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함을 위한 결단 막9:43-50
그리스 신화에 보면 지옥【?고생하는 인물 중에 ‘탄타로스’와 ‘시지프스’가 제일 유명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부르기아의 왕이었던 탄타로스는 무릎까지 잠기는 물 속에 서 있는데 바로 코 끝에는 먹음직스런 열매가 달린 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탄타로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허리를 굽히면 물은 금새 땅 밑으 로 빨려 들어가고, 과실을 따먹으려고 손을 뻗치면 나무가지는 바람에 날려서 높 이 올라가고 맙니다. 그래서 탄타로스는 과실과 물을 눈앞에 보면서도 영원히 굶 주림과 갈증에 시달려야만했습니다. 그리고 알베르 까뮈의 소설에서 부조리의 영웅으로 찬양 받은 고린도의 왕 시 지프스는 가파른 비탈길에서 커다란 바위를 밀어 올리는데 힘을 다하여 꼭대기까 지 밀고 올라가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립니다. 이는 시지프스가 영원한 노역에 종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지옥의 무한한 고통을 잘 말해 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대학가에서 나도는 은어 가운데, 천국과 지옥의 전화번호 이야기는 우리로 하 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요즘 우리문화는 예약문화인데, 천국과 지옥도 예약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예약 번호가 천국은 66-3927이고, 지옥은 11-1111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이 66-3927인 이유는 성경이 66권이기에 그것이 천국의 국번이고 고유 번 호는 구약 39권과 신약27권이 곧 3927번으로 천국 예약번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의 전화번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최고라는 일류의식 등 자기 만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합쳐서 11-1111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다고 할까요? 천국의 전화번호보다는 지옥의 전화번호가 훨씬 외 우기가 쉽고, 따라서 지옥의 좌석 예약자들이 천국의 좌석 예약자들보다 더 많다 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지옥 가기가 쉽다는 말이기도 한데, 중요한 것은 천국 좌석을 예약하려 면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지옥 좌석을 예약하려면 자기가 최고라는 주장 만 열심히 하면 되니까 당연히 천국 좌석 예약은 어렵고 지옥 좌석 예약은 쉬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웃고 넘길 이야기는 아닌 듯 싶은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성결한 신 앙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만면에 내가 항상 최고 라고 주장함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것입니다. 잘못된 종말론 사상
언제부터인가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천국과 지옥이라는 말을 상용하는 경우가 적어진 듯 합니다. 물론 설교도 지옥에 관한, 천국에 관한 내용이 한국교회 초기 같이 선포되지 않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터넷 설교를 확인해 보면 거의 지옥과 천국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기독교가 너무 현실주의적 신앙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측면에서 반성해 볼 내용입니다.
그런가 하면 상대적으로 이단 사이비 단체들은 극한적인 종말론을 강조하는 경 우를 우리는 쉽게 인지하고 볼 수 있습니다. 종종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사이비 이단의 잘못된 종말론 사상으로 인 해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폐해를 입게 되는가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이비 이단 단체의 잘못된 종말론 사상으로 인해, 올바른 종말론 사상이 불신자는 물론 기독교인들까지 약화시킨 것이 사실입니다. 아직도 우리 기억에 남아있지만 92년도 다미 선교회의 후유증은 복음전도사역 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했고 건전한 종말론 사상을 약화시킨 것은 한국교회사에 치명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가 어떻게 변천하든, 오늘의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 든,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성결한 삶을 살아가 는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생 복락의 축복을 누리는 것 은 변함 없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믿음 없이 곧 세상이 전부인 듯,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옥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옥이 얼마나 처절한 곳인가를 일깨우면서 어떤 경우이든 그곳에 가서는 안 되는 것을 역설하신 것입니다. 곧 그것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지옥 안가는 방법’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올바른 가치관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보편적인 상황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우선되는 것이 가 치관 정립입니다. 43절 이하 47절까지는 이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 은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말씀 중심에 이 문제를 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대 적 가치에 대한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 가치는 바로 ‘생명’이라는 것입니 다.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생명과 대신할 수 있는 인간의 가치관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본문 47절까지는 그 절대적 가치를 위해 분명한 삶의 자세 를 교훈 하신 것입니다. 즉 절대적 가치를 위해 상대적 가치를 포기할 수 있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 다. 우리에게 있어서 절대적 가치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 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장에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주셨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습 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절대 절명의 선택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냐 사랑하는 아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 아브라함은 절대적 가치를 생각한 것입니다. 이삭이 귀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아들입니다. 그것 도 약속으로 인하여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상(理想)보다 먼저 생각하는 절대적 가치관이 분명한 사 람이었습니다. 곧 이삭을 주신 분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렇 다면 더욱 분명하게 됩니다. 이삭보다는 하나님이 절대적 가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며 가치관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전혀 깊이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을 향해 갈 수 있었 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아브라함처럼 절대적 가치에 대한 개념정립을 하지 못하고 신앙생 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주신 자’와 ‘주신 것’에 대한 우선순위 에 대한 혼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주신 자’ 보다 ‘주신 것’이 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명확 하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감사함이 일생의 노래됩니다.
성결한 삶을 위한 결단.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그 가치관을 위한 삶입니 다. 주님은 이에 관해서 아주 분명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43절입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 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얼마나 단호한 말씀입니까? 그만큼 절대적 가치관을 역설하는 것인데 영원한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45절은 발에 대한 말씀이고, 47절은 눈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지체가 범죄하면 그 모든 지체를 찍어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지옥에 대한 극한상황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48절 말씀을 보십시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그만큼 지옥의 고통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인은 더욱 정신을 차리고 믿음생활을 잘하여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 복락을 누려 야 합니다.
