈을 갖게 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하나님의 믿는 믿음을 가지면 복된 소원을 갖게 됩니다. 이 땅에서 복을 받지 못하고 승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복된 꿈, 소원, 바람이 없이 그냥 환경이나 기분, 감정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복된 꿈, 소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믿음이 있는 자는 바라는 것을 복되신 하나님이 밑받침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된 소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의 믿음을 소유하면 영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11:1-2)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면 복된 소원을 가질 수 있지만 더 나아가서 그것을 영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증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꿈도 못 꾸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을 가진 자는 영적인 눈을 소유해서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 전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자는 말씀을 통하여 받은 것, 믿음으로 바라는 꿈과 소원을 가진 자는 이미 이루어진 것을 생생하게 영적으로 보는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반드시 승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의 믿음을 가진 자는 창조적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성경은 분명히 이 세상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1:1-5)
지금도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말을 하면 창조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사랑이 있고 영생의 말을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말을 하십시오. 창조적인 말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축복이 임합니다. 축복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아멘.
나의 긍정이신 하나님(고후1:15-22)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세상은 어둠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빛은 주님 안에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무리 처음에는 잘되고 크고 아름다운 것 같지만 나중은 어렵고 나빠진다는 것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3:19-20)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호4:7) 그래서 세상은 항상 부정적이며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는 빛이 있기에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더라도 주님 안에 있다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고 긍정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것이 복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두 번 들려서 은혜를 나누기로 했는데 그것이 일정의 변경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자, 그것이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결국은 예가 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고후1:17) 육신적, 세상적으로 운영을 할 때는 몰라도 주님 안에서는 얼마든지 예가 된다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고후1:18) 주님만이 우리에게 빛이 되시고 소망이 되시며 긍정이 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시118:6)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주는 하나님의 은혜를 어떤 것입니까?
첫 번째, 세상은 영원한 긍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너희로 두번 은혜를 얻게 하기 위하여 먼저 너희에게 이르렀다가 너희를 지나 마게도냐에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보내줌으로 유대로 가기를 경영하였으니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고후1:15-17)
사도 바울은 육신의 경영 즉, 세상에는 예하고 아니오를 할 수 있으나 하나님 안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얼마든지 예하고 나중은 아니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긍정으로 빛으로 출발을 해도 나중은 반드시 부정으로 어둠으로 끝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없는 곳은 다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자는 아무리 시작이 대단한 것 같아도 결국은 어둠이요, 부정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긍정이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후1:18-19)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부정적이라도 주님 안에만 있으면 언제든지 아니라 함이 아니고 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연약해도 주님 안에 있으면 결국은 우리의 영원한 긍정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편이요, 우리의 영원한 긍정이 되시기에 우리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시41:10)
더욱이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인 것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가 죽으면서 주님을 인정하고 믿으니 그를 낙원으로 이끄셨습니다. 주님만이 영원히 우리의 긍정이 되십니다.
세 번째,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긍정하면 긍정의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아무리 어렵고 우리의 삶의 현장이 부정적이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만 붙잡고 아멘하여 순종만 하면 나에게 긍정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연합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긍정이 되십니다. 우리의 현실이 비록 부정적이고 어둡고 힘들더라도 주님 안에만 있다면 우리의 나중은 반드시 긍정의 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환경에 붙들리지 말고 주님에게 붙들려 주님의 약속을 아멘하고 순종하면 당신에게 최고의 축복이 올 줄로 믿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긍정이십니다. 아멘.
