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노년

아름다운 노년
왕상1:1-4





아름다운 노년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모든 사람이 죽음을 맞이함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촛불을 켜놓고 창문을 여니 바람이 들어와 촛불이 꺼질 듯 꺼질 듯합니다. 그래서 창문을 닫으니 불꽃이 확 살아납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 그러나 그 촛불은 결국 타서 없어지고 맙니다. 암이 생긴 사람이 그것을 빨리 발견하여 수술을 해서 회복되었습니다. 다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죽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리다가 아찔한 순간에 브레이크를 잡아 살았습니다. 1초만 늦었어도 죽었을 텐데 살았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고 결국 죽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던 다윗 왕도 나이 70이 되니 늙어서 몸이 따뜻하질 않습니다. 이불을 덮어도 한기를 느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다윗의 신하들이 다윗의 괴로움을 알고 아비삭이라는 아리따운 젊은 여성으로 하여금 다윗 왕을 모시게 합니다. 신하들은 다윗에게 아비삭이라는 난로를 넣어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아비삭은 예수님께서 자라나신 나사렛에서 11. 2km 떨어진, 헐몬산의 동남쪽에 위치해 있는 수넴 출신입니다. 수넴은 미인 촌으로 소문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쪽에는 잘생긴 남자가 많고 북쪽에는 예쁜 여자가 많아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최고 미인들은 수넴에 가장 많았습니다

. 그 중에서도 아비삭이라는 처녀가 최고로 아름다웠습니다.
다윗은 신하들이 왕을 모시게 한 아비삭을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잠자리는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아비삭과 동침하지는 않았지만 다윗의 행위가 결코 옳은 행위는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몸이 따뜻하질 않아서 괴로웠겠지만 신하들이 붙여준 아비삭을 거절했어야 합니다.

다윗이 아비삭을 받아드림으로 다윗에게는 비록 잠자리를 같이 하지는 않았지만 또 하나의 아내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또 한 명의 아내가 생기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다윗은 곧 죽게 될 것인데 자신이 죽으면 젊은 아비삭은 어떻게 됩니까? 아비삭은 평생 혼자 살아야 합니다
.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지혜가 있어서 범사를 지혜롭게 행했습니다. 삼상 18:5에 보면 “다윗이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삼상 18:14절에 보면 다윗이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할 수 있었던 비결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많은 경험을 쌓게 되면서 나름대로의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노인의 지혜를 빌린다면 젊은 사람도 지혜롭게 살 수 있습니다.

설화에 노인을 내다 버리는 기로국(棄老國)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기로국 임금이 이웃 나라 임금과 왕관을 걸고 몇 가지 알아내기를 했습니다. 양쪽 두께가 똑같은 박달나무 토막을 두고 어느 쪽이 뿌리이고 어느 쪽인 가지인가? 크기가 똑같은 말 두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데 어느 쪽이 어미고 어느 쪽이 새끼인가? 를 알아내기였습니다. 어전 회의를 열고, 이 어려운 문제를 숙의 했으나 알 길이 없었습니다.

헌데 한 대신이 하룻밤 자고 나더니 임금 앞에 나아가 박달나무를 물에 띄우면 뿌리 쪽이 무겁기에 아래로 가라앉는다고 하고, 풀을 먹지 않고 다른 말에게 밀어 주는 쪽이 어미 말 이라고 했습니다. 그 지혜를 얻게 된 연유는 이렇습니다. 이 대신은 늙으면 들판에 갖다 버리게 돼 있는 아버지를 버리지 않고 토굴 속에 숨겨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토굴로 찾아가 노부에게 물어 국난(國難)을 타개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 뒤부터 그 나라에서는 노인을 버리는 법을 없애고 노인을 섬기는 국풍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팔도에서 병사를 모군하여 왕을 수호하고자 한양을 향해 싸우면서 올라왔습니다. 오합지졸들이요, 무기도 훈련도 사기도 없는 터라 도중에 모조리 패주했는데 유일하게 연전연승하여 한양까지 올라와서 행주산성 대첩을 한 부대가 있었으니 곧 권율 장군이 이끈 부대였습니다. 전승할 수 있는 요인이 여럿 있었으나 그 중 하나로 전라군에는 등에 업혀 다닐 만큼 노쇠한 지휘관이 많았다는 것을 듭니다. 비록 업혀 다니긴 하지만 지혜나 판단력은 뛰어났기에 그 지혜로 전승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젊어서 지혜로웠으니 늙어서는 더 지혜로워야 하는데 본문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다윗이라고 늘 옳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도 영성이 떨어질 때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행동하게 되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과 거리가 있는 행동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의 나이가 많아서 늙으니 그의 영성이 떨어진 것이 분명합니다. 젊고 힘이 있을 때는 늘 기도를 하던 사람이 늙고 병들면 기도를 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늙어서든 아니면 병이 들어서든 아니면 다른 일로 바빠서든 일단 기도를 쉬게 되면 영성은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영성이 떨어지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늙어서 영성을 잃어버린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이삭입니다. 그는 젊어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로 아내를 얻었습니다. 결혼 한지 20이 되도록 자녀를 얻지 못하니 기도하여 쌍둥이를 얻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나이가 들어서는 하나님의 뜻보다 육신을 따라갔던 일이 있습니다.

