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일 구국 기도회 (1)

\"40일 구국새벽기도 1\"|새벽설교
새생명축복 | 조회 35 | 09.08.08 18:22 http://cafe.daum.net/SermonSchool/Hmnv/67 

 제1일

 

“공의를 실천하는 민족”

 

성경: 미가서 6:6-8

하나님의 절대적인 축복 속에서 호렙산 축복 40일 새벽기도회를 시작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앞으로 40일 동안 하나님의 베푸실 능력과 축복을 기대하며 이번 기회가 새로운 새 시대인 21세기 준비를 위한 ?민족과 우리 교회 그리고 각 가정과 나 자신에게 진정한 기름부음을 받는 말씀과 기도의 축복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호렙산 축복 40일 새벽기도회이든 새로운 새 시대이든 모든 것의 열쇠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변해야 모든 것이 변하며 사람이 달라진 만큼 하나님의 역사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어떤 행사나 프로그램을 보시기 전에 먼저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만일 이번 40일간의 새벽기도회를 단순히 특별한 행사 정도로만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은 별로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교회가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고, 나 자신이 바로서는 기회로 삼는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 이상으로 살아 계신 증거들을 보여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성경에서 사람을 나누는 용어로 백성, 민족, 지파, 족속, 종족이라는 공동체를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이나 12지파 혹은 수많은 종족과 족속으로 불리며 진정한 국가 형성이란 민족이나 종족을 중심으로 무리와 백성을 중요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난 것을 선택받은 특권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인도 그리고 어떤 위험과 고통 중에도 하나님이 자신들 편에 계신다는 선민의식과 특별히 구별된 의식으로 민족적 긍지와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 만큼 민족 개념은 국가를 세우는 필수였습니다.

우리 나라 대한 민국을 형성하는 한민족에게도 이 원리는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 민족을 창조해 주셨습니다. 우리 민족 형성은 5000년 역사에 의한 단군?뿌리 이 전에 하나님이 만든 민족입니다. 적어도 이렇게 바른 역사관으로부터 시작해야 바른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세워서 늘 그 민족이 대대로 축복된 나라와 국가로 세워지기 위해서 요구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민족을 이끄는 정신적이며 영적인 질서를 말씀하시는데 바로 \' \'입니다

국가의 기초는 민족이라는 사람이고 그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 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6~8절을 읽어보십시오.

무슨 말씀입니까? 믿음이란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 관계를 통해 절대자이신 하나님께 영 광을 돌려 드리려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삶의 내용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국가를 형성하는 원리나 민족을 세우는 하나님의 법칙은 하나님이 원하시고 명령하신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와 민족은 공의를 앞세우는 것입니다.

공의란 도덕성과 윤리성의 근본적 원칙에 해당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로서 그 모든 의무적 바탕을 공의에서 찾아야 한다는 원리입니다.

국민 의식과 사회적인 흐름에서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고 움직이게 하는 모든 감정에 이르기까지 공의에서 비롯되고 영향 받는 것은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공의란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쪽으로 살려는 의식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일반법으로 판단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법에 의한 판단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때문에 성경에 나타난 모든 민족들의 국가 지도자들이나 백성들의 한결같은 관심과 싸움은 하나님의 심판을 가장 무섭게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이 바르게 세워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법을 무섭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이 절대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는 민족은 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공의를 실천하는 민족이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종교란 그 민족을 지배하는 정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다신교 아래서의 국가 형성과 미신과 무속 신앙 숭배 사상으로 잘못된 종교의식과 근래에는 단군 상을 건립하면서 민족의 뿌리를 미신과 전설로 만들어진 허수아비 민족 사상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존엄한 존재이고 존귀한 창조성으로 만들어진 [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성을 인정해야 하며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유일한 종교를 이 땅에 세우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제1법칙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민족만이 진정한 국가 형성과 민족의 번영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공의를 행하는 민족이란 [ ](8절)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은 복중에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이 떠난 민족이나 교회와 가정은 이미 불안정한 국가이며 가정입니다.

때문에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기를 워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민족이 되길 위해서 눈물과 회개로 우리의 교회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국가를 잃은 민족은 어떤 자유도 없으며 민족이 바로 서 있지 못한 국가는 하나님의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교회도 국가가 있을 때 존재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민족이 바로 세워지기 위해서 민족을 위한 철저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21세기를 맞고 있습니다.

새로운 1000년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민족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도록 교회가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일에 전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민족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이 민족이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게 하소서.

2. 유일한 하나님만을 섬기는 민족이 되게 하소서.

3. 대통령과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제2일

 

\"생명을 존중하는 민족\"

 

성경: 창세기 1:25-26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하는 병 즉[ ]을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라고 합니다.

나르시시즘이라는 단어는 본래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것인데 열여섯 살 정도 된 나르시스라는 소년이 숲 속의 은빛 고요한 아름다운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사랑을 고백하지만 상대방이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그만 물에 빠져 수선화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시즘」이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인간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최초의 인간을 만드시고 처음하신 말씀이 \" “( 창1:31) 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인간 이란 창조의 때부터 이미 생명의 가치를 지니고 태어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image )이란 하나님의 모양 ( likeness )을 따라 만들어 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 ( image )이란 그의 내면적 속성을 의미합니다.

곧 인간은 하나님의 본질과 성품을 본받아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 ( 요4:24) 그래서 우리 인간도 영적인 존재입니다.

2) ( 요일4:8) 그래서 인간도 사랑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3) ( 벧전1:16) 그래서 인간도

타락하기 전에는 거룩함을 사모하는 존재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인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엡4:24)

즉 (智), 정(情), 의(義)를 갖춘 인격적인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위치는 피조물 가운데 으뜸입니다. 인간만이 소유한 생명의 특징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속성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인간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뜻을 두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인간의 존귀함에 대해 시편 기자는

( 시8:4~8)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존귀한 인간의 생명이 너무 가볍고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생명의 존엄성이 사라졌습니다. 한사람의 죽음에 대해 큰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일가족이 죽는 것도 신문의 몇 줄 기사로 끝입니다. 수십 명이 죽는 일을 당해도 며칠 떠들다 맙니다. 어린 생명을 낙태시키는 일에 죄의식도 느끼지 않습니다. 작년 한해 낙태수술을 받은 아이의 숫자는 12만 명이나 됩니다.

인신매매나 자녀학대, 이혼과 강도 등 수많은 사건들의 배후에는 생명을 경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시키고 하나님께 범죄하는 가장 악한 죄임에도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생명을 존중하거나 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진국이란

생명을 경시하고 소중한 생명의 가치에 대한 국민의 의식이 부족하며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일반적이 흐름이 아주 약합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이 너무 소중하기에 천하보다 존귀한 존재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한 생명 한 영혼이라도 지옥에 가게 만드는 자는 영원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지옥을 설명하시면서 그리로 보낸다고 경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지구상에 가장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소중한 가치를 지닌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창조성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귀하고 가치 있게 창조된 인간으로 취급 받아야 될 사람들이 어느 경우는 짐승으로 취급을 당하고 차마 인간으로서는 당하지 말아야 될 것들이 우리 사회에서 그대로 행하여진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인간 회복과 인간의 가치 회복을 위해서 기독교가 일어나야 하며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는 일에 교회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새로운 새 시대는 인간의 생명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 사람 하나하나에 대한 사랑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일을 위해 노력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생명을 지키며 가치 있게 하는 삶일까요?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눌 때 참 인간됨의 의미를 바로 찾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육체의 모습이 아니라 [ ]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것처럼 인간도 거룩한 존재로 하나님이 자유로우신 것처럼 인간도 자유로운 존재이며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처럼 인간도 사랑의 존재로, 하나님의 도덕성과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를 창조하신 그 분을 닮은 존재답게 그 분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철학자 파스칼은 \" \"

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때로 신처럼 행동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짐승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진실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동물과 같은 본능을 따라 살 때가 아니라 오히려 본능을 부인할 수 있는 때입니다. 그 동물성을 초월하여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임을 보일 수 있을 때 인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끓어오르는 분노나 욕망을 억누르며 하나님 자녀답게 살겠다고 다짐할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근본 목적은 자기를 창조하시고 심히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기독교 요리 문답 1문에

\' \' 했습니다.

\" \"( 마6:33)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의를 건설하고 세우는 일이 인간에게 맡긴 제일 큰 기도제목입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생명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는 존재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담기고 하나님이 만드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회와 국가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참된 행복과 자유가 있는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운동을 새 시대에 이 민족에게 일어나길 기대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는 민족이 되게 하소서.

2. 나를 만드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소서.

3. 한 사람 한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회를 만드소서.

 

 

 

 

제3일

 

“세계를 품에 안은 민족”

 

성경: 마태복음24:14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지구촌이란 말이 이제는 익숙한 말이 되었고 국제화시대란 최근에 많이 쓰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국제화의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하며 21세기는 사람이 생각하는 이상의 변화의 물결이 온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만들 것입니다.

세계는 변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속도는 예를 들면 오늘의 지구촌을 1일 시대라고 합니다. 24시간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적 변화나 어떤 급속한 경제적 변화의 부분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구촌 사람들의 의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부가가치와 질을 높이기 위해 인간의 모든 두뇌와 지식은 물론 정보 과학 분야까지 총동원되어 이상적 나라를 만들기 위해 뛰고 있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이 세계적 변화에 지혜로운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동안 한국 사람들의 의식은 언제나 한국 속에 지구촌이 있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오다가 마침내 세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도록 IMF를 겪었습니다. IMF란 단순히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숙제가 아닙니다. 빚을 많이 지었으니 빚을 갚아야 나라가 잘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한국 지도자들과 기업가 그리고 국민들의 의식을 바꾸게 하는 것이 IMF였습니다.

\"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그 동안 우리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한마디로 모든 곳에 부정과 부패로 썩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진실이 통하지 않는 사회였고 오히려 깨끗한 것이 특종기사로 나오는 이상한 사회였습니다. 때문에 세계인들이 한국을 바라보며 지구촌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했는데 바로 그것이 IMF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는 법을 달리해야 합니다. 한국도 세계 속에 들어와 세계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온갖 고통과 희생을 당하면서 경제 사회적위기 속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빨리 적응하며 고칠 것은 고치고 버릴 것은 버리며 세계인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의식을 배워야 합니다.

무엇이 이런 잘못된 사회를 만들었습니까?

우리는 과거에 쇄국정책으로 많은 손해를 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차피 열어야 할 문이라면 과감하게 열어 우리에게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끼리만 하자는 의식 때문에 수많은 세월을 낭비했고 꼭 필요한 것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고 하셨습니다. 국제화를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안정된 자신의 삶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떠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말하길 \' \' 고 했습니다.

