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정미 레포트

2009-2010학년도/ 유나이트신학대학 / 학번 0911 / 성명: 이정미

 

 

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는 영적 자유의 “마그나 카르타” 종교개혁 가들의 전쟁선포문, 그리스도인의 독립선언문이다. 교회 역사학자들은“종교 개혁의 기초는 개혁가 마틴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이었다”고 말한다.

종교개혁 이건의 천주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salvation by works)이라는 교리를 천년이 넘도록 가르쳐 왔다. 이에 반하여 개혁가 루터는“믿음을 통한 은혜에 의한 구원”(salvation by grace working through faith),이라는, 하나님의 계획을 새롭게 발견하고 선포했는데, 이것은 갈라디아서를 세심하게 연구한 결과이었다. 만약 갈라디아서가 없었다면, 기독교는 단지 또 다른 유대 종파의 하나로 남아 있었을 것이며, 서구의 사상은 전적으로 이 방적이 되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기독교를 유대교로부터 분리시키게 만들었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개신교의 종교개혁의 모퉁이 돌이었다. 왜냐하면, 오직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가르침은 개혁가들이 외쳤던 내용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의 메시지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자유의 메시지이며, 그리스도께서 죄의 사슬과 종교적 율법주의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메시지인데, 이 메시지는 두 가지 측면에서 특별히 우리 세대에 아주 절실하게 필요하다.

첫째는, 우리나라의 교회가 종교적 율법주의로 전탁해 가는 현상이 요즈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측면이다. 이 이유는 율법과 복음에 관한 신학적 이해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우리나라의 사회가 개인적 자유주의로 인하여 분열과 혼란이 현상적으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측면이다. 이 이유는, 자유에 대한 책임을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수용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1장

 

중요한 시작(1-5)

 

갈라디아서는 편지로서, 당대의 일반적인 편지가 갖고 있는 양식을 따르고 있다. 보내는 자, “바울은”,수신자인“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이것이 편지의 전형적인 양식이다. 그런데, 이 전형적인 양식에 여러 가지 내용을 덧붙이면서, 바울은 이편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미리 말하고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시작은 아주 중요하다.

 

첫째, 보내는 자, “바울”을 말할 때, 즉 스스로에 대하여 말할 때,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사도권(apostleship)에 대한주장이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사도가 된 것에 대한 비판과 부인(denial)그리고 반대와 공격이 있었음을 전제한다. 이렇게 갈라디아서는 시작부터 논쟁적이다. 바울자신을 비판하고 공격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바울자신이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바울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삶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유대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사도바울이 세계선교의 비전을 갖고 선교여행을 떠났을 때, 즉 제1차 선교여행 때, 소아시아의 갈라디아지방(오늘날 터이키 지방)에서 성공적인 열매를 거두었다. 교회를 여러 개 세웠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을 때 유대 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갈라디아교회에 몰래 들어와서 오염된 메시지(polluted message),를 퍼뜨렸고, 이것이 전체 복음을 위험하게 만들다 는 것을 듣고 알게 되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의 되기 전에 먼저 유대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되기 전에 먼저 유대교를 받아 들어야한다-달리 표현하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먼저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을 알고 두 번째 선교여행을 떠나기 전에 즉, 사도행전15장에 나오는 제1차 사도총회가 있기 바로 전에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하면서도 절박한 심정으로 편지를 쓰게 된다. 갈라디아 교회를 다시 복음의 진리위에 올려놓기 위한 기도와 희망으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갈라디아교회가 바울의 이 서신을 받고 그들이 어떻게 했는지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주후40년 어간에 쓰여 진 이 편지는 그 후 2천년 동안 교회의 빛과 나침반이 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갈라디아서는 종교적 율법주의로 타락하는 교회에 대한 경고이면서, 복음의 회복을 위한 바침 반이 되는 것이다.

 

다른 복음은 없다

 

바울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 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 죄를 위하여 죽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것을 믿는 믿음인 것이다.

