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욕심으로의 전환 출20:17-21,약1:15,?2:15
사람의 소유하려고 하는 욕심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성경에 많은 사람들은 이 욕심에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걸림돌이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계명들의 결과는 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주님의 경계였습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계명은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계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하는 욕심은 사실은 죄의 동기입니다. 갖고자하는 것은 사실은 우리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까지 만들어 갑니다.
탐심은 \"더욱 지나치게 갖고자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 것은 나에게 속한 것이므로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소속이 된 것을 갖고 싶어한다면 그것은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죄를 지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첫 번째 인간 아담이라는 사람입니다.
롯의 아내는 어떠합니까?
야곱이라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야곱의 그 욕심은 어떤 것을 만들어 냈습니까?
엘리의 아들들은 어떠합니까?
사울은 어떠합니까?
다윗은 어떠합니까?
가룟사람 유다는 어떠합니까?
데마라는 사람은 어떠합니까?
성경에 기록된 이 모든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그 욕심에 의하여 그만 초라한 사람으로 전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것이 탐심이라는 죄입니다.
우리가 경험구약성경에 보면 아합이라는 사람의 욕심이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바울이라는 사람은 돈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경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하시기를 디모데 전서 6:10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계할 부분임을 바울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말입니다.
이런 것을 본다면 탐심이라는 죄는 우리들을 얼마나 죄를 만들어 내는 지 모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욕심이 잉태를 하고 탐심 너무 갖고 싶어하면 그것이 우상이 된답니다.
생각도 관념도 정서도 다 그렇게 만들어져 갑니다. 오늘날의 우리나라 돌아봅니다. 어떻게 우리나라가 만들어져 가고 있는 가하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삶들의 결과는 ? 정욕에 붙잡힌 사람들의 결과는?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 그리고 그것이 평생의 우상으로 군림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은 어느 정도에 머므르며 만족을 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는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소유의 넉넉함에 취하여 있던 농부를 주님은 어떻게 말씀을 하십니까?
눅12:15절에 말씀을 하시지요. 사람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오늘날에 우리들을 부추기는 것은 우리들의 소유의 넉넉함으로 과시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이렇게 초대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처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8:36-37)에 주님은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소유한 것으로 그 존재가치를 인정을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다윗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가 노력을 한다거나 내 스스로 만족함을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다윗은 말하기를 하나님으로 인하여 잔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엊그제 고 김항숙 권사님의 장례식에 그의 사위되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참으로 놀라운 간증거리 였습니다. 명지대학교 영문학박사이며 교수인 그는 말하기를 그는 교회의 사찰로 그의 가정이 18년을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는 이북에서 피난을 나왔으니 그 얼마나 땅과 집이 절박하였겠습니까? 땅을 장만을 하고 집을 장만을 하였는데 광성교회 김창인 목사님이 교회를 짓는데 어려움을 이야기를 하자 그 집과 땅을 처분하여 교회에 들였다 하나님이 잔을 넘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질보다 더 귀한 것을 그는 얻은 세상에 만족이라는 것이 돈에 있습니까? 물질에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실을 성경은 이미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솔로몬을 압니다. 세상에 그만큼 물질이 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부귀와 물질이 그의 손을 거쳐갈 정도로 그 만큼 많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솔로몬은 그의 심경을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전도서1:2-7절을 보면 \" \"
소유한 것에 의하여 저와 여러분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을 합니다. 그들의 소유가 없어서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안 같습니다. 비록 소유함은 넉넉하지 않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을 감격케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이 있다고 해서 그런 감격을 소유할 수 있습니까?
물론 경제적인 시대에 물질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행복이나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유냐 존재가치냐를 따진다면 우리는 존재가치를 귀한 것으로 따져야 한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 부자가 되느냐? 아니다 예수를 믿어도 부자가 안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모두가 다 가난해 지느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부자가 될 수도 있다. 기독교인은 부자가 되는 것을 신앙의 목표로 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신앙이 좋고 믿음이 좋아짐으로 가난하기를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더 넉넉히 살기를 원하실 것이다. 다만 그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그 물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감이 아니라 그 물질을 지배하면서 살아가자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가난한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시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말씀을 하신다. 이것은 주님은 부자를 싫어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삶의 의미를 소유에 둠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존재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가치이다. 탐심은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몇 일 전에 저의 사무실로 찾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감리사님! 저희들은 교회를 지으면 연수제일교회보다 더 크게 지을 겁니다. 저희들은 열심히 전도해서 연수제일교회보다 더 크게 만들 겁니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을 하여 보았습니다. 진정으로 겸허한 모양으로 주님의 그 명령에 감사해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기 위하여 이런 소리를 하난 하고 생각하고 정리를 하여 보았더니 여기에는 다툼으로 인한 탐심이 있더라구요. 내가 저 교회보다 더 커야지 하고싶은 탐심이 자리를 잡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스스로 말하기를 누가 짓고 싶어서 짓고 모으고 싶어서 모으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탐심은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삶을 유지하고 교회를 유지하게 위하여는 욕망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탐심은 여러 가지 올무에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6:9절을 보면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명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탐심의 욕심은 그것 하난 자체로 끝남이 아니라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입니다.