어려운 말이지만 어느 경우는 나를 중심으로 한 자기 이기주의나 집단 이기주의를 버려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혈통의 벽을 넘어 설 때가 있고 사는 방법과 원리 그리고 의식과 생활을 바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는 내가 잘사는 것이 첫째라는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진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가 잘 살고 모두가 혜택을 누리는 것을 위해 자기의 이익을 양보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함께 사는 세계인이 되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살기 위해 내가 희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남의 아픔을 돌아보는 것이 세계화를 실천하는 뿌리입니다. 잘못된 것들과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따르지 않는 것이 세계화를 출발하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나의 아픔을 작게 보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크게 보는 삶의 가치관을 바꾸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이런 사회가 신 사회이며 세계 속에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자격을 갖춘 사회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사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내어 주고 한 방울의 피도 남김없이 다른 이들을 위해 쏟으셨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 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의식이 세계화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까? 국제화나 세계화는 무조건 다른 나라의 문화와 의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국제란 문만 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도 보존하는 것입니다. 국제화란 무조건 남의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성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방과 국제화 이후 우리의 좋은 것을 너무나 많이 상실했습니다.

우리 옛말에 \"목욕물 버리다 아이까지 버린다.\"란 말이 있는데 우리의 좋은 것을 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예의를 지키고 열심히 일하고 정이 많고 하는 것들은 간직하고 자기중심적이며 사치하고 부패하고 남을 배려하지 않고 질서를 지키지 않고 환경을 걱정하지 않는 것들을 빨리 세계인들에게서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계 나라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계 나라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국제적 사도가 되기 전에 아라비아에서 3년 다소에서 7년 동안 자기의 것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국제화 이전에 반드시 우리의 것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우리의 고칠 것은 고치기 자성하고 자각하며 새롭게 결심하는 기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귀한 것을 보존하는 자세가 필요한 예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화를 통해서

를 이루게 됩니다.

국경이 사라진 국제 시대를 복음을 전하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이제는 어느 나라이든지 우리 여권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고 공산국가였던 나라들도 경제적인 이익만 있으면 들어오게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복음전파의 기회인 것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한국교회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전의 사고방식으로는 러시아니 카차흐스탄이니 중국이니 하는 곳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은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에도 한국 선교사들이 있고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국제화의 산물이다. 성경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국제화 시대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시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세우신 각 나라와 민족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인간 본연의 가치들을 높이고 바로 내 이웃과 내 주변으로부터 진실 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계를 품에 안을 만큼 우리의 능력과 실력을 예수 안에서 키워 나가는 민족이 되어야 합니다. 2009년대는 우리 민족이 세계인들과 함께하는 민족으로 서로 품에 안은 모습으로 살게 되길 기대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세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2. 세계를 향하여 주의 복음을 전하는 민족으로 세우소서.

제4일

 

“새롭게 도전하는 민족”

 

성경: 여호수아14:6-14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새로운 약속의 땅을 밟는다든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는 것은 벅차고 감격되는 일입니다. 그것도 오랜 고통이나 암흑에서 벗어나는 때라면 그 감격은 배 이상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정탐의 사건은 충분히 감격과 감동을 일으킬 만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다지파의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40년 전 가나안 정탐을 나섰다가 10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지도자인 모세와 백성들 앞으로 돌아와 그 당시 가나안의 상황에 대해 보고하는 장면을 연상합니다.

10명은 가나안 사람들을 두려워하며 절대 이길 수 없다는 불평적인 보고를 할 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백성들 앞에서 가나안의 꿈을 버리지 말자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런 후 40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약속의 땅을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가나안의 억센 아낙 자손이 거하는 헤브론 산지를 8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를 자청하여 토벌할 것을 제의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전진해 드디어 가나안 정복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며 이 민족이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서 깊이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새벽의 40일 중에 10일을 우리 민족이 어떻게 살아야 새로운 시대의 축복을 놓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한가지의 사실은 지금 세계의 흐름과 시대적인 상황에 대한 믿는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래에 대해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보며 살만한 세상이 올 것이라고 낙관적인 믿음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위치(position),는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보는 시선이 믿음에 근거하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기자의 말씀에 \" “ ( 히11:1)라고 했습니다.

때로는 우리 민족성을 설명할 때 쉽게 절망하고 쉽게 포기하는 성격, 참지 못하고 조급한 성격, 적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며 자기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부정적인 면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다릅니다.

오히려 믿음이란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있고 어려움 중에도 얼마든지 일어 설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란 언제나 새로운 날을 향한 날마다 새로운 도전을 목표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전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환경을 초월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그는 100세에 하나님의 쓰임을 받습니다.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으며 위대한 지도자로 사용되었습니다.

때때로 나이 때문에 주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전이란 젊은이만을 위한 특별 항목이 아닙니다. 당신의 나이를 초월하십시오. 얼마든지 하나님의 쓰임 받는 위대한 일군들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나이의 한계를 극복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식이 없어서 고민하시는 분은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는 마음으로 잠언서를 통독하십시오.

절망과 낙심에 사로잡혀 힘을 잃은 분들이 있습니까?

이 씨름하던 얍복 나루터에 가보십시오. 아니면 로뎀나무 아래서 지쳐 있는 엘리야를 만나 보십시오. 얼마든지 당신도 도전을 향한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사람들에게 시험에 들어있거나 열등의식 때문에 도전을 할 수 없다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 앞에 철저하게 멸시를 받았던

여인을 생각해 보시지요. 얼마든지 당신의 처지나 환경은 나은 쪽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도전을 방해하는 가장 무서운 적은 [ ]입니다.

조금 만 더 말씀 앞으로 나와 보십시오.

마가복은 9:23을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 \"

내 생각과 범주를 넘지 못하고 체면, 인정, 자기감정에 매여서는 결코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한계를 감싸고 있는 고정관념의 벽을 과감히 허물어 버려야 당신도 승리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또 하나 도전에 대한 중요한 사실은 어려운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3D 현상이라는 \'어렵고\' difficult, \'더럽고\' dirty, \'위험한\' danger 것들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어떤 일이든 주의 일이든 이 3D는 필수입니다.

진리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고난이 따르지 않는 진리는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아픔과 희생에서 열매가 있습니다.

눈물을 뿌려야 기쁨을 거둡니다.

. 나를 죽여야 상대방이 세워집니다. .

이 땅에 신자들에게 분부한 모든 것은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모든 것이 힘들고 더럽고 추하고 위험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열매가 더 아름답고 더 소중한 가치가 있기 위해선 어려움도 2배 3배 4배로 계속 커가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제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전해 보십시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어떤 환경 중에도 새로운 도전을 향한 용기를 주소서.

2. 이 민족이 새롭게 출발하는 축복을 주소서.

3.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믿음을 주소서.

제5일

 

“교회를 세워가는 민족”

 

성경: 요한복음18:36-38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고 요한복음 18:36에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언어와 예수님의 생활과 예수님의 문화 속에 사는 나라가 성경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언어나 이 세상의 사상이나 삶의 양태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모습이 하나님의 언어로서 오늘 우리의 시대,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에게서 찾을 수 있어야 내일의 희망이 있는 나라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국가는 \' \' 입니다.

자신의 국적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민족과 국가를 보는 시각입니다. 나라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 로서 온 것이라고 로마서 13:1에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소서.\"라는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기 위한 목적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임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민족에게 임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기도인 것입니다.

성경의 국가관은

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인들의 국가관이란 단순히 국가적인 이기주의에서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성경적인 바탕에서 세워지며 하나님의 뜻이 이 나라에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독인들의 나라 사랑이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워지는 일을 위해서 기도하며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수 있습니까? 그 길은 교회를 많이 세우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교회가 바로 세워져 있으면 그 나라는 바르게 섭니다. 그러나 교회가 부패하고 교회가 살아있는 역할을 못하면 나라도 바로 서지 못합니다.

오늘까지 교회가 한국 땅에 세워지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고 갖은 고통으로 시달렸습니다. 이 같이 교회 세움을 포기하지 않은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로 인해 오늘의 한국 교회가 이 만큼 세워진 것입니다.

순교의 피와 고통의 열매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조국을 만들었고 대한민국이 세워지는 일에 기독교인들이 수고하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이렇게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직도 나라이든 교회가 바로 서있고 하나님을 앞세운 민족은 축복을 받고 경제나 정치, 사회와 국민 생활이 안정되고 잘사는 나라가 됩니다.

왜 기독교가 흥왕하며 교회들이 많이 세워져야 합니까? 다른 이유들도 많이 있겠지만 진정한 인간을 회복시키고 바른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곳이 교회뿐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 교육이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죄지은 사람들을 감옥에 갔다 넣는다고 새 사람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드는 곳은 교회뿐입니다.

진실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진리와 거짓을 분별시키는 곳이 교회입니다.

, 연합하여 사는 법을 가르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런 소금과 빛을 주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교회는 많이 더 세워지고 그 교회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사명적 역할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생각과 사상과 삶이 진리였습니다. 오늘의 교회와 목회자 그리고 교회의 핵심인 장로와 집사 모두가 진리를 고집하며 진리를 실천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의 터가 되어야 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가 황무하고 살만한 세상이 되지 못한 책임이 바로 교회에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세상과 다른 곳으로 바른 역할을 했다면 세상과 구별이 되며 교회에서 외부로 나아가는 말이 권위가 있고 그 말이 사회를 지키고 질서를 만들고 진실을 따르도록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아무리 고함을 치고 사회 개혁과 변화를 외쳐도 세상이 따르지 않는 이유는 고칠 것들이 교회 안에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깨끗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결해야 합니다. 교회는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많이 세워지면 이 나라 이 민족의 미래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눈물을 흘리며 애통한 마음으로 이 새벽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까?

,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하느님의 진리가 세워지는 나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며 이 새벽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우리의 기도는 나를 중심으로 한 어쩌면 이기적인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이 민족을 보면서 더 이상 이대로 나라가 망하거나 더 썩어가도록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안타까워하는 주의 심정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믿음의 질이 높여졌습니다. 기도의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민족이 사는 길이 내가 사는 길이며 세상이 바뀌는 것을 보며 보람을 느끼는 신앙이 더 깊은 믿음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열심히 힘에 닿는 대로 교회를 세우되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들을 많이 세우고 주의 쓰임 받는 바른 목회자들이 많이 세워져서 진정한 교회의 힘이 세상에 전해지고 그 힘에 의해서 바꿔지는 나라를 만들어야 합니다. 더 이상 이 민족이 죄악에서 허덕이지 않도록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는 일에 모든 교회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이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이 나라에 더 많은 교회를 세워주소서.

2. 교회가 바르고 진리를 실천하도록 하소서.

제6일

 

“새꿈을 심어주는 민족”

 

성경: 시편137:1-9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의 세계를 불안과 공포로 얼룩진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세계 도처에서 쉬지 않고 발생하는 전쟁, 테러, 혁명, 기아, 질병, 천재지변인 지진과 홍수 등으로 2000년대의 미래에 대해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실상은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종말을 향한 징조라고 기독교는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은 말세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마 24:3~14)

이러한 주님의 예언이 이워지는 과정에서 역사는 세계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해 수많은 경고들을 갖가지의 사건과 현상 등을 보며 두려워하고 결국 지구는 파멸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됩니다.

