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함과 거룩함을 쫓으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히12:14-17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히12:14-17
2008-06-03 16:34:39 read : 87

우리 신자가 이 땅에 살아갈 때 추구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며 그 말씀의 이상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 말씀에서 보여주고 있는 새로운 인간과 세상을 보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계속해 나갑니다.

복음전파라는 방법을 통하여 인간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일을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거대한 비전을 가지고 이 이상을 추구하기 위해 힘써야 하지만 그 이상을 이루어 가야 할 사람의 인격적인 자질과 성품 역시 중요합니다. 이것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기는커녕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우리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셨는지 겨리적인 내용을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히브리서를 공부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만유의 후사요 창조자요, 만물을 통치하시는 분이시며, 구속자요 하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분으로서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이시오,

아론 계열의 대제사장보다 뛰어나신 분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오셨으며,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언약을 이행하시기 위하여 오신 언약적 중보자요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속죄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 분이십니다. 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결과로 우리로 하여금 하늘 성소로 자유롭게 왕래하며 교제하는 복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위하여 역사 가운데 객관적으로 행하신 일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결과로 자유롭게 하늘 성소에 왕래하는 복을 받은 우리의 행위문제와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행위란 한 사람이 살아가는 생활 방식 전체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입니다. 행위란 삶의 품행, 태도 등을 말합니다. 특히 구원받은 신자에게 있어서 행위는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합니다.

하나는 구원받아 변화된 증거로 그 사람의 달라진 내적인 삶의 표현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 배우게 될 본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목회하면서 구원받은 신자로서 합당한 행위로 나타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못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1-10:18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어떤 일을 하셨으며 우리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자세하게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히브리서 10:19-13:21까지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우리의 일상적인 행위문제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연구할 본문은 구속받은 신자의 일상행위 문제를 설명하는 부분 가운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구원받은 신자라면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면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중심으로 첫 번째로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는 명령의 의미를, 두 번째로는 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아야 하는지, 세 번째로는 어떻게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히12:14)

히브리서 저자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라고 하였습니다. “화평함”이라는 단어는 “평화”와 같은 뜻입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누구와 평화를 이루어야 할까요? 이 본문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며 살기를 힘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보면 인간적인 특성을 보면 같이 밥을 먹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같이 밥 먹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만 있으면 서로 이간질시키거나 부정적인 말을 하거나 얼굴을 찡그리고 있어서 분위기를 깨거나 관계를 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항상 자기 기분과 감정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행동양식이 매우 다른, 어떤 면에서는 완전히 상반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들과 평화롭게 지낸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19에서 “그들이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그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12에서는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과 화평함을 좇으라고 하였을 때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과도 평화롭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관계를 가지라고 하였을 때 죄악된 모습까지 인정하라는 것일까요?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으로 사는 삶을 설명하면서 덧붙여 “거룩함을 좇으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거룩함”(ἁγιασμος)은 세상과 구별되어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드려진 상태를 말합니다. 특히 이 말이 도덕적으로 사용될 때는 죄를 멀리하고 깨끗한 상태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를 “거룩한 무리들” 또는 “거룩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뜻은 한편으로는 세상과 구별된 존재요,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진 존재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를 말합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깨끗한 자를 가리켜 “거룩한 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거룩함을 좇으라”라는 의미는 세상과 구별된 존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진 자이며 여기에 합당한 도덕적인 삶을 사는 일을 힘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 본문에서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을 좇으라”라는 말씀과 “거룩함을 좇으라”라는 말씀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느낌을 줍니다. 화평함을 이루려면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가져야 하고, 거룩함을 유지하려면 그 가운데 구별된 삶의 특성이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두 말씀이 서로 결합된 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거룩한 품성에 어울릴 경우에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들과 화평해야 한다고 하면서 술 좌석에 가서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함께 요정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직원들의 회식 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똑같이 처신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합리화하면서 세상에 속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해야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나 우리 신자의 삶의 경험으로 보나 전도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을 전하는 루트를 차단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이웃과 담을 쌓고 살고, 불신자들과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을 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양면을 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라고 하는 말씀은 이웃과 평화롭고 좋은 관계를 가지되 거룩함에 모순됨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동일한 말씀이 구원받은 신자들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는 로마서 12:18에서 바울도 이와 같은 설명을 하였습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여기서 “할 수 있거든”이라고 하는 말은 참 중요합니다.

