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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14:8-18
바울과 바나바 두 전도자가 이고니온에서 지극히 어려운 핍박을 당하고도 쉬지 않고 다시 루스드라에서 열심히 전도를 하니 하나님께서 이를 기뻐하사 나면서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큰 기적을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병자에게는 사명감이 더욱 고취되며 핍박이 강한 만큼 전도의 책임도 강하게 느껴지며 이로써 주의 일을 더욱 힘있게 할 수가 있었습니다.
1. 이 병자 같이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앉은 뱅이의 마음 속에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불구자를 본 바울은 영적으로 구원 받게 되리라는 소망이 생기어 더욱 열심히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에 있어 비록 앉은뱅이 신자 노릇을 한다 할지라도 구원 얻을 만한 한가닥 믿음의 줄이 흐르고 있으면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장인을 속이고 불의를 많이 행했지만 그는 마음 속에 하나님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믿음의 줄을 붙잡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였고 그 후손이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남을 사랑해야 할 우리가 남을 미워하였고 축복해야 할 입에서 저주하였고 온유해야 할 우리가 혈기를 부렸고 진실해야 할 우리가 거짓을 말하고 십자가를 져야할 우리가 안일하고 꾀를 부리던 앉은 뱅이 신자 였음에 틀림이 없으나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을 따라가는 생활을 하기 원하는 한가닥 믿음의 줄을 보시고 우리를 붙들고 일어나라 하시는 것입니다. 금광에 가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쓸모없는 돌 조각 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 돌들이 고운 가루로 빻아져서 물에 씻겨 사금 가루를 모아 값비싼 금으로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면서 앉은 뱅이는 그의 마음속에 있는 구원 받을 만한 한줄기의 믿음이 있으므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2. 경시자가 되라고 하신 뜻입니다. 바울이 이 앉은 뱅이를 보니 그에게서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강단에서 성도들의 눈동자와 얼굴 그리고 그 사람의 설교 듣는 태도를 보면 믿음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짐작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앉은 뱅이 얼굴에서 구원 받을 만한 믿음있는 것을 보고 큰소리로 바로 일어서라고 명령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설교를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절망 가운데 있는 그를 구원하실 수 있다고 믿었고 또는 자기 말을 경청하는 그에게 감명도 받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깊게 한눈 팔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바울은 그가 고침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진지하고 우러러 보는 눈길로 인하여 바울은 그가 여태껏 가지지 못했던 능력을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에서 구걸이나 하던 앉은 뱅이를 고칠 적에 이를 \"우리를 보라\"고(행3:4)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걷게 되었습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자가 그로 더불어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경청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도하는 장소에 한 앉은 뱅이가 와서 전도하는 말씀을 주목하여 들었습니다. 말씀을 주목하여 듣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이 않은뱅이는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잘 듣는 중에 그 마음이 깨달음이 왔습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완전히 받아 구원의 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경청이란 그자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행20:9)에 \"한 청년 유두고\"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경청해야 할 급박한 시기에 창에 걸터 앉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자가 창에 걸터 앉았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자세입니까? 이는 오만 불순한 자세이니 은혜가 될 수 없고 은혜가 안되니 졸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자세부터 바로 가져야 합니다. 그리해야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금과 옥조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데 유두고의 모습은 얼마나 한심한 모습인지 모릅니다. 이는 마귀가 제일 기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는 것은 경청하지 아니하고 졸거나 딴곳에 등을 돌리는 일입니다(눅10:38-41) 조는 자에게는 언제나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운전자가 졸으면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신령한 면에서도 심령이 졸면 마귀에게 삼키우게 되는 것입니다(벧전5:8).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처럼 심령이 조는 자는 마침내 깨어나지 못하면 죽고 맙니다.