이삭의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중에 장자는 에서였지만 영적인 장자권은 야곱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와 야곱이 엄마 뱃속에서 싸울 때 그 일로 기도하던 이삭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에서가 형이지만 영적인 장자권이 동생 야곱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에서를 불러서 별미를 요구하고 영적 장자권을 잃어버린 에서를 축복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삭의 이런 실수 때문에 형제인 에서와 야곱이 원수가 됩니다. 그리고 20년 이라는 세월동안 가족이 얼굴을 보지 못하는 불행한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기도제목을 하나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노년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록 나이가 먹어서 외모는 볼품이 없을지라도 영적으로 내적으로 인격적으로 더 아름답고 고상해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노년을 위한 기도는 정말 중요한 기도입니다. 노년을 위하여 연금을 들고 저축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60살 정도 되면 하던 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전 3:1,6 말씀대로 범사에 기한이 있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 60이면 할머니 할아버지 소리 듣기도 민망할 정도로 젊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인 분위기는 하던 일을 내려놓아야 하는 분위기입니다. 하던 일을 내려놓고도 2,30년은 살아야 하니 노년을 위한 기도는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저축하는 것과 같습니다. 열심히 저축해놓으면 필요한 때에 찾아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년을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해놓으면 노년에 기도의 응답으로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하나님께 사랑 받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 받고 자신도 만족스러운 모습을 유지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에는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할 때가 옵니다.
다윗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거인 골리앗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3m나 되는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쓰러뜨리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거인 앞에 선 작은 체구의 다윗, 그의 손에는 물맷돌이 들려져 있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조롱합니다. 다윗은 자기를 조롱하는 골리앗을 향해서 돌진합니다. 그는 자기 손에 들린 물매를 돌립니다.

그가 돌리는 물매에서 조그만 조약돌 하나가 날아갑니다. 조그만 조약돌이 얼마나 힘 있게 날아갔는지 골리앗의 이마에 박힙니다. 그리고 거인이 땅 바닥에 쓰러집니다. 다윗은 재빠르게 달려가서 골리앗의 칼을 뽑아 목을 칩니다. 다윗의 승리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용기백배하여 블레셋을 물리칩니다.

다윗을 생각하면 병들어 누워있는 모습보다는 이렇게 강한 모습,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다윗은 넘치는 에너지로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전쟁을 할 때마다 승리했고, 군인으로 평생을 보냈지만 시를 짓고 노래를 만들고 수금을 타고 노래를 하는 등 폭발적인 영적인 에너지와 육체적인 에너지를 발산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이가 많아 늙고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시 110:3에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해야 됩니다. 목회를 하든, 선교를 하든, 찬양단을 하든, 주방 봉사를 하든, 운전을 봉사를 하든, 무슨 일을 하든지 즐거이 해야 됩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이 주께 나온다고 말씀하시는데, ‘새벽이슬 같은 청년’이 얼마나 좋습니까? 새벽이슬은 은혜를 가리킵니다. 주의 일은 은혜를 받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슬을 받지 못한 풀은 마르게 됩니다. 이슬을 받은 풀은 푸르고 힘이 있습니다. 물이 공급되지 않은 나무는 메마르게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물이 충분히 공급되는 나무는 푸르고 열매가 풍성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푸르고 힘이 넘치게 하려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다음 주 주일부터 수요일 까지 2009년 성령축제가 열립니다.

우리교회는 해마다 오순절을 맞이하여 성령 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기 위하여 성령집회를 합니다. 이번 집회에도 새벽이슬과 같은 은혜를 받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소낙비와 같은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새벽이슬 같은 청년’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청년의 때가 잠깐 만에 지나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새벽이슬은 해가 떠오르면 사라지고 맙니다. 청년의 때가 화려하고 좋지만 잠깐 만에 중년이 되고 잠깐 만에 노년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젊은 목사’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목사님들 모임에 가면, 제가 가장 젊은 목사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저보다 더 젊은 목사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저도 이제는 흰머리가 제법 많아졌습니다. 얼굴도 나이 먹은 티가 좀 납니다. 제 큰 아버님께서 한번은 저에게 “너도 곱더니 나이 먹은 티가 나는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 소리를 들은 지가 벌써 5년 정도가 되었고, 큰 아버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늙습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전도서에서 기자는 전12:1-8에서 노인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 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 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길거리 문들이 닫혀 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며 음악 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또한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정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의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객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니라.