나폴레옹 힐은 말하길 현대인들이 불안 해 하고 위험의 압박감에 사로잡히는 7가지의 공포에 대해 예를 이렇게 들었습니다.

1) 2) 3) 4) 5) 6)

7)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종말이 오든 어떤 공포의 요소들로 불안해하든 역사나 시대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으로 지구에 발생하는 사건들을 해석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형별과 죄에 대한 대가로 풀어 보기도 하지만 시대를 보는 믿는 이들의 제 1 원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일반 사람의 눈으로 시대의 흐름과 사건들을 보게 되면 절망하고 어떤 용기나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과 섭리로 모든 것을 바라보면 그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 바로 그것은 어떤 위기와 환난의

시대에도 [ ]은 계속되었다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민족에게 꿈을 통해 새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전쟁이 종말로 생각하던 때나 기근을 심판이라 부르던 때에도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비전은 계속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꿈과 비전은 새로운 새 역사라는 더 위대한 가능성과 문제들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새 역사란 무엇인가?

. 어떤 경제적인 강대국을 만들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드는

새 역사가 압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새 역사는 하나님이 직접 인간들의 역사 속에 깊이 관여하시고 계시며 그 역사를 다스리고 계신다는 하나님의 통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새 역사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를 지배하시며 섭리하시며 역사를 새롭게 진행시키신다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나라와 민족 가운데 개입하신 하나님을 추적해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보여 주신 꿈의 드라마 혹은 새 비전의 파노라마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을 보면 더욱 확실해 집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의, 거룩, 사랑 모두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새로운 새 역사의 꿈은 징계와 심판의 실현이 되었습니다. 바로 노아의 홍수가 그 시대입니다.

단순히 노아의 홍수 사건이 하나님의 심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시대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꿈이 그 배후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는다는 아픔과 절망이 있는 동시에 하나님의 새로운 목표가 있습니다.

범죄로 타락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나라 건설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죄악이 줄어든 세상과 조의 무서움을 아는 새로운 사람을 만들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종말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새로운 꿈입니다.

우리도 수많은 고통을 국가적으로 당하면서 깨어 있는 백성과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살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런 방법을 하나님은 사용하십니까?

..

마치 애굽에서 고통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 역사의 꿈을 애굽의 노예로 고통당하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모세를 보내어 새 꿈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노예의 역사에서 자유의 역사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출애굽의 여사는 새로운 역사의 꿈을 저 가나안에 두었던 것입니다. 궁극적인 새 역사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인 것(롬14:17)을 알게 했던 것입니다.

마치 본문에 나타난 이스라엘과 같은 바벨론 포로의 생활에서 인간의 자유와 인권, 소유와 생존권과 삶마저 상실했던 가장 비극적인 생활의 경험을 우리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의 꿈은 강대국이 되는 것이고 잘살고 부강한 나라가 되어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에 대한 대망의 꿈을 품고 열심히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채 정신없이 뛰어온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이 시대적 꿈은 해가 가면 갈수록 경제는 조금 나아졌고 살기는 조금 편해졌지만 가장 중요한 인간성을 상실하고 범죄가 판을 치고 죄악이 물 흐르듯하며 교만과 패역한 나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합니다. 새 시대는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으로 사는 길이 이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1. 잘살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민족이 되게 하소서.

2. 절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갖는 민족으로 세우소서

 

제7일

 

“새시대를 바라보는 민족”

 

성경: 이사야60:1-9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중동 지방에서는 해가 지평선을 뛰어오른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 중동의 나라들 중에서 예루살렘은 가장 광채가 나는 빛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온 땅이 어둠 속에 있을 때 가장 밝은 빛으로 비춰지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나 빛의 나라이며 동방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을 비추어야 할 땅이 하나님이 목적하는 대로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범죄와 사악함으로 암흑이 될 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세워 말씀하신 장면이 오늘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동방의 나라, 동방의 불꽃이라는 불리우는 우리 조국에 대해 생각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과연 이 나라 이 민족은 얼마나 찬란한 빛을 세계를 향하여 비추고 있는가?

과연 이 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깨끗하게 살아가며 동방의 나라로 인정을 받고 있는가?

참으로 부끄러울 만큼 우리는 고개를 들 수 없는 민족으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진실을 찾기 어려운 나라, 정직한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나라,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흔하지 않는 나라로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사야가 강력하게 외쳤던 \" \"

는 말씀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렇다면 빛과 어둠이란 무엇일까요?

빛과 어둠은 정신적 상징들입니다.

빛은

어둠은 를 말합니다. 빛은 평안과 번영의 상징이라면

어두움은 불안과 부조리의 상징입니다. 빛은 진리를 뜻한다면 어둠은 비 진리와 죄악 생활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진리이고 그 안에는 어둠이 없습니다. 빛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자기표현이며 열방이 예루살렘의 빛을 바라볼 때 저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영광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때 흑암의 세력은 물러가고 새 시대가 동터왔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련으로 어둠 속을 방황하며 땅에 엎드러져 쓰러진 이스라엘이 힘차게 일어날 힘을 얻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때였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수난의 시대가 지나고 새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 민족의 근대 역사를 살펴볼 때 우리는 너무도 많은 수난을 겪어온 민족입니다. 이조 말엽의 쇄국 정책으로 닫혀진 문화권 속에서 살아 왔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압제 속에서 36년간이나 자유를 빼앗긴 삶을 살아왔습니다.6.25동란의 쓰라림도 겪었습니다. 이 같은 역사의 흐름은 어둠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힘차게 일어나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입니다.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늘 깨어서 복음의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5~6을 보십시오.

\"

\"

그리고 눈을 들어 사면을 바라보십시오. 본문 4~7입니다.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그 때에 네가 보고 회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허다한 약대, 미디안과 애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팔레스틴 중앙 산맥 위에 있는 거룩한 산입니다. 해발 약 800미터가 되는 산지대의 성읍입니다. 그 성읍에서 동쪽으로부터 밀려오는 대상의 떼를 눈 아래 볼 수 있습니다. 각 나라로부터 무역과 문화교류를 위해 상인들이 몰려왔습니다.

서쪽에서는 지중해의 상선들이 돛을 펴고 돌아오는 것이 보입니다. 이 광범한 상업의 선로를 따라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자유를 얻어 고국으로 돌아옵니다.

예루살렘 성읍은 이제 모든 것의 구심점이 되어진 것입니다. 상업의 중심지요 문화교류의 샘터가 되었습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 문화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도 선지자의 말대로 눈을 들어 사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새 시대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세계만방을 포함시킵니다. 바로우리 나라가 세계만방을 위한 기독교 문화의 구심점이 되어야 하며 아름답고 복된 예수문화, 기독교문화의 센터가 되어야 합니다. 이 같은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눈을 들어 새로운 새 시대를 보아야합니다. 그렇다면 눈을 들어 새 시대를 보면서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빛을 발하라는 것입니다. 어둠의 세상, 죄악의 세상, 사탄의 세상, 타락의 세상을 밝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는 어둠의 도성과 같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과 같은 세상입니다.

사람들의 마음들이 완악해 졌습니다. 조금도 자신이 지는 쪽을 가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잘되는 것을 보기 싫어합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약해집니까? 그들의 마음과 정신이 공허하고 이기심과 욕심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12:2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 \"는 이

세상의 모습들을 따라가는 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빛으로 사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말 빛을 비추는 생활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합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신자들입니다. 우리가 빛으로 사는 생활을 실천하는 것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렇게 살면 안되지 저 사람들처럼 살아야지!\' 이런 충격과 고백이 나오도록 우리가 빛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빛으로 사는 생활이란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 마5:14~16

바로 착한 행실입니다. 새 시대를 바라본다는 것은 살만한 시대를 기대한다는 의미입니다. 그 살만한 시대나 세상이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자세가 선하고 올바른 빛을 비추는 곳입니다. 바로 이런 새 시대를 우리가 만듭시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빛 된 세상을 만드는 시작을 나로부터 실천하게 하소서.

2. 내가 있는 곳에서 예수를 드러나게 하소서.

제8일

 

“통일을 준비하는 민족”

 

성경: 역대상 11:15-19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새벽은 통일에 대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다루어 보고 싶습니다.

한반도가 불행하게 남북으로 분단 된지 어느덧 반세기를 넘기고 있으나 통일의 기미는 아득한 채 연일 신문지상에서 불안한 남북문제에 대한 보도를 거의 매일 접하고 보니 불안이 더욱 가중되어가고 있습니다.

북한이 핵폭탄의 개발을 서두르고 있을 분만 아니라 로동 1-2호 장거리 미사일을 생산하여 중동으로 수출까지 하고 있고, 발사를 하고 있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행히 북미 핵 협정에 의해서 잠시 마음은 놓이지만 여전히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금강산을 관광하고 경제 협력 단이 방북을 하고 친선 축구대회니 중국에서 이산가족 만남이니 하는 긍정적인 면들도 있기는 했지만 누구 하나 통일이 당장 아니 몇 년 안에 이루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소원은 통일이고 그 통일은 무력에 의한 것도 아닌 평화적 통일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2000년대는 누구나 전쟁이 없이 서로 같은 민족이며 같은 형제인 남과 북이 통일되는 것이 가장 큰 숙제이며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은 민족 분단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서로 죽이는 살인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서로의 비방과 모략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남한과 북한의 상황과 환경은 전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평화를 외치면서도 서로 전쟁을 대비하고 있으며 서로 사랑을 외치면서 살인을 자행하고 서로 용서를 외치면서 미움 속에 있습니다. 이제 통일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해야 될 일 이전에 교회가 할 일이며 신자들이 해야 될 사명적 일입니다. 왜냐하면 .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십시오.

사울 왕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등장을 합니다. 새롭게 왕이 된 그는 처리해야 될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긴급한 일은 사울 왕 시대 때 블레셋에게 빼앗긴 국토를 회복하여 조국을 통일시켜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통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 앞에서 행동했던 모습들이 소개되는데 그 내용을 추적하면서 우리의 통일과 더 나아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정신으로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한 예를 보겠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국토 회복을 위한 블레셋과의 전쟁이 치열하던 어느 닐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어 했습니다. 산악 지대에서 전투를 하다보면 갈증이 심했겠지만 하필이며 왜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요구했을까? 이 때 베들레헴은 블레셋 군대의 점령지역으로 경계가 삼엄하여 물을 길어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조국의 일부분인데 원수들에게 점령당하여 짓밟히고 있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심정에서 이렇게 요구한 것입니다. 다윗이 조국을 사랑하는 열정을 쉽게 읽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통일은 정신(mind)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나라 사랑과 통일에 대한 열망, 통일을 이루자는 기본적 의식에 의해 통일이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몇몇 사람이 의자에 앉아 통일합시다 라고 싸인을 한다고 통일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나 우리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지금보다 더 뜨겁고 열정적이라면 우리의 소원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되면 좋겠지 아니면 통일과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의식에서 기도를 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전혀 응답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성경의 기도 법칙에 의해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진정으로 조국의 통일을 소원하십니까?

