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노인 에게서 배운다

한 노인에게서 배운다/ 삿19:16-21/ 2005-01-19

한 노인에게서 배운다
삿19:16-21





한 노인

한 레위인이 저녁 해 질 때 기브아에 도착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고대 관습대로 거리에 앉아서 하룻밤을 유숙할 집을 찾았지만, 아무도 이들을 영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숙박비를 준다고 해도 그들을 맞이할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난처한 일입니다.

그 때 밭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레위인의 일행이 거리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누구며,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우리는 에브라임 사람으로 베들레헴에 갔다가 집에 돌아가는 길인데, 아무도 우리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양식이 있어서 큰 폐를 끼치지 않을 것인데, 아무도 우리를 영접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노인은 레위인 일행을 집으로 영접해서 그들의 발을 씻기고 먹을 것을 주고, 나귀에서도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는 노인(16절)

16절을 봅시다. “이미 저물매 한 노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오니 그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 산지 사람으로서 기브아에 우거하는 자요 그곳 사람들은 베냐민 사람이더라.”

레위인의 일행을 영접한 노인은 누구입니까? 그는 기브아에 살고 있지만 에브라임 사람입니다. 그는 기브아에 우거하는 자였습니다. 잠시 사는 나그네였지만 열심히 일했습니다. 노인이었지만 피곤을 모르고 해가 질 때까지 일했습니다.

당시 기브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나그네인 노인처럼 열심히 일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빈둥거리다가 해가 지면 거리로 나와서 방종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자기 땅에 사는 젊은이들이 일하지 않고 마귀의 종노릇 하였습니다. 남색을 자행하였습니다. 소돔성과 비슷했습니다.

기브아의 젊은이들과 한 노인의 삶을 비교해 보면, 한 노인이 얼마나 건강하게 살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나그네를 영접해서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한 노인의 모습에서 우리 부모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부모님들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시대를 사셨습니다. 일본의 식민지 시절과 육이오 동란과 보릿고개 시절을 몸으로 겪으셨습니다. 포기하고 좌절할만했지만 결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기어이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부모님들이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젊은 우리들은 더욱 일할 때입니다. ‘누가 일하고 싶지 않아서 일 안 합니까. 일거리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3D 업종은 외국인들의 차지입니다. 일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에 대한 건전한 직업의식이 부족합니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입니다. 땀 흘려 일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노동의 신성함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너무 빨리 퇴근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일할 때입니다. 건전한 삶의 방식을 잊어서 안 됩니다. 공부에 대한 열정은 세계 일등일 것입니다. 일에 대한 열정은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나라만큼 학력이 높은 국민이 있습니까. 일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배운 대로 일합니까. 건강하게 일하고 건강하게 살려는 인생관이 흔들려서 안 됩니다.

부모님들은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가정으로 돌아가서 식구들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당신이 희생했습니다. 교육을 위해서라면 아까울 것이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쉽게 삶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가정을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자살사이트가 웬 말입니까? 이혼 천국이 웬 말입니까? 우리 부모님 때에는 듣지도 생각도 못한 일들입니다. 책임감으로, 사명감으로, 이것이 인생이라는 본보기로 사셨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자녀와 가정을 위해 희생하신 모든 부모님들을 존경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게 된 것은 부모님들의 땀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부모님들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식구들이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부친의 사업 실패로 다른 집과 다를 바 없이 어렵게 살았습니다. 산동네 전세방에서 시작해서 여러 번 이사하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에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와서 놀랐습니다. 비탈진 한남동 산동네 올라오는데 힘이 드셨고, 단칸방에 책상 하나 없는 모습에 놀라셨습니다. 중학교 첫 시험에서 반에서 일등을 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뭔가 기대하고 오신 선생님에는 책상 하나 없는 단칸방에 적지 않게 놀라신 것 같았습니다.

작가 최인호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책을 쓰면서 많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생각하니 슬픔이 솟구쳐 올라서 많이 울었답니다.

“나는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의 어머니로 보지도 못하였고, 어머니의 고통과 비명 소리를 듣지 못하였던 비정한 자식이었다. 어머니는 쓰레기처럼 내 마음 속의 하치장에 함부로 버려졌다... 어머니는 그토록 고생하여 지문조차 남아 있지 않은 손으로 수고하여 훌륭하게 자식들을 키웠지만 머리는 좋은 대신 몰인정한 자식들에 의해서 독방에 감금되었던 종신형의 죄수였다.”

부모님을 외롭지 않게 해야 합니다. 전화 한 통화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립니다. 그 흔한 핸드폰 하나 부모에게 선물 못합니까. 어린이날에 아이들이 가장 기대하는 선물이 무엇이었습니까? 핸드폰이었습니다. 우리 아이에게 무슨 선물을 받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신문에 보도된 대로 핸드폰이라고 했습니다. 목사의 자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핸드폰이 얼만가 알아보았더니, 괜찮은 것은 한 오 십 만원은 한답니다. 아무 거나 사 주면 받지도 않습니다. 큰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핸드폰이 필요했는데, 집 사람이 쓰던 핸드폰을 준다니까 핸드폰 없어도 괜찮다고 거듭 사양했습니다. 착한 아들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아이들처럼 신형을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핸드폰 선물합시다. 핸드폰 요금도 내 드립시다.