 

1. 예수를 떠난 복음은 없다.

인간들은 타락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즉 자기의 구주를 버릴 가능성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다. 순식간에 진리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떠난 복음은 기독교인들의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떠난 기독교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2. 변질시킨 복음이다.

예수를 떠난 복음도 있을 수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도리를 변질시킨 복음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교리를 변질시킨다면 기독교는 아니다. 인간은 전적 타락하였는데 자기의 의를 결부시켜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이는 복음을 변질시킨 것이다.

 

3. 진리를 희생시킨 복음이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하늘로서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전제하고 자신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진리를 희생키시면서 까지 복음을 전하지는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진리를 희생시키는 자체가 다른 복음인 것이다.

 

오직 계시 (갈1:11-12)

 

바울의 복음에는 최소한 세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다.

둘째,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구원을 받는다.

셋째, 이 구원의 문은 유대인뿐만 아니고, 모든 민족에게 열려있다.

 

바울은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다는 진리는 인간적인 교리도 아니고 정치사회적인 이념도 아니고 종교현상도 아니고 오직계시에 의한 진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계시하신 진리인 것을 확신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바울의 교리 또는 바울의 복음이라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만, 오직 말씀으로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계시하시는 진리이다. 하지만, 믿음과 율법을 혼합하고, 은혜와 선행을 혼합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문화를 혼합 하는 것 (이것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 만들어 진 것이고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고 사람에게 배운 것이다.

 

복음과 율법은 공존 할 수 없다. 복음과 율법이 병행 할 수도 없다. 복음과 율법이 50%대50%,또는 80%대20%-석여 있을 수도 없다. 복음은 복음이다. 복음에 율법이 섞이면, 그것은 율법이다. 위조지폐가 무엇인가? 99퍼센트는 진짜이지만, 1퍼센트가 가짜 인 것은 인조지폐가 아닌가? 90퍼센트의 복음이지만, 1퍼센트의 율법이 섞이면, 이것은 율법이다.

오직 은혜! 오직 복음! 이것은 오직 계시의 의하여 주어진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16-21)

 

바울은 갈라디아서1장13-17절에서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임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1장18-24에서 자기가 전한 복음이 유대교회로부터 받은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말했고 2장1절-10절에서 예루살렘 기둥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도 아님을 명백하게 말한다. 그리고 2장11절21에서는 복음을 베드로부터 받은 것도 아님을 강조할 것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한지 14년 후에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바울은 자기가 전파하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는바 그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 기둥사도들은(pillar apostles)자기들이 전파하는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는 바 그 복음을 유대인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대상이 달랐지만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다른 것이 아님을 서로 확인했다. 각자가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은 같았다. 다만 서로 다른 것은 그들이 복음을 누구에게 전파 하는가? 즉 전파의 대상이었다.

 

사람은 본성상 하나님에게 반역한다.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도 않는다. 사람은 죄인으로서 죄를 봄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종이며 죄의 자식입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게 되었고 또 하나님과 무관하게살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이것이 죽음이다. 구원이라는 것은 바로 이 “죄의 종” 이라는 상태에서 구원받는 것이고 이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의 종으로서 죄를 범하며 그 후 죄책감의 고통을 받으며 죄의 결과로서 죽음의 세력 죽음의 영향력 안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공포, 절망, 흑암, 등은 죄의 실존이며 죄의 현실이다. 이 “죽음”은 통전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육체적 죽음, 심리적 죽음, 영적 죽음을 포함하는 통합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이 구원받기 전 인간의 실존입니다.

 

복음에 대한 반대 (4-5)

 

바울이 반대자들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 개인덕인 의도와 사리사욕 때문이 아니다. 물론 독선적인 것도 아니다. 오직“복음의 진리”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거짓형제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다르다고 비판 했던 것이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apostleship)을 비판했고 바울에 대하여 인신공격을 했다. 바울은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를 이방인에게 전해왔던 것이다. 이 계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비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만민을 위한 복음이다.

