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잉태/창48:11

 거룩한 잉태/창48:11

거룩한 잉태
창48:11





갑돌이가 사는 동네에 갑순이라는 이름을 가진 처녀가 있었습니다. 갑순이는 미인인데다가 똑똑하고 또한 대단히 착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동네의 모든 총각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갑돌이로서는, 갑순이에 대해 감히 꿈도 꿔보지 못합니다. 한편 을순이라는 처녀가 있는데, 갑순이에 비해 여러 면에서 떨어지는 처녀입니다. 하지만 갑돌이는 을순이가 자기 수준에 맞다고 생각하여 을순이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을순이는 갑돌이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을순이에게 사랑을 고백하다가 지친 갑돌이가, 어느 날 동네를 벗어나 들판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갑순이가 오고 있었습니다. 정말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갑돌이는 언감생심, 갑순이를 피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순이가 갑돌이를 부르며, 함께 길을 걸으며 얘기를 나누자고 청하지 뭡니까. 갑돌이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거의 넋이 나간 상태로 갑순이와 함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갑돌이와 갑순이는 결혼을 하였습니다.



갑돌이의 생각은 을순이와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이뤄지지 않고, 엉뚱하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뜻밖에도 갑순이와 결혼하게 되는 최고의 행운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행운이란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굴러떨어진 선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갑돌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지요? 자신의 생각으로 어떤 일에 대해 기대를 갖는 겁니다. 하지만 그 기대가 좀처럼 이뤄지지 않아 낙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어떤 행운이 찾아온 경우 말입니다. 곧 자신이 기대한 것에서는 실패했는데, 전혀 기대치 않은 것에서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그 행운은 하나님의 경륜에서 비롯됩니다.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생각의 세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 생각으로 기대를 걸고 살아갑니다. 그 기대가 이뤄지지 않으면 낙망하고, 혹은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 세계는 바로 하나님 경륜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믿고 살아갈 때, 우리는 뜻밖의 행운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와 비슷한 현상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끌어안으면서 요셉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의 얼굴을 다시 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하였는데, 이제 하나님은, 내가 너의 자식들까지도 볼 수 있게 허락하셨구나.\" 야곱이 무심결에 한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신의 생각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문제입니다.



야곱의 생각은 요셉이 죽었기 때문에,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형편으로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형들은 숫염소 한 마리를 죽여, 그 피를 요셉이 입고 있던 옷에 묻혀 야곱에게 가져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은 요셉이 들짐승에게 잡혀 먹힌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 않습니까? 야곱으로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갖는 생각이라는 것의 한계를 확인하게 됩니다.



야곱은 물증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거짓 물증에 속아넘어간 것이지요. 그런데 그 정도의 물증도 없이, 순전히 자기 추측만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대단히 많이 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추측에서 비롯된 생각이라는 것은 이렇게 한계를 지닙니다. 그것은 추측일 뿐 사실이 아닙니다. 자기 추측에서 비롯된 생각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많은 문제를 지니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 있지 않으십니까? \'아,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오해했구나\'라는 생각을 가져본 경우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느낌이 어떻습니까? 좀 머쓱하기도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요. 물론 그 오해의 깊이가 낮은 것도 있고, 아주 깊은 것도 있었을 겁니다. 오해란 그 사람의 행동거지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것인데, 잘못 이해한 그 당시에는 어떻게 그 사람을 대했을까요? 그 사람에게 화를 냈을 수도 있고, 그 이후 그를 미워했을 수도 있고, 또한 \'저런 한심한 놈이 있나\'하면서 그를 속으로 깔보기도 했을 겁니다. 추측에서 나온 생각으로 우리가 행동하게 되면, 이런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커지다 보면, 하나님도 자기 생각 안에 갇히게 됩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하나님보다 자기 생각이 훨씬 큰 것이지요.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생각 안에 하나님을 가둬놓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기식의 신앙인 것입니다.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기둥과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귀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넓적한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코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길쭉한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누구의 답도 옳지 않지요. 그런 식으로,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이해합니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틀렸다고 하며 서로 싸웁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저 \'오직 모를 뿐\'의 자세로 겸허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요셉을 살리셨고, 또한 요셉에게 아들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오늘 본문과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하늘만큼 뛰어넘은 상황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크고 오묘한 섭리의 역사 속에서, 먼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세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로 하나님의 역사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세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각의 무게중심이 하나님께 두어지는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 자세로 살 때, 우리는 가장 온전하고 복된 인생을 꾸려갈 수 있습니다.



