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성결케 하라 (1) 수3:1-6
아메리칸 인디언 사이에는 오래 동안 전승해 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한 추장이 한 종족에게 존경을 받고, 그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을 떠날 즈음이 되어서 이제는 자기 아들에게 추장직을 위임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들이 셋이 있는데, 어느 아들에게 추장직을 후계로 물려줄까?\\\' 깊이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특정한 아들이 마음에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테스트를 통해서 정하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세 아들과 더불어 사냥을 나가게 됩니다. 아버지 추장은 연세가 높아서 힘이 들지만, 배가 고프고, 또한 피곤하고, 온 몸이 견딜 수 없이 아파도 그래도 자녀들을 바르게 테스트하기 위해서 깊은 산중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느 한 지점에 갔는데, 나무 하ぐ?아주 크게 서 있고, 그 위에 높은 가지에 독수리 한 마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를 보자, 아버지 추장은 맏아들에게 말합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맏아들은 \\\"아름다운 하늘과 높은 산과 그리고 또한 큰 나무와 그리고 독수리 한 마리가 보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 추장은 씁쓸한 미소를 띄우고, 그 다음 둘째 아들에게 묻습니다. \\\"얘야, 너는 무엇이 보이느냐?\\\" \\\"예, 한 그루의 큰 나무가 있고, 그 위에 독수리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막내인 셋째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이 보이느냐?\\\" \\\"아버지, 독수리의 심장이 보입니다.\\\" \\\"그래! 그러면 쏴라\\\" 화살의 시위를 당겼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추장은 흡족한 얼굴로 \\\"네가 이제부터 추장이다.\\\"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냥을 갔으면, 쏘아야 할 표적을 보아야 하지요. 인생이 이 땅에 태어나서 나그네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궁극적으로 가야할 마지막 종착점을 항상 보며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을 살면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나의 삶의 향방을 모르고 살아서야 어디 그 사람이 역사의 진정한 봉사자로 의미있는 생애를 살아가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과연 생애를 사시면서 나의 마지막 \\\'Final Goal\\\' 나의 종착점을 표적으로 살아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인생의 최종적 포인트, 종착점이다. 이것이 인생의 최종적 목표가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에 살면서 그들을 바르게 살거나, 자유롭게 살거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그러한 기회를 이집트 사람들은 주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노예는 주인의 마음에 따라 한꺼번에 갑자기 운명이 바뀌기도 하고, 그의 삶의 상황이 뒤바뀌기도 합니다. 그런고로 노예는 의지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또한 희망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주인과 더불어 약속을 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라\\\' 그러면 자구요, \\\'먹어라\\\' 그러면 먹고, \\\'팔아라\\\' 그러면 팔려가고, 자식을 낳지 마라. 그러면 못 낳는 것이지요. 그런데 출애굽기 3장 10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서 모세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출애굽, 하나님에게로 가도록 그리고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에 가도록 하나님이 해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약속이란 말은 신학적 의미에서는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 이를테면 마지막 종착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지막 가나안, 종착점을 들어가기 전에 요단강 강변에 서있습니다. 이 마지막 단계에 과연 어떻게 행동을 해야 바로 그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현대인의 정신적 병리 중에 심각한 현상은 바로 목표상실의 증세입니다. 물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께서는 반론할 것입니다. 목표가 있습니다. 뚜렷합니다. 목표 없이 사는 인생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항변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예를 들어서 여러분께 증빙을 하겠습니다. 결혼을 앞둔 신랑 신부를 긴 시간은 아니지만, 교육을 시키고, 결혼에 임하도록 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신랑 신부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만약 두 사람 중에 결혼 생활을 하다가 부조화로운 일이 생기면, 헤어지겠느냐, 아니면 그래도 계속 결혼 생활을 영위하겠느냐\\\"하고 물어봅니다. 당돌합니다. \\\'헤어져야죠.\\\' 숨도 쉬지 않고 대답합니다. 정색을 하고 한 마디 합니다. \\\"헤어진다고? 그러면 결혼식이야, 이혼식이야? 나는 주례를 할 수 없어.\\\" 그제서 생각해보니, 뭔가 잘못 말한 것 같은 생각이 든 것 같습니다. 