이야기 사전에서 퍼온 글입니다. 지옥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은 다름 아닌 ‘껄’이라는 말 입니다. “예수 잘 믿을 껄” “남을 미워하지 말 껄” “전도할 때 잘 받아들일 껄” 온갖 말들이 ‘껄’로 시작해서 ‘껄’로 끝난다는 얘기입니다. 이들은 역시 지옥에서도 불평만 늘어놓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천국에서도 유행하는 말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십일조 잘할 껄” “주일 성수 제대로 할 껄” “주의 종 점 더 잘 섬길 껄” “작은 자들을 좀더 돌보아 드릴 껄” “직분 제대로 감당할 껄” 왜냐하면 천국 가보니 천국은 천국인데 세상에서 열심을 내지 않고 생활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만큼 상대적으로 상급이 없어 초라했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보다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악의 유혹을 거절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 다. 그것은 내 의지나 감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 하심으 로 가능한 은혜입니다.
우리교회에는 아직 주초(酒草)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분들이 계시는 것을 잘 알 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옥이냐 천국이냐의 길목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보다 성결한 삶을 위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어떻게 믿음 있는 사람이라 자처하면서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습니까? 손이 범죄하면 손을, 발이 범죄하면 발을, 눈이 범죄하면 눈을 찍어버리는 결 단을 가지면 못할 것 없습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을 도우시기를 축복합니다.
특히 성결한 삶을 위한 결단의 중요한 것의 하나가 화목에 있음을 50절에서 일 깨우고 있습니다.
50절입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화목보다 좋은 삶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위하여 하늘 보좌를 내 놓으시고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 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목, 인간과 인간과의 화목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 서 제물 되셨습니다.
에베소서 2:14, 16절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세상에서의 직무는 화목의 직책인즉, 이를 위하여 더욱 힘쓰는 생활이 바로 성결 한 삶을 위한 결단인 것입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만 나타나는 화목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일목요연(一目瞭然) 합니다.
33절 이하에서는 누가 큰 자 이냐 하는 문제로 다툴 때, 어린아이를 통해 진정 한 큰 자는 섬김을 통한 화목의 직책을 수행하는 자임을 가르치셨습니다.
41절 이하에서는 섬김의 도를 설명하시면서 화목을 추구할 것을 강조하셨습니 다. 50절 말씀에서는 소금은 좋은 것이지만 맛 잃으면 소용없는 것처럼, 그리스도 인은 세상의 소금이지만 맛 잃으면 아무런 소용없는 것임을 강조하고 그 맛이 바 로 화목 하는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요즈음 유행하는 말처럼 코드(code) 가 맞는 사람들끼리의 화목이 아닙니다. 나에게 거추장스럽고 별 볼일 없는 존재로서의 작은 자들, 즉 코드가 전혀 맞 지 않는 사람들, 곧 내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관계에서 그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것이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오늘의 그리스도인의 성결한 삶을 위한 행동하 는 신앙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가 싱싱한 지렁이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한 물고기가 그것 을 집어삼키려고 하자 다른 물고기가 타이릅니다. “얘, 저 지렁이는 낚시 바늘에 걸려 있는 거야. 저것을 잘못 삼키면 바늘에 걸 려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는 신세가 되고 말거야. 그러니 잘 생각해서 삼켜” 그러나 다른 물고기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누가 믿어? 아무도 그것을 증명하지 못했잖아. 어디 사람들의 식탁까 지 갔다 온 물고기가 있으면 증명해 봐. 네가 저 지렁이를 욕심내는 거지?” 그러고는 그 물고기는 덥석 지렁이를 삼켰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바다로 돌아 올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전도를 해 보면 이와 같이 냉소적인 반응을 하는 경우를 경험할 때 있 습니다. “천국이나 지옥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믿어? 증거 있으면 보여봐. 그러면 나 도 믿지.” 그러다가 결국 지옥에 가고 맙니다. 그 때는 이미 지렁이를 삼킨 물고기처럼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데살로니가후서 3:2절에서 말씀 합니다. 에베소서 2:8절에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 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말씀 합니 다. 이 구원의 선물을 받은 우리들은 더욱 성결한 삶을 위한 결단으로 오늘을 살아 가야 합니다.
또 한가지 있습니다. 오늘 결심하고 내일 그것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결심한 것을 포기하는 어리 석음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약하고 죄성이 있기 때문에 한 번 결단 한다고 그것이 영원 히 지켜지지 않는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켜지지 않는다고 쉽게 마음의 결심을 버리지 말고 꾸준히 그 결심을 실천에 옮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더 좋은 내일을 약속 받을 수 있는 오늘의 축복된 삶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와 하소연했습니다. ꡒ목사님! 설교를 듣고 죄의 유혹을 거절하겠다고 결단 하지만 작심삼일(作心三 日)입니다. 저는 구제불능입니다.” 목사님은 그의 말을 듣더니 창고에 가서 먼지가 뽀얗게 서려있는 낡은 소쿠리 를 그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다. “집사님 이유는 묻지 말고 소쿠리에 물을 담아오시기 바랍니다ꡓ 집사님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유를 묻지 말라고 하셨기에 순종하는 마음 으로 소쿠리에 물을 담아보려고 했으나 물이 담겨질 리 없어, 그냥 빈 소쿠리를 들고 목사님께로 왔습니다. 빈 소쿠리를 들고 온 집사님에게 목사님은 미소를 띠고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 다. ꡒ비록 소쿠리에 물을 담지는 못했지만 그 안에 있던 먼지는 깨끗이 사라졌지 요? 마음먹은 대로는 안되어도 무언가 새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입니다ꡓ
그렇습니다. 그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오늘도 내일도 보다 성결한 삶을 위한 결단으로 살 아야 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