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늙은 선지자 이야기

한 늙은 선지자 이야기
왕상13:11-34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살더니(11)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내게 이르기를 …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18)
여호와의 말씀이 그 사람을 데려온 선지자에게 임하시니(20)
-말씀을 어기며 … 지키지 아니하고(21)
-네 시체가 네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2)
사자가 길에서 저를 만나 죽이매 … 사자도 그 시체 곁에 섰더라(24)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 죽였도다(26)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32)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33)
이 일이 여로보암의 집에 죄가 되어 그 집이 지면에서 끊어져 멸망케 되니라(34)




심판의 필연성

13장의 타겟은 여로보암이다.
그럼 여로보암(1-10)과 여로보암(33-34) 사이에 마치 샌드위치처럼 들어 있는 벧엘의 한 늙은 선지자 이야기(11-31)는 무엇을 목표하고 있는가. 성경은 이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가.



한 늙은 선지자(11-19)

벧엘에도 선지자가 있다. 그는 늙었으며, 지금 북왕국과 여로보암의 형편이 안개 국면임에도 하나님이 임하시지 않는, 그래서 유다에서부터 벧엘로 여호와의 말씀을 가지고 온 하나님의 사람과 묘한 대조를 이루는, 이것이 13장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만드는 작가의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그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의 모든 언행을 아들들에게서 듣는다(11). 그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는 자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는 이 일(1-10)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다. 하나님도 그를 이 일 안으로 넣어주시지 않았는데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막 말로 하면, 남의 연탄불에 신경 쓰는 희한한 사람이다.

종종 사람들은 자기와 무관한 일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서야 할 곳, 끼어야 할 자리, 참여해야 할 말, 결정해야 할 문제와 하등 관계없는 사람들이 \"감 나라, 콩 나라\" 하면서 발을 들여 놓는다. 이렇듯 한 가지 어려운 대목은 그런데 왜 그가 반대되는 언행을, 그것도 천사를 들먹이며, 여호와의 말씀이라며 그 사람을 속였을까(18-19) 하는 부분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별 일이 없고, 오히려 속임을 당한 하나님의 사람만이 죽음을 당한다. 죄로 따지면 늙은 선지자 역시 무사할 수 없는 자다. 이렇듯 세상은 요지경이다.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무지의 영역이 -하나님 편에서는 섭리의 영역이다-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세상에는 사람의 소리(18)가 하나님의 소리(16-17)를 듣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 종종 있다. 그것도 이러한 파렴치가 비록 늙지는 했지만 선지자라는 사람에 의해서 자행된다. 그는 하나님의 소리를 의도적으로 훼방한다.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한다. 모든 것이 그럴 듯 하다. 누구 하나 의심할 수 있는 점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적은 내부에 있는 경우가 많다. 듣지도 않았으면서, 하나님이 임하시지도 않았으면서, 하나님이 하라고 맡기시지도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님을 뻔히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일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곳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20-32)

그는 속임을 당한 사람이다(18b). 하지만 속인 사람도, 또한 이러한 일이 발생하도록 원인을 제공한 여로보암은 일단 아직까지는 무사하다. 죄인들은 여전히 승승장구(乘勝長驅)한다. 오히려 의인이 죄인의 꼬임에 빠져 정죄를 받고(20-22), 예언이 성취됨으로 그만 죽고 만다(24). 처음 이 대목을 읽을 때는 하나님도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얼른 보면 사실이 또 그렇다. 생명을 걸고 벧엘까지 와서 여로보암에게 심판의 예언을 전하고 돌아가던 그였다(10). 그런데 늙은 선지자의 꼬임 때문에 그만 이런 결과로 처참하게 마무리되는 것을 보면서 좀 두려운 마음도 들고, 실수도 용납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좀 더 생각해 보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가 중요하다. 이런 하나님의 상반된 언행을 보면서, 그러니까 정작 벌을 받아야 할 사람은 살아있고, 사명을 감당한 사람은 죽고 하는 좀 난해한 하나님의 방정식을 보면서 말이다. 여기서 정말 두렵고 떨어야 할 사람들은 늙은 선지자와 여로보암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사실을 접하는 사람으로(26), 그리고 여전히 33절처럼 사는 것으로부터 돌아서지 않고 있다. 이것이 영적인 기초가 부실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이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잘 믿어도, 열심히 목숨 걸고 일해도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는다고만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상경에 대한 권위와 경외심을 접어 버리고 만다. 바로 이 부분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병이다. 아무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이런 일련의 일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하나님의 눈높이에 영적 수준을 맞춘 사람이 없다.