북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먹지 못하고 문화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 도움을 줘야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 때문에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형제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며 형제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주님의 심장을 닮은 사람으로서 반드시 통일이 되어야 주의 뜻을 이룬다고 믿는 믿음 때문에 통일을 워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동정심과 세계적인 흐름에 어쩔 수 없는 수용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좀더 본문의 다윗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이 적 점령지 안에 있는 베들레헴 우물물을 그리워하는 것을 본 군사 세 사람이 물을 길어 오겠다고 자원하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그 일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지만 생명을 걸로 적진을 뚫고 들어가서 물을 길어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땅에 쏟아 버렸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는 그 물을 부하 군사의 피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물을 생명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시는 것은 부하의 피를 마시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마시지 않는 것이다. 조국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윗 같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그들의 희생과 수고를 인정하고 그들의 대가 지불을 나의 동질성으로 갖는 것이 통일 정신의 기초이며 지도자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헌신하지 않습니다. 함께 고통의 짐이나 희생을 치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서로 같은 마음을 품지 않는 서로의 마음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사람을 대하는 지극한 마음의 자세를 본 받아야 합니다.

또한 다윗이 물을 땅에 부은 것은 하나님께 바친 다는 고백입니다. 이 세상의 일에는 최선이 있고 차선이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은 최선에 속하는 일입니다. 다윗이 전선에서 갈증이 심하였으나 군사가 생명을 걸로 길어온 물을 자기가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먼저 부어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경외를 최우선으로 해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마 6:33) 이와 같이 다윗이 하나님 경외를 최우선으로 했기에 축복을 받아 조국도 통일시켰고 자신도 하나님이 세우신 영광을 누렸던 것입니다.

. 여기서 우리도 다윗의 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과 그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먼저 경외하며 섬기는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통일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우리의 책임이기 전에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우리는 통일에 대한 분명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경제적인 통일이나 사회적인 통일, 정치적 통일을 꿈꾸지 마십시오. 먼저 하나님을 앞세운 통일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통일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개 교회는 하나님께 더욱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고 나라의 위정자들은 물론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 통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밝히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2000년대의 통일을 위하여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이렇게 기도해보십시오.

1. 통일에 대한 거룩한 부담을 느끼게 하소서.

2.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통일을 이루소서.

3. 평화적인 통일로 참 자유를 알게 하소서.

제9일

 

“비젼을 추구하는 민족”

 

성경: 예례미야 33:1-3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구약 잠언 29:18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묵시란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계시 혹은 비전( vision )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비전이 없는 백성은 꿈과 미래가 없기 때문에 방자하게 행하고 결국 망하고 만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비전이다.

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그러나 비전이 있는 사람, 비전이 있는 민족, 비전이 있는 나라는 희망의 사람이며 꿈이 있는 민족이고 미래가 낙관적인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비전이란 무엇입니까?

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심정으로 내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다는 의미도 미래지향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단순히 현재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보고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선조 때 율곡 선생은 일본이 쳐들어 올 것을 대비해서 10만 군대를 창설하자고 주장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다가 일본에게 침략 당하는 비극을 초래했었습니다. 율곡 선생의 비전대로 준비를 했더라면 임진왜란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비전은 한계가 있으며 그 일을 이루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우선임이 여기서 증명이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은 빚을 보여 주시는 분이라고 소개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비전을 보고 말했던 사람들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마치 이사야가 다른 사람들은 다 안일함에 빠지고 사치와 방탕 할 때 적인 북방민족들이 강성해지고 있는데 우리가 근신하지 않으면 망할 것이라고 선지자들은 외칩니다. 나라가 망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피 흘려 죽고 구슬피 울며 이방 나라의 포로로 잡혀 갈 때 다른 사람들은 다 이제 끝장이요 소망이 없다 라고 생각할 때 선지자는 아닙니다. 우리는 돌아올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며 희망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선지자들의 의식은 다릅니다.

그들은 을 항상 본 사람들입니다.

본문에 소개된 예레미야를 보십시오. 지금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습니다. 시드가야왕은 회개치 않습니다. 백성들은 소망이 없다고 소리를 지릅니다. 만일 우리가 예레미야와 같은 환경과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한숨과 탄식으로 절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사람들이 포기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하겠지만 하나님이 포기하시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가 만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선포하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 ”v2라는 하나님에 대한 비전과 꿈을 보게됩니다.

  왜 기도하라고 말합니까?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보면 쉽게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비전입니다. 하나님은 일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 일들을 성취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적 아픔들을 보기 전에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이 계획하신 세계를 보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내일의 축복을 보아야 합니다.

당신은 얼마나 하나님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끈질긴 비전의식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십니까? 예를 들어 창조의 하나님에 대한 비전을 잠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 계획은 단 하루로 끝이 났습니까? 아니면 2일 3일 4일 계속 입니까? 언제까지 계속하십니까? 그분이 보시기에 좋을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계획하신 비전은 언제나 이루시며 결과를 확인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의 독생자 사건도 같은 원리입니다. 가장 오랫동안 예언되어 약속되었던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수천년을 지나면서도 잊지 않으시고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십시오.

사람들이 안 된다고 포기하라고 할 때, 우리 민족이 가능성이 없다고 절망하는 때, 도저히 이런 사람들과는 같이 살 수 없다고 느끼며 가슴앓이를 할 때 지도자를 보거나 지식인들의 부패와 반윤리적이며 비이성적인 일들을 보며 실망하는 그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의 보여주시는 그 비전을 향하여 기도하며 그 비전이 이 나라와 민족에게 성취되도록 눈물과 소원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 40일 구국기도회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아니 그 동안 얼마만큼 이 민족의 아픔을 위해 기도했으며 이 민족이 사는 길을 위해 하나님을 찾으셨습니까? 당신은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잘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불평만을 늘어 놓겠습니까 아니면 그 시간을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선지자들의 심정을 갖겠습니까?

우리는 새로운 새 시대를 보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이 땅에 세우고 우리의 자손들에게 살만한 세상과 하나님이 성취하신 복된 기름부음을 받은 나라와 민족으로 남겨주어야 합니다. 더 이상 불의와 정말,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의식만을 유산으로 남겨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2:17을 보십시오.

“ .”

우리 민족이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으로 젊은이든 나이가 많은 늙은 사람이든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언을 보고 미래에 대한 하나님이 만드시는 환상을 보고 꿈을 꾸는 사람들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조국에 비전을 갖고 계신 오늘도 일을 지으시며 그 일들을 성취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내일에 대한 꿈을 갖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1. 이 나라와 민족에게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소서.

2.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 땅과 환경을 보게 하소서.

제10일

 

“정의를 실현하는 민족”

 

성경:아보스5:21-27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호렙산 40일 새벽기도회의 첫 10일간을 축복의 민족을 위한 호렙산에 오르며 우리나라 이 민족이 새로운 새 시대인 21세기를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떤 목표로 나아가야 하는가. 라는 기독인의 자세로 근본적인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오늘은 새 시대의 축복된 민족이 되기 위한 마지막 시간으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의로운 세상 만들기를 위한 말씀으로 끝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3기관이 있습니다.[ ]입니다. 그러나 이 3기관은 서로 연결되고 함께 공존되는 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국가 따로 교회따로 가정을 분리하면 어느 기관이든 건강하지 못하며 불완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국가라는 큰 공동체는 교회라는 기관과 가정이라는 세포 공동체로 구성됩니다. 예를 들어 가정이 건강하지 못하면 교회나 국가는 병이 들게 되고 교회가 바르지 못하면 국가 또한 의롭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트라이앵글 기관 구조\'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의미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동안 가정이라든지 교회는 많은 성장과 혜택을 누리며 지내 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경제적이며 물량적인 그런 발전에 비해 우리의 국가 형성이나 제도, 사회적 기반은 마치 지구본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어있는 느낌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목표나 국가가 지향하는 목표 그리고 사회의 총체적인 흐름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바르게 사는 사회와 바른 것이 상식으로 통하는 의식이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설명을 하면 공의나 정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 시대에는 달라져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캠페인의 문제 이상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국민적 의무이며 우리에게 부여된 사명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아모스는 유다의 모자로 일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북 왕국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여로보암 2세의 치정 하에 있던 이스라엘은 정치, 경제적으로는 부요와 번영에 치닫고 있었으나 정신적 윤리적으로는 정의가 땅에 떨어졌던 시대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까지도 불의를 행했고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가중히 여기셨으며(21절) 그들의 불법 때문에 레위기에 제시하신 정규적 예배조차도 열납하지 아니하셨고(22절) 공의와 신실함이 없는 노래와 악기 소리를 물리치셨습니다.(23절)

질서가 없는 혼합주의 사상에 물들어 가나안의 우상을 숭배하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패망의 경고를 하셨습니다.(26절) 그리고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내용이 본문 24절입니다.

\" \'\"

여기서 우리는 사회적 정신의 기반이 어디로부터 흘러나오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국가의 불의나 불법이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방법이 잘 못된 것임을 먼저 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를 앞세우지 않는 제사를 드리는 모습은 곧 그 사람들의 잠재적인 의식을 말해주는 것이고 결국 내면속에 흐르는 의식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잠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방법에 무엇이 정의롭지 못한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가나안의 혼합종교에 물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택함 받은 선민의식과 그 특권만을 강조 할 뿐 그에 부합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형식적인 이방신을 섬기는 가나안 사람들의 의식을 그대로 따랐다는 것입니다. 바알을 섬기던 모습이나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에 차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섬기는 것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의 민족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시겠습니까?

정의롭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정의로운 제사란 종교적 형식의 예배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삶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의와 인자를 행하는 것입니다. 종교적 이고샤머니즘 적이고 관습적인 예배의 참여나 헌신과 경배를 자기위로의 수단으로 삼고 바친 재물의 양과 정성만을 강조하는 기복적 신앙이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평일 세상에서의 삶의 의식과 목적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를 하나님은 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나라가 의로운 사회를 만들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거나 미신을 섬기듯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의식을 버려야하고 교회가 바로 서고 1000만이나 되는 기독교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지배받고 다스림을 받는 의로운 삶을 살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문화적이고 생활의 기본적인 양식과 질을 높이고 교육의 정도를 발전시키고 환경의 조건들에 의해서 정의롭고 바른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과 부패를 몰아내고 타락과 부조리를 없는 사회 건설이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바르게 예수 믿고 바르게 세상에서 사는 모습을 보여 줄 때 믿지 않는 사람 들고 바르게 살아야 인간답게 사는 것이구나 하고 변화되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으로부터 낙도의 어린 생명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옳게 섬기는 일을 위해 남은 시대를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모스와 같은 세상의 나쁜 흐름과 하나님 앞에 잘못 나오는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시대적인 주의 종들과 그렇게 살려는 깨끗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아져야 미래는 희망이 있고 살만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1. 정의를 위하여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게 하소서.

