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위의 노년

다윗의 노년에/왕상1:1-10 /2002-03-28

다윗의 노년에
왕상1:1-10





세계적인 설교자 중에 캠벨 몰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몰간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그 아들 넷이 다 목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생신에 4형제가 모두 모였습니다.
목사 5명이 지금 가족들 친척들과 함께 다 한 방에 모여있었습니다.
그 때에 친척되시는 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방에 있는 사람들 중에 누가 제일 설교를 잘하십니까?>
그러자 아들들은 의논할 것도 없이 순간적으로 <어머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캠벨 몰간 목사도 역시 <나도 동감이오.>라고 수긍했습니다.
그 아들 네 명이 모두 목사가 되기까지 그 어머니가 아주 열심히 잘 가르쳤다는 것이 그 결론이었습니다.
스잔나 웨슬레는 19명의 아들 딸을 낳아 양육했는데 날마다 성경을 들려주고, 기도는 시간표를 짜서 한 아이 한 아이를 불러 기도했습니다.
그 속에서 요한 웨슬레나 챨스 웨슬레와 같은 위대한 인물이 나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노년, 이제 거의 그 생명이 꺼져갈 무렵에 일어났던 일을 살펴봅니다. 아버지 다윗의 생명은 마치 바람 앞에 등불처럼 꺼져가는 그 때에 그의 아들 아도니야는 스스로 높이고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과 함께 반역이 아닌 반역이 일어나는 장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도니야의 행동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 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쉽게 말하면 제 자식 예뻐서 아무리 잘못을 해도 그냥 덮어주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사랑하는 자녀에게는 채찍을 드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하지만,
귀한 아들 둘을 잃은 다윗은 아도니야를 대할 때에 그냥 <오냐, 오냐>했다는 말입니다.
스잔나 웨슬레가 자녀들에게 아주 엄격한 벌칙을 가지고 훈련했다는 것은 우리가 다 익히 알고 있는 바입니다.
오늘날에도 자녀들에게 채찍을 들지 않는 버릇없는 자녀로 키우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멀지 않은 장래에 그 자녀로 인해 골치 아픈 일들이 생깁니다.
부모의 죽음을 앞에 두고 재산 싸움하는 자녀들이 있다는 말들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혀를 내 찹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꼭 그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 다윗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왕권을 차지하려는 아도니야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이제 다윗의 노년에 대해 열왕기 기자가 기록한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옷깃을 여미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은 날이 옵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읽으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여러분 중에 <맞아 요즘은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가 않아>라고 긍정하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이제 주님 만날 날이 좀 더 가까우신 분들일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아직 <도대체 왜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을까? 이불 속에 얼음이라도 들었나?>라고 생각이 드는 사람은 아직 그래도 피가 뜨겁게 끓고 있는 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다윗은 원기가 있는 활동가였습니다.

하나님이 허락만 하셨다면 알렉산더처럼 전 세계를 점령해볼 만한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맹렬한 불길이 그의 가슴속에서 불 일 듯이 타고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의 피가 싸늘해지고 피의 순환이 불순해져서 침상에만 틀어박혀 있어도 체온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은 날이 다윗에게 찾아왔습니다.
그것도 왕실의 침구를 가지고도 소용이 없는 날이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그 날이 옵니다.