핸드폰 못 해드리면 안부 전화라도 합시다.

노인이 되면 멋을 부립니다. 노인이 주책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얼마나 외로우면 멋을 부리실까,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머리에 물도 드리시고, 높은 구두도 신으시고, 머리도 하시고, 드시고 싶은 대로 드시고, 옷도 예쁘게 입으시고, 걸어 다닐 수 있을 때 어디든 가시게 합시다. 다 외로우셔서 그렇게 하신답니다. 다 이해합시다. 얼마든지 하고 싶은 대로 하시도록 합시다.

최인호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에서 치매가 있으시고,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다리가 아파서 걸음도 잘 걷지 못하시는 어머님에게 죄송스런 마음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는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있다. 시간이 없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게 아니라 어머니의 늙으신 모습과 죽음을 앞두신 그 모습이 보기에 마음이 불편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네게 어머니는 이제 어머니로 비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슬프다. 이제 어머니는 우리의 삶이 결국 저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생로병사의 어떤 견본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나는 슬프다... 저 어머니가 우릴 키우셨다. 어머니가 마치 개구리처럼 오그라 붙으시고 노망이 들으셔도 어머니를 목욕시키고 어머니의 시든 젖을 빨면서 지난 일들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나누는 그런 아들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자신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귀한 것은 얼굴을 맞대고 부모님과 함께 있는 시간입니다. 이보다 더 큰 효도가 어디 있습니까? 잘하는 부모가 누구입니까. 자식 앞에 나타나지 않는 부모라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것은 부모님 사셨을 때 이야기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에, 부모에게 할 수 있는 작은 것이라도 다 해야 합니다.

자녀 된 우리가 부모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합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공경은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과 정성으로 해야 합니다. 부모님들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에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생활비 염려 없도록, 병원비 염려 없도록, 여행하고 싶을 때 염려 없도록, 할 수만 있다면 부모님의 노년에 불편이 없도록 합시다. 형편이 안 됩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관심이 없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핑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부모가 있어서 우리 교육시켰습니까. 먹고 남아서 자식들 고생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까.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 반도 못 따라 가지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생명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육신의 부모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가 없을 것입니다. 육신의 부모를 섬기지 않는 자가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까? 산 자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공경과 부모 공경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조건입니다. 무슨 큰일을 하는 것보다,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보다 부모 공경이 사람다움의 첫 조건입니다.





손님을 대접하는 노인(20-21절)

20-21절을 봅시다. “노인이 가로되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 하고 그를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서 나귀에게 먹이니 그들이 발을 씻고 먹고 마시니라.”

노인은 레위인의 일행을 아무런 조건 없이 하룻밤 유숙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손님을 대접하는 사랑의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해방된 백성입니다. 가나안으로 오는 광야 40년에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배고프고 목마르고 길이 험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이기고 가나안에 정착한 백성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생존의 방식입니다. 지난날 받은 은혜를 갚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손님을 접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깊은 타락에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당시 기브아는 남색과 정욕에 빠졌습니다.

기브아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의 법을 잊었거나, 알고도 이행하지 않을 때, 에브라임 산지에서 온 한 노인이 이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숙박비를 준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이 노인은 스스로 부담했습니다.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는 자리 말라.” 얼마나 친절했던지, 손님의 발을 씻고 먹을 것을 줄 뿐 아니라, 나귀의 먹을 것도 주었습니다. 억지가 아니라 본심으로, 생색만 내는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거짓이 아니라 진심으로 나그네를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사사 시대는 왕이 없으므로 각기 제 길로 가는 시대였지만, 이 노인은 한결같이 신앙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어두운 세상에 빛입니다. 아직도 신앙의 전통을 잊어버리지 않은 빛과 소금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시대가 악해도,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한 노인은 신앙의 길을 간 우리 부모의 얼굴입니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준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유산입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은퇴 설교에서 “기도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치 아니하리라” 하였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 전통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부모님들의 기도입니다. 어려운 시절에 기도는 희망이었습니다. 새벽마다, 밤마다, 예배당이나 기도원에서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부모님의 기도의 덕분입니다.

거리마다 흔히 볼 수 있는 교회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부모님들의 신앙의 열정에서 온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핍박도 받았습니다. 전쟁의 폐허에서 먼저 교회를 세웠습니다. 자치 자립 자전이 한국 교회 선교의 3대 원리입니다. 우리 목사님을 세우고, 우리 스스로 헌금하고, 우리 스스로 당회와 노회와 총회를 조직해서 자립하는 교회를 든든하게 세웠습니다. 한국 사람은 교회 세우는데 일등입니다. 한국 사람은 세계 어디를 가나 교회부터 먼저 세운다고 합니다. 교통사고, 40대 사망율 등 세계 일 이등을 다투는 것이 여럿인데, 교회 세우는데 세계 일등이라니 얼마나 뿌듯합니까?