 

만민을 위한 복음(6-10)

 

첫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인정해 주었다.

둘째, 그들은 바울의 부름을 인정했다.

셋째, 가난한 사람에 대한 구제사역을 기억하고자 서로 약속했다.

 

복음은 하나이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같았다. 다만 그들이 전파하는 대상이 다를 뿐 이었다. 바울은 이방인에게, 예루살렘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복음을 전하는 대상이 달랐을 뿐, 복음의 내용은 하나이다.

 

율법에 대하여 죽고, 믿음으로 살라!(11-21)

 

초대교회의 두 기둥,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 발생했던 갈등과 충돌이 인용되어 있다. 베드로와 바울의 충돌- 이것은 신약성서에 기록된 사건 가운데서 가장 긴장되고 극적인 사건중 하나라 말할 수 있다. 바울과 베드로는 모두 성령이 충만한 사도이었다. 둘 다 예수님에 의하여 특별하게 부름을 받았고, 특별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다. 예수그리스도의 사도들을 지탱시켜 주는 두 기둥 이라할 수 있다.

 

율법의 행위와 예수의 믿음(15-17)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신다.

 

첫째, “율법”은 일반적으로 오경을 가리킬 수 있고 더 확대하면“성경”을 말할 수도 있고 더 나아가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고 신실하게 살도록 권면하고 훈계하는 기능이 있다.

 

둘째, 율법의 행위라는 개념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무죄하기를 원하면서 만든 율법 시스템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죄 할 수 없는 시스템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었다. 그런데 또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되는 줄 알고 율법을 지키려고 할 수 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할 때 우리는 율법을 어길 수밖에 없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유죄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동반자가 절대로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한 것을 계기로 율법의 본질을 설명했을 뿐더러,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밝혔다.

 

율법에 대하여 죽고 믿음에 대하여 사는 그리스도인(18-21)

 

율법은 본질상 생명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3장

 

그리스도 체험과 믿음 (1-5)

 

갈라디아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체험한 내용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명백하게 체험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의미와 능력과 효능은 구원이다. 구원의 의미와 능력과 효능에 관한 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이다. 갈라디아 교회는 그리스도 체험과 성령 체험도 확실하게 했다.

 

성령체험과 믿음

 

첫째, 성령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 대한 선포와 함께 온다는 진리다.“ 그들은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십자가 복음이 공개적으로 선포 되었고, 사람들이 그 진리를 듣고 믿을 때 성령께서 오셨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을 받았다.

 

둘째. 성령과 육체는 철저하게 대립된다.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교사들은 복음을 듣고 율법을 지키면 마무리가 잘 되는 것 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듣고 율법을 지키면 그것은 치명적인 타락이라고 말했다.

 

셋째, 성령은 새로운 시대의 능력이다. “영”spirit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는 “숨(입김)과 ”바람“의 의미도 갖고 있다. 성령이 내 안에 들어오고, 내가 성령 안에 들어 가는것,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가고 하나님이 내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영어로 ”열정“enthusiasm 이라고 표현한다. 성령의 실재가 없이는 계시와 교회는 소멸된다. 그래서 기적과 이사와 가시적인 카리스마타 charismata(은사) 도 없는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이 열정이 교회 안에서 사라진다면, 이것은 교회가 잠들었거나 죽은 것을 의미한다. 열정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없다.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께서 주시는 열정, 이 열정이 참된 열정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복

 

구원은 믿음에 의하여 얻어진다. 이 믿음은 인격적이며, 내적이며, 영적인 사건이다. 이 믿음은 어떤 의식과 예식과 절차와 선행과 외적 행위와 아무 관계가 없다.

사도 바울은 앞에서 갈라디아 사람들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즉 그들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고 오직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체험을 통해서 복음을 설명했다.