은 줄이 풀리고 금 그릇이 깨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지고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서 기자가 노인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이유는 젊을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전12:1 “너는 청년의 때에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 12:13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장례를 준비해야 할 때에 혼인을 준비하지 마십시오.
매튜 헨리가 본문의 내용을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을 그 때에 다윗의 신복들은 장례 준비를 해야 하는데 혼례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때에 맞게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윗은 이제 죽을 나이가 된 것입니다.

그는 겸손히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데 아비삭을 붙이고 있습니다. 겨울에 씨를 뿌리고, 소낙비가 오는데 추수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듯 다윗의 신하들도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12장에 보면 장례를 준비해야 하는데 창고를 지으려는 어리석은 부자가 나옵니다. 그는 소출이 풍성하여 창고를 더 짓고 곡식을 쌓아두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그는 자신의 영혼에게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장례를 준비해야 하는데 창고를 지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장례를 준비해야 하는데 혼인을 준비했기 때문에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첫째 문제는 국가적인 혼란입니다. 아도니아가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국론 분열을 초래한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이 물러날 때를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으니 아도니아가 왕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둘째 문제는 자식 간에 큰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아도니아가 밧세바에게 아비삭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 일로 아도니아가 솔로몬의 칼에 죽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은 어떤 때라고 생각합니까? 눅 21:8에 근거하면 지금은 주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여름에 아이들과 3박4일 일정으로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고 가정해봅시다. 삼일간 잘 놀고 사일 째 오전이라면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합니다. 지금이 그런 때입니다. 주의 재림이 멀지 않았습니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한 후 첫 번째로 모신 손님이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이 빌리 그레함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 세계의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그때 빌리 그레함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역사는 예수님의 재림을 향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얼마나 남았는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누구든지 재림의 주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멀든지 가깝든지, 우리의 죽음이 멀든지 가깝든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은 심판의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는 재림의 주님을 맞이할 사람들입니다. 장례를 준비해야 할 다윗이 혼인을 준비했듯이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다 그렇게 한다고 나도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당시에 왕의 몸을 따듯하게 할 여인을 구하는 것은 주변 나라들의 풍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왕이라면 그런 일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다윗과 다윗의 신하들은 주변나라들의 풍습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다 하는 일이라고 무작정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과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는 세상을 따라가느냐 아니냐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엡2:1-3에서 신자들의 예수 믿기 전의 상태를 말해줍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첫째,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서 행했습니다. 둘째, 이 세상 풍속을 좇았습니다. 셋째,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습니다. 넷째,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습니다. 다섯째,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세상이 하는 것을 우리가 해도 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명절을 지키는 것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절에 모여서 제사하거나 노름을 하거나 술판을 벌리는 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할 수 있어도 믿는 사람들은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고 있고 양심에 걸리는 일이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에 필리핀에 가서 송집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감사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등을 돌리고 관계를 끊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과 함께 관계를 맺고 삽니다. 하지만 그분들처럼 세속적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송집사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이 감동이 되어 송집사님이 태권도 도장을 세우고 선교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믿음도 없는 분이 100평의 홀을 아무런 대가없이 사용 하도록 내어주었습니다. 불교신자가 400kg의 태권도 도복을 공짜로 공급해주었습니다. 필리핀 현지인들이 대형거울 여섯 개를 달아주었고, 자신들이 법인을 만들어서 송집사님의 사역을 푸드사역으로 돕겠다고 나서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지금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는 사람들에게 자신들처럼 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도 믿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구별된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하라고 강요할 때 그 강요를 못 이기고 그들처럼 산다면 그들은 우리를 보고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그런 모습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나의 작은 유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지 마십시오.
다윗이 아비삭을 받아드린 것은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한 여인의 일생을 망치는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아비삭은 다윗의 첩이 되었습니다. 왕의 첩이었던 사람이 누구와 다시 결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비삭은 평생을 외롭게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다윗의 이런 행동은 주님의 십자가 정신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어떤 희생을 요구하시는 것 같지만 그것은 주님이 이기적인 욕망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복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왕상 17장에 나오는 사르밧 과부에게 엘리야를 공궤하라고 명하신 것은 사르밧 과부를 괴롭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 남은 마지막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대접하게 하는 것은 사르밧 과부를 고통스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순종으로 가루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기름병의 기름이 다하지 않는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번에 필리핀의 송집사님에게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물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신 송집사님의 장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송집사님의 희생정신입니다. 송집사님은 제 설교 중에 “믿는 사람은 손해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손해 보는 일이 있어도 받아드리고 감사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제가 그곳에서 송집사님을 도와주시는 분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그분들이 송집사님의 그런 순수함 때문에 송집사님을 돕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몇 번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삭처럼 억울하고 손해는 보아도 내가 희생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면 손해를 볼 것 같아도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로 내게 유익이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나의 작은 유익을 위하여 남을 희생시키면 그 일로 얻게 되는 작은 유익보다 더 큰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남의 희생시켜 나의 유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희생해서 남을 유익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