악한 사람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문제에 있어서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으면”이라고 하는 말이 될 수 있는 대로 무조건 양보하여 화평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문대로 옮기면 “가능하다면”이라는 뜻인데 무엇이 가능하다고 하는 말일까요?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지 않는다면 화평하라는 말입니다.

악을 허용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라”(마10:34-3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의와 불의, 진리와 거짓을 타협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진리를 드러내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악한 자들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불의와 거짓을 타협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신분됨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함을 유지하면서 이웃과 화평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서는 이웃의 안전과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특히 이 일은 목장교회를 통하여 잘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집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 할 수 있고, 그들이 어려움 가운데 있으면 진심으로 기도해 주고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평화로운 관계를 통하여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항상 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레일을 통하여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2. 왜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아야 하는가(히12:14)?

우리가 왜 사상과 감정과 삶의 방식이 다른 사람들과 화평하고, 또한 거룩함을 좇아야 할까요? 그 이유는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이것이 없이는”(οὑ χωρις)이라는 말은 단수입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거룩함”을 받는 말입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 “주를 본다”라는 말은 주님을 만나고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주를 본다”라는 개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적인 의미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보고 현재적으로 성령을 통하여 경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미래적인 의미로 주님이 재림하게 될 때 만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적인 개념은 주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며, 그를 만나고 교제하는 일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그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고 싶어도 우리의 삶이 거룩한 생활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우리 신자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서 화평함을 추구해야 하고,

또한 도덕적인 면에서 거룩해야 할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21에서 한 말씀은 의미가 있습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거룩함을 이루는 중요한 방편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3. 어떻게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을 수 있는가(히12:15-17)?

그러나 이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어떻게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어 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거룩함을 추구해야 하는데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노력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이미 우리는 거룩한 존재가 되어 성화가 이루어져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거룩함을 추구해야 할 책임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할 수만 있으며 화평하되 거룩함이라는 끈을 놓치면 주님을 볼 수 없고 걷잡을 수 없이 세속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웃과 더불어 화평함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거룩함을 좇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12:15-17입니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이 말씀에서 맨 앞에 있는 “너희는 돌아보아”라는 말씀은 헬라어 성경에 “에피-스코푼테스”(επι-σκοπουντες)라는 말인데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복수입니다.

그리고 이 뜻은 “자세히 살피다”라는 뜻인데, 이러한 문법적인 성격을 이해하고 번역하면 “너희가 자세히 살피므로”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앞의 주동사 “좇으라”라는 말의 부대적 상황을 설명하는 절입니다. 그래서 번역할 때 “너희가 자세히 살피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너희가 자세히 살피면서”라는 뜻은 자기 혼자 스스로 거룩함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생활을 통하여 서로 섬김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개인적인 권면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듣는 일이 중요하고, 동시에 성도들과 서로 교제하면서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고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16에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같이 성장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함께 성화(거룩함)를 이루어가며 성장하게 됩니다(Anthony A. Hoekema, Saved By Grace, 195).

그래서 교회생활에서 성도들과 교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잘 할 수 있는 시스템 가운데 하나가 우리 교회에서 시행하는 가정교회 시스템입니다. 가정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성장을 돕고, 복음을 전파하며, 이웃과 사회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 장(場)입니다.

그러면 교회 가족들과 어떤 점을 유의하여 보면서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어갈 수 있을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두 번째로는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세 번째로는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는 있는지를 두려워하며 살펴야 합니다. 이들은 어떤 자를 말할까요? 우리는 앞에서 거룩한 자가 주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교회 가족 가운데 습관적인 죄를 짓는 사람이 없는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없는지, 다른 사람을 음해하고 비방하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배생활에 빠지거나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이 일을 어디에서 체크하며 돌볼 수 있을까요? 목회자 한 사람이 다 할 수 있을까요? 목장교회에서 목자와 목녀가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교회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도 목장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쓴 뿌리가 나서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이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더럽힐까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쓴 뿌리”라는 말은 “독초”를 말합니다. 이 말은 신명기 29:17-18에서 나온 말입니다.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여기서 사용된 의미는 그 마음에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서 떠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교리나 사상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없도록 살펴야 합니다.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쓴 뿌리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교회의 공적인 예배와 모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기 마지막에 나오는 미가의 집에 우상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을 섬기듯이 목사 한 사람을 고용하여 임의대로 예배드리는 형태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기존 교회에서는 은혜를 받지 못하거나, 기존 교회의 질서를 부정하고 명목상으로는 개혁한다는 미명 아래에서 그렇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중요한 이론적 기초를 만인 제사장직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실제 루터가 『독일귀족에게 보내는 글』(1520)에 주장한 만인 제사장직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교회의 질서와 성직자를 부정한 것은 아닌데도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역사나 오늘날 교회 현상적으로 나타난 바들을 조사해 보면 교회에 해로울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온전하게 서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공적인 예배와 질서를 부정하고 자기 생각대로 섬기는 것은 교회의 쓴 뿌리요 독초입니다.

