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두고가 살아남 / 행20:7-12

유두고가 살아남 / 행 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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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고가 살아남                          

                                                           ▨ 행 20:7-12 ▧

 

 

바울의 설교를 듣는 중 졸다가 삼층루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는 잠자는 자들에게 큰 각성을 주는 교훈입니다.  즉 이는 육신의 잠보다 영적 잠자는 자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성경역사에 잠자다가 실족하고 범죄와 죽음까지 당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이 본문의 주인공인 유두고같이 불행을 당한 자들을 생각해 보면

* 시스라는 전쟁에서 쫓기는 중 피곤하여 야일의 장막안에 자다가 말뚝박혀 죽임을 당했습니다(삿4:17-24).

* 삼손은 음행에 빠져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자다가 머리를 깎여 불행을 당했고(삿16:18-21),

* 다윗은 아침 늦게까지 잠자다가 유부녀와 음행하여 범죄했고(삼하11:2-5)

* 요나는 주의 사명을 기피하고 배밑층에서 잠자다가 고기밥이 되어 죽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기도 하고(욘1:1-10)

* 베드로는 기도하라고 세번이나 당부를 받고도 잠자다가 시험에 빠졌습니다(마26:36-56).

이와 같이 유명한 사람들도 잠자다가 불행을 당하고 망신을 당했으니 성도들도영적의 잠을 자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합시다.

 

1.  앉은 자리가 문제가 있었고

앉아서는 안될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떨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성서는 성도들이 가서는 아니 될 곳도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베리얄이 어찌 함께 할 수 있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것은 유복자의 필수적인 삶이라고 노래를 하였습니다(시1:1-3).  성도는 가서는 안되고, 서있어도 안되고, 앉아서는 더욱 안되는 곳이 있는 것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땅에서 변을 당하여 살상의 참극을 빚은 것도 선지자 발람이 짐승의 항변을 받게 된 망신스러움도 따지고 보면 가서는 안될 곳에 함부로 갔다가 발생된 사건들입니다.

동양의 현철 맹자의 어머니가 세번씩이나 교육을 위해 이사를 다녔다 함은 귀감되는 일입니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말라고 하였는데 보혈의 피로 씻음 받고 의에 흰옷입은 크리스찬은 결코 아무데나 가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도 먹어서는 안될 선악과가 있었습니다.

 

첫째, 창에 걸터 앉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자가 창에 걸터 앉았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자세입니까? 이는 오만 불손한 자세이니 은혜를 받을 수 없던 것입니다.  은혜의 자리에서 은혜를 못받으면 졸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자세부터 바로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가다듬어져서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창에 걸터 앉았다는 것에 신령상 해석을 붙여 보면 교회와 세상 중간 지점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신앙의 회색지대에서 헤메이는 사람, 미온적 신앙 상태에 있는 사람, 이러한 사람은 언제나 위험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2.  정신 상태가 문제였습니다.

만사에 현재의 자세가 어떠하든지 그 정신 상태만 건전하면 별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험천만한 곳에 앉았으니 오죽이나 정신이 오싹 하였을까 마는 어이없게도 잠자는 상태였습니다.  본문에 깊이 졸았다함은 잠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함이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함은 잠에게 피습되어 노예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 졸았다고 했습니다.

졸되 깊이 졸았습니다.  바울이 지금 금과 옥조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데 얼마나 한심스러운 상태입니까 마귀가 제일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미워하시는 모습은 조는 모습인 것입니다.

조는 자에게는 언제나 위기가 옵니다.  신령한 면에서도 심령이 졸면 마귀에게 삼키우게 됩니다.  (벧전5:8)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죽은 것처럼 심령이 조는 자도 마침내 깨어나지 못하면 죽고 맙니다.

 

3.  예배를 엄숙히 드리라는 것입니다.

유두고가 창에 걸터 앉아 졸은 것은 이는 예배 의식의 존엄성을 상실한 행동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란

 

첫째, 예배에 (샤하)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엎드린다\"혹은 \"따른다\"는 것입니다.  역대하 29장 30절에 \"히스기야왕이 귀인들로 더불어 레위 사람을 명하여 다윗과 선견자 \"아삽\"의 시로 여호와를 찬송하게 하매 저희가 즐거움으로 찬송하고 몸을 굽혀 경배하니라\"고 했습니다.  욥기 1장 20절에도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엎드린다\"혹은 \"따른다\"는 말은 피조물인 인간이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완전히 복종해야 하는 존재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란 (아바드)라고도 하는데

이 말의 뜻은 섬긴다는 것입니다.  (사19:21)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렘44:3)에 \"이는 그들이 자기나 너희나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나의 노를 격동한 악행을 인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자주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셋째, (프로스쿠네오)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뜻은 무릎을 \"끓고\" \"엎드린다\" 또는 \"손에 입맞춘다\"는 뜻으로 윗 어른에 대한 예의와 존경과 복종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2:2절과 11절)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고 한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고용된 거룩한 피조물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예배하는 피조물로 지음받았습니다.