일체의 비결을 배우라(빌4:10-20)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보다 무엇을 더 소유하면 행복할 것으로 생각을 하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평생을 다해 애를 쓰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소유로 행복을 찾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그 사람의 됨됨이에서 오는 삶의 자세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에릭 프롬은 말하기를 “인간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에 있다.”고 했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5] 그러면 인간의 복된 됨됨이는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찌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34:10]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시67:7]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평생 하나님 선교사역에 있어서 자신의 동반자이고 지원을 했던 빌립보 교인들의 지원에 감사하여 축복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그리고 바울은 선교 현장에서 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주님 안에서 자족하고 행복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1-12] 이제 어떤 형편에서도 주님 안에서 자족할 수 있는 바울의 일체의 비결이 무엇인가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주님 안에 모든 소유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0-12) 주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실 때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면 만물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5-17) 즉 예수님은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속에 있으면 만물이 다 내 속에 있기에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만물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주님 안에 모든 능력이 다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이 땅에 오시어 죽음에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승천하시어 이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섭리하고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그 분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이 땅에 계실 때 죽은 자도 살리시고 바다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명령으로 잔잔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오늘 성령으로 우리 속에 예수 믿는 자 속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 속에서 살고 계십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3:16) 주님이 우리 속에 살고 계시기에 우리는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 살면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주님 안에 모든 미래, 삶의 승리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여기서 ‘쓸 것’은 물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미래에 살아갈 모든 자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물질, 지식, 건강, 지혜, 능력, 행복까지도 하나님은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채우시리라’는 말은 원어로 풀이하면 이미 채워졌다는 과거완료로 해석이 됩니다. 이미 다 완성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의 삶도 믿음으로 그 분을 따라 살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날 것이며, 주님이 이루어 놓은 것을 찾아 사는 복된 승리의 미래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모든 소유와 능력, 미래, 삶의 승리가 주님 안에 있습니다. 믿음으로 축복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구원 후의 삶(눅9:22-24)
성도가 교회에서는 은혜를 받고 승리를 할 것 같은데 왜 막상 삶의 현장에서는 실패를 하게 됩니까? 실패의 이유는 구원 후의 삶의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전에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을 받은 후의 삶에서도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 삶의 현장에서는 자기의 방식대로 살기 때문에 실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은 후의 삶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을 사는 방법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 권세 잡은 자에 속해서 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다 하나님 나라의 소속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3:9-10)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후의 삶은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성경은 구원 후의 삶의 방식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성도가 구원받은 후에 세상을 철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길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세상에서 이기는 길이고 예수님을 좇는 길이며, 예수의 제자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이제 구원 받은 후의 삶을 어떻게 오직 믿음으로 살아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의 삶의 주인이 내가 아니고 예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은 어떤 삶의 상황이나 여건에서도 내가 주인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이시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면 성령으로 부활의 주님이 내 속에 오셔서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우리 속에 주님이 계신다는 말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반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도, 그 분이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삶을 그 분이 사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여기서 자기 십자가는 우리의 환경입니다. 그것도 정말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 자기의 환경을 말합니다.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준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아를 죽이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그런 환경을 주신 것입니다. 환경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훈련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날마다 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비밀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1:8-9) 여기서 아주 중요한 영적원리는 구원 받은 후의 오신 성령은 내가 의지로 그 분을 모시고 맡길 때만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 환경은 누구나 자기가 죽는 십자가입니다. 날마다 그것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자기의 환경을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 죽고, 오직 하나님께 맡길 수가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세 번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합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아를 포기하고 주님을 모신 자는 주님을 좇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그 분이 내 속에서 반드시 그의 삶을 살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면 이제 그 삶 속에서 반드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맨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주님을 바라보고 좇아가면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주님은 언제든지 우리와 떨어진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빠져서 우리의 눈이 어두워 진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후에 한 번도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을 좇아가십시오. 길을 모르거든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당신보다 앞서 가시는 그 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은혜로 사는 사람들(수24:5-13)
인간이 예수 믿고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적인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불행한 것은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아서 육적인 것, 보이는 것, 세상 것만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13:14-16) 인간은 영적인 눈이 열려야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사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 같지만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가 깨달아야 할 축복의 원리는 1)성도는 믿음이 성장하면 성장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2)하나님은 은혜를 깊이 깨닫는 자에게 더 깊은 은혜를 주시고 더 크신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눈이 열린 자는 어떤 일을 만나도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지금은 어려워도 나중에는 반드시 선을 이루고 축복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또한 늘 겸손하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니 겸손히 의지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또한 더욱 자기의 맡은 바 일을 사명으로 알고 최선을 다해 순종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은 출애굽 광야 40년 생활,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와 가나안 땅을 차지하여 정착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살게 된 삶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력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특별히 하나님이 은혜로 살도록 하나님이 구원해주신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것도 하나님이 인도한 것입니다.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내었고 또 애굽에 재앙을 내렸나니 곧 내가 그 가운데 행한 것과 같고 그 후에 너희를 인도하여 내었었노라”(수24:5) 재앙을 내린 것도 하나님이고 그들을 인도해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화를 받게 하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화에서 건져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자기 집에 좀 안좋은 일이 있다 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기에 우리는 긍정적인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순종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잘못을 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우리는 회개를 해야 합니다. 회개는 가장 하나님의 긍정적 은혜의 문을 여는 길입니다. 진실로 회개를 하면 성도는 성령을 받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2:37-40)