 

아브라함의 믿음(6-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옳다 인정하셨다. 그리고 그 후 몇 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사실을 간과하지 말라는 논 중이다. 율법주의자들이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은 것이라 주장 하는 것은 “시간착오”라는 것이다. 시대적 순서가 바뀐 것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라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인정받은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인정받았고, 그 후에 언약과 성결의 상징으로서 할례를 받은 것임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십계명과 십일조 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다. 복을 받은 사람이 십계명과 십일조를 지키는 것이다. 만약 십계명과 십일조 법을 지켜야 복을 받는다고 설명하면, 이것이 율법과 종교의 공식이다. 우리가 복을 받았으니, 우리가 죄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 이리고 인정하시는 복을 받았으니, 우리가 십계명도 지키고 십일조도 지키는 자라고 설명하면, 이것이 은혜와 복음이다.

 

그리스도(13-14)

 

“속량“(exagorazo)은 헬라 세계에서 노예를 자유를 사는 것, 즉 노예의 몸값을 치루고 그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어로는(redemption) 으로 번역하는데, 이 단어는”다시 사다“re-buy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옳다“고 인정하시어, 즉 ”무죄“하다고 인정하시어 그 사람을 죄의 노예로부터 풀어 주시기 위하여 몸값을 지불 하셨다. 이 몸값은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께서 몸값으로 지불되는 방법이 십자가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가에 돌아가셨는데,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저주를 받으셨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 때문에 저주를 받으셨다.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사람의 위한 것이다 만민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에게 약속하셨다.

첫째, “네가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

둘째, “너의 이름을 크게 하겠다.

셋째,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내가 저주할 것이다. 땅의 모든 민족들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복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을 받는 복이다. 이복은 모든 민족에게 까지 이른다. 아브라함의 복은 율법의 행위, 즉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복이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복이다.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은 율법의 저주가 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민족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그런즉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15-29)

 

자유인만이 윤리적이 될 수 있다. 은혜와 복음을 경험한 사람만이 도덕적일 수 있다. 자유를 무엇인지 알고, 그 자유를 체험한 사람만이 그 자유의 대한 책임을 느끼며 윤리적으로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나의 행위와 나의 의로움의 댓가가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인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다. 이것이 참된 윤리이며 참 믿음의 실천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기독론적 신학이 보수신학이며 정통신학이다. 복음과 은혜의 신앙이 보수적이며 정통적 신앙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보수적 신앙 또는 정통적 신앙이 아니고 아브라함의 언약을 믿는 것이 보수적 신앙이고 정통적 신앙이다.

개혁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칼빈과 루터의 종교개혁은 아직도 계속되어야한다. 진정한 개혁은 칼빈이 주장했던 오직본문(sola scriptures)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 본문이 말하는 오직 은혜로 돌아가는 것이다. 참된 개혁은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율법과 죄(19-25)

 

19절부터 25절 말씀은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중하나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리스도 신앙과 모세의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율법의 세 가지 “용법”(three uses of the law)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율법은 사회적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이며 시민법을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둘째,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적인 죄와 개인적인 삶의 죄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그래서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셋째, 율법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율법의 제 삼의 용법”이다.

 

율법은 사람이 죄를 범하기 때문에 추가로 주어졌다.

첫째는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있었기 때문에 율법이 주어졌다는 해석이고, 둘째는 율법이 주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죄를 범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두 해석은 서로를 보완해준다.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면 율법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율법과 죄가 서로 떨어 질수 없는 관계임을 명백하게 선언하고 있다.

 

갈라디아4장

 

한때 종노릇하였다(1-3)

 

로마 사회에서 아버지의 상속을 받을 아들이 법적으로 아버지의 모든 권리를 갖고 있지만, 그가 어렸을 때에는 그 집의 종들과 함께 지냈다.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는 다른 종들이 그 아들을 돌보게 된다. 바울 시대의 로마에서도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주인의 아들과 노예의 아들이 함께 놀았던 것이다. 바울은 이 관습을 예로 들면서 “우리도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다”고 말한다.