이것은 인간만의 특전입니다.  하나님께 바로 엎드려 하나님을 바로 섬기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무릎을 끓고 주님의 손에 입맞추기 위하여 사람이 존재합니다.

인간은 이렇게 예배적 인격자입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사명은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 본연의 위치와 자세로 올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이 예배를 받기 위하여 자신을 계시하였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예배의 거룩한 전당으로 불렀습니다.

 

4.  외적 노출이 너무 많았다는 것입니다.

\"유두고\"가 떨어져 죽은 이유중 하나라면 이는 창가에 걸터 앉았으니 그의 육체의 중심이 외부로 더 많이 노출되어서 땅에 떨어져 죽게 된 것입니다.

유두고의 육체가 교회안에 더 노출되고 기울어졌더라면 교회안에 내려 앉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네가 내안에 내가 네안에 있으면 과실을 절로 맺는다고\"(요15:5)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크리스챤들이 천이백만 성도라고 하는데 과실이 절로 맺는 것과 같은 형통함속에 지내는 자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지 않나 싶어집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나의 신앙이 어떠한지 검토해 봅시다.  크리스챤들은 주안에서 감추어진 신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귀에 많이 노출이 되거나 세상에 더 많이 나의 육체와 나의 생각과 행동이 노출되면 주와는 멀리 떨어질 것이며 관계가 끊어져 결국 죽게 될 것입니다.

 

5.  흠없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첫째, 삼층 다락에서 추락했으니 이 얼마나 망신입니까?

둘째, 은혜의 자리에서 죽음의 자리로 떨어진 것이니 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셋째, 보다 더 열심히 말씀을 듣고 있던 회중들에게 그 은혜로운 시간을 중단시켰으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은혜받는데 봉사는 못해도 은혜받는 일에 방해가 되거나 거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되야 겠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심려를 끼치고 귀중한 시간을 낭비케 하였으니 이는 보통의 결례가 아닌 것입니다.  성도의 기본 생활은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는 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살 수는 없지만 그의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가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걸어가신 발자취는 한마디로 인류를 위한 희생과 흠과 티가 없는 생활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류를 위한 어떤 공헌보다는 주님의 뜻을 거스리는 결례를 해서는 안되며 질서없는 생활로 타인에게 손해를 끼쳐서는 더욱 안되는 것입니다.

 

6.  말씀의 경청자와 경시자의 차이점을 주는 교훈입니다.

노아때의 사람들도 노아의 전도를 들었더라면 살았을 터인데 노아의 전한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죽었고 놋의 때에도 심지어 그의 사위들 마저 그의 전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다가 죽었고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 들었던 딸들은 살았습니다.  모세 때의 불뱀에 물린자들이 모세의 말을 듣고 장대위에 매달은 구리뱀을 쳐다 본자는 살았고 모세의 말을 불신한 자들은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 삼층루에 바울의 열심있는 설교를 들은 자들은 다 은혜가 충만하여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영적으로 한량없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졌는데 말씀을 안듣고 잠이나 자던 유두고 청년은 떨어져 죽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청년의 영육이 살아야 기독교의 무한한 부흥과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기대의 부응에 응하지 못하고 말씀을 경청치 못하고 졸았으니 죽음의 비극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7.  유두고로 인하여 드로아 인들이 위안을 받았습니다.

12절에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고 했습니다.  \"드로아\"교인들은 살아난 유두고를 보면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나타난 극적인 표적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 가운데에 큰 기쁨뿐 아니라 비난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믿게 하는데 큰 공헌도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누구의 죄로 인함이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요9:2-3)에 대답하셨듯이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바울과 유두고를 통해 당신의 능력과 사역과 임재를 나타내시는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나 성도들에게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인해 당신의 임재와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체험한 사람들은 그 기쁨을 자신만이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함으로써 그 기쁨과 위로를 나누도록 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