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삶(3) 벧전1:23-25 2004-05-12 12:21:40 read : 152
지난 두 주간에 걸쳐 ‘거룩한 삶’에 대한 주제를 두고 본문 이전의 말씀인 13절에서부터 22절의 내용을 함께 묵상하는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오늘도 같은 주제를 가지고 마지막 세 번째의 ‘거룩한 삶’에 대한 묵상을 하려고 합니다.
거룩이 무엇이고 거룩한 삶은 어떤 것인가? 라는 내용은 주제적인 접근만 한다면 더 깊고 다양하게 찾아 묵상하고 나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크게 나눈다면 표면적 거룩과 내면적 거룩으로 구별이 가능합니다. 「오!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마라나타의 신앙으로 주의 오심을 사모하는 거룩이 내면적 거룩인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표면적 거룩이 될 수 있습니다. 형제와 자매로 성도들을 여기며 뜨겁게 사랑하고 초대교회처럼 유무상통하는 삶을 산다해도 그것은 표면적 거룩일 수 있습니다.
지난 두 주간에 나눈 말씀들은 그런 관점에서 본다할 때에 표면적 거룩에 대한 이야기들이고 주장과 권면이었습니다.
그것만으로는 거룩을 정확히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거룩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즉 내면적 거룩입니다.
표면적 거룩만 가지고 본다면 유사기독교를 다 포함시켜서 볼 때에 가장 거룩해 보이는 공동체는 사이비 이단들입니다.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자매들보다도 그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이 더 소중하고 그들끼리만 만나면 마치 천국에서 만난 것처럼 헤어질 줄을 모르고 죽고 못삽니다. 그 공동체를 위하여서는 재산도 다 팔아 바칠 수 있습니다. 그 종교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이혼도 가능하고 심지어 부모자식 관계도 끊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표면적 거룩은 어떤 특별한 감성적 느낌이나 지식이나 자유라 할지라도 참 거룩일 수 없습니다.
어젯밤엔 어떤 기독교 공동체 사이트를 들어가 살펴보았습니다. 그 공동체의 리더인 목사의 글을 꼼꼼히 살펴 읽어보았습니다. 대단한 감성적 접근을 하고 있어서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층이 생각 없으면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모습이고 주장들이었습니다. 마치 기존 신앙인들과 교회는 무언가 제도라는 울타리에 다 갇혀 버린 불쌍한 사람처럼 인식시키고 있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사람 자연의 미물들을 구원자로 각인시킴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었습니다. 지렁이는 흙을 정화시키는 구원자이고 의사는 육체의 질병을 치료시키는 구원자라는 식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인격체 한사람 한사람 안에서 발견하게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보니 당신이 하나님이셨군요’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내주해 계시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과 자격을 보라는 것이지 다른 사람을 하나님으로 보라는 황당한 이론은 아니지요.
여러분, 조심하십시오. 지금 말씀의 뿌리가 약한 교회들이 무섭게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표면적 거룩을 조심하십시오. 그것은 완전한 거룩일 수 없습니다. 천사의 모습이 있어도 천사의 말이 가득 차 있어도 그것이 거룩이 아닙니다. 거룩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내면적 거룩의 삶은 생명의 말씀입니다. 덧칠해지고 재해석되어지고 위장되어진 말씀이 아닌 변하지 않는 말씀만이 거룩입니다. 2천년 교회역사 속에서 여러 이단의 위기를 거쳐오며 존속된 정통교회를 통해 교리의 바탕 위에서 전해진 참 하나님의 말씀만이 거룩입니다.
<순결하게 하는 말씀>
거룩을 표현하고 설명하는 가장 좋은 단어는 ‘구별’과 ‘순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별이라는 말은 구별하여 따로 떼어놓은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듣고 아멘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거룩한 자라고 인정을 받게 되는 성도가 됩니다. 그것은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자로서의 호칭은 아닙니다. 그냥 구별된 자라는 뜻일 뿐입니다.
