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열정을 회복하라 계3:14-22
믿는 사람들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열정이나 열심은 아주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려면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열정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신시아 커지가 지은 「걸림돌을 디딤돌로 삼아라」라는 책에 프란스시코 부시오라는 사람의 삶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외과의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스물 일곱 살 때에 성형외과의 레지던트가 되었고 몇 년이 지나 개인병원도 차릴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5년 9월 19일에 그가 살고 있었던 샌프란시스코에 리히터 지진계로 8.1의 강도가 되는 대지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나흘간 땅속에 있다가 기적적으로 구출되었으나 외과의사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손가락을 잘라낼 수밖에 없었는데,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절단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외과의사가 되리라는 소망을 결코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발가락 두 개를 잘라 손가락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식하였습니다. 이후에 그는 피나는 반복훈련으로 지금은 존경받는 성형외과 전문의로 병원을 개업하여 여러 가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특히 언청이 아이들과 화상을 입은 아이들을 위해 무료로 복원수술에 무료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과의사가 되려는 강한 열정이 그 모든 어려운 역경을 이기게 한 것입니다. 그는 열정에 대하여 이러한 의미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이런저런 장애물에 부닥칩니다. 하지만 가장 뜨거운 열정을 연료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결국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열정은 이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일을 하는데 모든 시간과 정력을 소모하여도 힘들어하지 않고, 장애물이 있어도 극복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섬기는 일에는 이 열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교회는 그 생활원리를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주가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관계는 아주 중요합니다. 이 관계는 교회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의 뜻을 이 땅에 이행하는 직접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이 땅에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사랑하고, 우리의 모든 열정을 쏟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봉사로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라 집을 짓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뜻을 수행할 교회는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다양합니다. 그 중에 믿지 않는 신자들이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문제도 참 중요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교회의 머리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인 교회가 어떤 모습을 가지기를 원하시는 지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력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당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칭찬과 책망의 말씀을 통하여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편지내용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을 조명해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교회는 복음에 대하여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주제를 잘 이해하기 위하여 이 본문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인 구조에 따라 첫 번째로는 주님의 책망이 무엇이며, 두 번째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영적인 실상이 무엇이었으며, 세 번째로는 주님의 처방인 열심을 회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주님의 책망 :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없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으로부터 책망만 받은 교회입니다. 소아시아에 위치해 있었던 일곱 교회들 가운데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들었고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교회 등은 부분적으로 칭찬도 들었고 책망도 들었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만은 책망만 들었습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책망은 교회가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을 가지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덕목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위치해 있던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는 당시 로마시대에 아주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은행과 의료학교 그리고 직물산업 등으로 잘 알려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물 공급이 적절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한 도시의 형편은 본문에서 부분적이긴 하지만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곳에 위치해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누가 언제 교회를 세우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바울의 편지 가운데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를 근거로 하여 에바브라에 의해 세워졌다고 보기도 합니다(골1:7; 2:1; 4:12-16). 이 견해는 많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누가 언제 어떻게 이 교회를 세웠든 간에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이 교회가 주님이 보시기에 잘못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형편과 처지는 약간 다를 수 있지만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은 오늘날의 모든 교회들을 위한 교훈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요한계시록 3:22의 말씀에 \"귀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비단 라오디게아 교회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한 주님의 견해를 귀 있는 자, 즉 들을 수 있는 자는 모두 알아야 하고, 모든 교회들이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떤 교회를 원하시는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책망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 볼 때 이 교회는 다른 교회들처럼 어떤 특별한 죄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단자나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의 방해에 대하여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이 교회를 책망하고 있는데, 그 책망의 내용이 요한계시록 3:15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여러분! 주님의 이 책망은 교회에 무엇을 요구하시는 말씀일까요? 주님께서는 이 교회에 대한 책망을 물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더웁든지 차든지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도시는 대단히 부유한 도시였으나 물의 공급이 적절하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이 도시는 북쪽 히에라폴리스의 미네랄이 풍부한 온천에서 내려오는 물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물이 계곡을 따라 흘러 내려오면서 라오디게아에 이르게되면 물이 식기도 하고 다른 물들과 섞여서 미지근한 물이 되었습니다. 미지근한 물은 마시기에 적절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주변환경에서 일상적으로 늘 경험하는 것들을 통하여 영적인 교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교훈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히에라폴리스에서 내려오는 미지근한 물과 같이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미지근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기록된 헬라어 표현은 \"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않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밝혀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차다\"라는 말은 얼음같이 찬 것을 말하고 \"더웁다\"는 말은 끓는 물같이 뜨거운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나타난 \"더웁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제스토스(ՆՅՓՔՏՒ)는 말로서 로마서 12:11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한 말씀에 \"열심을 품고\"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신 말씀은 복음에 대한 열심이나 열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분명한 확신은 요한계시록 3:19에서 주님이 이 교회가 영적인 상태를 진단한 후에 치유책을 권면하시는 내용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네가 열심을 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교회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에 대하여 열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에 대하여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2.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인 실상 : 자기 만족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이러한 영적인 실상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그 이유를 요한계시록 3:17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 한글판 성경에서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헬라어 성경에서는 이유절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영어번역 성경 가운데 한가지인 NASB나 RSV 등을 보면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because나 for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7절을 읽을 때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를 넣어서 읽어보십시오. \"(왜냐하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교회가 자신의 모습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고 하였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다 그러하지만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스스로 부요하다고 지위하고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3:17) 그들은 스스로 부자요 부요하다고 생각하였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앞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만 라오디게아는 상당한 부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가난하다고 하셨고, 의료학교의 좋은 약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멀어 있으며, 옷감을 짜는 직물산업이 번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벌거벗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지적을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가 열정이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기 만족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복음에 대하여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자기의 실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만족에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알지 못하고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아주 중요한데 주님이 우리 교회와 신앙상태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에 주님께서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들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해 보신다면 어떤 상태일까요?