2.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을 의롭게 하소서

3. 아모스와 같은 주의 종들을 주소서

   

   

제11일

 

“시간을 생각하는 민족”

 

성경: 마가복음16:15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인생의 자본 중에 가장 고귀한 것은 시간의 자본입니다. 시간이란 가치가 있기 때문에 시간은 황금이다 혹은 돈이라는 격언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시간의 신비입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성공 자와 실패자로 나눠집니다.어떤 일이든지 전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고 했습니다. 한번 가버린 시간은 다시 찾을 수 없고, 지나간 화살은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시간의 개념 중에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시간은 없기에 꼭해야할 일을 신중히 선택해서 가장 중요한 일만을 해야 합니다. 시간관리( Time management )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시간 사용에 신중해야 합니다. 무질서한 시간 사용은 하나님의 일을 그릇 칠 뿐만 아니라 세월을 낭비하며 하나님의 쓰임 받는 사람도 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까? 성경적 시간 사용에서 \'영혼구원 만큼 긴급한 시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부탁하신 마지막 선언도 영원 구원이었습니다.

로마서 13:11~12을 보십시오

\" \" 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깨어 있어 야 할 시간

입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시간은 정확하게 지나가고 있으며 역사의 커튼은 곧 내려질 것입니다. 어는 날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 \'이제는 마감 시간입니다\'라는 문이 닫혀지는 때가 옵니다.

요한복은 9:4에서 예수께서는 \"

\' 고 시간 제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 전체에 흐르는 시간의 긴박감과 재촉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영혼구령에 대한 미동적이고 소극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영혼에 대한 긴박감이 없는 교회는 잠자는 교회이며 죽은 교회입니다. 위기의식이 없는 교회나 교인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위하여 활동하지 않고 뛰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낼 수 없습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생명, 시간,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영혼구령에 전력을 다해야 합니다.

계 3:19~20에서 너는 열심을 내라고 했습니다. 적극적이고, 헌신적이며, 열렬하고, 정열적이며 뜨거운 자세로 전도하는 일에 오직 나의 삶을 던져야 합니다.

오늘도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 죄의 노예가 되어 세속으로 끌려가며 어둠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을 향해 긴박감을 갖고 열심을 다해 그들의 영혼을 살리기 위해 전도해야 합니다.

. 내일이나

다음주로 미루는 사이에 그들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로 죽음을 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서둘러야 합니다.

삶의 좌절에서 고통당하는 그들을 위해서 서둘러야 합니다. 부패되고 타락되어 죽음을 앞에 놓고 달려가는 그들에게 서둘러 전해야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나의 소중한 아들과 딸들이 그 길을 향하고 있습니다. 나의 친척, 친구, 이웃, 동료들이 그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있는데 웃고, 노래하며,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애타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추수할 곡식은 많은데 일군이 없습니다. 우리주위는 황금 어장인데 그물을 던질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릴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상기하십시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들을 대상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바울은 말하길 나는 헬라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식 있는 사람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 다 빚진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대상은 모든 사람입니다.

어떻게 전해야 합니까? 다니며 전합니다. 수고하며 전합니다. 희생 없이 아이를 출생할 수 없습니다. 산고의 고통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들을 향해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전해야 합니까? 복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예수가 없는 이들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포로 된 자들에게, 눈먼 자들에게, 방황하는 자들에게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교파를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교회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을 소개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뀌게 하시는 예수!

사망으로 달려가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는 예수! 좌절과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과 회복을 주시는 예수! 바로 그 예수를 전해야 합니다.

   

시간을 허비하거나 낭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에 왜 우리들을 보냈습니까? 왜 예수 믿게 하셨습니까? 우리에게 왜 사명을 주셨습니까? 서둘러서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왕국을 확장시키고 하나님의 집을 채우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나만 잘되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믿게 하셨고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전파를 위해서 내 자신을 던져야 합니다. 파우스트에서 괴테는 말하길 \'오늘 못하면 내일도 못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 열정을 가지고 나가 예수를 전합시다. 디티 나일즈 박사는 말하길 \'

\' 라고 했습니다. 축복 받는 교회는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축복 받은 교인은 전도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인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합시다. 예수를 전하고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명령하시는 말씀 앞에 순종을 합시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영혼 구령에 활용하게 하소서.

2. 나의 주위 사람들을 주님의 심정으로 보게 하소서.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제12일

 

“

한 영혼을 사랑하는 교회”

 

성경: 사도행전1:8

사람이 어떤 일에 성공을 하려면 적어도 3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하려는 일에 대한 충분한 기술의 습득이요, 둘째는 완벽한 장비의 확보요, 셋째는 피눈물 나는 노력입니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장비가 없으면 속수무책이며 장비가 아무리 완벽해도 기술이 없으면 그림의 떡입니다. 또한 기술과 장비가 완전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생산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비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해서 일마다 백발백중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일에 대한 의욕과 열정이 얼마나 불타고 있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좌우된다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의욕상실은 가장 큰 위험이며 불행입니다.

신앙생활도 동일한 이론이 성립됩니다.

전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 니다.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열정만큼 그를 구원시킬 수 있으며 주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도시를 구원시키기 위해서 애타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의인이 몇 명 있으면 심판을 거두시겠느냐고 하나님께 호소한 장면이 있습니다. 창세기 18:23~24을 보십시오.

\"

\"

이렇게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은 예수님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왔노라\"고 외치시면서 죄로부터 고통당하는 사

람들, 심한 상처로부터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 심지어는 자신을 못 박는 사람들에게까지 사랑의 연민으로 가득 채워진 주님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놓았습니다.\"

\"

( 행20:24)고 바울은 자신을 전도에 바쳤습니다.

한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을 보게 됩니다. 때문에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디를 가든지 그의 마음속에는 전도에 대한 정열이 타올랐고 침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바울은 고전 9:16에서 자신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위한 강력한 약속을 합니다.

\"

\"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났던 안드레는 형인 시몬의 영혼을 사랑하기에 예수님 앞으로 데려온 사건이 있습니다. 빌립은 에수님을 만난 후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찾아가 예수님을 소개하고 예수님 앞으로 끌고 왔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았던 위대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으로 전도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도에 짐을 늘 지고 산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동포들의 운명을 생각하면서 근심했고, 구원받지 못한 형제를 생각하면서 밤낮을 쉬지 않고 울었습니다.

위대한 선교사 헨리 마틴은 말하길 \' \' 라고 기도하며

구원의 열정을 표현했으며, 영국 복음화의 화신인 존 낙스는 기도하기를 \'주님 제게 스코틀랜드를 주옵소서. 아니 주시면 제가 죽겠나이다.\'라고 몸부림쳤습니다.

전도란 한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는 뜨거운 정열, 세상과 좌로부터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로 변화 시켜야 한다는 구원의 열정만이 전도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마음의 불이 꺼져 있고, 식어져 있다면 그는 전도할 수 없으며 전도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될 것은 그 뜨거움과 열정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로부터 오는 능력은 하나님이 친히 임재 하시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바로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과 뜨거움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인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날에 증인이 되기 위해선 성령의 능력이 있어야합니다. 아무리 내가 전도하겠다고 결심을 해도 성령의 역사를 힘입지 못하면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령의 충만함과 열정이 메말라 있는 상태에선 복음 전도는 실패합니다. 이 능력과 열정을 위해서 인내하며 기다릴 때 약속하신 대로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실 것이며 능력 있는 증인, 열정 있는 증인으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남녀노소 누구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과 믿음과 삶을 지배해서 능력 있는 전도인이 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능력있고 살아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으로부터 전도의 열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살아 움직이려면 성령의 능력으로 전도할 때만 가능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헬몬산에서 받은 물을 요단강으로 보내 줍니다. 받은 것을 주는 바다이기에 살아 있는 바다입니다. 하지만 사해바다는 요단강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을 받기만 합니다.

받기만 하고 주지 않자 바다는 죽어 버렸습니다. 우리 교회가 살아있고 내 믿음이 살아 있으려면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성령 받은 증거는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뜨거운 열정이 넘칩니다.

교회가 변한다는 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 한사람이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고 성령이 나를 지배하도록 하며, 예수님을 영접한 그 기쁨과 감격으로 헌신하기를 결심하고 지금도 어디에선가 기다리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정을 다해 전도할 때 기쁨을 거두고 믿음생활의 보람을 느끼며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1. 한 영혼을 사랑하는 주님의 마음을 주소서.

2. 이번 기회에 한 사람이라도 전도할 수 있게 하소서.

 

제13일

 

“구원을 선포하는 교회”

 

성경: 마가복음16:14-20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성서적 인간 종류는 두 종류입니다.

.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알곡입니까? 알곡이라 함은

사람입니다.

반대로 쭉정이는 누구입니까? 쭉정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고, 성령으로 말미암는 성화가 없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 속에는 불신자가 있고,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있고, 비웃기 좋아하는 바리새인이 있고, 자기중심주의와 세상 제일주의로 살아가며 주님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들의 말씀에 순종치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육적 그리스도인으로 십자가의 멍에를 지지 아니하며 불만과 불평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세상에는 귀족과 평민, 주인과 종, 부자와 빈자, 배우자와 못 배운 자의 계층으로 분류하지만 하나님의 알곡 쭉정이로 구분을 합니다.

이제 우리 개인에게 적용 시켜서 당신은 알곡에 속합니까? 쭉정이에 속합니까.? 어느 편입니까? 이 질문이 우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고통을 주는 물음이라고 해서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 충족된 답변이 없다면 우리는 쭉정이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거듭났는가? 새 피조물이 됐는가? 회개했는가? 죄와 싸우고 있는가? 세상으로부터 나왔는가? 거룩하게 살기를 애쓰고 있는가? 라는 질문만큼이나 중요한 질문이 바로 나는 알곡인가? 아니면 쭉정이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적어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은 선명하고 확고한 자신의 대답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에 어느 날 인가 그리스도께서 농부가 곡식을 키질하여 고르듯이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여 쭉정이를 고르시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사람을 나눈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아무리 통찰력이 뛰어난 목사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다 읽을 수 없습니다. 누가 등잔에 기름을 채워 놓은 자이고, 누가 은혜가 있는 자이고,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 인간의 눈으로는 판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결코 잘못 판단치 아니하시며, 지식이 완전한 분께서 정확하게 골라내시는 날이 임할 것입니다. 그 구분은 참으로 두려운 것입니다. 알곡은 알곡끼리 쭉정이는 쭉정이끼리 각 각 모아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자리에 두십니다. 그 날에 실로 의인들은 복될 것이며, 별처럼 빛날 것이며, 백합처럼 아름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자들과 그곳에 있지 못한 자들은 실로 비참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람만이 경험하는 천국, 알곡들만이 모여 있는 하늘나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구분하시는 대 분리입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살고 있습니까? 신앙을 외투처럼 걸치고만 사는 사람들이 정체가 폭로되는 그날, 타작마당에서 나의 색깔이 비춰지는 그날, 우리들의 비밀과 모순과 타락과 행위가 그대로 선포되는 그날을 아십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믿음생활을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본문에 나타난 알곡이 받을 몫과 쭉정이가 받을 몫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알곡은 안전한 장소로 모아들이십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단 한사람도 그 무리 중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의인들을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시149:4, 벧전5:7)

그러나 쭉정이는 모아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 믿지 아니하는 자, 진리를 그릇되게 사용하며 세상에 집착함 땅에 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가공할 만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들의 형벌은 대단히 혹심할 것입니다. 불에 타는 고통만큼 심한 고통은 없습니다. 이 말이 의심스럽다면 손가락을 잠시만 촛불에 대어 보십시오. 커다랗게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용광로를 들여다보십시오. 불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모시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이 받을 몫은 바로 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쭉정이들을 불에 태우신다고 선언 하셧습니다. 그 불은 결코 다함이 없고 줄어듦이 없는 꺼지지 않는 불입니다. 이곳은 지옥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이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에 대해 말하는 것까지도 싫어합니다. 이것은 모두 사탄이 좋아하는 말입니다. 사탄은 말합니다. 염려마! 지옥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괜찮아! 당신과는 상관없어! 쉬! 지옥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마 라고 유혹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성경을 믿는다면 [ ]도 믿으십시오. 만일 지옥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말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성경은 지옥에 대해서 고통의 장소라고 말합니다. 영원히 죽지 않고 의식이 있는 상태로 당해야 하는 고통의 장소입니다. 어느 날 존 뉴톤은 죤 라일목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왜 저에게 지옥의 모습과 고통을 좀더 자주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냐’고 탄원을 했습니다.