이 초등학문에 종노릇하다가 이제는 예수님을 믿게 되어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살고 있다.

 

이제 아들과 딸로 산다(4-7)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는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오셨음으로 강조하는 표현이다. 결코 성차별적인 표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실 때 꼭 여성의 몸을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다른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의 몸을 통해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신 이유는 우리로 아들과 딸의 명분을 얻게 하려 심이었다. 곧 율법 아래에 있는 우리들을 속량하시기 위함이었다.

 

다시 종노릇하려느냐? (8-11)

 

유대인들은 날을 지켰다. 즉, 안식일뿐 아니라 한 달 중 첫날에 마지막 날에 관한 율법을 지켰다.

그들은 또 달에 관한 율법을 지켰다. 절기와 해에 관한 율법,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등을 지켰다.

바울이 문제 삼고 있는 율법들 가운데 몇 개의 중요한 율법이 아니라, 율법주의자들이 정성껏 지키려하는“모든” 율법인 것을 알 수 있다.

삼가 지키는 것은 “지성이면 감천”의 행위이다. 이것은 정성이 지극해야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정성이 모자라면 하나님이 분노하신다는 일반적 종교 신앙이다. 바로 이 삼가 지키는 행위가 율법행위이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을 받기 위함이다.

 

사랑의 시작: 자유 (12-16)

 

갈라디아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바울과 영적인 사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했다. 율법으로부터 자유했기 때문에 서로 사랑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은 자유와 함께 시작한다. 자유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 자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나누는 사랑은 소유, 복종, 탐욕, 또는 거짓과 쾌락이다.. 자유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랑의 시작, 그리고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사랑,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의 사랑은 자유와 함께 시작되었다. 우리의 사랑도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할 만큼 바울을 사랑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은 은혜와 함께 시작한다.

 

사랑의 타락: 율법(17-18)

 

갈라디아 사람들은 율법을 사이에 두고 분열하게 되었고, 민족이라는 개념을 사이에 두고 분열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차지하려고 하거나 더 나아가 그것을 독점하려고 하면서 서로 분열하게 되었던 것이다. 좋은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좋으나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은 타락이다.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의 결국은 분열이다. 율법에 열심을 내는 것의 결말은 사망이다.

 

사랑의 회복: 성화 (19-20)

 

첫째: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 대하여 갖고 있는 소망이다.

둘째: 바울은 그 희망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바울은 해산하는 수고를 통하여 타락한 자유가 회복 될 수 있고 타락한 사랑이 회복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어머니의 해산하는 고통은 은혜이다. 해산의 수고라는 이 은혜와 사랑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이루어진다.

 

두 아들(22-23)

 

아브라함이 75세가 되는 해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몇 년이 흘러도 아들이 태어나지 않자, 아내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에게 제안했다. 자기의 여종 하갈과 함께 아들을 후사로 삼으로고 말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이스마엘 이다. 그런데 사라는 그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는 해에 아들을 낳게 된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이삭이다.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고 말하면서, 여종에게서 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말하는 것이다.

 

두 언약(24-27)

 

시내산은 율법과 모세의 상징이다. 그런데 유대인들 입장에서 충격적인 것은 이 시내 산으로부터 “종”이 나왔다는 설명이다. 바울은 더 나아가서 그 시내산이 아라비아에 있음을 강조한다. 아라비아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있지 아니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욱 어 충격적인 것은 그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다는 설명이다. 시내산과 율법과 모세와 예루살렘과 하갈과 종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과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다. 하늘에 있는 거룩한 산과 예루살렘이ㅣ 자유자이다. 종인 하갈은 율법의 상징이다. 종은 이 땅의 예루살렘을 말한다. 곧 유대주의 이다, 그러니, 유대주의와 유대인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율법은 조의 자식인 것이다. 하지만 이삭의 어머니 사라는 자유자이니,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상징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사는 자유인들이다. 시내산은 옛 언약이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새 언약이다. 세 예루살렘의 시민이다. 이 시민은 종이 아니고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다.