조용히 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결혼의 목표가 무엇인가? 결혼은 약속이야. 약속의 내용은 사랑이야. 사랑하는 상대가 사랑 받지 못할 때, 사랑하는 것이 결혼의 목표야. 신랑이 신부가, 신부가 신랑을 도저히 용서 못할 때에 용서하는 것이 사랑이야. 이것을 하자고 결혼하는 거야. 지금까지는 내가 나를 사랑했다 하더라도 결혼 후는 너를 위하여 내가 존재한다는 자기 존재를 긍정해야지.\\\" 이 말을 듣고야 비로소 알아듣겠다는 표정을 짓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고등학교 3학년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목표가 있느냐?\\\" \\\"예,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래, 대학은 도대체 왜 가려고 하느냐? 무슨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대학에 가려고 하느냐?\\\"그 다음은 답변이 없습니다. \\\"당신은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합니까?\\\" \\\"돈벌려고요.\\\" \\\"벌어서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법니까?\\\" \\\"글쎄요.\\\" 하여간에 법니다. 바로 오늘 인간의 문제 중에 가장 심각한 문제가 궁극적 목표가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혹시 어렴풋이 세웠두었다고 하더라도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온전히 투자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그 역사에 동참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런데 만약 광야에서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시니까 그 만나를 많이 끌어 모아서 그 만나를 소유하는데 생애의 목표를 삼는다면, 그 사람은 광야에서 죽고 말 것입니다. 뿐입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을 잘 재판하기 위해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이러한 직위를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인기를 끌어서 자기가 백부장을 광야에서 하겠다고, 생애를 백부장에 목표를 둔다면, 그 사람은 절대 가나안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어제 밤에 준비하는 중에 친한 친구로부터 부음하나를 받았습니다.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얘기는 이렇습니다. 화환, 이를테면 조화가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지 그 영안실에 가득하고, 들어가는 입구에도 가득하고, 마당에도 계속 조화를 세워둔다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지도자들이 많이 문상을 와서 지금도 사람이 바글바글 한답니다. \\\'아마, 형님이 많은 공로가 있는 것 같다. 인간관계가 좋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말합니다. 제가 모든 얘기를 다 듣고, 한 마디를 했습니다. \\\"당신 사랑하는 형님은 지금 저 냉동실에 있어. 그 분은 벌써 떠나갔어. 거기에 가득한 조화가 그에게 무슨 영향력을 주며, 무슨 유익을 주느냐? 수많은 조문객이 와서 조문하는 것이 그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구. 그 영혼이 어디 갔느냐고 생각해 보았냐고, 차라리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할 생각은 없느냐고.\\\" 여러분, 우리는 어쨌든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는 바로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에 바로 우리에게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에로 가는 길에는 많은 유혹과 방해물이 있습니다. 경험론의 선구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유혹 중에 가장 사람들이 넘어지기 쉬운 유혹은 세 가지\\\'라 그랬습니다. \\\'첫째가 거친 육체적 욕망이 바로 그것이고, 둘째가 자기만 잘났다고 하는 교만이 그것이고, 셋째가 졸렬한 이기심이라.\\\' 그랬습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을 뛰어넘어야 인생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살아가는데 거친 육체적 욕망은 신체적 건강과 경제적 부유가 올 때에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요즘, 매일 아침 운동을 하는데 의사 선생님이 한 분이 함께 저와 운동을 합니다. 엊그제 함께 대화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해왔습니다. \\\"목사님, 죄를 짓는데 말입니다. 어떤 죄를 짓는다고 해서 다 똑같이 만약에 심판을 한다면, 형평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그래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생각을 해보십시오. 신체구조나 건강이 좋거나 그리고 특별히 아주 정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음란의 유혹을 받으면, 넘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병약해서 지금 죽을지 살지 모르는 사람 앞에 음란의 유혹을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넘어가겠습니까? 또 명예를 유혹한다고 해서 넘어가겠습니까? 돈으로 유혹을 한다고 해서 넘어가겠습니까? 