두 번째, 적군인 바로의 군대, 아모리 군대를 물리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 그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붙이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였고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멸절시켰으며”(수24:6-8)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의 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적을 물리쳐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
세 번째, 하나님이 발람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습니다. “때에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내가 발람을 듣기를 원치 아니한고로 그가 오히려 너희에게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 손에서 건져 내었으며”(수24:9-10) 모압의 왕 발락이 브올의 아들 선지자인 발람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지만 결국은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저주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축복과 저주는 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 적과 싸울 때 하나님이 우리의 무기가 되십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여리고에 이른즉 여리고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들이 너희와 싸우기로 내가 그들을 너희의 손에 붙였으며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사람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 너희 칼로나 너희 활로나 이 같이 한 것이 아니며”(수24:11-12) 이것은 칼이나 활로 이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2) 성도의 무기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섯 번째, 모든 열매를 은혜로 먹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또 너희의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건축지 아니한 성읍을 너희에게 주었더니 너희가 그 가운데 거하며 너희가 또 자기의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과실을 먹는다 하셨느니라”(수24:13) 이 말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노력을 하지 않고 있어도 열매를 먹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을 해도 결국은 열매를 먹게 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력했다 해서 열매를 다 먹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노력의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을 따지고 보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깊이 아는 자만이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시고 더 큰 사명과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사는 사람들은 어떤 일이라도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늘 겸손하고 기도하여 주님을 믿고 의탁하십시오. 맡은 바 일을 사명으로 다하며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범사에 어떤 일도 연합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들(빌3:5-11)
하나님은 사람을 만들어 쓰시는 옹기장이십니다. 좋은 그릇 같은 옹기도 깨뜨리시기도 하고 또 쓸모없는 먼지 같은 흙을 빚어서 빛나고 아름다운 그릇으로 만들어 쓰시기도 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렘18:6)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기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릅니다. 겉으로는 좋아보여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것을 쓰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실 때도 그 기준이 사람들과 같지 아니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
세상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을 봅니다. 사람들에 의하여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하나님이 쓰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울왕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대단히 잘생기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버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버리면 인간은 정말 이 세상에서 무용지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 바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얼마나 은혜를 주었는지 그는 신약의 27권 중에 무려 13권을 쓴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 번째, 하나님 앞에 자신이 무익하며 무력한 자임을 깨달은 자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4-6)
인간적으로 볼 때 자기가 다른 사람들보다 육체적으로 자랑할 것도 있고, 열심을 낸 것도 있지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일꾼으로 쓰임을 받으면서 영적으로 눈을 떠보니, 그것은 하나님 앞에 무익하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일부러 가장한 겸손이 아닙니다. 진실로 그는 영적인 눈을 뜨고 깨달은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7-8)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인간은 누구나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그릇이 좋고 재질이 좋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주님이 우리 속에 계시지 않으면 아무 쓸모도 없는 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절망을 극복하고 믿음을 가진 자를 쓰십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3:9)
주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자기가 무력함과 무익함을 정말 원하던 원치 않던 환경, 실패, 환란, 고난 속에서 깨달았을 때 인간은 본능적으로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내 인생은 이것으로 끝났구나 하는 좌절과 실망, 절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절망을 극복하고 주님을 보고 주님께 나와서 적극적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자를 하나님은 쓰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의 실존의 절망과 좌절을 인생의 도피나 쾌락으로 죄악과 어둠에 빠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쓰실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부활의 능력에 눈이 열리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3:10-11)
정말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는 힘은 이 세상에 보이는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승리의 힘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힘을 덧입을 때 가능합니다.
이 세상의 철학은 모두 자신의 힘을 강하게 하고 자신감을 키우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된다는 것을 강조 하는데 그것은 사탄에게 속은 것입니다. 진정한 힘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을 체험하고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나 세상을 이글 수 있는 참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능력은 아무리 강해도 다 부정적인 능력 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죽이는 능력은 있어도 살리는 능력은 없고, 미워하는 능력은 있어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능력은 없습니다. 남을 쓰러뜨리는 능력은 있어도 남을 일으켜주는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우쭐할 줄은 알아도 겸손히 남을 섬기는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능력은 죄를 짓고 타락하는 능력은 있어도 죄를 사하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능력은 그 근원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이 사탄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의 능력은 정말 우리를 살려 내시는 긍정의 능력입니다. 즉 주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신 능력이시기에 우리를 살리고 생명을 주시며 사랑하고 용서하고 겸손하고 섬기고 소망을 주고 영생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 능력은 다 부활의 주님의 능력에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부활의 능력을 받기 위하여 어찌하든지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려고 하는 자를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아멘.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4:6-16)
우리가 경제적으로 사는 것이 좋아지면서 눈에 띄도록 육적인 훈련이나 스포츠, 레저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일 수 있고 엄격히 말하면 인간의 타고난 본능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런 육적인 운동이나 훈련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영적이고 경건에 이르는 훈련입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살아있는 인간을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으로 이분법으로 나누어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하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하나이고 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전인적으로 건강해야 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
오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같은 제자 디모데에게 말을 하길 우리가 육적인 훈련도 중요하겠지만 영적인 경건훈련이 훨씬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4:7-8) 그러므로 인간이 육적인 훈련과 영적인 훈련이 다 중요하지만 기준과 우선순위가 영적이고 경건훈련에 있을 때 사탄의 유혹과 세상, 정욕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에 이르는 훈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따르는 삶으로 영적으로 생명과 축복의 길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망과 저주의 길을 떠나는 삶인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신11:26-28) 그러므로 경건에 이르는 훈련은 주님과 하나 되고 연합하는 훈련입니다.