2차적인 거룩이 있습니다. 그것은 순결한 자가 되어 가는 일입니다. 순도 99%의 금이나 은이 되도록 정제의 과정을 갖듯이 순결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런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참다운 거룩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순결하게 하는 힘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오. 23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말씀을 이야기할 때 ‘썩지 아니할 씨’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력을 이야기합니다. 생명이 공급됨을 통해서 신앙은 순결함에 이르러 가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귀에 들려지고 마음 밭에 계속 뿌려지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나 사고가 조금씩이라도 전환되게 되어 있습니다. 길가와 같이 굳어져버린 사람은 어떤 말씀이 들려져도 회개도 아니 되고 그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말씀을 아멘으로 받을 수 있는 말씀의 사람은 순결한 신앙인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성도들이 다른 교회의 성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전에 우리 교회에 와서 말씀큰잔치 인도를 해 주셨던 목사님께서 그 점을 칭찬하시는걸 들었습니다. 자신의 말씀이 쉬운 말씀은 아닌데도 그렇게 집중을 잘 하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말씀이 참 생명의 말씀이라 생각하십니까? 이런 질문을 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 지식을 공급하는 말씀인가! 입니다. 다른데서 들을 수 없는 특별한 말씀에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하다는 것은 항상 위험이 잠재해 있습니다. 대개는 비판을 통해서 차별화시키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을 깨우치기보다는 머리를 자극하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빠져들면 자신이 특별한 신앙인이라도 된 것처럼 차별성을 부각하고 교만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둘째로 해 보아야 할 질문은, 지나치게 감성을 자극하는 말씀은 아닌가? 입니다. 영성과 감성은 다릅니다. 매혹적인 말이나 호칭하나에도 사람의 마음은 녹아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줄 것 같은 표정과 관심하나에도 사랑은 무너질 수 있습니다. 말씀도 대단한 감성적 터치로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런 테크닉이나 프로그램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의 깊이와 감화력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본성만을 자극하는 설득력이나 속임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의 분별력입니다. 제가 볼 때에 우리 교인들 안에서도 제대로 분별력을 가지고 이러한 지성적,감성적 터치에 대응하고 판단할 수 있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세 번째의 중요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정말 생명을 공급하는 말씀인가? 입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웬만큼 신앙생활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되면 구원의 교리나 진리에 대하여 기본적인 상식을 가지게 됩니다. 늘 들은 말씀이고 아는 말씀인데 새로움으로 다가온다면 틀림없는 생명의 말씀입니다.
말씀의 생명은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롭고 신비한 이야기에 있지 않습니다. 2000년동안 사도들이나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전혀 이야기되지 않는 이상한 말들은 다 속이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말씀, 그리고 지금 이 시대의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전하는 말씀이 다르지 않습니다. 오직 깊이가 다를 뿐입니다. 그것은 맛의 차이이지 다른 새로운 메뉴가 아닌 것입니다.
이단들은 항상 성경에 없는 새로운 메뉴를 적당히 응용해서 만들어 내어 한 시대를 풍미한 속이는 사단의 졸개들입니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썩은 냄새를 내며 악취를 풍기다가 사라지고 맙니다. 더 이상 새로운 메뉴는 없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이 중국집과 저 중국집의 짜장면 맛과 짬뽕맛이 다릅니다. 같은 본문의 말씀을 전해도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 때문에 적용과 깨달음이 다른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혀 새로운 메뉴가 깊이 있는 영성의 말씀이라는 어리석은 착각과 주장에 현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육을 위한 음식이 에너지도 되지만 다 썩어 없어지고 배설물이 되듯이 참 생명의 말씀이 아닌 것은 자신을 망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참 생명의 말씀은 깊고 신비롭고 감동스럽고 은혜로워서 나를 더 거룩하게 하고 성결하게 만듭니다. 내 삶의 환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도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만해져서 행복함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참 신앙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원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말씀>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거룩하게 하는 말씀의 또 다른 증거는 영원성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영원에 이르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전도관을 보십시오. 통일교를 보십시오. 영생교를 보십시오. 이제 앞으로 이만희의 신천지를 보시고 또 흉내내어 나타나는 온갖 잡다한 사이비를 보십시오. 그들이 하나같이 영생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그들은 영생에 이르기도 전인 이 세상에서 짧은 종말을 맞이하고 있고 또 그렇게 되어지고 맙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고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은 영원으로 향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순탄하지도 않고 매력적이지도 않습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살았던 한때의 영광스런 에덴동산을 보십시오. 거기에 선악과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실과인 생명나무가 있었습니다. 생명나무는 선악과처럼 매혹적이고 더 먹음직스럽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먹어서는 안 되는 열매의 나무였고 생명나무는 항상 먹어야 하는 나무였습니다.
생명나무란 우리에게 있어 생명으로서의 말씀에 대한 예표적 나무입니다. 생명은 선악과에서 나오지 않았고 생명나무에서 나왔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이 말씀이 아닌 다른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듣는 것이 따분하고 피곤할지 몰라도 그것은 영적 생명을 존속하며 영원한 생명을 준비해 주는 일이기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 우리의 변함 없는 삶의 자세입니다.
사단은 선악과를 가지고 아담과 하와를 현혹했습니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아진다고 했습니다. 또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먹었습니다. 먹고 나자 영원도 잃어버리고 동산도 잃었습니다.
신앙생활의 원리를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영생의 힘은 말씀에서 나오는 것이지 다른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봉사와 직분도 더한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하는 역할일 뿐이지 말씀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목사도 말씀의 힘을 잃으면 천국소망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도 목사는 설교하는 사람이라 말씀과 죽으나 사나 함께 할 수 있는 축복이 있습니다만 제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중직자들입니다. 교회에서는 존경받고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장로이고 권사이고 안수집사님인데 만약 말씀의 힘과 기도의 힘을 잃는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제가 우리 교회를 세워가면서 소망을 담은 기도문이며 소개문이 입구 다보간판에 있습니다.
조용히 ... 서서히 ... 그러나 큰 걸음을 옮기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세미하게 역사하는 말씀의 능력을 사모하며 그 위에선 바른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중략)
바른 신앙 바른 교회는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세미하게 역사하는 말씀의 능력 안에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고 인정할 수 있어야만 바른 신앙이며 바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생명 안에 거룩이 있습니다. 말씀이 거룩입니다. 말씀의 사람, 말씀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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