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병의 정결법 레14:1-9
부정한 병 레위기 13장에서 나병에 대하여 20번 이상 부정하다고 했다. 겉모습은 하나의 표식이며 보이지 아니하는 속사람의 부정한 모습을 강조한다. 나병은 탐심이 생길 때 탐욕을 이기지 못하여 발병하였는데(왕하 5:20-27) 그의 일생 뿐 아니라 자손대대로 미치리라는 말씀을 들었다. 탐심은 우상숭배(골 3:5)이므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신다. 이 부정한 병에 대한 정결법은 우슬초로 씻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김받아야 한다.
죽음과 부활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몇가지가 있다. 그중 살아있는 새 두마리를 취하여 새 한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고 다른 한 마리는 산 채로 취하여 예식을 행했다. 새 한마리를 잡은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죽음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것의 그림자요, 살아있는 새로 예식을 행함은 부활의 주님을 상징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다. 물에 잠김은 죽음이요, 물에서 올라옴은 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 (고전 10:2) 세례를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된다.
옷을 빨고 몸을 씻음 나병 환자가 제사장에 의해서 정결하다고 선언을 받았어도 바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 옷을 빨고 머리털을 밀고 온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그런후 7일간 자기 처소 밖에 있어야 한다. 옷을 빨고 몸을 씻는 것은 성도의 성화(聖化)를 의미한다. 신약에서 성화로 표현한 말은 구약에서는 구별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거듭난 사람도 날마다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 7:1)고 하셨는데 한걸음 한걸음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
한신대학교에서 목회상담학을 가르치는 정태기 목사님이 미국에 있을 때 소록도에 관한 기사를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정교수는 한국에 돌아오자 일주일 예정으로 소록도를 방문했습니다. 소록도 안에 있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통성기도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목사님은 소리내어 기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뒷자리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주 투박한 충청도 사투리로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큰데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는데유? 하면서 계속 같은 기도만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인가 해서 돌아다 보았더니 눈 한쪽은 없고, 두 손은 없어져 팔뚝만 남았고, 입도 코도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큰데 어떻게 갚는데유? 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목사님은 그의 기도하는 모습에 가슴이 북받쳐, 그 사람의 다리에 자신의 몸을 의지한채 울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시간이 가는줄 모르고 울고 있는데 몽둥이가 정목사님의 옆구리를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사람의 팔이 그를 깨우고 있었습니다. 예배 끝났시유 하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 안에는 정목사님과 그 사람 뿐이었습니다.
밖에 나와서 그에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기에 그런 기도를 드립니까? 했더니, 문둥병이 들자 처자식도 형제도 다 자신을 버렸지만 오직 하나님은 자기를 버리지 않고 날마다 품에 안아 주심을 느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고 했습니다. 그날부터 정목사님은 교회 사택에 머물지 않고 그분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였고, 그의 교수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멀쩡한데, 속사람은 마비되었고 추하고 더러운 것으로 얼룩져 있지나 않은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나병은 육체와 마음을 만신창이로 만들지만 그 병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품어주심을 입게 됩니다. 분명 나병은 무서운 병이며 다정하던 사이를 갈라놓고 부모형제를 격리시키고, 사회와 직장과 친구를 격리시키는 병인 것처럼,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 놓으며 가족과의 행복한 삶에서 격리시키는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만이, 우리를 씻어 정결케 하며 모든 더러움에서 건지시고 하나님의 자녀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십니다. 나병의 실체를 알 때 죄의 실체를 알며,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았을 때의 감격과 기쁨은, 죄에서 용서받고 사유의 은총을 입은 감격과 기쁨과 같습니다. 오늘은 레위기 14장을 통하여 나병 정결의식에 대하여 말씀을 생각하겠습니다.
첫째로, 나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레위기 13장에서 나병에 대하여 20번 이상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겉모습의 현상은 하나의 표식이며,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아니하는 속사람의 부정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울을 볼 때 볼 수 있는 내가 있고, 볼 수 없는 내가 있습니다. 거울에 보이는 나의 모습은 예쁘게 나타나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나의 모습은 더럽고 추할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나의 얼굴은 단정하고 흠이 없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나의 모습은 상처투성이고 이그러진 모습일 수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내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겉모습은 화려하고 정상적이지만 속사람은 추하고 상처 뿐이며 죄로 얼룩져 있을 수 있습니다. 나병을 부정한 병으로 규정하는 것은 죄로 인하여 이그러진 속사람의 모습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더럽고 추한 죄가 자리를 잡을 때 나의 진정한 모습이 어떤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렸던 아람 나라 군대장관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서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말씀을 듣고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어 깨끗이 나음을 입었습니다. 너무나 고마운 마음으로 나아만은 엘리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내가 이제야 하나님 같은 신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준비하여 온 예물을 받아 주시오 라고 했습니다. 그 예물은 은 10달란트, 금 6천개, 의복 10벌이었습니다. 값으로 따지면 엄청난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것을 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것이지, 내가 낫게 한 것이 아닙니다 하며 기어코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 장군은 엘리사에게 간청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땅의 흙을 주시면 고국에 돌아가서 그 흙으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예물을 받았더라면 흙을 가지고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곁에서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몸종 게하시가 마음에 아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옷과 금과 은을 본 게하시는 마음에 탐심이 생겼습니다.(왕하 5장) 그래서 떠나간 나아만을 쫓아가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인이 나를 보내시면서 선지자의 생도 중에서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 왔는데 청컨대 은 한 달란트와 옷 두벌만 달라고 하십니다 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었습니다. 게하시는 그것을 집에 숨겨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엘리사 앞에 왔을 때에 엘리사 선지자가 묻습니다. 네가 어디 갔다 오느냐? 게하시는 아무데도 안 갔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네가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느냐? 그렇게 재물이 좋으냐?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가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게하시는 나병에 걸려 부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너무 가혹한 처사인듯 하지만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는 말씀입니다.
