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삶이 곧 참된 정결이다

바른 삶이 곧 참된 정결이다/막7:14-23

바른 삶이 곧 참된 정결이다
막7:14-23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참된 정결(2)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의 근본적인 차별성이 \'정결 논쟁\'에서 더 분명해진다.
바리새인들은 성경과 전혀 다른 전통인 장로의 유전(遺傳)을 만들어서 정결을 오해했고, 그래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무시한 것 밖에 한 일이 없다. 그들은 정결을 \"나는 깨끗한데 넌 더러워!\"라는 식으로 밖에 사용할 줄 몰랐다. 그러나 주님은 진짜 정결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신다(14). 한편 본문은 구약 정결법 가운데 음식을 중심한 정 부정의 정결만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율법에 반대되는 예수님의 정결 규례는 레위기(5,11장)에 익숙해 있는 유대인들에게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19b)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선언은 쉽게 이해될 리 없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무엇은 먹으면 부정하고, 어떤 것은 먹을 수 있는, 그러니까 식물에 대한 먹는 것의 여부가 철저하게 규정되어 있었다.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이것은 구약의 정결 규례와는 완전히 상반된다.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거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사실 이 문제는 초대교회의 역사를 보더라도 아직 해결되지 못한 첨예한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베드로는 고넬료와의 만남 직전에 환상을 보았음에도 부정한 것을 먹지 못하겠다고 항변했었다(행10:9-16). 당시 베드로는 이미 성령충만한 사도요, 초대교회의 실질적인 리더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그는 사도행전 10장에 이르렀을 때까지도 아직 이 문제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대.\"(행10:14)

그는 이미 오래 전 예수님께 직접 정결에 대한 설교를 들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는 어떤 의미에서 아직 변화되지 못했다. 주님의 설교를 들었는데도 말이죠. 사실이 그랬다. 예수시대나 초대교회나 사람들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바로 이점에서 \"모든 식물은 깨끗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첨예한 대립을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까지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문제를 하물며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님은 무엇을 먹고, 혹은 먹지 않았기 때문에 정결이 결정된다고 말하시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내 놓고 있느냐를 볼 때 그것이 정결을 결정한다고 말씀하신다. 만약 무엇을 먹고, 혹 먹지 않느냐가 정결의 기준이라는 바리새인의 주장이 옳다면 저들은 좋은 것 만 먹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깨끗한 것, 정결한 것, 부정하지 않는 것만 먹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들이 내 놓는 것은 나쁜 것들이다. 정결한 것만을 골라 먹었다면 분명 정결한 것이 나와야 한다. 마치 누에가 뽕잎을 먹으면 명주실을 뽑아 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겉과 속이 달랐다.

결국 주님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무엇이 들어가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마음으로부터 만들어져 나오느냐가 정결의 기준이라는 말이다. 주님이 드신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자. 먼저 사람의 마음 속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이다(21a). 이는 바리새인들이 어떤 식물의 먹고 먹지 않음이 정결의 기준이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정결의 구분은 외형(형식)적인 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태도 여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정결 기준이었다.

또한 그 생각이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때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21-22). 예수님은 부정한 식물을 먹지 않은 것이 정결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열 두 가지 행위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신다.

*음란(고전5:10-11) → 간음, 도적질(십계명) → 탐심, 살인(십계명) → 악독
*속임(거짓)
*음탕(성적 방탕)
*흘기는 눈(시기와 질투)
*훼방(신성모독)
*광패(어리석은 판단)

이처럼 마음의 생각이 행동을 결정한다. 인간에게 어떤 행동이 나타나는 것은 이미 그 마음에서부터 그 일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모든 죄는 심령의 부패로부터 기인한다는 점을 명쾌하게 설명하신 것이다. 즉, 죄로 물든 인생이 정결을 논할 가치가 없다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신랄한 지적인 셈이다.



정결 판별법

그럼 주님께서 보여주시려고 했던 참된 정결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무엇을 먹느냐, 먹지 않느냐가 정결의 기준은 아니다. 먹는 것이나, 그것을 먹는 방법(방식)이 정결을 결정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이미 증명이 되었다. 부정한 것은 먹거나 가까이도 하지 않았다는 바리새인들이 내 놓은 것이란 전부 악하고 나쁘고 부정하고 추한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원래 구약의 율법은 부정과 정결을 매우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부정한 물건이나 부정한 사람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그는 부정하게 된다(2-4). 그러니까 율법에 의하면 최소한 부정한 것을 가까이 않거나 먹지 않으면 그것으로 정결했다. 무슨 짓을 하고 있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만 하면 OK였다. 이것이 율법이 가르쳤던 정결의 한계였다.

