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습관을 가집시다(2)

거룩한 습관을 가집시다 (2)/눅4:16-19

거룩한 습관을 가집시다 (2)
눅4:16-19





어떤 개구리가 평생을 한 우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우물 안에 다른 개구리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우물의 터주대감격인 개구리가 새로운 개구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디에서 왔니?\" 새로 온 개구리가 대답합니다. \"나는 바다에서 왔어. 거기가 내가 사는 곳이야.\" 평생을 우물 안에서만 살아온 개구리는 \'바다\'라는 말을 처음 들었습니다. \'도대체 바다가 얼마나 클까\' 궁금해진 우물 안의 개구리가 다시 묻습니다. \"네가 산다는 그 바다는 얼마나 크니? 이 우물만큼 크니?\" 바다를 어찌 우물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바다에 사는 개구리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합니다. \"내가 사는 바다는 이 우물과는 비교도 안돼. 얼마나 큰데.\" 우물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크다는 말에 놀란 우물 안의 개구리가 손과 발을 쫙 펴 보이며 다시 묻습니다. \"이 보다도 더 커?\"

우물 안의 개구리는 바다 개구리가 바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는 척 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평생 이런 거짓말쟁이는 처음 보네. 아무리 내가 바다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해도 어쩜 그렇게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때로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이고, 내가 경험한 것 외에는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는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때가 많습니다. 분명 더 크고 더 넓은 세상이 있는데, 그걸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1561∼1626)은 \'동굴의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평생을 동굴 안에만 쳐다보며 살고 있는 사람에게, \'동굴 밖에 나가면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는 태양이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믿지 않습니다. 평생 동굴 안만을 쳐다보며 살아왔기 때문에 온통 세상은 동굴처럼 캄캄할 것이라는 자신의 편견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런 쓸데없는 고집과 편견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편견 가운데 하나가 \'나는 신앙 남들보다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입니다. 내가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이 주일 예배에 빠지면 믿음이 없는 짓이라고 치부합니다. 내가 봉사하지 못하는 것은 생활이 바쁘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봉사하지 않으면 게으르게 신앙생활하려고 한다고 비판합니다. 내가 실수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실수하면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은 어느 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죄로 오염되어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죄된 인간의 보편적인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못된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거룩한 습관\'을 가지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습관\'은 삶의 일부분입니다. 우리의 삶과 어떤 행동을 구별할 수 없고, 삶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 우리의 습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거룩한 습관을 많이 가질수록 우리는 우리 안에서 자꾸만 우리의 삶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는 죄성(罪性)과 타락한 본성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거룩한 습관을 가져야 우리 안에서 자꾸만 우리 신앙인의 본질적인 삶을 방해하는 죄성과 타락한 본성을 이기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주에 예수님에게서 발견된 거룩한 습관 가운데 하나인 \'기도하는 습관\'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삶에서 발견된 또 다른 거룩한 습관인 예배하는 습관과 생명을 사랑하는 습관에 대해서 생각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삶의 모델이신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거룩한 습관을 몸에 익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거룩한 성도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두 번째 습관은 \'예배하는 습관\'입니다. 오늘 신약 본문 16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여기에서 \"규례대로\"(as His custom)라는 말은 \'평소의 습관대로\'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습관이라는 말을 나타내는 단어가 두 개가 있습니다. \'custom\'과 \'habit\'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habit\'은 \'어떤 사람이 가끔씩 행동하던 것이 몸에 익서 자신도 모르게(자동적으로) 그 일을 다시 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custom\'은 오랜 기간 동안 반복적으로 시행된 결과로 이제는 자신의 고정된 삶(문화)이 되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규례대로\'(as His custom) 회당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렸다는 말에는 \'habit\'이 아니라 \'custom\'이란 단어를 썼습니다. 회당에 들어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미 오래 전부터 몸에 익숙해져 있었던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 동안 고향을 떠나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살고 계셨는데, 오랫 만에 고향 나사렛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볼 때 그 동안 예수님은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나사렛에서 살 때만 해도 그는 평범한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동안 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에 예수님은 유명 인사 가운데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예수님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던 세례 요한을 만나서 그에게 세례도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 수 없노라고 거절했지만 - \'내가 오히려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찌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십니까?\' 그렇게 거절했는데도, 예수님의 강권으로 요한은 세례를 베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강림하였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는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셨습니다. 40일 금식이 끝날 때에는 마귀의 시험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예수님은 본격적으로 가르침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바로 앞인 14-15절에서 예수님의 활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예수님은 이미 갈리리 지역에서는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유명 인사가 되신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의 습관대로 회당에 가셔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회당에 들어가자 회당장이 예수님께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당시 회당장은 회당 예배에 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마을에 유명한 랍비나 교사가 오면 회당장은 그런 분들에게 성경말씀을 가르칠 것을 부탁하곤 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미 유명해진 분이셨기 때문에 회당장이 예수님께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에 회당을 찾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에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회당에 들어가신 것은 아닙니다. 회당에 들어가자 회당장에 말씀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했고, 예수님께서 강단에 서시자 이사야의 말씀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물론 유대인 남자들은 5살이 되면 회당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고, 13세가 되면 거의 의무적으로 안식일에는 회당에 가야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예배드리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의로운 사람\'(마 1:19)이었습니다. 강직한 성격일 뿐만 아니라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예수님은 좋은 믿음의 훈련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안식일이면 회당을 찾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예수님의 생활이 되었습니다. 그런 오랜 전통과 교육 때문에 회당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이 예수님의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배당에 보여 예배드리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이면 반드시 회당을 찾아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그런 분위기가 없습니다. 주일에 예배당을 찾아오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사람에게나 전통에 어떤 큰 부담이나 압력을 받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예배드리는 거룩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게 습관이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만 예배를 빼먹게 되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게 우리의 습관이 될 때까지는 갈등을 겪을 일들도 많이 생깁니다.