그러니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신체구조를 가진 사람들은 봐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이를테면, 스포츠에서 체급별로 메달을 주듯이 저희도 체급별로 나누어서 그렇게 심판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렇게 이론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웃는 자리기에 웃기는 했습니다만 여러분, 영양이 좋고, 돈이 많고, 그리고 또한 건장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복되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바로 목표인 하나님께로 가는 길에는 엄청난 유혹을 받을 수 있는 약점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의 젊은이를 생각합니다. 잘 먹고, 잘 자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젊은이들, 이 젊은이들은 유혹에 너무나 약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육체적 욕망이 하늘을 찌를 것 같은데, 그 젊은이들에게 유혹이 다가오면, 어떻게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까? 오히려 유혹을 받고 싶어서 동분서주하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 바로 오늘의 젊은이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또 하나, 현대인들은 교만하기 이를 때가 없습니다. 왜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까? 어머니와 아버지, 한 가정에 한 자녀만 낳았습니다. 한 아이 중심으로 가정을 경영합니다. 그래서 키우니 사랑받기만 하고, 자기 위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에 인격화됩니다. 그러고 나니 모든 만사가 다 자기 위주로 되기를 바랍니다. 한 할아버지의 넋두리입니다. 아들집에 갔더니 손자 녀석이 어깨 위에 올라오더니 마구잡이로 머리를 쥐어뜯는 것입니다. 한바탕 꾸중을 해주자니 아이가 울 것 같고, 울면은 자부가 표정이 달라질 것 같고, 그래서 자기 표정만 일그러지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라나는 아이들이 교만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자기 하고 싶으면 해야 돼요. 윤리도 도덕도 인륜도 없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쾌락을 추구하면, 사랑이 떠나갑니다. 사랑이 없으면, 허무해 집니다. 그리고 허무가 지나쳐서 결국은 자기 자신을 비하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자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대가 얼마나 교만한지 아십니까? 사회 정의를 다수의 의사가 규합되면, 이것이 사회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몇 일전에 탤런트 H씨가 \\\'나는 동성애를 하는 사람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모일간지에서 9월 28일부터 10월 5일까지 네티즌들에게 동성애를 인정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여론 조사를 했습니다. 그 중에서 동성애를 인정할 수 있다는 프로 테이지가 54.6%, 인정할 수 없다는 쪽이 45.4%라 그랬습니다. 그럼, 많은 사람이 인정하면, 그렇게 해도 됩니까? 그것이 사회 정의로 채택될 수 있는 것입니까? 절대자를 무시하며, 절대 진리를 무시하는 사회는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성애는 성경 창세기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동성애를 합법화하고 즐기던 사회입니다. 창세기 19장 4절 말씀에 보면,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사자를 \\\'소돔과 고모라에 죄가 어느 정도 관영하나 살펴보고 오라.\\\' 명을 받고 소돔과 고모라에 갔습니다. 이 때, 롯이 그 사자를 자기 집으로 모셔들여서 유숙하고, 대접하고 있는데 그 분들이 남성입니다. 그러니까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이 모여서 동성애를 즐기자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이를 참지 못한 롯이 \\\'자기 딸이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둘이 있는데, 이 둘을 내보내줄 테니까 이 딸들을 너희 마음대로 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 이 손님들은 손대지 말라.\\\'라고 사정사정하는 내용이 바로 창세기 19장 4절 이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람은 무론 노소 남녀할 것 없이 합의적으로 이것은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 정의화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죄가 관영한 사회를 멸망시키고 말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민주주의, 민주주의 하지만 분배의 문제는 사람들의 여론을 중시여겨서 분배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익분배이니까요. 그러나 사회 정의는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정부가 \\\'많은 사람들이 원하면 원대로 한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도자의 정의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도자의 양심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도자의 삶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른 지도자라면, 깨끗하고 청념한 지도자라면, 될 것은 되고,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회는 유혹을 자처하는 사회입니다. 유혹을 오히려 더 많이 받기를 위해서 아예 목표를 포기해 버리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한 자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약속의 성취를 얻자면, 세 가지를 지키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3장 7절에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도 알게 하리라\\\' 그랬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선포가 되었는데, 여호수아의 말을 꼭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 여호수아를 높이겠다. 