 

약속의 자녀로 살라 (4:28-5:1)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이면 이삭과 같은 대우를 받는데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로 받은 첫째 대우는 핍박이다. 종의 아들 이스마엘 이 자유자의 이삭을 괴롭혔다. 이와 같이 오늘날에도 율법적, 종교적 기독교인들, 즉 율법 아래에 살고자 하는 자들이 자유 안에 살고자 하는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을 놀리고 괴롭히고 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유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자유주의자라고 놀린다. 율법 아래 사는 자들은 은혜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무원칙주의자 또는 방종주의자라고 괴롭힌다. 약속의 자녀로 살 때 이러한 핍박과 조롱이 있는 것이다. 약속의 자녀로 살 때 받게 될 둘째 대우는 약속의 유업이다. 오직 이삭에게서 태어난 아들만이 아브라함의 씨라 불려진다. 유대주의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이 아닌 자유 안에 있는 복음적 그리스도인들이 참 이삭에게서 태어나는 자녀들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불려진다. 율법 아래서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유업을 받지 못한다. 오직 자유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브라함의 유업을 받게 된다.

 

갈라디아서 5장

 

자유, 성령, 사랑, (1-15)

 

그리스도인의 진리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이어진다.

“칭의” 또는 “의인”(justification) -\"의롭다 인정받음“의 진리는 ”성화“(sanctification)의생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구원은 해방이다. 구원받기 전 우리는 ”종‘ 이었다.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은“자유”라는 한 마디로 표현된다.

 

자유(1)

 

첫째,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구원은 해방이다. 구원받기 전 우리는 “종”이었다. 죄의 종이었다. 죄를 범하면, 죄에게 예속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주셔야, 우리가 자유 해진다. (요8:36)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 이다. (고후3:17)

성부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3:17)

성령께서 하시는 일도, 자유롭게 하시는 일이다.(눅4:18)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식과 내용은 “자유” 이다.

생명은 자유이며 자유가 생명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생명을 주신 것이고, 생명을 주신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사는 것처럼 산다는 것이다.

율법적으로 사는 것은 겉으로는 산 것 같지만 속으로는 죽음이다.

 

성령(2-6)

 

첫째, 2절을 보면 율법주의자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아무 유익이 없다.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과 죽음이 그들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게 된다.

둘째,3절을 보면, 율법의 한두 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이것 자체가 저주이고 죽음인 것이다.

셋째,4절을 보면, 율법주의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게 된다.

넷째, 율법주의자들은, 의의 소망이 없다. 즉,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은혜와 율법은 함께 갈 수 없다. 오직 은혜만이 진리이고, 은혜만이 자유이고, 오직 은혜만이 생명이다.

 

사랑(7-15)

 

첫째,7절을 보면, 그들은 진리를 방해하는 사람이다.

둘째, 8절을 보면, 그들의 가르침, 율법으로 살라는 가르침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셋째, 9절을 보면, 그들은 교회를 오염시킨다.

넷째, 10절을 보면, 그들은 결국 심판을 받게 된다.

다섯째, 11절을 보면 그들은 은혜와 자유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박해한다. 그들에게는 십자가의 은혜가 걸림돌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진리-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이 걸림돌 인 것 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오직 십자가의 은혜를 가르치는 사람을 박해하고,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섯째, 12절을 보면, 율법주의자들은, 베어 버림을 당할 것이다.

 

서로 자유하면서, 서로 종노릇 하는 것- 독립된 인격으로서, 서로 섬기는 것이다. 성령이 계시는 곳은 자유하고, 자유 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뜻이다.

사랑 없는 정의는 율법주의이다. -Justice without love is legalism.