그러면 주님과 동행하는 삶, 주님과 연합하는 삶인 경건에 이르는 영적인 삶에 대하여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우리의 삶의 목적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딤전4:9-11)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실패하는 이유는 우리가 추구하는 인생의 목적이나 소망을 잘못 잡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주님께 두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동행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성공을 하고 실적을 올리더라도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으면 결국은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1:15-17)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을 하더라도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우리의 소망과 목적을 하나님께 둘 때 우리를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성공이 참으로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공과 업적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면 그것이 좋은 것이 못되고 죄 짓는 올무가 되는 것입니다. 좋은 것은 오직 하늘로부터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헛된 신화를 버리고 말씀에 착념해야 합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4:6-7)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딤전4:13) 우리가 사는 세상에 얼마나 세상의 문화와 학문, 철학, 이론이 판을 치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단, 사이비 어둠의 종교가 얼마나 득세를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얼마나 정보, 문화, 언론, 인터넷의 홍수 속에서 삽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고 확신하는 진리라는 것이 얼마나 허구가 많은지 상상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헛된 신화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바울 당시에도 얼마나 많이 희랍신화에 빠졌는지 모릅니다. 거기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을 할 때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경건에 이르는 축복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바울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든 신의 이야기에 빠지지 말고 오늘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듣고 따라야 하나님이 오늘도 역사하고 구원의 삶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은사에 진보를 나타내도록 기도의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4-15)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면 성령이 오십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하나님이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 인내, 거룩, 지혜, 감사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속에 나타나도록 하려면 주님이 친히 우리 속에서 주인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내 속에서 주님이 사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물어봐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을 할 때 우리 속에서 주님이 은사로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기도에 승리하지 못하여 내가 나아가면 삶 속에 하나님의 은사가 나타나지 못하여 실패를 합니다. 육신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 주님이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은사의 삶이 점점 더 진보하도록 경건에 이르는 영적인 삶이 되도록 기도의 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건에 이르는 축복의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나아만의 문둥병 크리닉(왕하5:1-14)
우리나라의 작년 GDP 기준으로 경제 규모는 세계에서 13번째로 잘사는 나라이지만 OECD 국가 중에 단위 인구비로 볼 때 자살 율이 가장 높기도 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뿐 아니라 경제 수준이 높을수록 자살율이 상승하는 것이 보편적이 추세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왜 살기가 좋아지고 생활의 수준이 높아졌는데 오히려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일까? 하는 문제를 우리가 깊이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실질적으로 장애를 느끼고,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은 우리의 외적인 환경이나 여건에 있기보다는 우리 속에, 우리의 내면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길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막7:15-16) 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치명적인 병은 우리의 내적인 질병이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고치면 되지만 속에 있는 병은 발견되기도 어렵고 발견되면 벌써 병이 깊어져서 위험 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아람나라 그 당시 강국 이였던 오늘날 시리아의 군대장관 이었습니다. 그는 큰 용사였고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공적인 있는 권세자 이었지만 그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은 그가 치명적인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용사나 문둥병자더라”(왕하5:1) 오늘 날 우리 현대인의 문제가 환경이나 여건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갖고 있는 병이 문제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환경이나 여건이 불리하고 어렵다고 해도 우리 속에 있는 내적인 질병, 문둥병 같은 나만의 병을 고칠 수만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승리하고 복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아만의 문둥병이 상징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이라는 영혼의 질병입니다. 이 죄는 태어 날 때부터 영혼의 병으로 우리가 잉태되어 죄를 짓게 하여 육체의 질병을 걸리게 하며 우리의 이땅의 삶 자체를 죄를 지어 병들게 하여 실패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 죄는 우리의 영원까지 병들게 하여 지옥으로 우리를 이끄는 가장 무섭고 치명적인 병이 죄라는 병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오늘 본문에서 나아만 문둥병을 고침 받는 것 같이 우리도 죄라는 문둥병이 오늘 고쳐지고 클리닉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둥병에 대한 나아만의 오해하고 실수를 먼저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1.그는 세상적인 방법인 물질로 문둥병을 고치려고 했습니다.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아람 왕이 가로되 갈지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새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벌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왕하5:4-6) 세상의 권세로 물질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고 움직일 수있다는 생각이 바로 죄악이 사고입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지요.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을 움직이고 받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에 붙들려 있는 것이 죄악의 문둥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문둥병을 이기십시오.
2.나아만은 세상적인 권세로 문둥병을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는 출발을 할때 도 아람왕의 편지를 갖고 이스라엘 왕에게 가지고 간것입니다. 엘리사에게는 자기 신분, 자기 지위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자기를 내세우고 싶어 하는 습성이 바로 사탄에 죄악의 포로 붙들린 우리의 문둥병입니다.