생각의 무게중심 하나님께 두어지는 사람이 시련을 만나면, 첫째로 담담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 시련을 안겨준 사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셋째로 자신을 돌아보며, 부족한 점을 찾아내어 고치려 합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시련을 만나면, 그 반대로 행동하게 됩니다. 곧 첫째로 몹시 절망합니다. 둘째로 그 시련을 안겨준 사람을 원망합니다. 셋째로 아무런 자기 부족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이 올라온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하나님의 크고 오묘한 섭리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한 가지 좋은 방법을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바로 \"이럴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생각을 떠올리는 겁니다.



예수님은 가장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신 분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생각의 무게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사신 분입니다. 겟세마니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죽음의 그림자가 당신 앞에 깊게 드리웠을 때의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생각으로 나온 말이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옵소서\"였습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신 말씀이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십시오.\"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예수님 개인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대비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개인 생각이 있었지만, 금방 그것을 하나님의 경륜 속으로 던져 넣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맡기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고통스런 일은 죽음을 맞는 일이 아닐까요?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은 죽음이 아닐까요? 가장 자신의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상황은 죽음 앞에서가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상황에서 생각의 무게중심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일에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생각을 내맡기셨으니, 그보다 쉬운 일에서는 더더욱 흔쾌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생각을 내맡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 우리가 본받아 따라야 할 길입니다. 그분의 삶을 본받아 따름이 우리에게 가장 은총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만날 때마다 \"이럴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 생각이 올라오는 순간 잠시 그 생각에서 벗어나서, \"이럴 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때 떠오르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오묘한 은총의 섭리대로 살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지 꼭 2,000년이 되는 날입니다. 아니, 2,000번째로 다시금 태어나시는 날입니다. 여러분, 오늘 밤 여러분의 영혼 속에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의 영혼 속에서 자라나게 하십시오.



임산부가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바로 뱃속의 아이입니다. 그 아이를 위해 음식을 가려먹습니다. 그 아이를 위해 습관도 바꿉니다. 그 아이를 위해 아름다운 음악을 듣습니다. 그 아이를 위해 마음이 따스해지는 책을 읽습니다. 그 아이를 위해 가급적 좋은 생각만 하려 합니다. 자신의 가장 많은 에너지가 그 아이에게 두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몸과 마음이 아주 건강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때 산모는 몹시 기뻐합니다.



여러분의 영혼 속에 잉태된 아기 예수님께, 마치 임산부가 자기 뱃속의 아이에게 에너지를 쏟듯 쏟으십시오. 언젠가 산모의 기쁨이 바로 여러분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아니, 산모의 기쁨은 잠시이지만, 여러분의 기쁨은 영원한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2,000년 전에 저 멀리 이스라엘에서 태어났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한 인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한 인물의 생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겁니까? 단순히 캐롤을 부르고, 선물교환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는 그분의 영을 우리의 영혼의 자궁 안에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 속에 깃든 그분의 영의 힘을 빌어,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고 오묘한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의 세계 안에 갇혀 살아가면, 우리는 자주 낙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경륜의 세계를 믿으며 살아가면, 우리는 뜻밖의 행운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이라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생각의 세계 속에서 사시렵니까, 아니면 하나님 경륜의 세계 속에서 사시렵니까?



2,000년 전 성령께서 마리아의 자궁에 아기 예수님을 잉태케 하였듯이, 오늘 성령께서 여러분의 영혼의 자궁에 그분의 영을 잉태케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거룩한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거룩한 밤의 역사가 하나님 축복의 은총으로 이어지기를, 오늘 밤 여러분의 영혼의 자궁에 잉태될 아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