3. 주님의 처방 : 열심을 내라
그러면서 주님께서는 그들의 수치에 대한 처방으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계3:1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책망과 처방은 모두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불로 연단한 금이 믿음이라든지, 흰옷을 그리스도의 의로 입은 옷으로 또는 안약을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게 하는 무엇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약에 이러한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믿음도 없는 교회요 의롭다하심을 얻지 못한 교회로 보게 만들고 단순한 진리를 굉장히 복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해석을 풍유적 해석이라고 합니다만 아주 잘못된 해석방법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처방이 \"열심을 내라\"(계3:19)는 것이지 믿음을 가지라든지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고, 안약을 사서 보게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19에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한가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여기에서 징계한다는 말은 벌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고 헬라어로 파이듀오우(ՐՁՉՄՅՕՙ)라는 말로서 \"교훈한다,\" \"가르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는 열심을 내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의 잘못을 치료하는 처방전으로서 열심을 내라고 권면하셨습니다. 교회가 열심을 낸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에 대하여 열심을 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회가 하는 일, 즉 복음에 열심을 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고, 또한 복음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특별한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지식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대하여 정의하기를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역사적 사건\"(고전15:3-4)이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이 복음을 전파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당시 라오디게아 교회는 복음에 대하여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영어관용구 가운데 \"미온적인 사람\"이나 \"열심이 없는 사람\", \"애매모호한 사람\"을 가리켜서 라오디시언(Laodicea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기원이 바로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주님의 책망에서 나왔습니다.
교회는 복음에 대하여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하여 열심을 내어라고 한다해서 광신자가 되어라는 말은 아닙니다. 광신자는 이치를 따지지 아니하고 이해력없이 열심만으로 믿는 자를 말합니다. 진리에 대한 바른 이치를 따지지 아니하고 열심을 내는 자는 광신자이지만 아무런 열심도 없이 진리에 대한 이치만을 따지는 것은 모든 행동에 마비 현상을 일으키게 합니다. 이것은 광신적인 행위보다 더 나쁜 악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복음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고 열심으로 그 복음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 신자들은 복음에 대하여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에 대하여 합당한 반응을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에 대하여 책임적인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복음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 적이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의미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골3:4)라고 말하기도 하였고, \"내게는 산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이다\"(빌1:21)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울이 이해한 것처럼 복음을 이해하게 된다면 어떻게 복음에 대하여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예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가 되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하여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현대교회는 \"열심\"이나 \"열정\"에 대하여 익숙하지 못한 것같습니다. 그러나 \"열심\"은 기독교신앙의 핵심적인 부분 가운데 한가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께서 교회들에게 요구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열심이나 정열, 불 등은 오늘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고 몹시도 필요한 덕목입니다. 주님은 오래 전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복음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버리고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하여 열심이 없는 부분이 있었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이 \"회개하라\"는 권면은 예수님께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 가운데 칭찬을 들은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신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잘못을 인정하고 그 길에서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 회개의 내용은 복음에 대한 열심이 없었던 부분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닙니다. 잠언 28:13에서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회개가 없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귀담아 듣고 과거에 복음에 대하여 열심이 없었다면 회개하고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미지근한 신앙태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때 다시금 열심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 3:20에서 그 방안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볼 때 라오디게아 교회는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주와 교제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이나믹한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정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마음의 빗장을 열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이 약속의 말씀대로 우리와 교제하며 신령한 은혜를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머리 속에 그려보십시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고 우리 집에 모셔들이기만 하면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한 식탁에서 먹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기독교신앙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만날 때 능력과 신비롭다는 말 외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옷을 사서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며, 안약을 사서 보게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오는 풍성함입니다. 그들이 복음에 대하여 열정이 없었기 때문에 이 교제를 경험해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대하여 열정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마음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아마도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으로 이해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을 마음에 영접한다는 것은 아주 실제적인 일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여러 상황과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나름대로의 가치관이나 입장에 따라 행동을 결정합니다. 이 경우에는 대개 자기 자신이 결정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마음의 모든 결정권을 주님께 내어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간략하게 표현하면 주님의 말씀의 믿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여러 프로그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자기 생각에 따라 굳게 빗장을 친 마음문을 열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해 보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만나게 되고, 우리 속에 복음을 위한 거룩한 열정이 불타오르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교회를 섬기는 일에 열정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는 일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지역에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한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 성격은 아닙니다만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범죄한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교제하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 목적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행하신 십자가의 사역과 그 의미를 설명하고, 동시에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하신 일들을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계속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을 전파하여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명을 얻게 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하늘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 예를 들면 정치, 경제, 문화, 환경, 가정, 교육, 이성, 철학 등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 가운데 그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될 때 교회의 일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만큼 가치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사명을 이해할 때 교회를 섬기는 일에 어찌 어중간하고 냉랭한 자세로 섬길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룩한 열정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하여 가지는 열정을 내는 것과 다른 성격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 거룩한 열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마음의 빗장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과 교제하는 신령한 기쁨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거룩한 열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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