3.나아만은 자기사고, 자기방식으로 문둥병을 고치려고 했습니다. “다메섹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 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왕하5:12) 나아만은 자기 방식 자기의 뜻을 자기 방식대로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사고 생각 우리의 이성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을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이러한 나아만의 실수에도 나아만이 고침을 받은 길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나아만은 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영적 겸손이 있는 자였습니다.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 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왕하5:2-4)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왕하5:13) 자기의 주장을 꺾고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작은 계집종과 자신의 종의 말을 듣는 영적 겸손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의 말이라도 은혜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자 이가 축복인 것입니다.
2.나아만을 요단강을 가르쳐 준 주의 종을 만난 것이 축복입니다.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왕하5:10) 요단강에서 목욕을 하는 것은 어쩌면 모든 것을 버린 자만 자신을 죽인자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요단강은 그래서 죽음을 상징하고 주님의 십자가와 보혈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보혈의 강 요단강의 은혜 복음에 눈을 뜨는 은혜를 가르쳐 준 주의 종을 만나는 것이 축복입니다.
3.나아만은 결국 믿고 전적 순종을 했습니다.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왕하5:14) 결국은 나아만 다 벗고 자기의 체면 권세 마스크 다 벗고 자기의 원래의 모습으로 요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목욕하며 철저히 순종을 할 때 하나님의 역사로 죄악의 저주의 문둥병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라(사40:27-31)
세상에서는 아무리 좋아 하는 것이 있다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절대적이지 못합니다. 잘하면 힘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 같고 좋은 것 같지만 조금만 상황이 바뀌면 또 금방 힘을 잃고 피곤하고 실망하고 허탈해 하고 어려워집니다. 인간의 참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 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미국의 영성 목회자 조이스 마이어는 말하길 “인간의 참 만족과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힘은 기쁨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이 하나님께서 주는 것이 아니면 진정한 힘이 되지 못하고 세상의 힘은 인간이 교만해지고 죄를 짓게 하기 때문에 결국은 세상의 힘은 다 피곤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주는 힘을 구하지 말고 세상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새 힘을 받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0-31) 여기서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추구하고 바라며 인내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앙망이라는 말은 신약의 믿음이라는 말로 대신 쓸 수 있습니다. 새 힘을 준다는 말은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준다는 말입니다. 즉 이 세상과 다른 질서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실 때 어떤 축복이 오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사40:27)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는 분입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와의 막힌 담을 허시고 응답을 해주십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담이 막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고 세상에 빠질 때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1-2)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앙망하고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을 주시고 길을 보여 주십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다시 임하니라 가라사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행33:1-3)
두 번째,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 한없는 지혜와 명철을 주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40:28)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힘들어 하고 죄짓는 이유는 우리가 하늘의 지혜와 명철이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나빠서 고생이 아니라 하늘의 지혜가 없으면 평생 고생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없으면 인생은 실패하고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다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우리를 풍요롭고 평화롭게 하고 복되게 합니다. 그래서 힘이 나고 피곤하지 않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세 번째,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참 능력을 받아 넘어지지 않고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사40:29-30) 세상의 힘은 참 매력적이고 힘이 있는 것 같지만 그 특성은 부정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 재력, 권력, 인기력, 체력, 재주의 힘 등이 있으면 대단히 매력적이고 능력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것들은 특성 자체가 부정적입니다. 이런 세상의 능력은 커지면 커질수록 인간을 구속하고 매이게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자유가 없습니다. 이것은 자꾸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는 특성이 있습니다. 안정이 없기에 유지를 하려면 피곤하고 힘든 것입니다. 이런 능력은 가지면 가질수록 교만해지어, 자기 중심이 되어 남을 세워주는 사랑이 없고 남을 쓰러뜨려 죄를 짓게 되어 스스로를 넘어지게 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참 능력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고 영원히 변치 않기에 무한한 평안을 줍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 남을 도와주고 세워줄 수 있기에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의 축복이 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십시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0-31) 아멘.