4. 전도의 효과가 있었던 증거입니다. 첫째, 방해의 이유로 보아서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믿게 됨으로 시기하여 무리한 짓을 한 것입니다. 둘째, 이방인들이 기뻐한 것은 구원 받은 뚜렷한 증거입니다. 셋째, 그리고 사람의 심중에 심은 씨앗은 빼앗을 수 없다는 면에서 전도의 반대는 무미한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 이유라면 (1) 천지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위함이고 (2) 헛된일 즉 우상 섬기는 일을 버리게 하기 위함이고 (3)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소개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우매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음이 너무 어두우니까 어두운 생활인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복음이 마음속에 들어가야 마음이 밝아지며 그러므로 광명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루스드라\"사람들은 복음이 마음에 없었기 때문에 사람을 신으로 섬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로써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 그중에 나면서 걸어 보지도 못한 앉은 뱅이가 고침을 받고 \"루스드라\"일대에 복음이 퍼지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5. 영적으로 앉은 뱅이 신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앉은 뱅이는 말은 합니다. 보기도 합니다. 듣기도 합니다. 먹기도 합니다. 다만 걷지 못하는 불구자입니다. 그런데 이 앉은 뱅이보다 더 불쌍한 앉은 뱅이는 영적으로 앉은 뱅이된 병자입니다. 즉 신앙이 성장이 없는 자인데 예수 믿은 경력은 많은데 그 경력만큼 신앙이 발전하지 못하여 아직도 구원관이 없고 내세관 축복관이 없어서 신앙에 열의가 없는 자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안에는 한번도 영적으로 걸어 본일이 없는 앉은 뱅이 신자가 많이 있습니다. 앉아서 일한다고 하는 교인들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앉아 있을 동안 성한 사람 같습니다. 입은 성하니 곧 잘 재잘 거립니다. 눈은 밝으니 성경을 봅니다. 열린 입으로 곧 잘 찬송하고 기도합니다. 귀는 열려 있으니 은혜로운 설교는 잘 듣습니다. 그런대도 그의 실상은 일을 해보거나 일을 해내지는 못합니다. 즉 신앙이 자립하지 못합니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업혀 다닙니다. 겨우 다른 사람이 주는 것으로 연명합니다. 전통이나 습관이나 자기 교만의 아집에 깊이 얽매인 나머지 10년 20년 30년 40년 신앙 생활만을 되풀이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전혀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 뿐인 자를 영적 앉은 뱅이라고 합니다.
6.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나면서 앉은 뱅이가 된 자의 고난을 연미해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그는 이미 성인이 되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바꿔 말하면 그는 매우 오랜 기간을 고난 가운데 지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랜 고난이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는 결과로 나타납니다(요9:3).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 이외의 모든 성도의 고난은 이처럼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 내려는 깊은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고난이 시작 될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잉태했다고 생각하고 참고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7. 믿음이 더욱 굳세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면서 앉은 뱅이 된 자의 모습을 주시해 보면 그에게는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구원은 단지 육체적인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영혼 구원과 매우 밀접히 연관되어 있습니다. 결국 오랜 고난의 세월을 통해 나면서 앉은 뱅이 된 이 사람은 성숙된 신앙의 사람이 되었고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는 순간 놀라운 영적 흡수력으로 복음을 수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령한 바울은 이것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고전2:13)흔히 고난은 연약한 신앙인을 좌절시킬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믿음의 시련은 사람을 더 강하게 합니다. 뜨거운 불이 더욱 정결한 순금을 빼내듯이 뜨거운 시련은 사람을 순수한 신앙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결 론 유대 민족들은 기적과 기사를 보기 전에는 믿으려고 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들의 역사는 이적과 기사의 역사였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행한 기적을 목격한 \"루스드라\"의 모든 무리들은 놀라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도들의 행한 기적이 인력 이상인 신의 능력에 의하여 된 것이라고 인정한 것은 그들의 정당한 판단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이 없건 있건 간에 항상 신의 존재를 믿고 의식하며 역경 가운데서도 주만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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