어떻게? 모세 때의 권위처럼 높이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말씀을 하십니다. 첫째, 법궤를 따르라. 법궤를 따라야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된다고 하는 말은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면, 말씀대로 살아야 요단강을 건널 수 있다. 이런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만 사는 것으로 인정을 합니다. 사람이 먹고, 자고, 입고, 시집 장가가고, 자식 놓고, 키우고, 늙어 죽는 것, 이것도 사는 것은 사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는 것을 생리적 삶이다. 즉, 동물적 삶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철학적 삶을 삶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관을 정해놓고, 그 인생관을 투철하게 관철하기 위해서 자기는 절제하며, 최선을 다하여 자기의 삶을 살아갑니다. 여기는 인간 주도적 삶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추구하는 인생관을 성취했다고 하더라도 어떤 경험이나 하나의 사상은 남겨놓을 망정, 그 영혼은 하나님 앞에 생명으로 옮겨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차원의 삶이 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 삶입니다. 영혼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 절대 진리대로 사는 삶,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사는 삶이 영혼이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서 부모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다. 부모님은 나보다 먼저 생애를 살아보신 분들입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사랑의 정보입니다. \\\'1m밖에 가시가 있다. 조심해라. 10m밖에 웅덩이가 있다. 돌아가거라. 100m밖에 깊은 강이 흐른다. 보트를 준비해라.\\\' 그 말씀대로만 가면, 생이 복되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고, \\\'나도 한번 가시에 찔려보자. 나도 한 번 웅덩이에 빠져보자. 나도 한 번 강에 가서 퐁당 빠지자\\\' 죽는 것이지요. 부모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를 이렇게 만들었고, 너희를 이렇게 살도록 내가 만들어 두었다. 창조했다고 하시는데, 왜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완전자이십니다. 완전하신 분이 진정 사랑으로 우리에게 이르는 말씀대로 왜 살지 않느냐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생명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요단강을 건너자면, 제사장을 따르라.\\\' 그랬습니다. 여호수아 3장 3절에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그랬습니다. 제사장을 좇으라는 말은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뒤따라 살아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십자가적 삶입니다. 십자가적 삶은 너무나 추상적으로 들었기에 오늘은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십자가적 삶을 사는 예수님은 바른 인격자, 온전한 인격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참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말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知), 그리고 의지, 그리고 감정, 지정의를 그대로 닮는 것이 십자가적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성, 지식은 호세아서 6장 6절에 기록하신 말씀처럼 \\\'여호와를 알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이 온전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감성은 그야말로 성령이 주는 감화감동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온전히 헌신하는 그 기쁨을 누리는 감성이었습니다. 요즘 대형 서점에 가면은 \\\'감성소설\\\'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그 서가에 꽂힌 책들을 보면, \\\'하얀 기억 속의 너\\\' \\\'하얀 사랑\\\' \\\'외사랑\\\' \\\'들국화\\\' 들어보니까 로맨틱한 소설제목 같지 않습니까? 이 책들이 왜 독립코너로 서가에 꽂히게 되었느냐? 요즘 중년 남성들이 말입니다, 영국의 성 전문가 게일 쉬이가 말한 말에 감동을 받았는지 \\\'나도 남성 폐경기에 들어왔다. 내가 이제까지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정을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그리고 이 역사를 위해서 헌신만 하고, 나는 도대체 무엇이며, 나의 존재는 어디서 다시 찾을 것인가?\\\' 그러다가 돌파구로 나간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옛 애인 찾기 운동, 또 순진한 사랑을 한번 해보자. 말라빠진 감동이 다시 생기는 그러한 연애 한번 해보자.\\\' 이런 심리가 있어서 그 심리에 부응하는 소설들이 무지무지하게 나와서 그 소설에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중년 남성은 한 사회에 허리부분입니다. 중추입니다. 허리가 잘못되면, 상하가 잘못됩니다.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데, 자기를 찾다니요. 