하나님이 역사하는 길(삼상7:3-11)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승리하는 삶은 우리의 힘이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못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 그래서 우리가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이 역사하고 함께하시면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교인의 신앙의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우리가 얼마나 강하고 잘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역사하고 나타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8-29)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역사하는가를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왕이 세워지기 전 엘리 제사장 시대에 영적으로 가장 어둡고 힘들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전쟁터에 가지고 나가서 실패하여 법궤를 빼앗기도 전사를 했습니다. 엘리는 그 충격으로 죽고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입니다. 그 때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금식의 대성회를 열고 기도하여 하나님의 우레의 역사로 블레셋을 물리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을 따라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더라”(삼상7:11) 이 전쟁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는가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스라엘 백성 속에 있는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섬기게 했습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니라”(삼상7:3-4) 여기서 말하는 바알과 아스다롯은 그 당시 가장 널리 알려진 가나안의 토착 우상신으로 오늘날의 물질과 정욕, 자식을 대표하는 우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물질이 하나님보다 앞세우면 우리 속에 바알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너뜨리고 하나님만 우리 속에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위하여 이용되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제거된 자에게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역사하는 길은 철저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 ”(삼상7:5-6)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버리게 하고 미스바에 모여 기도하면서 물을 길어 와 몸에 붓고 성결예식을 거행하며 금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철저히 자기들의 삶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려면 우리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진정한 회개는 생각을 바꾸고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셔 내 속에 그 분이 나를 통하여 사시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이 바뀌고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닌 주님으로 바뀌어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세 번째, 주님이 역사하려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삼상7:8) 구원 받은 자에게 놀라운 영적인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구원을 받은 자 속에 주님이 계시지만 우리가 그 분에게 청하고 의지할 때만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자동적으로 역사한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그렇게 중요하고 위대한 것입니다. 기도할 때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믿음은 지금 기도하는 신앙입니다. 기도하면 자기가 생각한 것 이상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도 기도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보여주시고 알려 주십니다.
네 번째, 하나님이 역사하려면 온전한 번제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삼상7:9)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역사하였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의 길을 열려면 우리가 우리의 삶이 산제사가 되도록 하여야 하고 우리가 산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 자로 날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가 되고 우리가 산제물이 된다면 반드시 하나님은 역사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이 역사하는 길을 여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너의 필요를 채우리라(빌4:15-21)
지금 이 지구상에는 안타깝게도 하루에 1달러 미만의 수입으로 살아가는 기아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수가 인구 60억 중에 1/5에 해당되는 12억 명이나 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이들은 부족해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선진국에서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먹고 마시어 비만과 함께 다이어트를 하며, 성인병으로 시달리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한없는 어리석음과 부조화가 있습니다. 한 쪽에서는 공급이 부족하고 없어서 죽어 가고, 다른 한 쪽에서는 공급이 너무 과잉되어 병들고 죽어 갑니다. 이것이 영적인 어둠입니다. 어둠 때문에 진리가 가리워져서 우리가 병들고 죽어갑니다. 우리 모두가 살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진리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는 부족해서 어렵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잘못 채워지기 때문에 어려울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한 필요와 채워짐이 절실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로부터 늘 어렵고 힘들 때도 선교의 지원을 받아 왔습니다. 그래서 항상 빌립보 교회에 감사하고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4:14-15]
그는 빌립보 교회의 지원을 받아 감사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한 필요를 깨달았고 그 필요가 채워짐을 풍성히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첫 번째, 인간의 진정한 필요함은 하나님의 창조의 온전함(Wholeness)입니다. 인간은 누구도 할 것 없이 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자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면서 이루고자 하는 창조의 뜻을 위하여 영적으로 육적으로 모든 것이 소유되어야 온전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 요구되는 것이 진정 나의 필요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영적이고 육적이고 과거적이고 미래적이고 통전적으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간은 범죄함으로 온전함을 잃어버렸고 필요함을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는 온전하게 만드셨으나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나 눈이 어두워져 필요를 알 수도 없고, 필요를 채울 길도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필요를 채우려고 하니까 많으면 많아서 죽게 되고, 적으면 적어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알지도 못하고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 번째, 오직 인간의 진정한 필요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필요를 알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 뿐의 뜻 안에서 우리가 만들어졌기에 그 분 속에 창조의 설계도가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그래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쓸 것을 알고 필요함을 알고 온전함을 알고,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직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필요를 채우는 것이고 온전함에 이르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적으로 육적으로 온전히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어둠을 안고도 승리하는 삶(룻1:19-22)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겉으로 보면 다 좋아 보이고 잘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힘들고 부정적인 어둠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그렇게 아프고 고통스럽고 어두운 부정적인 것을 안고도 훌륭하게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1)에디슨은 귀머거리였으나 축음기를 발명했습니다. 2)존 밀턴은 눈이 멀고서도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세계적인 명저 실낙원과 복락원을 써서 오늘날까지 어둠을 밝히는 진리의 등불이 되게 했습니다. 3)베토벤은 귀가 멀어서 월광곡을 작곡하여 세계적인 악성이 되었습니다. 4)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절름발이였으나 미국 역사상 뛰어난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5)슈베르트는 평소에 몸이 약하고 질병이 많아서 정신적 육체적 고통 속에서 비록 31세에 죽었으나 세계적인 명곡 110곡을 작곡하여 위대한 음악을 후세에 남겼습니다. 이들 모두는 고통과 어둠을 안고 평생을 살면서도 위대한 삶,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한 결 같이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신앙을 소유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사도바울 같은 사람도 평생을 살면서 사단의 가시를 갖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것은 떠나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했지만 그것을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에 머물러 있게 한다는 역설적인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고후12:8-9) 그래서 사도바울은 사단의 사자를 평생 몸에 달고 다니면서 그렇게 위대한 사도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미라는 여인은 원래 이스라엘 베들레헴 사람으로 흉년이 들어 이방지역인 모압 지방으로 가서 살다가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큰 어둠과 슬픔을 당하게 지만 나오미는 며느리 룻과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와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돌아오는 나오미를 사람들이 맞이하자 나오미는 자기 자신을 괴로운 여인 마라라고 합니다.