\"누구든지 부정한 들짐승의 사체나 부정한 가축의 사체나 부정한 곤충의 사체들
무릇 부정한 것을 만졌으면 부지중에라 할지라도
그 몸이 더러워져서 허물이 있을 것이요.\"(레5:2)

그러니까 이 율법의 기준에 의하면 제자들은 여지없이 지금 부정하게 되었고, 예수님 역시 부정하다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바리새인들의 지적은 일면 타당하다. 왜냐하면 구약의 율법을 들어서 제자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에 비추어 볼 때는 제자들(예수님)에게 잘못이 있다는 말인데, 본문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혼돈스럽다.

결국 주님은 정결에 대한 율법의 말씀을 완성하고 계신 것이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다음 성경에서 좀 더 분명히 확증되고 있다. 마침내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롬3:21a)를 통해 \'율법의 행위\'가 결코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계신다. 어느 누구도 율법으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16)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정결을 결정한다. 죄로 가득찬 인생이 그것의 근본적인 해결 없이 아무리 \'율법의 행위\'를 깨끗이 한 들 -그러니까 손을 씻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고, 정한 것만을 먹고, 전통을 지키고, 율법을 지키는 모든 행위들을 말이다-, 그러니까 들어가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손치더라도 문제는 나오는 것이 더럽고, 추하고, 악하다는 말이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충고하시는 내용의 핵심이 바로 이거다 : \"바리새인들아, 뽕잎을 먹었으면 명주실을 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넌 누에다. 만약 나일론을 뽑아내고 있다면 너희들은 누에가 아니다. 착각하지 말아라.\"



부스러기 묵상

그리스도인이라고 이해하는 표(sign)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 전통은 물론 아직까지 유효하다. 그러나 이것만을 유일하게 붙잡는 것으로는 설득력이 약한 시대가 되었다. 똑같이 이중 장부 쓰고, 똑같이 세금 적게 내려고 버둥거리고, 단 돈 10원이라도 이해 관계가 꼬이면 안면 바꾸며 달려들고, 이기적이다. 단 하나 다른 것은 다 똑같으면서 퇴근길에 \'한 잔 합시다!\'는 소리만 나오면 거룩한 표정으로 \"난 예수 믿어요!\"라는 소리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우습게 보는 것 아닐까, 이런 억측을 해 본다.

세상은 나에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분명한 구별을 요구한다. 이것이 앞으로 교회가 세상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가치여야 한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대형사고(大型事故)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이 들어 있다. 주님은 이런 추한 모습들이 우리의 정결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것들이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술 먹지 않는 것으로 그리스도인을 대단하게 보지 않는다. 우리가 얼마나 자신들과 다르게 살며, 바르게 살며, 정직하게 살며, 깨끗한 삶을 보여주는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것이 교회의 정결을 결정하는 표상이 되었다.

내가 있는 곳이 나 때문에 정결하게 되는 것을 꿈꾼다. 그곳이 가정이든, 직장이든, 어떤 모임이든, 슈퍼나 미장원이든, 승용차의 핸들을 잡고 도로(道路) 가운데 있든지 나 자신을 정결의 통로로, 그리하여 선하고 바른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깨끗하고 정결케 하는 참된 정결의 회복을 이루어야 하겠다.

*하나님은 내 마음이 먼저 정결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정결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내 가정을 통해 또 다른 가정이 거룩케 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내가 섬기는 교회를 통해 모든 교회들이 정결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이제는 참된 정결을 위해 분명한 대가를 지불할 때다.

나에게는 무엇이 나오는가.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내 마음 속에서 악한 것들이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그런 것들이 있다면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한번 외치는 구호로만 되지 않도록 해야겠다. 정결은 정작 마음 속은 썩었는데 손을 깨끗이 씻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결은 \'나는 이런 것들을 먹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사느냐가 곧 정결이다. 정결이 나를 비웃지 않도록 다시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b)라는 기도의 깃발을 하늘 향해 달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