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갑 족속의 거룩한 고집/ 렘35:18-19


레갑 족속의 거룩한 고집
렘35:18-19


사람은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행복함과 불행함, 웃음과 분노 등등의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언제나 교차되는 삶을 삽니다. 긍정적인 감정은 우리들의 삶을 기름지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고 활동적이 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긍정적인 감정은 창조적인 삶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은 우리들의 삶을 폐쇄적으로 만들고 불행하게 만들며 수동적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 가운데 분노의 악영향을 성경은 경고를 하고있습니다. 시37편8절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약에 치우칠 뿐이니라” 잠19:19절 “노하기를 맹령히 하는 자는 벌을 받을 것이라”라고 쓰고 있습니다. 가인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라는 오명을 쓰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고 동생의 제사를 받으심에 대해 분노를 품고 동생을 돌로 쳐죽인 장본인입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이 노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순간적으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살인과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세는 분노 때문에 세 번씩이나 뼈아픈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첫 번째는 왕자로서 애굽 왕궁에 살 때 동족들이 매를 맞는 것을 보고 분노가 치밀어 애굽사람을 쳐서 죽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바로왕의 체포령을 피해 광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분노가 살인의 원인이었습니다. 또 한번은 40일 동안 시내산에 올라 십계명 돌판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내려왔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제사를 지낼 때 화가 나서 가지고 있던 돌판을 던져서 깨뜨렸습니다. 이로 인해 나중에는 자신의 손으로 힘들게 돌판을 다듬어서 들고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또 한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다고 불평할 때 화가 났습니다. 그러자 모세도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민20:8절) 그런데 모세는 화가 나서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쳤습니다. 그 결과 물은 나왔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듣고 결국 모세는 가나안 땅이 보이는 비스가산 꼭대기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치명적인 분노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노의 치명적인 결과를 잘 알기에 엡4:26-7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을 낼 때 마귀가 틈을 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노가 모두 나쁜 것이지만 거룩한 분노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를 발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외치시면서 그들을 성전에서 내 치셨습니다. 이러한 분노를 가리켜 거룩한 분노라고 합니다. 분노가 나쁜 것이지만 이런 분노는 필요합니다. 사실 이러한 분노를 품지 못함이 안타까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러한 거룩한 분노를 우리 성도들도 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근심이라는 것도 좋은 감정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근심과 염려의 부정적인 영향을 말하기를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 고 말씀합니다. 마음을 즐겁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하는 일도 능률이 오르고 힘든 일도 쉽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고 양약이 된다고 합니다. 건강하기 위해 보약을 지어서 잡수시는데 보약보다 더 좋은 것이 마음을 즐겁게 가지는 것입니다. 한번 즐거워할 때마다 보약을 한 첩씩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고 뼈를 마르게 합니다. 병이 듭니다. 사람이 축쳐져서 아무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근심은 나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6장 산산수훈을 통해 염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염려하는 것은 곧 불신앙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면 근심과 염려를 할 필요 없습니다. 성경은 “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라”(벧전 5:7) 그렇기에 근심과 염려는 나쁜 감정입니다. 백해 무익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쁜 근심도 거룩한 근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근심은 어떤 것일까요? 고후 7장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로 인해 근심을 하면서 후회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 편지가 그들에게 근심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 근심은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였기에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 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그들로 하여금 간절하게 하였으며, 분하게 하였으며, 두렵게 하였으며, 사모하게 하였으며, 열심있게 하였으며, 벌하게 하였으며, 자신을 깨끗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거룩한 근심은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자신을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금까지 잘 못 살아온 것을 후회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주의 일에 열심을 내게 하고 자신을 깨끗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성도들도 거룩한 근심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하는 근심의 주된 내용이 무엇입니까? 돈에 대한 걱정과 건강에 대한 염려와 내가 어떻게 살아야 부유하게 살 수 있을까? 하면서 세상살아가는 것에 대한 근심이 주된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믿음이 없을 때나 하는 걱정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자를 있는 자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고 한다면 근심과 염려의 차원을 이제 한 단계 높여서 좀더 영적인 근심, 거룩한 근심으로 업그레이드 시키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 모습이 말씀에 비추어 바로 서 있는 모습인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인가 하는 것을 신중하게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며, 이 근심은 우리들의 믿음을 성숙시켜주는 근심이 될 것입니다.
