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받을 때에 눅3:21-22
이제 요한에서 예수에게로
저는 지난 주에 세례 요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모든 행동거지는 오실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랜 하나님의 침묵 속에 좌절한 백성들에게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우리 또한 요한처럼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천한 노예나 하는 신발끈 매고 푸는 일도 할 수 없을 만큼 낮은 사람으로 자신을 여겼습니다. 예수님 또한 선생이요 주님이셨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은 올바른 소리, 복된 소리를 전하다가 감옥에 갇힙니다. 바로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과 모세도 현재의 안락한 삶을 스스로 포기하고 더 나은 하나님 나라의 본향을 위해 고난을 받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부터는 드디어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역사의 중심이 되신 예수님에게 시선이 모아 집니다. 역사는 이 주인공으로 말미암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집니다. 지금까지는 마치 사회자가 출연해서 노래를 부를 가수를 소개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가수가 무대에 서면 사회자는 조용히 방해되지 않도록 무대 뒤로 나갑니다. 지금까지는 오픈 경기였습니다. 이제는 정말 본선경기입니다. 그 주인공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부터는 드디어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십니다.
첫째, 예수님만 자랑하자
그런데 누가의 기록을 읽어보면 정작 세례를 베푼 요한의 이름이 빠져 있습니다. 단지 모든 백성이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도 세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 따르면 분명히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 사람은 요한입니다. 왜 누가는 요한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일까요? 누가의 실수나 잘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었다는 역사적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는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암시적으로 인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둘째\\\'는 초점을 예수님께 맞추고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세례를 베푸는 요한이 더 중요합니까? 아니면 세례를 받는 예수님이 더 중요합니까? 세례를 받는 예수님이지요. 그래서 누가는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요한의 이름을 빼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서울대나 부산대, 고신대 병원장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서울대학교와 부산대학교, 고신대학교 등의 총장이 누구인지를 아십니까? 병원장과 총장이 누구인지를 잘 모르는 것이 일반적일 겁니다. 그래도 그 단체는 탄탄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각 조직의 단체장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단체의 명암이 엇갈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그 단체 안의 사람 외에는 누가 단체장인지를 잘 모릅니다.
그런데 교회는 다릅니다. 부산에 있는 교회를 예를 들어 봅시다. 수영로 교회하면 정필도 목사님, 호산나로 이름을 고친 하단의 새중앙 교회는 최홍준 목사님, 이렇게 교회와 목사님이 동일시됩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시게 되거나 은퇴하게 되면 여러 가지 교회에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생깁니다.
이것을 두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는 교회의 최종 리더십이 누구냐에 따라 교회 부흥 성패가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가 바로 서면 교회가 부흥하고, 지도자가 영적으로 잠자고 있으면 교회 또한 잠자게 마련입니다.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교회가 목사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없어도 교회는 안정되고 계속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자기 교회 목사님을 자랑합니다. 특히 부흥하는 교회의 교인들은 자기 목사님을 너무 사랑하여 자랑하는 것을 봅니다.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목사 자랑, 교회 자랑하면서 하나님 자랑, 예수님의 십자가 자랑이 없다면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지 교회와 목사 자랑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로마서 14장 8절 말씀처럼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값주고 사신 온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은 먹든지 마시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위대한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빌립보서는 노년의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입니다. 그 인생의 마지막에 쓴 편지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감추어져야 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이 증거 되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해야 합니다.(마6:3-4)
내 평생 살아온 길(예수 찬미 74번의 3절)
예수님 나의주님 사랑의 내하나님 이제는 예수님만 내자랑 삼겠어요 나의남은 인생길 주와 걸어가면서 예수님 복음위해 굳세게 살겠어요
예수님만 자랑하는 멋진 하나님의 백성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자랑이 되는 거룩한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우리와 같으신 예수님
예수님의 시작은 세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받으셨던 세례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세례는 첫째, 요한이 예고했던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요한이 예고했던 것처럼, 성령으로 오시며, 신들메를 감당할 수도 없는 분이라는 것,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속자라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대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알려 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세례 의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세례는 그가 어떤 분이신 지를 알리는 사건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경이 가시적인 형체로 임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는 것은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며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 것을 신학자들은 왕의 대관식이라 표현합니다. 