‘나오미’라는 말은 ‘희락’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라’라는 말은 ‘고통, 쓴 것, 슬픔’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들은 승리하게 됩니다. 그 슬픔과 어려움, 어둠을 안고 살았지만 룻이 이삭 줍기를 하다가 보아스를 만나게 되고 결국은 그들은 복된 여인들이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이런 어려움, 어둠을 안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된 것일까요?
첫 번째, 현실을 바르게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룻1:19-20) 우리는 항상 나오미와 마라를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즉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고 슬픔도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나오미와 마라는 있는 것입니다. 연예인, 대기업 회장, 국회의원,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대통령 영부인 등 겉으로는 화려하고 대단한 것 같지만 다 그 속에는 나오미와 마라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나오미와 마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승리하는 비결은 나오미로 사느냐, 마라로 사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즉 극복을 했느냐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셉도 그가 애굽의 국무총리로 살았지만 형들이 자기를 죽으려고 한 것 마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속에 있는 마라를 극복하고 나오미로 사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두 번째,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믿어야 합니다. 나오미는 세상의 떡을 찾아 떠났다가 하나님의 떡집으로 돌아 온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를 합니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룻1:20-21) 그는 징벌을 받았지만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여호와를 굳게 의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둠을 안겨 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사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세 번째, 과거를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룻1:22) 나오미는 정말 베들레헴에 오기 전에는 지긋 지긋한 어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베들레헴에 와서는 추수하기 시작할 때 들어와 그들은 과거의 삶은 잊어버리고 오늘 하나님의 은혜의 삶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슬픈 삶, 어두운 삶에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는 과거이고, 오늘은 오늘의 삶으로 끊어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 마라의 삶을 치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3-34) 아멘.
본향을 찾는 사람들(히11:8-10/ 13-16)
지난주에는 추석 명절로 수많은 사람들이 귀성을 했다고 합니다. 경제가 어렵고 힘들어도 다 자기 고향을 찾는 일에는 열심이 있습니다. 귀성 교통 대란을 겪으면서도 즐거워하고 의미있게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부모님을 만나고 일가친척을 만남으로 효를 이루며 삶의 활력을 오히려 얻게 됩니다. 거기서 힘이 들어도 오히려 안식과 평안을 얻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언제나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귀소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늘 자기의 고향을 바라고 그리워합니다. 이것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 만물이 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원리이기도 합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11:36] 그러나 우리 고향을 더 깊이 생각을 해보면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고향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태어난 곳은 어머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우리의 고향도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고향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근본적인 본향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보면 예수 믿어 구원을 받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성도는 고향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요1:12-13]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만 생각을 해도 평안이 오고 천국만 바라보아도 기쁨이 오며 안식이 오는 것입니다. 천국은 성도의 영원한 고향이요, 진정한 본향이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이 땅의 삶과 신앙은 본향인 천국을 찾아 가는 순례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본향을 찾아 가는 삶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본향을 찾는 믿음을 소유하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나 본향을 찾는데 실패하면 영원히 삶의 낙오자가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부르심에 갈 바를 모르고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11:8) 그 당시는 씨족 사회이기 때문에 자기 고향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은 곳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 때 우리는 본향을 그리게 되고 찾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바리세인 중에 바리세인입니다. 그는 율법으로 이 땅의 천국을 꿈꾸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체험할 때 죽음의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영인 성령을 체험하고 눈이 열리며 하늘에 있는 본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두 번째, 약속된 축복의 땅에서도 천국의 비전을 가지고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히11:9-10)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곳에서도 늘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그곳이 온전한 본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장막을 치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중요하고 축복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천국의 그림자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다 변하고 사라집니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장막을 치고 살며 천국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천국을 증거하고 찾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히11:13-14) 이들은 우리처럼 천국의 약속은 받지 못했습니다. 예수가 아직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들보다 더 확실하게 천국의 확신을 가지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보는 사람들에게 천국이 있는 것을 증거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아브라함은 육신의 고향을 사모한 것이 아닙니다. 더 나은 천국, 본향만 사모하고 찾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고 하늘에 그를 위하여 영원한 성을 준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본향을 찾는 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약해도 승리하는 길(고후4:7-12)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승리의 길은 남들보다 강하고, 많고, 커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약하고 부족한데서 승리하는 길이 있다고 말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법대로 승리의 길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길, 승리의 길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약하고도 이기는 길은 없습니다. 늘 남보다 강하고 많고 커서 남을 지배하고 넘어뜨리고 없애야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을 하는 것은 그렇게 강하고 많아져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약한 상태에서 이기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에게 말씀하신 승리의 비결입니다.