게하시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한마디로 탐심과 탐욕 때문입니다. 게하시는 엘리사와 같이 훌륭한 선지자와 함께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보고 압니다. 엘리사를 통하여 수많은 기적이 나타났음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은혜의 분위기 속에서 만족하고 감사하고 감격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육의 사람을 벗지 못했습니다. 마음에 일어나는 탐심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소욕대로, 탐욕을 부리며 살았습니다. 골 3:5에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하셨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므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고 부정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계명 중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는데 나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며 우상을 만들지 말라 고 하십니다. 탐심은 나병과 같습니다.게하시의 잘못은 거짓말 한 것과 엘리사를 속인 것과 탐심입니다. 가룟 유다의 탐심이 패망의 길을 걷게 했으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탐심이 비참한 불행을 가져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당부한 말이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고 했습니다.(딤전 6:10)
있는 바를 족할줄 알아야 합니다. 탐심을 물리치고 주님께 수종 들어야 합니다. 탐심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성숙한 신앙인입니다. 잘 살려고 하지 말고 바르게 살아야 하며, 잘 믿으려고 하지 말고 바로 믿어야 합니다. 바르게 살겠다는 생각보다 잘 살겠다는 생각이 있을 때, 거짓말하게 하며 남을 해치고 악한 일을 합니다. 바른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생각보다는, 남보다 잘 믿겠다는 생각이 있을 때 남을 무시하고 자기만 제일이라는 신앙적 교만에 빠집니다. 탐심이나 교만은 영혼을 병들게 하며, 이런 것은 부정한 것입니다.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는 법으로 우슬초를 가지고 결례를 행했습니다.
우슬초는 팔레스틴에 흔한 식물인데 박하과에 속합니다. 향기가 특별하고 방부제의 효능도 있어서 나환자의 결례를 비롯하여 여러 의식에 사용하였습니다. 다윗은 시편51:7에 자신의 죄를 부정한 나병과 같이 생각하여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라고 간구했습니다. 우슬초를 백향목과 함께 취하여 정결의식을 행했는데 백향목은 높이 자라는 나무이며, 곧게 자라고 향기가 있는 나무로 성전 재목으로 썼습니다. 가장 높은 백향목과 가장 낮은 곳에 자라는 우슬초로 함께 취하는 것은, 교만에 대한 징벌인 나병을 가장 낮은 자세를 갖게 하는 겸손의 예식입니다. 탐욕을 버리고 겸손함 마음으로 살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정결법의 의미는 죽음과 부활입니다.
정결케 되는 날의 규례는 몇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살아있는 새 두 마리를 취하여,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에서 잡고, 다른 새 한 마리는 산 채로 취하여 예식을 행했습니다. 흐르는 물을 일본 성경에서는 산 물 이라고 했습니다. 이 예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상징하는 예식입니다.
여기의 새는 부정한 새가 아니라 정결한 새이며 새 한마리를 잡아 흐르는 물위에 피를 흘리게 한 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신 속죄 죽음의 그림자이며, 새 한 마리는 산 채로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일곱 번 뿌리게 했는데 이것은 우리 주님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수로서 완전한 구원, 완전한 속죄를 의미합니다.
또한 흐르는 물위에서 의식을 행하는 것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세례를 헬라어로 밥티죠라고 하는데 물에 잠그다 라는 뜻입니다. 물에 잠기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새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뜻합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주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0:1-2에서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했습니다. 홍해에 들어선 것을 세례로 보았습니다. 바다를 지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홍해에 들어서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 살았습니다. 이는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죄악을 속하고 새 생명을 주신 은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정결케 된 은혜를 감사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옷을 빨고 몸을 씻었습니다.
나병 환자가 제사장에 의하여 정결하다고 선언을 받았어도 바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기 옷을 빨고, 머리털을 밀고 온 몸을 깨끗이 씻어야 합니다. 그런후 7일간 자기 처소 밖에 있어야 합니다. 철저히 부정을 제하는 것입니다. 7일간 이 예식을 반복하므로 날마다 날마다 정결함을 받아야 합니다. 옷을 빨고 몸을 씻는 의식은 성도의 성화(聖化)를 의미합니다. 신약에서 성화로 표현한 말은 구약에서는 구별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새 생명 얻은 거듭난 사람도 날마다 성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성화는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듯이 주님 앞에 설때까지 올라야 합니다.
칼빈은 \"이 세상에서 완전한 성화는 없다. 하나님 앞에 서야 완전한 성화가 된다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7:1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 했습니다. 세상의 욕망을 하나 하나 버리고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성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부정한 것을 완전히 떨쳐 버리고 성결한 주님의 자녀로 당당히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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