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잔과 세례

예수님의 잔과 세례/막10:32-45

예수님의 잔과 세례
막10:32-45
맨체스터 한인교회 설교





여는 말

제각기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앞에 서서 가시는\\\'(32절) 예수님을 볼 터인데 과연 어떤 소망을 가지고 따르고 있는지... 본문에는 \\\'좇는 자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고 했는데 무엇이 그들을 놀라게 했고, 무엇이 그들을 두려워하게 한 것인가. 그것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란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혼자의 몸이면서도 대적하는 자들이 득실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겠다는 그 당당한 모습이 좇는 자들로 하여금 놀라게 했을 것이며, 그러면서도 앞으로 닥칠 그 위기가 그들을 두렵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대화 가운데서 제자들 사이에 예수님의 영광을 서로 먼저 차지하려는 다툼이 있었던 것을 볼 때 좇는 자들의 마음에는 놀라움과 기대감이 두려움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과연 예수님을 좇는 일에는 영광의 체험만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예수님께서 생명을 내주시기까지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복음은 위로와 위기를 모두 동반한다. 주님의 당당한 모습으로 인한 위로이지만 또한 복음이 몰고 오는 세상 가치관과의 대립으로 인한 위기가 그리스도인들에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다(롬 8:18; 고후 4:17).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오해하며 살고 있을 수 있듯이... 조금의 손해도, 조금의 양보도 견뎌하지 못하고 오로지 뭔가 더 나은 것을 받아내고픈 그런 생각이 우리의 믿음 생활을 채우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인 야심이 믿음을 앞지르고, 하나님의 나라의 후사는 고난을 감내해야 한다고 하는데도(롬 8:17) 하나님의 나라는 물려받으려 하면서 모양은 세상을 기업으로 얻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엄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살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가 아니라 현실로 임해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이원적인 태도와 같지 않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한결같은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과연 그러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1. 우리는 예수님의 인격 전체를 받아들여야 한다.

위기는 버리고 위로 받을 것만 취한 제자들(35절)... 충성은 없고 야심만 있는 제자들, 그런 제자들이 우리의 모습이 되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등만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내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인격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야심으로만 가득할 때에 찾아오는 결과는 \\\'요란함과 악한 일\\\'이라고 했다(약 3:16). 아론과 미리암도 자기들이 한 자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을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모세가 구스 여인을 아내로 취한 것이 흠 잡힐 만한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모세를 오히려 칭찬하신 데에는, 모세의 지도력의 원천이 자기 야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충성에 있었던 사실 때문이었다: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민 12:7). 모세의 모습은 바로 우리 예수님의 모습이었다: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히 3:2). 그러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는가? 주님은 이렇게 물으신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38절).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겐 오직 한 가지 레벨의 \\\'제자도\\\' 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고(롬 6:3), 육신대로 사는 삶을 버리며(롬 8:13)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어도 살리라는 다짐으로(요 11:25)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이 되어(마 24:45)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제자도의 모범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전체\\\'에서 배우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 중에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했던 요한과 야고보도 결국은 예수님의 인격전체를 가슴에 담고 이 제자도의 길을 걸었다. 야고보는 목 베임을 당했으며(행 12:2) 요한은 온갖 환란 가운데 유배되어 살았다(계 1:9). 아마도 그러한 자녀들의 죽음을 내다보신 주님의 아픔이 그들을 꾸중하기보다 오히려 측은히 여겨주신 이유였지 않았을까...(39절). 멋모르고 영광을 취하려는 마음으로 주님을 좇고 있는 우리이지만 결국 우리들도 주님의 인격을 닮아 자라가면서 마침내 주님의 나라를 위해 희생하길 기뻐하는 제자들의 모습으로 세워질 것을 주님은 내다보시고 계시기에 우리의 현재 모습을 용납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시고 격려해주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2. 우리는 기독교의 기초(BASIC)를 회복해야 한다.

기독교의 근본에는 \\\'겸손\\\'이 있다. 그것은 자기만을 낮추는 데에 머물지 않고 남을 높이는 데까지 이르는 겸손이다(빌 2:3). 그리고 또 다른 기독교의 뿌리에는 \\\'순종\\\'이 있다. 주님은 이 땅을 살면서 어떻게 아버지의 뜻에 그렇게 순종하실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 볼 때 그 비밀은 \\\'기도\\\'에 있었던 것을 발견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NIV, his reverent submission 순종)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기독교의 기초인 \\\'순종\\\'을 회복하려면 기도가 회복되어야 한다. 아쉬울 것이 없던 주님도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해야 할 것인가...

3. 우리는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나라의 생활패턴을 가져야 한다.

세상은 권세 부리는 것을 제일로 삼지만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자를 가장 큰 자로 여긴다(42-44절; 참조, 9:35). 주님의 섬기는 모습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시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45절). \\\'대속\\\'이란 값을 치르고 다시 사오는 것을 말한다. 주님이 치른 값은 그의 생명이었다. 우리에게 \\\'삶\\\'이 있고 그 삶의 \\\'내용\\\'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좇는 자들이라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삶의 내용은 아직도 이 세상에 젖어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다시 사 오기 위한 \\\'대속물\\\'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나의 삶이 형제를 위한 대속물이 되기를 바라는 그 소망이 우리의 생활 패턴을 이끌어 갈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섬기신 모범\\\'을 따라 살고 있는 참 제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

주님, 주님의 고난을 생각합니다. 주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주님의 받으실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장담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지만 지난 삶을 돌이켜 보면 즐거운 일만 있길 바랬고 기쁜 일만 좇아 다녔으며, 고난을 생각하는 것은 끔찍이 싫어했고, 고난은 제것이 아니라고 여겨왔습니다. 주님, 주님의 섬김을 깊이 묵상합니다. 주님은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는데 저는 어떤 값을 치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길 수 있는지요... 제가 가진 것은 \\\'이 삶\\\' 뿐인데 주께서 저의 삶을 지금까지 인도해 오신 데에는 제 삶을 대속물로 쓰시려는 뜻이 계신 것이 아닌지요... 주님, 주님의 손에 사용되는 삶이 되길 소망합니다.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로 만족할 수 있길 원합니다. 주님, 힘을 주시고, 주의 긍휼로 저를 붙들어 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