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다비다가 살아난 기적 / 행9:36-41

죽은 다비다가 살아난 기적/행9:36-41| 

 

 

죽은 다비다가 살아난 기적

 

본문 행9:36-41

 

이 세상의 사람들 중에는 있으면 안될 사람, 있으나 마나한 사람, 꼭 필요한 사람 등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자는 있으면 안될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징벌로 죽었고 베드로는 전도 사업에 꼭 필요한 사람이므로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까지 해도 (마26:69-75) 저를 멸하지 아니하시고 구해 주셨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다비다의 부활도 그가 생전에 선한 일을 많이 하였거니와 너무나 필요한 인물이기에 베드로의 기도와 성도들의 눈물을 보시고 다시 살려 주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교회와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하나님께 사랑받는 다비다 같이 귀한 일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죽음은 선악인 누구에게나 있는 것입니다.

인류에 구세주이신 예수님도 죽으시었으니 그 누가 이세상에서 죽지 아니하고 살아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 다비다가 선析?구제가 많았다고 3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공로보다 더 귀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선을 베푸는 것으로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망은 인생의 최대 강적입니다.  사망앞에는 금력, 권력, 지력등 인간의 어떤 힘이라도 쓸데없고 이 사망에게는 경우도, 예의도, 체면도 없고, 사정도, 항의도 못하고 그저 따라 갈 것 뿐입니다.  사망은 뉘게나 어디서든지 언제나 옵니다.  그러므로 고인도 금인도 미래인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순 같은 성군도 갔고 걸주같은 악군도 갔고 6국을 병탄하고 만리장성을 샇고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 종고 금인을 만들어 궁중에 세우고 아방궁을 짓고 불노초와 불사약을 구하여 먹으며 말하기를 이제는 나를 대적할 자 없으리니 일세 이세 만세 무궁하리라 하던 절세 영웅 진시황도 갔고 역발산 기개세하던 천하용장 초패왕 황우도 갔고 3대륙을 휩쓸던 알렉산더 대왕도 갔고 불능이 어디 있느냐 하던 나폴레옹도 파리 성중에 개선문만 남겨 놓고 대서양 센트 헬레나 섬에서 6대주에 부는 바람은 인간의 한숨이 아니며 5대양의 넘치는 물결은 인간의 눈물이 아니냐는 예화를 남겨 놓고 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은 인생의 최대의 비애요 최대의 공포요 최대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사망은 누구나 슬퍼하고 겁을 먹는 것입니다.  이 사망은 무상합니다.  어느 때 올지 알수도 없습니다.  죽음은 밤 낮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옵니다.  그러므로 덕망있고 존경받던 다비다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내세 소망이 있습니다.  내세의 소망을 가리켜

* 복스러운 소망(딛2:13)

* 하늘에 쌓아둔 산 소망(골1:5)

* 좋은 소망(살후2:16)

* 영원한 소망이라고 합니다(딛1:2).

그래서 성서는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즉 죄인이 죽으면 음부에 가고 성도가 죽으면 낙원에 가는 것입니다(눅16:19-31).

 

2.  하나님의 큰 영광이 들어나기 위하여

영광이란 이름이 빛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서 제일조에 보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간들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하여 인간이 영광과 찬송을 받으려고 하며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은 정함이 없는 허탄한 재물에 눈이 어두워 재물을 위한 사업, 재물을 위한 투쟁, 재물을 위한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생애는 그러한 세속적인 재물이나 일시적인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그러한 삶이 아니라 (고전10:31)에 \"그런즉 너의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사43:7)에 \"무른 내 이름으로 일컫는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은 오직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더우기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도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높은 자리에 두신 것은 우리 인간에게 별달리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어떠하였습니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기를 원하였으며 그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하며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사42:8)에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께서 받으실 영광과 찬송을 어떤 인간이나 우상이나 다른 그 무엇에게도 빼앗기지 아니하였고 당신의 영광을 도적하는 사람이나 민족이나 국가는 모두 패망하였던 것입니다.

(행12:23)에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였는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은 사실이 있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그 말년에 실패한 것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어야 합니다.

사실 본문은 베드로가 기도하므로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영광을 받으려고 죽은 자를 살아나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역사하셨으니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3.  과부들의 거짓없는 애끓은 요청이기도 합니다.

39절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서서 울며\"했습니다.  이같이 이 다비다의 죽음은 누구보다도 동료들이 더 서러워 했고 베드로에게 살려 달라고 요청을 한 것입니다.

예컨대 (눅11:5-8)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웃 친구가 밤늦게 아니 이미 잠자리에 들어갔는데 친구가 와서 떡 세덩이를 요구할 때에 그가 말하기를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 할찌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죽은자보다는 그의 동료들의 간청에 의하여 베드로가 특별한 기도를 하게 된 것으로 보이며 이로써 하나님께서 그 갸륵한 장면을 보시고 역사하시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는 또한 가나안 혼인 잔치  집에서도 마리아가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이를 해결할 것을 요구할 때에 (요2:4)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하시었지만 그의 요청에 의해 처음 이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기독자들이 배워야 되며 실천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