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삶을 살라

거룩한 삶을 살라/벧전1:13-17

거룩한 삶을 살라/벧전1:13-17
2001-09-14 17:47:42 read : 142

1.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삶(13-)


베드로는 1:1,2에서 자기의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인사를 한 후에 1:3부터 1:12까지에서 우리 성도들은 산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의 첫 부분인 1:13을 보면 \'그러므로\'라고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그러므로 하는 말은 우리 성도는 산소망을 가진 사람이니까 \'그 산소망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했습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옷은 통으로 된 것이어서 허리를 묶지 않으면 펄럭거렸습니다.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을 하거나 활동을 하려면 반드시 허리를 묶어야만 했습니다.
출12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려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준비시킬실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있으라고 하셨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허리를 동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단단히 준비를 하라는 말로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던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했습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정신을 차리라는 말인데 영어 성경에 보면 \'Be self- controlled\'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기 자신을 control 즉 잘 조절해야 한다 하는 말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의 본래의 뜻은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자가 되라는 말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경 딤후2:3에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군사가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절에 보면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하면서 너무 자기 마음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직들 중에도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닌데도 주일예배를 함부로 빠지는 사람들을 있는 것을 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한국 교회가 천만 성도를 이야기하면서도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만 군사라고 하지만 오합지졸들이기 때문입니다.
주일 예배를 이런 저런 그리 중요하지 않은 문제 때문에 빠졌었다면 예배에 성실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밥은 꼬박꼬박 잘 챙겨 먹으면서 일주일내내 성경 한번 읽지 않고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정신을 차리고 정기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것입니다. 또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는데 기도를 소홀히 하며 살았다면 정신을 차리고 새벽기도든지 밤기도든지 기도의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것입니다. 또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교회의 맡은 일에 충성하지 못했었다면 다시 부지런함을 회복하는 것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셨는데 움켜 쥐려고만 하고 모으려고만 했었다면 나누어 주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다시보면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전히 바랄찌어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 성도는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 살면서 희생하며 불편하게 살아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영원히 손해만 보고 절제만 하고 살아야 한다면 억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다시 오실 때 또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실 은혜가 있습니다.
고전15:19-20에 보면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 했고


또 고전15:58에서는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졌기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살 수 있습니다.



2. 과거의 사욕을 좇지않는 삶(14-16)


여기 사욕이란 물질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심 등 자기 추구의 욕망들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벧전4;3에 보면 이런 것들은 \'이전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좇던\'것으로 끝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사욕을 좇지 말고 구별된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에 나왔다가 실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는 애초에 잘못된 기대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실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아가씨를 만나는 곳 정도로 생각하고 온 사람들은 결국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3.1운동 때 교회가 3.1운동에 아주 중요한 기지가 되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에 뜻을 둔 사람들이 교회로 몰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3.1운동에 적극적이기는 했지만 독립운동만 전문으로 하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이 곧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아들 낳고 사업에 성공하는 복을 받을 거라는 기복적인 기대를 가지고 왔다가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회는 무엇인가 다를 것이고, 교인들은 무엇인가 다를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왔다가 먼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고는 실망하고서 실족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족하는 자에게도 화가 있지만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더 큰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산소망을 가진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약속의 땅에 거하면서도 늘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헤어질 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았었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본향 곧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반면에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신앙의 출발을 했고, 본토 친척 아비집을 다 두고 떠나 왔으면서도 이 땅의 것에 너무 많은 미련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삼촌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 물이 많고 숲이 우거진 소돔쪽을 선택했습니다.
소돔 쪽은 선택한 롯은 결국 조금 더 좋은 곳, 조금 더 살기 좋은 곳을 따라 움직이다가 결국에는 창13:12에 보면 소돔땅에 \'이르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창14:12에 보면 그 소돔 땅에 \'거했다\'고 했습니다. 성도도 사람인지라 일시적인 욕심을 따라 소돔성에 이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소돔성이 죄악의 도성이고 성도가 살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그곳에서 나왔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롯은 세상것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 성에 거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소돔성의 죄악을 보시고 유황불로 심판하시기로 하셨을 때 아브라함을 보시고 천사를 보내사 롯에게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창19에 보면 천사가 롯에게 빨리 소돔성을 떠나라고 재촉을 했을 때 롯이 \'지체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너무 많이 물이 들어 버렸습니다.
롯의 아내는 그곳에 두고 오는 것들이 아까와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에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롯은 아내도 재산도 다 잃어 버리는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이 참으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사욕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이보다 더 비참하게 될 수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다시한번 보겠습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했습니다.


요8에 보면 유대인들이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 했을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해야 될 것이 아니냐\'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면 아브라함의 자손들답게 살아야 할 것이 아니냐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산소망을 가지고 사는 성도라고 한다면 산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다운 모습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 때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15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즉 하나님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기준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상황윤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들이 다 그러니 나도 그래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생활은 하면서도 \'집사도, 권사도, 장로도, 목사도 다 그렇게 살지 않는냐\'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되고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그 말씀에 기준을 두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그렇게 구별되게 사는 것이 여러 가지 환경상 쉽지 않다고 이런 저런 이유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록하였으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면 그것이 절대적인 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의 이유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3. 심판을 두려워하며 사는 삶(17-)


17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즉 이 말은 \'너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즉\'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를 생각하고 두려움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여기 두려움으로 지내라는 말은 벌벌 떨면서 겁에 질린 사람처럼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중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만, 우리 교회도 주일찬양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수가 낮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절반이 안됩니다. 그리고 수요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수는 다시 찬양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절반이 안됩니다. 그 시간에 다들 무엇들을 하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인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배에 모이는 것보다 기도의 문제로 넘어가면 더 심각한 모습을 봅니다.
정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면 이처럼 영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많이 이야기합니다만 사실은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영적 어려움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성도들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장소를 정해놓고, 정해진 시간에 정기적으로 기도하고 있으십니까? (시간과 장소가 안 정해지면 방해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루에 적어도 30분도 기도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 정도의 교제의 필요도 못 느끼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없다는 증거라해도 절대로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생활은 영적 생활의 바로미터 (barometer)와 같은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의 죄와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세상과의 영적 전쟁을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하면서 그러므로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했고 특히 늘 성령안에서 깨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또 대적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자를 찾으니 근신하고 깨어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30분도 기도하는 것이 없이 산다는 것은 영적전쟁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죄와의 영적전쟁을 포기하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로서는 너무나도 중요하고 마땅히 해야할 것인데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그냥 하루 하루를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참 많습니다. 정말 산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단지 주일낮 예배에 한번씩 참석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자신이 성도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산소망을 가지고 사는 성도는 아닙니다.
물론 기도를 안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왜 교회에서 출석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의 단계에 있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마음이 많이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늘 그럴려고 애를 냵습니다만 오늘의 말씀은 특별히 먼저 저 자신에게 적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살전2:13)
17절을 다시 보면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마7:21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고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하면 \'내가 목사가 아니었습니까\'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고, 어떤 직분을 가졌느냐, 목사였느냐, 장로였느냐, 권사였느냐, 집사였느냐 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살 산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거룩한 삶 즉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성도의 사명, 또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잠시 세상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영원한 나라에 대한 산소망을 가졌다면 이 세상에서는 잠시 소외된 삶을 살 수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 기 도 >

하나님 우리 부족한 사람들을 산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성도로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는 삶, 과거의 사욕을 좇지 않는 삶, 심판을 두려워하며 사는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