성경에 쓴 뿌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점을 자주 경계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시대에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가 일어나 르우벤 지파의 몇 몇 사람들과 모세와 아론을 대적한 일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민수기 16:3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불이 나와 250명이 죽고, 이 일로 인하여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14700명이었습니다(민16:35, 50). 쓴 뿌리는 자신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망하게 하는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교회 안에 쓴 뿌리를 제일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특별한 자격이나 기준이 되지 않으면 사람을 세우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 작은 텃밭이 있습니다. 작은 밭이기는 하지만 고추도 심고, 화초도 심어서 교회성도들에게 정서적으로도 도움이 되도록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올해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병충해가 고추 전체를 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원을 조금씩 이상한 모습으로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저는 이 현상을 지켜보면서 교회도 이와 같다는 것을 여러 차례 새겨보기도 하였습니다. 작은 오류와 교묘한 말로 사람들의 관계를 이간시키는 작은 요소들이 전체를 더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쓴 뿌리를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목자모임 때마다 성도들이 서로 나눌 때 부정적인 부분을 나누지 말고 긍정적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어떻게 문제를 풀어나갔는지를 나누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사람이 있을까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에서가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판 이야기는 창세기 25:27-34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은 에서와 야곱입니다. 어느 날 에서가 들에서 돌아왔을 때 야곱은 붉은 색의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시장하여 붉은 색의 음식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연유하여 에서의 별명이 “붉다”라는 뜻인 에돔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야곱은 그 음식을 주는 대가로 장자권을 요구하였습니다. 장자권은 축복권이요 또한 모세의 율법에 재산을 두 배로 주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신21:17).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언약적 축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언약을 이행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왜냐하면 이 언약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었지만 단순히 개인적인 언약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방이 복을 받게 되리라는 복음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갈3:8; 창12:1-3). 이러한 이유 때문에 크라프(S. G. De Graaf)는 “언약책무자”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장자권을 요구한 것은 이러한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에서는 이 장자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에서가 조부 이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받은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약속은 이삭의 후손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 때문에 이 약속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에서의 행동에 대하여 창세기 25:34에서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며 자세히 살피라”라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세상에 속한 돈이나 이익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바꾸는 사람이 없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식물이나 세상에 속한 돈이나 명예와 같은 작은 이익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그러면 장자권을 멸시한 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에서는 땅의 기름짐에서 떠나 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자기 동생 야곱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창27:39-40) 이 말씀의 의미는 에서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리 떠나고, 하늘의 이슬에서 멀리 떠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영농에 주로 의존하였던 시대라고 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저주입니다. 에서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울면서 축복을 요구하였습니다(창27:34). 하지만 이미 기회는 지나갔습니다.

바로 이 역사를 거울로 히브리서 저자는 히브리서 12:16-17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한 그릇의 식물로 인하여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는 에서를 역사적 실례로 들면서 세상에 속한 일 때문에 믿음을 버리는 사람과 비교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가 장자권을 버린 것은 단순히 세상적인 축복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진리를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나중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어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생활을 통하여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늘 성소에 자유롭게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은혜를 받은 성도들에게서 반드시 나타나야 할 삶의 양식입니다. 이러한 삶이 전제가 되지 않으면 신앙생활의 핵심개념인 하나님을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책임적인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마치 농부가 농사를 짓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어서 정성을 들여 식물을 재배합니다. 하지만 농부는 자신의 능력으로 씨앗을 발아시킬 수도 없고, 농작물을 자라게 하고 여물게 하는 비와 햇빛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수확을 위해서는 어떤 면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부는 열심히 밭을 갈고, 거름을 주어야 할 그의 책임을 소홀히 하면 아무 것도 거둘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화평함과 거룩함을 이루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지만 또 한편으로 전적으로 이 일을 이루어야 할 우리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좇으라”(διωκω)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인간의 근면과 수고를 요구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교회의 공적인 예배와 성도들과 교제하는 생활을 통하여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도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보고, 저 세상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보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