탐심이라는 것은 나 하나로 끝을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을 하였습니다 만은 아간이라는 사람은 가나안땅을 진격하던 여호수아의 군대를 멈추게 하며 두려움에 쌓이게 하였던 장본인이라는 것입니다. 그 한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는 것입니다.
출18:21절을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자기의 사위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지도자를 세우려면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사람을 뽑으라고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불노소득과 그런 종류를 바라는 사람 치고 건강한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광야 한가운데에서 그들의 지도자가 불의한 탐심으로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들의 대열은 가나안을 앞에 두고 들어가지를 못하였을 것이다.
교회의 영적인 지도자들은 딤전3:에 말씀을 하십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탐심은 한 사람으로 끝남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죽이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탐심으로부터 이기기 위하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원칙은 탐심은 죄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고요. 맞는 말입니다. 작은 것이라고 죄가 아닌가요. 살인죄만 죄입니까?
탐심은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대대는 탐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탐심은 결과를 가져다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톨스토이가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어느 농부가 왕으로부터 \"네가 하루동안 밟고 걸어 다니는 땅을 다 네 것으로 인정을 하겠다는 제안을 받습니다. 이 농부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뛰기를 시작을 하였습니다.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최대한 있는 힘을 다하여 전력으로 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밤늦게 까지 달렸고 돌아와서는 너무 기진맥진하여 그가 출발한 지점에 돌아와서는 그만 쓸어져 죽고 말았습니다.
어리석은 이야기이지만 우리들의 한 부분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감정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자신의 의지의 영역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합리화를 시켜서 죄를 만들어 갑니다. 욕심은 죄를 낳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죄는 사망을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자족의 교훈에 관심을 갖는 일입니다. 바울은 빌4:12-13절에 이런고백을 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줄도 알아 모든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만족하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주신 것을 누리며 또 다른 비젼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이럼 말씀을 주십니다. \"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지 말라 이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지 믿음의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을 소유하는 것을 부정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다. 다만 그의 부르심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기억을 하라는 거입니다.
밤낮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것과 입을 것만 생각을 하고 있다면 우리들의 삶 가운데에는 기독교의 탁월한 진리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좀더 차원을 높이자 좀더 높게 보자. 우리의 이상은 여기의 차원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적어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하늘이라는 이상을, 꿈을 주셨다. 적어도 하늘이라는 천국의 이상을 주셨다. 오늘의 이 자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다 복 받는다. 복 못 받으면 어떻게 책임을 지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들의 관심사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렇다고 오늘을 부정하는 하늘나라가 아닙니다.
엊그제 돌아가신 차정옥 권사님은 63세입니다. 다만 그분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좀더 사시고 내가 보는 관점은 조금 더 부자가 되셔서 그의 아들을 잘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면서도 부자가 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교회 옆에서 살았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답게 만들어 갈 때에 쓰고 단 일을 모두가 경험을 하였습니다. 저의 생각에는 더 사시고 더 부자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보다 높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의 의를 구하는 그를 이 세상에서 더 두시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주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거룩한 욕심을 우리 안에 세워가야 한다. 거룩한 욕심이 없으면 우리는 날마다 탐심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탐심에 잡혀 노예적인 삶을 살게 만드는 요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세상적인 물질에 얽매이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물질적인 탐욕에 잡히게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거룩한 욕심에 잡히게 하여야 합니다.
어느 분은 제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드라구요. 그 동안에는 물질에 대하여 그리 좋은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귀한 일들을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일들을 하기 위하여 돈을 벌어야 하겠습니다.
선한 목적을 가지고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항상 탐심이라는 굴레를 벗어 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이런 권고를 하십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골3:2).
내 사고는 이미 이 세상적인 것에 익히 익숙하여있습니다. 그래서 고작 생각한다는 것이 물질적인 것에 만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던지 주님의 생각에 맞추어서 살아보는 신앙의 맛도 경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기자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시119:36절에 \" 내 마음을 주의 증거로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행치 말게하소서\"라고 소원을 합니다. 거룩한 욕망에 불타게 하소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다른 생각을 말게 합시다.
우리의 영역은 저쪽입니다. 왜 그런데 여기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좋은 생각을 하십시오. 선한 생가을 하십시오. 하늘의 생각으로 교회를 바라보십시오. 교회의 일을 하면서 시험 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 시험 들었어.! 그 말은 내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 안되니깐 시험들었다는 일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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