우리에게 예배드리는 게 습관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예배를 빼먹게 유혹하는 일들을 쉽게 거절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 어떤 행사가 있어서 예배를 빼먹어야 할 상황이 닥쳤을 때에, 예배드림이 습관이 되어 있으면 아주 간단하게 그 상황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의 일이나 친구들의 문제나, 어떤 애경사 때문에 거기에 참석해야 하느냐 아니면 주일예배를 참석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고민해 보셨습니까? 가정의 일, 친구들과의 모임, 애경사 등에 참석해야 할 경우 우리는 그다지 많이 고민하지 않고 주일 예배보다도 그쪽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일예배는 매주일 드려지기 때문에 한두 번쯤은 빠져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가족의 일이나 친구와의 모임이나 애경사 같은 것은 자주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에는 빠지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매년 봄이나 가을만 되면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숫자가 평소보다 약 20명 정도 차이가 나는 때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교인이 많아서 20정도 빠진다면야 별로 표시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100여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주일 참석 인원 가운데서 20여명 정도가 빠지면 자리가 굉장히 많이 비어 보입니다. 매년 봄이나 가을이면 왜 그렇게 많은 숫자가 빠지게 됩니까? 거의 대부분이 결혼식 때문입니다. 가족이나 친척 결혼식에다 동네 이웃의 결혼식에 다 쫓아다니려다 보니 예배당은 많이 비게 됩니다.


결혼식에 참석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 \'꼭 참석하라고 해서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우리 집 결혼식 때에는 왔는데 주일이라고 안 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주일에 있는 결혼식에 가주지 않으면 사람구실 제대로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될까 두렵다고 생각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면 주일에 결혼식이나 가족 행사에 참석하지 않고 성수주일하고 예배드리는 것을 선택한 장로님이나 다른 분들은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입니까? 그렇게 예배 때문에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예수 믿는 놈들 영 못 됐어\' 그런 소리만 듣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걸 알아야 합니다. 내가 교회 다니는 사람인줄 아는데도 주일에 있는 결혼식이나 행사에 예배를 빼먹더라도 꼭 참석해 달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평소에 예배를 빼먹어도 되는 것처럼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나는 절대로 주일예배를 빼먹는 일에는 참석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아 놓고 신앙생활하면, 처음에는 뭐라고 뒷말을 하겠지만, 나중에는 그게 다 인정이 됩니다. \'저 사람은 주일에는 절대로 예배를 빼먹지 않아\' 그렇게 인식되어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주일 예배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어도 욕하지 않습니다. 주일 예배 빼먹고서라도 꼭 참석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일 예배에 참석해야 하느냐 다른 일에 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게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습관이 덜 되어 평송에도 종종 주일예배를 빼먹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오늘도 하루쯤 빼먹고 와\' 그렇게 말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주일에 예배를 빼먹고 어떤 일에 참석해야 할 일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지금까지 내가 예배드리는 일을 습관화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경우에도 주일예배만이라도 꼭 참석해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으면, 그리고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면 우리의 몸과 삶에도 거룩한 예배드림의 습관이 배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야 합니다. 예배드림은 하나님께서 아주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배드림의 거룩한 습관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삶이요, 축복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0:29절의 말씀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예수님의 삶에서 발견된 또 하나의 거룩한 습관은 \'일보다는 사람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일보다는 사람을 중요시하셨습니다. 어떤 관습이나 법규보다는 생명을 사랑하는 일을 우선시 하셨습니다. 사람의 외모보다는 그 사람의 내면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일들이 자주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하신 일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회당에서 예배드리고 말씀을 가르치시는 것이요, 두 번째는 병자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주일에 병자를 고친다는 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격한 율법의 규제 아래서 살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요 불경스러운 행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지켜야 할 규범을 316가지나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조목조목 제시해 놓은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는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뜻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규정을 어겨가면서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오늘 본문 조금 뒤인 4:31절 이하에서는 안식일에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6:6절 이하에서는 오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당시 유대의 관리들은 안식일 법규를 어기면서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계신 예수님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올무를 놓기도 했습니다. 누가복음 6:6절 이하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송사할 빙거를 찾기 위해서 예수님을 미행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오른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을 범한 현장을 잡았다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눅 6:9)