사랑 없는 믿음은 이데올로기 이다. -Faith without love is ideology.

사랑 없는 희망은 자기중심성이다. -Hope without love is self centeredness.

사랑 없는 용서는 자기 비하이다. -Forgiveness without love is self abasement.

사랑 없는 용기는 무모함이다. -Fortitude without love is recklessness.

사랑 없는 구제는 낭비이다. -Generosity without love is extravagance.

사랑 없는 돌봄은 단순한 의무이다. -Care without love is mere duty.

사랑 없는 충성은 노예의 삶이다. Fidelity without love is servitude.

그리스도인의 모든 덕목 -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말씀 - 모든 말씀은 - 사랑의 표현이다.

자유, 성령, 사랑 -이 세 가지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육체와 성령의 싸움(16-18)

 

성령에 인도되는 삶은 성령과 육체의 갈등이 계속되는 삶이다. 성령에 인도되지 않은 삶은 갈등도 없다.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율법은 우리를 변화시킬 수도 없다. 율법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의롭다 인정을 받은데 아무 소용이 없다. 율법은 “칭의” 또는“의인”(Justification)에 효력이 없다.

율법은 사람을“거룩하게 변화시키는 능력도 없다. 율법은 그리스오인의 ”성화(Sanctification)에도 아무 효력이 없다. 모세의 율법도 마찬가지이다.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의 기준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폭로해준다. 그래서 우리의 노력으로는 하나님께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오직 율법을 삶의 기준 삼아 산다는 것은, 자기의 와 위선 안에서 육체에 의하여 사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성령을 억압한다. 율법의 열매는 사망이다. 오직 성령만이 내적으로 진정한 의의 열매를 내 안에서 생산해낸다.

 

육체의 행위와 성령의 열매(19-23)

 

19절의 “음행, 더러운 것, 호색” 은 성윤리에 관한 것이다. 음행과 더러운 것, 호색을 금하라는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고 노력해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 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율법의 이러한 사슬에 더욱 얽매이게 된다.

20절의, “우상숭배, 주술” 은 종교에 관한 것이다. 우상숭배와 주술도 육체의 열매이다.

2이절뒷부분과 21절 앞에 나오는,“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분냄, 당 짓는것, 분열함과 이단, 투기” -이렇게 여덟 가지는 대인관계의 장애를 말한다.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대인관계의 장애의 증후들이 나타난다. 율법적으로 가르치고, 율법적으로 믿고, 율법적으로 사는 사람은 결과적으로“원수 맺는것, 분쟁, 시기, 분냄...등등의 육체적 열매를 맺게 된다.

술 취함, 방탕함, 그와 같은 것들 -이러한 것들은, 중독현상에 관한 것이다. 술, 도박, 마약 등 - 어떤 물질이아 관계에 대한 중독현상들은 율법적 생활의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22-23절에 있는 “성령의 열매”는 세 개의 삼화음(three triads) 으로 설명된다.

첫째, 삼화음, 즉 사랑과 기쁨과 화평의 화음은 하나님을 향한 삼화음이다(God ward triad).

둘째, 삼화음, 즉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화음은 이웃을 행한 삼화음이다(Human ward triad).

오래 참는 것은 성숙한 성품의 꽃이다. 양선은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을 말한다.

셋째 삼화음, 즉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화음은 자신을 향한 삼화음이다(Self ward triad). 충성은 성실을 말하고, 온유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허한 부드러움이다.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양면이다.

 

육체의 대한 성령의 승리(24-25)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율법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이다. 이 말씀은“율법의 종교가 끝났다!” 는 선언이다. 이제는 자유와 사랑의 길이 열렷다! 이제는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는 길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자유와 성령과 사랑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완전한 승리요 궁극적인 승리이다.

 

율법적 윤리(5:26)

 

서로 노엽게 하고 투기하면서 스스로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아야한다.