지급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이 타는 곳으로 향해서 열심히 뛰어가고 있습니다. 만일에 영혼의 파수꾼이라는 목사가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이웃집이 불에 타 들어가고 있는데 그것을 보고 불이야! 불이야! 라고 소리치지 않는다면 목사입니까? 매사를 기분 좋게 처리하고 듣기 좋게 말하며 평화로운 자장가만 계속 불러주는 것이 사랑일 수 있습니까? 저는 그러게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합니다.

만일 제가 지옥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면 제 자신도 마귀의 공범자일 뿐입니다. 지옥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쭉정이를 태우는 불은 분명히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이 진리를 깨달으십시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 진리를 붙잡으십시오. 그러므로 교회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소식을 선포할 때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이렇게 기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1.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세우소서.

2. 나도 알곡된 신자로 주님 앞에 서게 하소서.

 제14일

 

“표적을 보여주는 교회”

 

성경: 마가복음 16:14-20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본문 속에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열정이 있습니다. 그 열정은 믿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소원하시고 얻고 싶었던 반응은 오직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금식이라든가, 선행, 구제, 봉사 등에 대한 도덕적인 의무나 종교적인 경건과 윤리적인 생활보다는 오히려 믿음에 큰 비중을 두시고 교훈을 하셨습니다.

주님은

을 불 신앙 즉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모든 문제는 믿음에 의해서 판가름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믿음이 성숙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그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고 그들 곁에 계심을 보면서도 제자들은 불신앙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무리 믿으라고 소리쳐도 마음 문을 닫고 믿으려하지 않는 제자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당신의 못 자국난 손을 내밀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믿음에 대해 강력한 요청을 하십니다. 그래도 믿지 않는 제자들을 꾸짖기도 하시면서 괴로운 심정으로 말씀하십니다. 왜 믿지 않느냐! 왜 의심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의심하기로 들면 끝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죽은자를 살리시고, 병자를 고치시고, 5천명을 먹이신 것은 믿음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믿음 한 가지 때문에 온갖 방법을 동원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거침없이 믿어지십니까?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십니까? 교회에서 누가 축복된 사람이냐 하면 입니다.

믿어야 하나님의 능력이 무한함을 알 수 있으며 부활의 능력을 믿어야 헛소리 못하는 것입니다

[ ]뿌리 깊은 죄입니다. 에덴동산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역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말씀을 믿었다면 어찌 감히 따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부부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마음대로 죽을까 하노라고 의심하면서 설마 따먹으면 어떻겠느냐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창3장)

인생은 일방통행입니다.(No retum one way street.)한 번 살면 그만입니다. 되돌아오지 못합니다. 한번가면 끝입니다. 언제까지 믿지 못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까? 모든 것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부족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때 도망을 간 제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렇게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 믿음이 없는 행동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어떤 것도 믿어집니다. 의심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입니다. 사랑하면 못 믿을 사람까지도 믿어집니다. 그러므로 내게 의심이 있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것은 전적인 수락입니다.

또한 행동적인 믿음입니다. 주님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이 요구하십니다. 먼저 의탁하라! 먼저 따르라! 먼저 순종하라! 이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간혹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차 어떤 일이 생길 것인가? 내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은 운명을 맡기라, 따르라, 믿으라 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꾸짖으신 다음 최초의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믿음 없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전도할 수 있습니까? 무엇인가 믿음도 충만하고 능력도 있고, 기적도 행할 때 전도 해야지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도마처럼 확인하고 표적을 먼저 보고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가라, 먼저 행하라 먼저 전하라, 그리하면 표적이 따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믿고 전하고, 믿고 행하면 거기에 기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준비를 하고 훈련을 충실히 받았다 할지라도 믿음이 전재되지 않는 것이라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대해선 좀 부족하고,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주께는 열정이 가득하다면 그 곳에 능력이 나타나고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힘쓰고 있습니까? 우리의 남은 시간을 신중히 사용히야 후회가 없습니다. 헛된 일에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내 생애의 전체 목적은 주님께 대한 신뢰의 믿음과 순종의 자세로 주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전도하기 위함이요, 직장생활 하는 것도 전도하기 위함이요, 교회생활 하는 것도 전도하기 위함이요, 기도하는 것도 전도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 일을 행할 때에만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 잘 믿는 다는 것은 목사처럼 신학교를 나오고 예수님처럼 40일 금식기도 한 후 주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은 늘 하나님의 표적들이 나타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표적은 먼저 행하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 있거나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을 통해서는 어떤 표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일 안일하게 그대로 앉아서 교회 의자나 따뜻하게 하다가 돌아가는 신자나 주의 살아계심을 보면서도 의심이나 하고, 비웃기나 하며 교회의 자리만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망치는 사람이며 불 신앙적인 사람 일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먼저 믿으라, 먼저 전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표적이 거기에 나타나리라. 우리 교회를 표적있는 교회로 만드는 일은 내가 적극적으로 활동함에 있음을 놓치지 마십시오. 먼저 실천해 보십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1. 믿음으로 먼저 행동으로 옮기는 삶을 살게 하소서.

2. 어느 때에라도 내가 만난 주님을 전하게 하소서.

 

제15일

 

“변화를 추구하는 교회”

 

성경: 이사야5:1-7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직업에 대해서 한 번 선택한 직업에 대해 과거든 현재든 실망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결혼도 그렇습니다. 부부관계에서 예나 지금이나 이 사람과 결혼하기를 정말 잘했다. 나에게는 오직 ?사람 밖에 없다고 사랑을 고백하고 후회 없는 사랑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불행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실망만 주는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실망을 시킵니다. 절망하게 만듭니다. 허무에 빠지게 만듭니다. 실의에 빠뜨립니다.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의 힘을 빼앗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유감스럽게도 실망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절에 보면

\"

\" 라고

아름다운 포도원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기름진 산에 땅을 파서 돌을 골라내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울타리를 만들고 망대도 세웠습니다. 포도주를 만들기 위하여 술틀까지 파고 질 좋은 포도가 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잎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막상 거둘 때가 되어 포도가 익은 것을 보니 아무 것에도 쓸모없는 들 포도가 열렸습니다. 농부는 크게 실망을 합니다. 기다림의 꿈이 깨어집니다. 그 동안 수고와 정성과 사랑의 헛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이 실망으로 끝이 난 것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농부이며, 포도나무와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상징적인 포도원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것과 기다리시는 바가 있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좀 더 나아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고 택함 받은 사람들은 포도원이며 하나님은 그 포도원에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마치 우리의 교회를 여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

그 하나님의 기대와 기다림을 본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절에 바랐더니....4절에 기다렸거늘.....7절에 바라셨더니.....하면서 하나님의 애절한 마음을 보게 합니다. 이렇게 농부는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가 열리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부르시고 역사를 운행하시면서 목적을 갖고 기다리심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땀을 흘렸으니 추수의 영광을 바라는 것처럼 정성을 드렸으니 기쁨을 거두고자 하는 마음처럼 수고에 합당한 열매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입니다. 당신의 기대에 꼭 맞는 포도를 따 내시길 원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랐습니다. 4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

하나님은 사랑을 주셨습니다. 은혜도 주셨습니다. 필요한 것을 다 주셨습니다. 잘못된 길로 갈때는 길을 막아 주셨습니다.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적극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하셨습니다. 그러나 심고 가꾸어 거두게 ?포도는 극상품의 참포도가 아니라 들 포도 였습니다. 알이 굵고 과즙이 달고 많으며 보기에도 좋은 참 포도를 기대하는데 작고 딱딱하며 시어서 먹을 ?없는 저질 들 포도 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양적인 부족함에서 오는 실망이 아니고 에서 오는 실망입니다. 많이 거두지 못했다는 실망이 아니고 지금 거두고 있는 것이 쓸모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주인이 심은 것은 좋은 종자였는데, 거두게 된 것은 상품이 아니라 하품이라는 실망입니다. 이것은 물량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문제 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들 포도가 열렸다는 것은 종자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밭이 좋고 나쁘고, 비가 오고 안 오고, 거름이 좋고 나쁘다는 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환경을 탓합니다. 가난하기 때문이다. 병들었기 때문이다. 억울하기 때문이다. 시간 때문이다. 누구 때문이다라고 변명을 합니다만 사실은 환경 탓이 아니라 종자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부부싸움을 하면서 난 본래 착한 사람인데 당신하고 결혼한 다음부터 나빠졌다 하며 대들고 합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틀린 말입니다. 좋은 좋습니다.

그러나 못된 사람은 어디서나 못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종자의 문제, 바탕의 문제, 뿌리의 문제, 마음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

스데반을 보십시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는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더 좋은 여건이 필요합니까? 시간이 더 필요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열매는 들 포도 입니까? 문제는 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

19 절, 24절 잊지 마십시오. 들 포도는 시간이 지나도 좋은 포도가 되지 않습니다. 환경이 좋아지면 변하겠지 나이가 들면 나아질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뿌리 즉 종자가 잘못되었는데 환경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이제 원점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영적 대 개혁과 대 혁신이 있어야 합니다. 더러운 나 자신을 십자가 밑에 완전히 묻어 버리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요한복음 15:2에 \"

\" 고 했습니다.

비록 한 송이라도 좋으니 제대로 된 열매를 맺으면 그 다음은 계속 맺는다는 원리입니다. 한 송이 최상품의 포도가 열리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하여 더 큰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들 포도가 열렸다고 낙심하지도 마십시오. 우리의 교회는 완전한 교회도 아닙니다. 이 땅에 완전한 참포도 그것도 극상품 포도 열매를 맺는 교회는 없습니다. 모든 교회가 이런 하나님의 기대를 향하여 서로자기를 버리며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할 뿐입니다. 이제라도 시작합시다. 교회다운 교회의 열매를 맺는 신자가 되도록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나 자신부터 하나님의 기대에 맞는 열매가 되게 하소서.