특히 22절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은 구약의 시편 2편의 7절 말씀인데, 2편은 왕의 대관식에 사용하던 시편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세례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왕이심을 온 천하에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셔야 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마태복음 3장 13-15절에 나타납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서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신대 요한이 말려 가로되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신대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세례를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즉, 마태복음은 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까를 질문하지만, 누가복음은 예수님은 어떻게 세례를 받았나를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백성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백성들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었는데, 예수님 또한 세례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다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의 모양을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누가복음의 주제가 인간으로 오신 예수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와 동일하게 되신 분이십니다. 마리아라는 한 여자아이의 뱃속에서 단세포로부터 시작하셔서 태어나신 분이시고, 키도 자라고 지혜가 자라야 할 필요가 있는 평범한 소년이었다는 것을 누가복음은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따라 갈 수 없는 불가능한 이상을 제시하고 우리더러 따라 오라고 재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이셨기에 우리의 모든 삶의 질고와 눈물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제가 이번 주에 읽은 필립 얀시의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라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하겠습니다.
\\\"다른 신들은 강했으나 당신께서는 약했다. 그들은 당당히 걸어서 옥좌로 나아갔지만 당신께서는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의 상처에는 오직 하나님의 상처만이 말을 걸 수 있다. 다른 신들은 상처를 입지 않았으나 당신께서만 홀로 상처를 입었다.\\\"
어떤 종교에도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심지어 코란에는 그들의 유일신인 알라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헬라 사상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위대한 한 철학자는 \\\"어느 누가 제우스를 사랑했노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역으로 제우스가 인간을 사랑했다는 말 또한 괴이한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말은 그 어떤 종교에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보시는 우리 한국 사람은 아버지의 심정을 서양 사람들 보다 훨씬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동양 사회에서, 특히 이스라엘 사회에서 남자 어른이 맨발로 뛰는 법이 없습니다. 양반은 비가 와도 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맨발로 뛰어 가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그것은 지극히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날마다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날마다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 또한 그러합니다. 히브리서 5장 8-9절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희한한 말씀을 우리에게 해 주십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모르셨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고난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도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의 고난을 배우셨습니다. 그 고난의 학교를 예수님은 잘 통과하심으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고난을 배우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고난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신다고 히브리서 2장 18절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만 그런 분이 아닙니다. 성령님 또한 우리를 다 아시는 분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님 또한 우리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 주십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그저 손가락 하나를 까닥이면서 인간사를 조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슬프고 어두운 일들이 고작 신의 손가락 하나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인생이 허망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고통받을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울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받으십니다. 성령님은 내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왜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우리와 같이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의 눈물을 아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의 깊은 고통까지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도 그 성령님을 따라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와 함께 고통받으시는 예수님은 우리 눈물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 예수님께 기도하심으로 응답받는 신자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만 자랑하고 기도하는 성도가 되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같이 세례를 받으시고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이 바로 나와 여러분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의 고난을 다 아시고 염려를 이해하시는 그분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긴 행렬에 서 계신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모습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내 마음의 슬픔과 눈물을 다 아십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분만을 자랑하고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가정에서 가사일을 하던지, 직장에서 일을 하던지, 캠퍼스에서 공부를 하던지, 우리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고, 하나님만 자랑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자랑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우리가 신이 될 수 없는 더러운 인간이기에 하나님이 더럽고 남루한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하늘에서 아무리 얘기하고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어도 듣지 않자 몸소 인간이 되셔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허물을 인해 찔리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그분이 상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분이 내 질고을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왜 그런 험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고난받으신 까닭을 히브리서 말씀은 고난받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와 같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우리의 고난을 해결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인간이 되어 고난받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신 예수님께 기도해시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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