믿음이 강하다고 생각한다면 약한 사람을 무시하거나 정죄하거나 그래서 무엇이든지 강요하지 말아야한다. 무엇이든지 그들의 생활, 윤리, 습관, 취미 -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강요하거나 자극하지 말아야한다. 또 믿음이 약하다고 생각하면, 강한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말아야한다, 나보다 강한 사람, 나보다 큰 사람, 나보다 의로운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지 말아야한다, 그것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이것이 율법적 사고, 율법적 감정, 율법적 언어생활이다. 한 마디로 이것을 율법적 윤리라 하는 것이다.

 

은혜적 윤리(6:1)

 

바울은 이제까지 훈계하고, 경고하고, 가르치고, 권면했던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을 “형제와 자매”로 부른다. 이렇게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여기는 것이 은혜적 윤리의 출발점이다.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의 실수와 범죄를 드러나게 하신 이유는 그 사람을 통하여 나 자신을 보게 하신 것이다. 누구나 다 똑같은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온유한 마음으로 찢어진 그물을 기워야한다,

 

갈라디아서 6장

 

율법이 아니라 은혜!

구원(salvation)도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성화(sanctification)도 은혜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결정하는 것도 은혜 이어야한다.

 

서로의 짐을 지라(1-5)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 또는 화려한 행동, 또는 멋진 행동이 아니다. 사랑의 법은 서로의 짐을 지는 행동이다. “짐을 지는 행위”는 “종” 또는 “아랫사람”의 의무이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종의 행위인 “짐 지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법을 설명한다.

 

26절“헛된 영광을 구하는 행위, 즉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강압적으로 대하고,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투기하는 행위” -이것이“ 스스로 속이는 것” 이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 자기의 짐을 지는 사람이 서로의 짐을 질수 있다. 자기의 짐을 지지 못하는 사람은 남의 짐을 질수 없다.

 

선생의 짐을 지라(6)

 

“전적으로 가르침에 헌신하는 교사들도 자기와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일을 해야 하는가? 질문에 바울은, ”모든 사람들은 재정적인 책임을 스스로 져라! 그런데 Full time 교사들은 예외다“ 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 시대 교회에서 “교사”는 말씀과 전통을 연구하고, 해석하여, 설명하고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직임이었다. 오늘날, Full time 목회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웃의 짐을 지라(7-10)

 

바울은, 성령의 생활과 육체의 생활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씨 뿌리기 sowing 와 거두기 harvest\" -즉 농사를 비유로 든다. 수확을 잘하기 위해서, 씨를 잘 뿌려야한다.

첫째, 볍씨를 뿌리면 벼가 나오고, 밀 씨를 뿌리면 밀이 나온다. 그러니까, 거두고자 하는려 씨를 제대로 뿌려야 한다. 심은 대로 거둔다.

그래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생명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된다.

둘째, 씨를 잘 뿌린다는 것은, 좋은 씨를 뿌려야한다는 것이다. 바른 씨를 골랐어도, 그 씨가 나쁘면, 싹이 나오지 않고, 또 싹이 나와도 금방 시들어 버리고 만다. 좋은 씨를 뿌려야, 나쁜 환경에서도 잘 자란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에 따라 살면서 좋은 일을 하다가, 낙심하거나, 포기하고 싶을 때 끝까지 인내해야한다. 그것은 좋은 씨를 뿌려야, 그 식물이 잘라나 끝내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한다.

셋째, 씨를 잘 뿌린다는 것은, 많이 뿌려야 한다. 바른 씨, 좋은 씨를 많이 뿌려야, 수확을 많이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가능한 한 많은 선행을 해야 그리고 믿음의 가정에게 가능한 한 많은 씨를 뿌려야 성령의 열매를 많이 거두게 되는 것이다. 또한 좋고, 바른 씨가 아무리 많이 땅에 뿌려져도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지 않으면, 또 열매를 맺게 하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오직 은혜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