예수님은 그 어떤 것보다도 생명을 중시하는 분입니다. 안식일의 규정이 아무리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긴 해도, 그것 때문에 생명을 살리는 일, 선을 행하는 일이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이 한 원인이 되어서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게 될 위험에 빠뜨려짐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귀중한 생명으로 보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결혼 적령기에 있는 처녀들이 하는 가장 큰 거짓말이 뭔지 아십니까? \'남편감이요? 외모 필요 없구요, 마음씨 착하고 성실하기만 하면 돼요.\'하는 말이랍니다. 얼마나 잘 생겼느냐, 얼마나 돈이 많으냐, 얼마나 좋은 학교를 나왔고, 얼마나 좋은 직장에 다니느냐 그런 것 상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실제로 남편감을 고를 때에는 가장 먼저 외모와 재산과 학벌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남자의 사람됨과 그 사람의 생명을 사랑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끼리도 외적인 모습으로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외적인 환경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신앙 양심 앞에서 솔직해져 봅시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외적인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너무 가난해서 헌금을 전혀 할 수 없는 분이 교회 등록했을 때와 사는 것도 넉넉하고 신앙이 좋아 보여서 헌금을 많이 할 수 있어 보인 사람, 열심히 봉사 잘 할 것 같은 사람, 사회적으로 그래도 지위가 꽤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등록하면 더 좋아하지 않습니까? 목사를 보면서는 마치 하나님을 대하는 것같이 하다가도,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대하고, 말을 함부로 하고 그런 모습은 없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에서 천시 받아야 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늙고 병들었어도, 아무리 세상적으로 가진 것이 없어도,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아도, 아무리 어리다 하더라도, 우리가 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을 똑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구별하거나 다른 잣대로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정신으로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살아야 할 우리는 사람을 내 맘대로 판단하고, 내 맘대로 차별을 합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닮아가야 할 우리는 일이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바로 그 생명 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고, 생명 그 자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 내 옆에 앉아 계신 분들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의 외모를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분의 생명을 믿음의 눈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옆에 앉아 계신 분들의 생명이 더 귀중합니까? 여기 앞에서 지금 설교하고 있는 안목사의 생명이 더 귀중합니까? 어느 생명이 더 사랑스럽습니까? 다 똑같습니다. 다 똑같아야 합니다. 똑같이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보는 게 믿음입니다.

생명을 귀중하게 볼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떤 잘못한 일이 있어도, 심지어 어떤 죄를 범했더라도, 그 사람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생명인데, 왜 내가 미워합니까? 어떻게 내가 미워할 수 있습니까?

나보다 열심히 봉사하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나무랄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닮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배드림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기셨던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을 닮아, 우리도 예배드림의 거룩한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셨던 거룩한 습관을 닮아,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생명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한 습관을 가지기 위해서 신앙의 아름다운 훈련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주셔서 우리로 거룩한 습관을 가지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기도하는 습관, 예배드림의 습관, 생명을 소중히 사랑하는 습관은 내 노력만 가지고 만들 수 없는 거룩한 습관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셔서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사심으로, 그 거룩한 습관을 통해 하늘의 복을 마음껏 누리는 축복된 생애가 되실 수 있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