2. 우리 교회는 참포도 열매를 맺도록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소서.

 

제16일

 

“영적인 전투하는 교회”

 

성경: 에베소서 6:10-20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믿음생활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고자 합니다. 흔히 예수를 믿게 되면 불행 끝 행복 시작처럼 믿고 있습니다. 이제는 축복뿐이고, 아무 문제도 없는 유토피아만 있을 것으로 기대를 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고민에 빠진다든지 고난이 생기게 되면 좌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어도 별 볼일 없어\' 하고는 후회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첫날부터 성경은 무엇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파티를 열어라, 축제를 벌려라, 복을 줄 테니 창고 문을 열어라 입니까? 아니면 싸움을 해라, 영적인 전투를 해라입니까? 성경은 모두 영적 전투 쪽으로 신자를 몰고 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으로부터 탈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을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어떤 세계가 펼쳐졌습니까? 환영축제 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애굽사람들보다 더 힘이 센 아멜렉 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메마른 광야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멜렉과 싸우고, 메마른 사막과 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생존 경쟁을 위해 싸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히려 광야 생활하는 동안 메추라기와 만나, 구름기둥과 불기둥, 반석에서 나오는 생수로 먹고사는 문제는 하나님이 책임을 지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영적 싸움에서 실패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너무 고생이 되어 더 이상 하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고 난 후 우리들에게 찾아오는 것은 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싸움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나면 예수를 믿기 전보다 가정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예수 믿고 나면 안 믿는 가족들이 너 하나 때문에 우리 집에 분란이 생겼다고 합니다. 영적인 싸움이 믿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영적 전투입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 믿고 난 후에 우리의 싸움은 재산이라든지, 자식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명예라든지, 권력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영적인 전투입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

\' 고 했습니다.

낮아지는 싸움, 사랑하는 싸움, 빛으로 사는 싸움, 한길을 가는 싸움, 이 전투는 믿는 순간부터 계속 됩니다.

인간의 본성은 언제나 교만해지게 되어 있고, 미워하게 되어 있고, 분열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은 하면 할수록 어렵습니다. 한 단계를 거치면 새로운 싸움이 계속됩니다. 이렇게 믿음생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영적 싸움은 더 힘들어 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두 가지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는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성령의 검을 갖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믿음의 방패로 완전 무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영적 싸움에서 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13절에\"

\"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싸우는 종교이며 전투의 종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원수의 힘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주안에서 그 힘으로 장되지 않으면 마귀는 밀 까부르듯 얼마든지 교회를 흔들고 신자들을 넘어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편 46:1~3 \"

\" 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앙의 최고 수중을 말하는 겸손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겸손해지는 것 자체도 주를 의지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붙잡혀야 그렇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 후서 1장에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이사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고 환난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환난을 당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게 겸손하고 순종하는 바울에게 계속 하나님이 훈련하신 것은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붙잡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영적 위치를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20절에 \'

\"

[ ]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영광된 이름입니까?

또한 사단의 가시가 떠나게 하기 위하여 3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을 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

\"( 고후12:9).

주께서는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기 전에 먼저 주를 붙잡게 하십니다. 이것이 큰 은혜요, 큰 축복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메를 대시고 우리가 할 수 없는 문제를 주십니까? 주를 붙잡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성령의 검, 의의 흉배, 진리의 허리띠, 구원의 투구, 믿음의 방패를 통해 주를 붙잡게 하시고 세상과 나와의 싸움을 승리케 하십니다. 때문에 편안할 때 주를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안 때립니다. 공부하는 자식을 때리는 부모를 보셨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지 못합니다. 주를 붙잡는 것이 필요한 것이지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원리가 있어야 빌립보서 4:13말씀이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

\"

무엇이 선행되어야할 신아입니까? 영적인 전투를 위하여 하나님께 붙잡히는 신앙입니다. 지금 교회들이 허약한 이유는 하나님께 붙잡혀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당신께 붙잡힌 자에게 나타나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며 어떤 세상의 세력과 유혹으로부터 이기는 교회로 세워갑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하나님의 능력보다 하나님께 붙잡힌 교회가 되게 하소서.

2.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인 교역자와 직분 자들이 하나님께 붙잡히게 하소서.

제17일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

 

성경: 이사야6:1-8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40년부터 700년까지 40년간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는 유대 역사상 가장 어려운 때였습니다. 나라는 남북으로 나뉘고 외세의 강한 침략을 당하게 됩니다. 결국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치먀을 받아 앗수르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방나라의 지배하에 있게 되니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이방신을 섬기게 되었고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사야의 조국인 남왕국 유다는 끊임없이 애굽 바벨론의 침략으로 이제 거의 멸망직전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 나라는 말할 수 없이 부패했고 특히 당시 왕이었던 웃시야는 교만하여 악을 저지릅니다.

역대하 26:16~18

웃시야 왕은 나라가 강성하고 형통해지니까 교만을 부립니다. 반드시 아론의 자손들인 제사장이 제사를 집행하게 되었는데 그것까지 빼앗아 자신이 분향을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웃시야 왕을 그대로 두지 않고 징계를 내려 문둥병을 걸리게 하고 결국 죽습니다.

더구나 웃시야 왕은 이사야의 사촌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정치적인 배경은 끊어지고 왕실의 보호를 받던 권력벨트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본문 1절에 보면 웃시야 왕이 죽던 때에 허무감과 실패를 느끼며 이사야는 조용히 성전을 찾습니다. 여기서 꼭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혹 괴롭고 고통스러운 때가 있습니까? 조용히

문제가 있습니까?

신자들에게

나타나는 위기는 하나님을 찾게 하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웃시야 왕이 죽은 후 성전을 찾아 왔던 이사야 선지자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절을 다시 보십시오.

\" \"

특이한 일은 하나님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이 살아 있을 때 성전에 수없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런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성전에 드나들 때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안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성전을 행하는 마음은 다릅니다. 국가적인 위기, 개인적인 위기, 절망과 고뇌에서 성전을 향했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다는 목마름이 이사야의 영혼을 탄식케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놓치지 마십시오. 교회에 와서 은혜가 없다느니 응답이 없다느니 감격이 없다느니 하며 교회를 핑계대서 넘어지지 마십시오. 예배에서 목사의 설교가 형편없어서 그렇고, 교회 분위기가 맞지 않아서 재미 못 본다는 식으로 둘러대지 마십시오. 문제는 역시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목말라 하는가? 얼마나 간절하게 찾는가? 얼마나 소원을 갖고 있는가? 이것이 없다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건강한 예배의 제1법칙은

것입니다.

이제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보였다는 것은 심령의 눈이 떠졌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을 보십시오. 요한계시록에 가장 많이 쓰여진 단어가 무엇입니까? 요한계시록의 가장 핵심적인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 ]입니다.

1:2, 4:1, 5:1, 6:1, 7:1, 8:2, 9:1... 예수께서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후 제자 요한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왔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후 전도자로 예루살렘 거리를 다니며 죽도록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결국 잡혀 밧모섬에 가게 됩니다. 거기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신령함의 극치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최고의 믿음인 언제나 엎드리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그 동아 이사야에게 늘 보였던 것은 40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던 웃시야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되니까 하나님이 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보입니다. 이것을 제 2의 부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요, 훈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깊은 영적 교통을 통한 체험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예배의 생명입니다.

예배는 [ ]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은혜를 체험하고 고백을 체험하게 합니다. 그

리고 그 체험은 예배자에게 변화를 줍니다. 눈을 열게 합니다. 잘못을 보게 합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가 살아있으면 성도들은 예배 때마다 변합니다. 달라져서 나옵니다. 이사야를 보십시오.

\"

\"

하나님의 거울 앞에 서면 자신의 얼굴에 묻은 더러운 것이 발견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보았을 때 자신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너무나 더럽고 비참한 망할 자식임이 드러났습니다. 그것 뿐입니까? 그 동안 입술이 부정하게 살아왔음을 깨닫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선지자인데 권력에 어두워 왕실과 유착하며 살아왔던 지난 날! 왕이 교만하고 부패할 때 죽음을 각오하고라도 정신 차리라고 아니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소리치지 못했던 부정한 입! 외로움을 선포하지 못했던 입술, 옳은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던 입이 추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보니 얼마나 지난날의 모습이 형편없는 존재인가를 발견하고 이사야는 깊은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배의 역사가 이런 변화와 회개를 갖게하고 자신의 부족과 잘못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무너뜨린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스랍들을 보내어 제단의 숯불로 입술을 지집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향하여 묻습니다.

\"

\"(8) 부패된 백성들을 향하여 이방신을 섬기며 만신창이 가 된 완악한 자들을 향하여 누가 가겠는가를 묻습니다. 드디어 이사야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 \"(8)

어느 날 성 다미얀이 문둥병자들이 살고 있는 모로카이 섬을 지날 때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불쌍한 자들을 위해 가라고 했을 때 그는 순종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 참으로 위대한 고백입니다. 예배는 이렇게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게 하소서.

2. 우리교회의 예배를 사랑하게 하소서

 

 

제18일

 

“부흥을 일으키는 교회”

 

성경: 사도행전11:19-21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새벽에는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부흥에 대한 꿈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는 부흥을 목표로 합니다.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과 교회가 생명력이 있다는 것은 영적인 부흥은 물론이며 교회가 성장하는 부흥의 불이 붙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기도회 기간에 잃은 영혼을 찾는 Double I, II, III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부흥의 열망과 하나님의 명령에 실천하여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자는 목표입니다. 아직도 이 일에 참여하지 못했거나 전도에 대한 실천을 못하신 분은 오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심으로 임해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부흥이라는 단어를 해석하는 원어를 보면 이렇습니다. 부흥을 히브리어로 카야흐(Kayah)라는[ ]는 의미입니다. 만일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다면 호흡 곤란 상태의 사람에게 산소호흡을 통하여 숨을 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호흡곤란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영적 산소호흡을 시켜서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부흥입니다. 사단과 마귀의 역사로 말미암아 영적 호흡을 하지 못합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게 되어 영적 호흡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호흡 곤란 자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 숨이 통해지게 하고 다시 기도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 ] [ ]는 의미입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사르밧

과부의 유일한 힘이었던 독자가 죽었습니다. 3년 6개월 동안 선지자 엘리야를 모시고 잘 대접 했는데도 그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실망함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내가 주의 종을 잘 받들어 섬기는데, 아들이 죽다니\'하는 원망과 불평을 들은 엘리야가 달려 와서 그 죽은 시체를 부둥켜안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죽은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날 영적으로 죽어있는 심령들을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다시 살게 해주는 것과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주는 것이 부흥입니다.