성경중심, 교회 중심, 하나님의 영광! 이것이 바른 교회의 터전입니다. 바른 교회가 세워졌기에 세계 선교 역사에 찾아볼 수 없는 교회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바른 교회가 세워졌기에, 선교 백년에 세계 선교를 할 수 있는 힘 있고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신앙의 부모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기도의 무릎이 있습니까. 성경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습니까. 교회의 일이라면 집이라도 팔아서 바쳤던 헌신이 있습니까. 전도에 대한 열심이 있습니까.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습니까.

젊은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된장은 묵은 것이 맛있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묵은 된장 맛나도록 합시다. 인터넷 하듯 하지 맙시다. 인터넷은 속도와 비인격의 문제가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늦는다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화면이 뜨는데 조금도 시간이 걸려도 참지 못합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넘치는 것이 정보입니다. 넘치는 것이 또 있는데 욕과 음란한 것입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합니다. 온갖 음란한 것이 넘칩니다. 교회 홈페이지에도 음란물이 도배를 합니다. 며칠만 지우지 않으면 낯뜨거워서 볼 수 없습니다. 인터넷이 우리나라의 힘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역기능은 줄여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벗어나야 합니다. ‘빨리, 빨리’를 주의합시다. ‘내 맘대로’를 주의합시다. ‘감각대로’를 주의합시다.

사람과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더욱 그렇습니다. 초대교회는 가정교회였습니다. 함께 식탁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믿음의 가족이 친척보다 더 가깝습니다. 교회를 왜 못 옮깁니까? 하나님도 하나님이지만, 목사님과 정들어서 못 옮깁니다. 교회에 헌금한 것 아까워서 못 옮깁니다. 축의금이나 조의금 낸 것 아까워서 못 옮깁니다. 그만큼 성도와 관계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좋아하고, 또 성도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헌금도 하고, 축의금이나 조의금도 하고, 남에게 밥도 잘 사고, 목사님 대접도 잘하도록 신경 씁시다. 아무리 성경공부 많이 하고, 훈련받았다 해도, 신앙이 좋다고 해도 옆에 사람이 없으면 잘못된 것입니다. 노인과 유치부 아이들이 친구가 되는 신앙생활이 정상입니다. 장차 임할 하나님의 나라는 사자가 어린 양과 함께 뛰놀고,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습니다.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젊은이나 노인이나 함께 손잡을 때 좋은 신앙의 전통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젊은이답지 않게 간도 작고, 헌신이 없습니다. 우리 부모 세대는 통일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지금 젊은이는 통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배고플 때 세계선교를 시작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가난할 때도 교회 건축했는데, 지금은 뒤고 안 돌아보고 갑니다. ‘죽든지 살든지 이 몸을 주님께 드립니다’ 하고 헌신합시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입니다. 통이 크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난장이가 되지 말고, 신앙의 대장부가 됩시다.

우리는 부모 세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좋아졌는데, 신앙은 어떠합니까? 한국 경제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렸다는 비판이 있는데, 과연 우리 신앙도 그런 것 아닙니까. 아직 70% 이상이 믿지 않는데, 교회가 시들고 있다니 말이 안 됩니다. 꽃이 피기도 전에 벌써 시들고 있지 않습니까.

노인이 손님을 대접하고 발을 씻기고 먹을 것을 공급할 때, 젊은이들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빨리 잊어서 안 됩니다. 흑암에 있던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 빛을 잃어버려서 안 됩니다. 처음사랑을 회복합시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의 힘입니다. 일만 불 문턱을 넘지 못하고 십년 째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국가 경쟁력이 인도나 말레이시아나 중국보다 못하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걱정입니다. 우리의 희망이 무엇입니까. “할 수 있거 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신앙에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불가능에 도전했던 신앙의 정신이 우리의 힘이고 경쟁력입니다.

우리 정치가 좌경화 되었다고 합니다. 공평과 분배와 의에 관심을 갖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대로 모든 것이 개혁되고 고쳐지고 잘 된다고 고집해서 안 됩니다. 인간의 부패성만 아니라,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대와 희망과 가능성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고소와 시비와 투쟁과 논쟁과 재판으로 얼룩져서는 안 됩니다. 인간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아서 안 됩니다. 개혁한다고 개혁이 안 됩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빈대 잡다가 초가삼간 태워서 안 됩니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 우리가 부패하고 죄를 짓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이 땅에 묻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백성에게 내일의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가족과 자녀를 위해 온갖 수고를 다하신 부모님들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세월이 빠릅니다. 자녀 된 우리가 벌써 부모가 되었습니다. 우리 부모에 비하면 부족하기 그지없는 변변치 못한 부모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교회와 복음을 위해 열정을 다하며 가정과 자녀에게 축복을 전하는 참 부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