그 날이 올 것을 생각하고 의기소침해지자는 말이 아닙니다.
아직 그래도 이렇게 교회당에라도 나올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가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은 날이 이르렀을 때에 <좀 더 젊었을 때에 주님 앞에서 잘살 걸>하고 후회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제 거동하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서 주로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하면,
<좀 더 젊었을 때 부지런히 놀러 다닐 걸>하고 후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은 그 때에도 정신 못 차린 사람입니다.
아무튼 이곳에 나와서 앉아있을 수 있는 분은 아직도 잘 살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밤이 찾아오기 전에 주어진 우리의 위치에서 정말 성도답게 살아서 훗날 후회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노라>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신복들이 다윗에게 취한 태도를 봅니다.
신복들은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은 다윗을 위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근동지역의 풍습을 따라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해서 따뜻한 피를 가진 처녀가 몸으로 따뜻하게 해주도록 결정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대부분의 성경주해가들은 아무런 주해를 달지 않습니다.
잘했다 잘못했다 평가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복들이 다윗에게 그 이야기를 고했고 다윗이 허락을 했기 때문에 젊은 처녀가 다윗에게 오게되었으니까 말입니다.
다윗이 젊었을 때 끓는 피로 인한 잘못은 지적하기가 쉬워도 <그 성군 다윗이 나이가 들어서도 잘못할까> 하고 지적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저는 매튜 헨리가 지적했던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윗이 마지막 나이가 들어서도 역시 하나님 앞에 잘못하는 부분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한 사람을 완전히 희생시키는 것입니다.
이제 그 동녀는 다른 사람에게 결혼할 수가 없는 몸이 되고 맙니다.
다윗의 아내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왕상2장에서 아도니야가 그 수넴여자를 아내로 구한 것이 큰 잘못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다윗의 신복들은 다윗을 위해 일을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먼저 주변 국가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본받아서 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의 왕으로서의 다윗에게 어떻게 행해야 할 지를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도 역시 이런 실수를 하기가 쉽습니다.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왔으니까,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 범죄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우선 당장 자기에게 유익이 되어서 허락했는지 모릅니다.
주변국가가 다 그런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동녀 아비삭과 관계되어서 그의 아들 아도니야는 솔로몬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매튜 헨리가 이 부분을 재미있게 설명했습니다.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을 그 때에 다윗의 신복들은 장례 준비를 해야 하는데 혼례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말입니다.
아주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주님이 부르실 날이 다가올 때 다윗도 그렇고 다윗의 신복들도 그렇고 다들 장례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도 주님 맞을 준비해야 하는데 다른 준비하는라고 바쁜 것은 아니가?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래도 한평생 하나님 앞에서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다윗이 나이가 들어서 이렇게 어리석은 일을 행하게 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나이가 들면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큰 특징중의 하나는 사회성이 없어서 이기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들 틈에서 혹은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점점 그 이기심들을 짓누르고 사회성을 길러 갑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 다시 이기적이 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자기만 생각하고 행동을 합니다.
다윗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게됩니다.
저는 사무엘서를 읽다가 열왕기서를 대하게 되면 왜 그렇게 다윗이 무기력해 보이는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분이 <성도는 생각을 잘 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이가 들어도 생각을 잘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이가 들면서 자기가 쌓아놓은 기득권을 가지고 범죄하는 쪽으로 사용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다들 그렇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다윗의 아들 아도니야의 행동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선택하는 권한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다윗의 왕위를 솔로몬으로 하여금 계승하도록 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다는 것을 역대상 22장 9,10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도니야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기에게 왕위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결국 다윗 왕의 노환의 때를 이용하여 왕위 찬탈을 시도한 것입니다.
결국 아도니야는 하나님과 다윗 왕을 무시한 행동을 시도한 것입니다.
자기의 어떤 힘을 길러서 그 힘으로 한 번 밀어붙여 보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도니야가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아도니야의 계획이 잘못된 줄 알고도 같이 모의하고 도와준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들끼리 힘을 모으고, 계획을 아무리 거창하게 잘 세워도 하나님을 무시한 그 행동은 결국 망하는 길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잘 보여줍니다.
7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래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아도니야와 함께 합니다.
그러나 그들도 같이 망하는 길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악인들이 아무리 별의 별 모의를 하고 힘을 모은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파하실 때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어떤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지금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이 아도니야와 관련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누구와 함께 하느냐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루야의 아들 요압, 제사장 아비아달은 그래도 비교적 다윗에게 있어서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압은 훌륭한 장군이었습니다.
아비아달은 좋은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도니야와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제사장 아비아달은 제사장 직분을 파면 당하고,
요압은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편에 내가 서 있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하고,
두 번째는 내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 동행하느냐? 어떤 사람들과 교제를 나누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시편기자는 그 1편에서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찾는 것이 복입니다.
특별히 성도는 예배시간에는 예배당에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기도할 시간에는 기도의 밀실에 있어야 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의 위치에 있는 것이 정말 복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성도가 늘 불신자들 노는 곳에만 함께 있으면 우선 당장은 재미있는 것 같을 지 모르지만 그것으로 인해 슬피 울 날이 이릅니다.
그 다음 이 아도니야의 행동과 관계해서 한 가지 더 볼 것은 처음에도 말씀 들렸듯이 다윗의 잘못입니다.
그 부모의 잘못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자녀를 대할 때에 채찍을 들지 않는 것은 절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신앙의 바른 길을 걸어가지 않는 자녀를 보고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버린 자식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다른 부분에서는 잘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자녀 교육에 있어서 다윗은 빵점이었습니다.
이제 아도니야의 행동을 바라보면서 여러분들도 자녀들에 대한 교육, 특별히 신앙교육에 더욱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 론
우리도 이불을 덮어도 따듯하지 않은 날이 올 것입니다.
어두운 밤이 찾아오기 전에 주어진 우리의 위치에서 정말 성도답게 살아서 훗날 후회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노라>고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고,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 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냥 행동하고 말하고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며,
내가 오늘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을 잘 살피고,
나는 지금 어떤 사람들과 같이 보조를 맞추고 있는가 하는 것도 살피며,
자녀들을 신앙인으로서의 교육에 더욱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