에스겔서 37장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골짜기로 내려가 보았더니 뼈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마른 뼈들이 심히 많았습니다. 그 뼈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그러자 뼈들이 연결이 되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였습니다. 그러나 생기가 없었으므로 생기야 이 사망을 당한 사람에게 들어가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생기가 그 심령 속에 들어가 죽어있던 시체 다시 살아나 큰 부대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오늘 이 새벽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의 심령이 살아나고 깨어 일어나고 고침받고 열심을 품게 되어 살아있는 영혼들로 가득 채우는 교회가 되면 부흥을 일으키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단어는 [ ][ ][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생茨?강이 소개되는데 그 양쪽 언덕에 생명나무들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수로 인하여 그 나무들이 살고 또 생명수가 흐르는 곳에 고기들이 살아나고 생명수가 흘러 들어가는 곳에 바닷물이 소생함을 입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생수를 공급함을 받을 때에 모든 영혼이 살아나게 되고 생기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를 보십시오. 첫 교회라고 불리 우는 예루살렘 교회는 바로 부흥의 불을 부어 타오르는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그런 부흥의 역사가 일어 날 수 있었습니까?

본문 20절과 21절을 보십시오.

\"

\"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함께 하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안디옥 교회를 가득 메운 부흥을 일으킨 것입니다. 부흥의 원동력은 예수입니다. 예수가 들어가는 곳에는 부흥을 일으킵니다. 사람을 살립니다.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만을 전파했습니다. 그것이 부흥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흥이란

우리도 같은 방법을 사용해야 부흥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의 일터에서 당신이 만 나는 사람에게 예수를 전해 보십시오. 예수를 전할 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비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예수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영혼을 구원시키고 영혼을 흔들며 거듭나게 하고 예수 앞으로 나오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고 고백하였습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를 전하는데 아직도 확신이 없습니까? 가장 쉬운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이렇게 하십시오. \'예수 앞에 나와 봐라\'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만나보라‘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와서 예수 은혜를 받아 보라고 전하십시오.\'이것도 효과적인 전도 방법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수가성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 본 다음에 변화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고 변화 받게 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전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 고 했습니다. 이렇게 전도하면 복음의 원동력이 되어서 교회 가 부흥이 되는 것입니다. 21절을 다시 보십시오.

\"

\' 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전도를 하면서 내가 전도하면 열매 가 맺어질까? 하는 염려를 갖는 경우가 있어 전도에 부담을 느끼고 부들부들 떱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용기를 가지십시오. 당신이 전도하는 그 시간 주님의 손이 여러분을 붙들어 주시고 여러분이 전하는 전도의 말씀을 듣고 상대편이 감동을 받아서 주 앞에 나오도록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요, 열매 맺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내 영혼과 믿음에 부흥의 불을 붙여주소서.

2. 우리 교회를 부흥의 불길로 타오르게 하소서.

제19일

“

세상에 빛을 주는 교회”

 

성경: 베드로전서 2:4-10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교회는 교회로서 주님의 목표가 있습니다. 교회에 대해 신약에는 교회가 여러 모양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지가 많은 포도나무 혹은 양들을 거느린 목자 또는 왕이 다스리는 거룩한 도성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교회가 머릿돌을 가진 선전 곧 영적인 집으로 묘사되어 있는 가장 완벽한 교회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교회론적 접근이 필요한데 본문에서 베드로가 말하고 있는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의 그 성전이 아닙니다. 그는 오늘날도 지어지고 있는 영적인 집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교회\'라고 할 때 눈에 보이는 건물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란 .

그렇다면 교회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4절에서 예수님은 [ 산돌 ]Living stone이라고 불렀습니다. \'돌\'은 메시야를 가리키는 명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둘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돌은 [ ]을 대변합니다. 따라서 메시야를 돌에다 견주어 말할 때에는 하나님의 확고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돌은 평범한 바위나 어떤 돌이 아니라 \'산 돌\'이라는 것이 다릅니다. 돌이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이 이사야 28:16을 보십시오 \"

\"

바로 그 돌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온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다시 본문 2:6을 보십시오.

\"

\"

시온은 교회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짓기 위해 예수님을 머릿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에 의해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6절은 예수님이 머릿돌 또는 기초라고 말합니다. 건물을 지으려면 제일 먼저 기초가 중요합니다. 어느 곳에 세웠는가에 따라서 건물의 견고성과 영구성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건물이라도 기초가 부실한 모래 위에 라면 그 건물은 모래성과 같습니다. 바로 교회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머릿돌이란 건물 전체의 각도를 잡아주는 기준입니다. 만일 머릿돌의 위치가 비뚤어지거나 잘못되면 건물은 전체가 지탱할 수 없는 불안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리를 하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이며 기준이며 머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교회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압니다. 그것은 교회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는 사람들이 있는 교회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왜 베드로는 이 말을 해야할까? 분명히 인생의 황혼기에 수많은 경험과 교회를 세우고 갖가지 경험들을 다한 주의 종이며 고난의 종이라고 불리우는 베드로 그가 마치 유서처럼 말하는 교회에 대해 이렇게 강한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것은 오늘 한국교회가 깊이 새겨야될 말씀입니다.

교회는 주인입니다. 예수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또한 예수보다 높아지려는 사람이 있어도 그곳은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예수의 운동, 예수의 생명, 예수의 주권에 대한 내용이 없어 세상적인 것들이나 어떤 인간중심의 모임이 되거나 핵심 지도자들인 몇몇 사람들이 자기과시나 자기교만의 드러내는 곳이라면 그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분명히 교회란 산 돌이신 예수가 살아서 활동하고 예수가 충만한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이며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대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자랑스런 교회이며 능력 있고 살아 있는 교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교회의 구성원들은 산 돌 같이 되고 싶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살아오셨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을 받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는 절대 하나님에게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우리교회는 어떤 교회의 모습입니까?

베드로는 이 말의 뜻을 벌써부터 알고 있으며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이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8을 보십시오.

\"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놓치지 마십시오. 이 말씀에서 섬뜩한 부분은 마지막의 \'음부의 권세\'라는 용어입니다. 어느 교회는 음부의 권세들의 놀이터가 되는 교회가 있고 어느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발도 붙일 수 없는 권세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무엇으로 평가를 받습니까? 산돌과 죽은 돌입니다. 예수가 살아 있는 교회는 산 돌 교회이며 예수가 죽고 사람이 활동하며 중심이 되는 교회는 죽은 돌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9절과 10절을 명심하고 그대로 교회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 즉 성도란 모두가 택함 받은 백성의 위치와 거룩한 제사장의 모습을 보여야하고 그 교회는 거룩한 나라로 이 세상에 빚으로 산돌로 소개되어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빛이 되고 등대가 되자고 외치는 것 이전에 아름다운 선전을 할 수 있는 교회 안의 사람들이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예수처럼 행동하고 거룩하게 생활하는 삶을 몸소 보이는 것이 진정한 빛을 주는 교회로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8절 말씀처럼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지 않기 위해 부단한 희생과 회개, 개혁과 변화를 끝없이 실천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우리 교회는 산 돌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권을 행사하게 하소서.

2. 교회 구성원인 나의 모습이 거룩한 변화를 갖게 하소서.

제20일

 

“목표가 새로워진 교회”

 

성경: 마태복음28:19-20

오늘 새벽도 하나님께서 새로운 축복으로 기도에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10번에 걸쳐 새 시대의 진정한 축복된 교회는 어떠한 교회인가에 대해서 공부했고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21세기에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에 대하여 목표가 분명하고 새로워진 교회를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시대가 달라지면서 교회가 교회로서의 바른 역할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3가지에 충실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교회로서 영적으로 살아 있어야 날마다 새로워지는 신자들의 문제들과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적은 교회이든 큰 교회이든 계속적인 영적인 성장과 질적인 성장 그리고 양적인 성장을 위해서 예측 사역과 전문 사역을 시도해야 합니다. 셋째는 를 만들어야 합니다. 앞으로 새로운 시대는 건강한 교회를 목표로 해야 합니다. 일시적인 프로그램이나 편법과 불합리한 방법으로 사역하는 교회는 점점 신뢰를 받지 못하고 쇠퇴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교회를 만드는 원리를 우리는 주님의 최후 명령에서 찾을 수 있고 이런 교회가 되어야 2000년대에도 활발하게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을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에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런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우리의 교회 생활과 교회 안에 허락된 모든 것들을 누리는데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와 여러 분은 바른 교회, 바른 신자가 되기 위해서 공동 노력을 해야할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셔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다가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

\" 는 최후의 지상명령인 이 말씀을 선교의 대 헌장이라고도 말합니다.

신학자 에밀 브르너는 \'불이 불음으로써 불이 있는 것과 같이 교회는 선교에 의하여 존재한다\'고 말함으로 교회의 존재 이유가 곧 [ ]에 있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선교는 교회의 절대적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교회의 한 부분 사역이 아니라 교회전체의 핵심입니다. 교회는 선교의 역할을 감당할 때 참다운 교회가 되며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선교는 왜 중요합니까?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가든지(Go) 아니면 보내든지(Send)입니다. 당신이 선교사로 세계의 열방을 향하여 직접 나가든지 아니면 선교하도록 보내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말한다면 그 첫째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면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선교는

입니다.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열정은 너무 강렬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한 분이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사 인류의 죄를 대신 지워서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도 멸망 받기를 원치 아니하시며 한 영혼이 돌아오기를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 같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 사역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 일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어떤 운동보다도 선교운동은 가장 힘있고 감동적인 사역입니다. 또한 선교는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본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

\"( 고전 9:16)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하는 일은 주의 종들로서 당연한 의무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정규 훈련을 받은 해외선교 지망생이나 선교사에게만 부여된 사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어느 곳을 가든지 복음을 전해야 될 책임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교회라는 이름을 헬라 원어로 [ ]라 하는데 에크는 \'나왔다\'는 뜻이고, 크레시아는 \'부름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곧[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나온 무리를 가리켜 교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교회로 부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극적인 면으로 푼다면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교제하고 구제하고 사회 참여하고 교육하는 것도 있겠지만 궁극적인 목적인 부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목적을 부여받은 자로 이미 세워진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함께 동역하기로 약속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미 세상으로부터 선택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분 한 사람 한 사람은 너무 소중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 사명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교를 실천하는 보다 적극적인 목표는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오늘의 교회는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합니다. 선교에 대한 일반적인 의식은 선교하면 꼭 해외 선교만을 고집하고 해외도 아프리카나 동구권 아니면 중국, 미전도 종족인 중앙아시아를 생각합니다. 주님의 선교지역은 해외만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곳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나의 일터가 선교지이며 나의 가정이 선교본부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복음의 은혜와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선교전략 지역입니다. 그리고 학원선교, 기관선교, 교도소 선교, 방송선교, 직장선교 등 예수의 복음이 필요한 곳은 우리의 선교 예상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는 희생과 눈물로 이루어지는 열매라고 최초의 선교사 리빙스턴은 말했습니다.

. 이제 우리는 선교의 당위성을 선언하신 말씀을 보면서 교회의 궁긍적 목적이 선교임을 잊지 않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로마서 10:13~18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1. 우리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실천하게 하소서.

2. 내가 선교사로 가든지 아니면 선교를 후원하든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