진정한 중년의 감동 감화는 그리고 살아있는 감성이 있다면, 내가 나를 온전히 희생시키고, 그리고 나의 가정과 나의 사랑하는 사회와 그리고 오늘 이 역사가 평안하고, 즐겁고, 복된 사회가 되기 위해서 자기를 끝까지 희생하면서 오는 십자가적 기쁨을 추구해야지, 도대체 어쩌자는 거예요. 자기를 찾기는 어디서 찾아요? 바로 자기의 영혼을 바로 세워야지요. 예수님의 의지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사랑을 성취하는 바로 이 사랑을 그대로 이루는 그러한 의지였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자신의 의지는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지가 예수님의 의지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기도하시기를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진정한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나의 의지를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요단강에 들어가거든 발을 요단강물에 들여 놓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지 순례를 가보시면, 요단강을 보고, \\\'참 이해가 안 간다.\\\'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상류로 건너간다면, 물이 마를 때는 폴짝 뛰어 건널 수도 있습니다. 상류는 그렇지요. 또 하류라 하더라도 건기에는 그렇게 강폭이 넓지 않고, 깊지가 않습니다. 신학자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시간이 언제냐? 우기, 비가 많이 와서 요단강물이 홍수처럼 넘실넘실 이렇게 흘러갈 때, 하나님이 \\\'건너가라.\\\' 명했다는 거예요. 그 이유는 왜 그런가? 그렇게 건너가야, 하나님께서 그 홍수를 막으셔서 육지로 만들어 건너게 해주어야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고,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기 위함이었다.\\\'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4장 24절 말씀을 보면,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고 바로 우기에 물이 홍수처럼 흐를 때, 건너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 안에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네가 마지막 목표점, 최종적 목표점, 하나님에게로 가는 길에 어떠한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발을 들여 놓아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가는 길에 어떤 방해가 있습니까? 어떤 유혹이 있습니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고, 발을 요단강에 들여놓듯이, \\\'너희들은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었느냐?\\\' 자격은 스스로 성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결이라고 하는 말의 뜻, 소극적으로 말씀드리면, 이 성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영혼 속에 그 보혈이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인이 해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대리인이 해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중보자가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스스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보혈의 피를 받을 수 있는 심령은 참회하는 눈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회개이고, 참회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배드리면서 참회 없는 예배를 드린다면, 참회하지 않는 자에게 말씀은 결코 역사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 죄가 관영한데, 말씀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내가 죄를 하나님 앞에 진실로 눈물을 흘리며, 참회한 심령 안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했을 때, 기뻐 감격하지, \\\'나는 의인입니다. 내가 이래도 52주일을 한번도 안 빠지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내가 얼마나 세상 사람과 비교할 때, 착한데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와서 졸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교회에 빠짐없이 교회의 문을 들어왔다, 나갔다 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이 한 말씀도 은혜와 감격이 안돼요. 말씀이 역사치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인 성결은 무엇인가? 내 안에 성령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소원이 뭐예요? 행복이요? 교회는 행복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결케 하고, 거룩케 하는 곳입니다. 나의 영혼이 하나님의 영, 성령을 온전히 모셔들여서 어떤 가라지와 유혹이 나의 심령 속에 들어올 공간을 허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원이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이 소원이 되어야 하고, 성령 충만한 자가 적극적으로 거룩하며, 성결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성결한 자가 되어서 요단강을 기쁘게 건너 최종적 종착점 하나님의 품에 모두 안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