한편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의 돌연한 죽음은 몹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시며,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눅9:62)는 주님의 말씀처럼 사람의 소리에 연연하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을 뒤로 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신다는 점을 새삼 새롭게 생각해 보게 된다. 재미난 것은 -한 사람의 죽음과 장례식 앞에 경솔한 표현일까- 나귀와 사자의 반응이다(24b,28b). 미물에 불과한 사자도 단지 사냥을 위해 그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다. 늙은 선지자가 사자 곁에 죽은 하나님의 사람을 나귀에 실어도 사자는 그냥 있었던 모양이다(28). 아무도 여기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한다. 비록 하나님의 사람은 불순종 때문에 죽었지만,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도 당신의 예언과 섭리를 도도하게 진행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죽어서까지 늙은 선지자와 온 이스라엘에게 교훈한다. 그리고 이 교훈은 마침내 늙은 선지자의 입을 통해 다시 북왕국 이스라엘과 여로보암에게 메아리친다 : \"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32) 이렇게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는 마침내 여로보암의 턱을 정확하게 겨냥한다. 그의 불순종은 이미 이러한 결과를 예고했으며(11:37-39 → 12:25- ), 13장은 이를 확증한다.



여로보암(33-34)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陰府)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마11:23-2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더 멀리 떠나 있다.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고\"(33a)로 시작되는 성경의 고발이 이를 더 분명하게 해 준다. 그는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이 가는 길에 사자의 밥이 되어 죽는 것을 보고서 아마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흔히들 예수 잘 믿고, 열심을 다 해 교회와 복음을 섬기는 사람 가운데 혹 13장의 하나님의 사람처럼 그의 말로(末路)가 이처럼 일그러질 때 여로보암처럼 처리해 버릴 수 있다. \"예수는 저렇게 왁자지껄하게 믿는 게 아니다, 혼자 잘난 척 다 하더니 꼴 좋다, 저 사람은 아마도 남들이 모르는 심각한 죄가 있나 보다, 예수 믿은 결과가 개죽음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다.\", 등등 뭐 이런저런 생각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일들을 통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일에 실패한다는 점이다. 여로보암이 바로 이런 유형의 부끄러운 모델이다.

그는 이미 영적 성장이 멈추었고,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죽은 자다. 하나님의 사람이 죽고, 이제는 늙은 선지자마저 이번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다시 찾고 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할까. 이것이 회개치 않은 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마음이다(마11:20-24). 성경은 계속해서 여로보암을 향해 경고의 나팔을 끊임없이 외친다(11:37-39, 13:2,32,34). 사람(선지자 아히야, 하나님의 사람, 늙은 선지자, 열왕기 기자)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계시고, 또 예조와 기적과 사자를 통해서도(5,6,24),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까지 말씀하신다. 주님은 지금도 이렇게 찾아오시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분이시다.



부스러기 묵상

벧엘의 영적 형편은 실로 암흑이다.
여로보암은 사설 제단인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양하고 있고(1), 反진리와 非진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공공연하게 난무하고 있고(18), 여로보암은 \'이 일\'(1-32) 후에도 여전히 악한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33). 그 와중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던 하나님의 사람, 그러나 속아넘어간 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자의 밥이 되어 죽는다(18,24). 이것은 여로보암에게 강력한 메시지였다. 하나님의 사람도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죽는다면 여로보암 자신은 어떠하겠는가를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에게는 이러한 영적 분위기와 흐름을 간파할 영적인 능력이 없었다. 하나님의 예언을 거역한 그의 죄는(11:29-39 → 12:25- ) 이렇듯 그의 영적인 감각을 말라버리게 했다. 그는 이미 12장에서부터 죽어가고 있다가 13장에서는 도저히 회생 가능성을 상실한다. 하나님은 이미 자본을 잠식한 여로보암의 죄에 대한 구조조정을 발표하신 셈이다. 여로보암은 이제 파산 절차만 남겨놓고 있다(14:1- ).

하나님은 13:2절을 향해 거룩한 걸음을 시작하셨다. 열왕기는 \'요시야\'처럼 일하는 사람을 찾아 만나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고 죄악이 관영해도 여로보암 같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사자\'(24,28)를 배역으로 쓰시면서까지 이 도도한 흐름을 주도하신다. 하나님은 22년이나 기다리셨는지도 모른다(14:20). 이렇게 갈 것을, 뭘 더 누리고 쥐고 휘둘러보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인지, 지금도 보이지 않는 무수한 곳에서 어떤 식으로든 헤게모니(hegemony)를 쥐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에게서 여로보암 바이러스를 본다. 그러면서 나는 이처럼 살지 않아야겠다는 쪽으로 삶의 파도를 끓어 당겨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여로보암처럼 나에게로 오는 묵상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다. 문제는 나다. 지금도 하나님은 다양하고 무수한 채널을 통해서 끊임없이 나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13장의 그림에 들어온 배역들을 통해서 이를 좀 더 깊게 묵상하기 위해 좀 더 오랫동안 머물러 서 있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