고집이라는 감정 또한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고집쟁이라는 말은 완고하고 타협할 줄 모르고 융통성이 없는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이 완악과 강팍한 것으로 나타낼 정도로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은 고집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는 고집이 필요합니다. 좋은게 좋다더라는 식으로 물에 물탄 듯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다 좋다는 식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고후1:19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오직 예수님만 “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예” 저것도 “예”가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고집이고 이 고집을 가리켜 거룩한 고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명절이 되면 제사 문제로 인해 집안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는 가정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정말 감당하기 힘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앙의 고집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해 나갈 때는 철저하게 하기를 원하고 투철한 사명의식을 가지고 일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신앙생활에 대해서는 철저함 보다는 편의주의를 강조하고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적당히 타협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기를 요청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고집이어야 합니다. 거룩한 고집이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어야 한다는 고집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거룩한 고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3장을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모든 바벨론 사람들이 왕의 금신상에 절하도록 법을 정하고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풀부불에 집어 넣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에 대해서 큰소리 치면서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신앙의 고집을 가졌습니다. 도대체 이 세사람은 무엇을 믿고 이런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낮은 자를 높이시며 빈핍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는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으면 거룩한 고집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이러한 거룩한 고집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서머나 교회에는 폴리캅(P0ly Carp; 70-156년) 이라는 감독이 있었습니다. 그는 서머나 교회의 12번째 순교자로서 그에 관한 순교의 장면이 잘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86세의 노감독 폴리캅은 관원들에게 붙잡혀 서머나의 노천극장으로 끌려갔습니다. 이미 그곳에는 유대인과 이교도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폴리캅의 사형을 보기 위해 운집해 있었습니다. 사형 집행관이 폴리캅에게 부드럽게 말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말하라! 그러면 내가 맹세코 너를 살려주리라!\" 이에 폴리캅은 조금도 주저하거나 두려움 없이 말하기를 \"내가 86년 동안이나 구주 예수를 섬기고 믿어 왔건만, 그분은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이제 와서 나더러 그분을 배신하라고 하느냐!\"하면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폴리캅은 거룩한 고집을 품고 있었습니다. 어떤 누구도 그의 이 거룩한 고집을 꺾을수 없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서 사도 바울도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고집을 품은 분 가운데 주기철 목사님이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도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하며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거룩한 고집을 품었던 목사님입니다. 이러한 거룩한 고집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거룩한 고집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고집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본문에서 우리는 거룩한 고집을 품은 족속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레갑족속입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뜻밖의 지시를 하십니다. 레갑족속을 성전의 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당시 모든 사람들이 즐겨먹는 음료수입니다. 특별난 것도 아닙니다. 이 특이한 지시에 예레미야는 순종하여 레갑족속을 성전의 한 방에 모아 놓고 잔과 사발에 포도주를 가득 부어놓고 마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사람도 그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이 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독이 든 것도 아니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이 마시지 않습니다. 술좋아 하는 분들은 얼씨구나 좋다 이게 웬 술이냐 하면서 단숨에 들이켰을 것입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성찬식을 할때 포도주 잔이 너무 작다고 불만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정말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도무지 먹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말하기를 35:6 - 7절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영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도 재배치 말며 두지도 말고 평생 장막에 거처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우거하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상의 말씀대로 그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집을 짓지 않고 천막에서 살며 포도농사를 짓지 않고 유목생활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말할 때 성령께서 예레미야의 마음을 감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레갑족속이 술을 마시나 아니하나를 테스트하신 이유는 그들의 거룩한 고집만 못한 유대인들을 책망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35:14 절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부지런히 말하여도 너희는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
레갑족속을 예로 드신 이유는 이렇게 그들의 거룩한 고집 때문입니다. 그 거룩한 경건의 고집이 어떻게 보면 지나칠 수 있습니다. 시대에 너무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의 그 소망, 그리고 경건을 위해 지시한 조상의 교훈의 뜻이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것임을 알고 행하는 그들의 그 거룩한 고집을 하나님은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 레갑족속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아들 호합의 후손들로서 겐 족속의 사람들입니다(참조, 대상 2:55 ; 삿 1:16). 이 겐 족속들 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 가나안에 정착한 한 족속이(참조, 삿 4:17 ; 삼상 15:6) 레갑 자손이고 레갑의 장남이 요나답입니다. 이 요나답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예후왕 시대의 사람으로(참조, 왕하 10:15, 16) 명망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때는 유다 왕 요아스가 통치하던 시대로서 예레미야 때로부터 약 2백 30년 전인데 그 때 요나답이 명한 경건의 훈계를 지금까지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들은 원래 미디안 족속이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데도 그들은 출애굽 때의 일을 모델로 삼아서 경건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거룩한 고집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건을 지키는 것이 어렵습니다. 세상이 다 하는 일 좀 따라하는 것 무엇이 큰 문제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장 동료들의 회식 모이에서 술 한잔 한다고 그게 뭐 그리 큰 죄가되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융통성이 있어 보이고 사람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레갑족속을 선택하셔서 유대인들이 불순종하고 구원의 감격에서 멀리 떠나고 신앙의 고집을 버린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레갑 족속은 200년이 넘도록 조상이 명한 유언을 고집스럽게 지켜왔습니다. 누가 그 고집을 알아 주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스스로 왕따로 살아간 것입니다. 약삭빠른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지금 망해가는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회개운동을 촉구하시면서 예레미야를 세워 외치시고 계실 때 그 회개운동을 위해 본받아야할 경건의 모델로 레갑족속을 지목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집이 좀 필요합니다. 거룩한 고집, 경건의 고집 말입니다. 다 술먹는 자리인데 나도 한 잔 해야 분위기를 맞출 수 있을 때, 다 같이 죄 짓는 자리를 가는데 나만 빠지기가 곤란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경건의 고집입니다. 때가 되면 알아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축복을 하십니다. ‘레갑 족속\'의 \'족속\'이란 말은 \'집\'이란 단어 \'베트\'를 쓴 것입니다. 따라서 \'레갑족속\'이란 말, \'베트 하레카빔\'은 \'레갑의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집안이 축복의 집안이 된 것입니다. 어떤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가 하면 19절을 보면“레갑의 아들 요나다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영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레갑 족속을 통하여 거룩한 고집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들의 신앙에는 너무 고집이 적습니다. 쉽게 무너지고 쉽게 변합니다. 적어도 신앙에 대해서 만은 거룩한 고집으로 뭉쳐진 고집쟁이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고집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이루어 가는 힘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축복하심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어지게 될 것입니다. 레갑 족속과 같이 말씀을 지키고자 하는 거룩한 고집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충만히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