약할 때 강함이라는 이야기는 약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의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승리의 비결은 우리가 강하고 약한데 있지 않고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얼마나 역하시느냐 안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약한데도 주님을 더 의지하여 승리하는 길을 깊이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성도는 주님의 능력의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4:7) 우리는 심히 약한 질그릇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능력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능력은 주님께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겸손해야 하고 늘 그 분을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질그릇이라는 사실과 우리 속에 능력이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는 세상 문이 닫히고 실패를 한다 해도 겁을 먹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또 다른 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우리 속에 계신 주님은 부활의 주님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4:8-9) 우리의 삶 속에서 정말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올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끝나고 다 죽은 줄로 알지만 우리는 버림받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 계신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이기에 이 세상에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절대로 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 이 땅에 살더라도 우리의 영은 부활하여 하늘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도 이 세상을 초월하여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육신의 삶 속에서도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으면 성령의 역사로 이 땅에 몸은 살지만 우리의 영은 하늘에 살기에 이 땅에서는 어떤 억압, 사슬에 매여 있어도 자유가 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약한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4:10-11) 하나님께서 우리를 약한 그대로 어찌할 수 없는 상태로 두시는 이유는 우리 속에서 나의 육신의 죽음을 체험하여야 예수의 생명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는 부활의 생명은 올 수 없습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3-5) 처음 의기양양했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한없이 약해졌고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의 안수로 그는 성령을 체험함으로 예수 부활의 생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지켜보시며 주님의 부활의 생명이 얻기를 바라시고 계십니다. 또 우리가 약한데 거함으로 죽음을 체험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활의 생명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가 생명을 받았듯이 우리가 죽음을 체험하고 약한데 처해야 주님의 생명은 전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4:12)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 대신에 우리가 주님의 역할을 해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속에 주님의 역사는 날마다 커지고 구원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누가 죽지 않으면 생명은 전파되지 않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출4:1-5)
우리가 아무리 부족함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약해도 크게 쓰임을 받을 수 있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5:10)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인간에게 큰 장점이 있다 해도 장점 때문에 어려워지고 교만해지고 실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삼상15:17)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그러므로 인간은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기적이 일어나고 은혜가 있고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을 이드로의 양을 치는 목자로서 살면서 80살의 노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인간적으로 나약해지고 담력이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서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되게 하시고 그 꼬리를 잡으라 하셨습니다. 모세가 순종하니 뱀이 지팡이가 되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적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4:3-4) 이 놀라운 표적의 의미를 생각해 봅시다.
첫 번째, 손에 든 지팡이를 던지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출4:2-3) 모세의 지팡이는 평범한 지팡이지만 모세가 살아오는 과정 속에 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모세를 지켜주고 모세의 가족을 지탱해 준 지팡이입니다. 목자로서는 지팡이가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팡이는 모세의 삶의 무기이며, 장점이며, 재주며 은사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장기이며 기술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는 뱀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이 사탄의 무기, 아니 사탄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실패를 할 때 대부분 다 잘하는 것으로 실패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에게 강점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잘 사용하면 승리하지만 그것 속에 마가 있다는 것을 알고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뱀의 꼬리를 잡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것을 땅에 던지라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4:3-4) 이 말은 믿음을 가지고 어둠의 세력을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그대로 순종하면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뱀은 에덴동산부터 사탄 마귀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약속을 하시기를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이 오시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예수님이 오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뱀의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꼬리를 잡으면 하나님께서는 머리를 잡아 물리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꼬리를 잡는다는 것은 이처럼 주님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했다는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꼬리를 잡는 위험이 있는 것 같지만 순종을 하면 반드시 승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새로운 지팡이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또 가라사대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 하시고”(출4:4-5) 뱀을 잡아서 승리한 지팡이는 하나님이 새로 들려주신 지팡이입니다. 우리의 재주, 은사, 도구, 기술 모두 하나님께 드릴 때 새로운 축복의 지팡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바위를 쳐서 물을 내고, 산꼭대기에서 그 지팡이를 들고 기도할 때 적을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묻습니다. 당신의 돈, 자식, 사업이 당신 손에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욕망의 그릇을 채워주는 것 밖에 안 되지만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훌륭한 도구가 되며, 당신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