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소속의 문제 입니다

믿음은 소속의 문제입니다
출2:1-15





지난 번 집회 차 미국을 방문중에 미국에서 한국과 미국과의 월드컵 경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는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내어 놓고 한국을 응원하는 것을 상당히 주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받은 사람들은 참 입장이 난처한 모양입니다. 한국을 응원해야 하는데 미국이 눈치 보이고, 그렇다고 미국을 응원할 수는 없고, 그러다가 1:1로 무승부가 되니까 너무 좋아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미국 이민 1세들이나, 1.5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소속감의 문제인 것 같아 보였습니다.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이란 어떤 의미에서 소속의 문제입니다. 내가 과연 어디에 속해있는가를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이 교회에 있다고 해서 곧 그것이 나의 믿음이고 나의 소속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나의 소속이 되는 것도 아니지요. 헌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속되지 않고도 헌금은 할 수 있습니다. 기부금으로 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은 그런 외적인 행위이전 소속, 신분의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소속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마귀에게 속한 자요, 세상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늘에 속한 자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빌3:20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늘 시민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세의 부모의 믿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모세가 태어날 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많은 핍박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왕은 핍박을 하다 하다 안되니까 결국에는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하수에 던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첫머리에 보면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출2:1)로 시작합니다. 여기 레위 족속이라는 것은 아무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은 말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속한 지파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도 이름은 안나옵니다. 단지 레위지파라는 소속을 밝힙니다. 이 말은 비록 몸은 애굽 땅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던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모세의 부모의 믿음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영웅들의 리스트에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히브리서 11장에는 수많은 믿음의 영웅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데 모세의 부모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롭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 하였으며”(히11:23)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남자아이를 낳으면 다 나일 강에 던져 죽여야 하는 그 살벌한 고통의 시대에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모세를 키웠습니다. 왜 그들이라고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모두에게 다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모세의 부모는 믿음으로 결단했습니다. 애굽의 왕 바로에게 시선을 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높은 권위자이신 하나님에게 시선을 두기로 했습니다. 참 놀라운 믿음의 결단입니다.

본문 2절에 보면 그들은 아이가 태어났을 때 3개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키우게 됩니다. 그러나 3개월이 지나면서 더 이상 모세를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마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커졌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3개월 동안 아이를 키우는 것은 모세의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습니다. 믿음의 최선을 다한 후에 모세의 부모는 갈 상자를 가져다가 물이 들어오지 못하게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그 안에 아이를 담아 하수가 갈대 사이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그 누이 미리암은 어떻게 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미리암을 보내는 것은 단순히 호기심이 아닙니다. 아마 모세의 부모는 이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시는지를 보기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어떤 면에서 내가 힘쓸 것과 하나님께 맡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와 통합니다. 힘써야 할 것과 맡겨야 할 것을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맡겨야 될 것을 가지고 밤새도록 고민합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좋은 믿음입니다.

자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더 정확하게 묻는다면 하나님은 그 다음에 어떤 섭리를 행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바로의 공주를 그 강으로 보냈습니다. 하필 그 갈대가 있는 그곳으로 목욕을 하러 나왔고, 갈대사이의 상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시녀를 시켜 상자 가져오게 하고 그 안에 있는 아이를 보게 되지요. 바로의 공주는 상자 안에 있는 아이를 보고 그 아이가 히브리인의 아이인 것을 알았습니다. 상자를 열 때 아이가 울게 됩니다. 이 아이의 울음을 통해 하나님은 공주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아이가 운 것도 사실 하나님이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 아이의 울음으로 인해 공주의 마음에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때 바로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공주는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미리암은 곧 바로 달려가서 어머니 요게벳을 데리고 왔습니다. 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의 젖을 먹고 공주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나중에 공주에게로 데려갔을 때 바로의 공주는 이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불렀습니다. 물에서 건져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그 극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너무 완벽하게 모세를 안전하게 지켜주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바로의 공주에게 양육비를 받아가면서 당당하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세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정말 기적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통해 놀라운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라난 모세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된 것은 하나님의 간섭 없이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었을 때 그 공주에게는 다른 아들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또 입양되었다고 그에게 무슨 차별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당시에는 입양된 아들에게도 친아들과 똑같은 법적인 권리가 있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자랐습니다. 권력과 힘을 가졌습니다. 엄청난 부와 세상적인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자리에 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관심은 그런 것에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애굽의 권력을 차지하는 왕이 될 수 있을까도 그의 관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마음은 이미 자신의 민족에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바로의 궁전에서 자랐습니다. 애굽의 학문을 배웠지요 아마 애굽의 최고의 학문이었겠지요. 다신론을 교육받았을 것입니다. 우상들에 대해서도 배웠을 것입니다. 과학교육, 철학교육도 받았겠지요. 애굽의 역사, 그리고 애굽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인지를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자신이 애굽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은 애굽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합니다.

히11:24-26에 보면 모세의 이런 믿음의 소속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참 놀랍습니다. 분명히 모세는 애굽의 궁전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자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애굽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애굽을 거절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 사는 것이 가장 부요한 인생, 가장 가치있는 삶으로 알았습니다. 애굽의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능욕받는 것을 더 기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받는다는 것을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너무 어렵게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모세는 당시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지만 그의 백성들을 위해 애굽의 삶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믿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단순히 교회에 다니느냐? 그렇지 않느냐? 주일예배를 꼬박꼬박 참석하느냐? 십일조는 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문제는 ‘과연 내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몸만 교회 온다고 다 믿음의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진정으로 믿음의 사람,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나의 관심은 하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일에 우리의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겐 이런 소속감이 있습니까? 세상 한 가운데 살지만, 때때로 실패하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과 동화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모세는 스스로 자신은 애굽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알았을까요?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애굽 궁전에서의 평안한 삶을 포기했을까요?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모세의 친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키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많은 것을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아마 3-4년, 더 길면 6-7년을 어머니 요게벳은 아들 모세에게 신앙교육을 시키고 민족의식을 심어주었을 것입니다.

“모세야 너는 애굽사람이 아니다.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야,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야!” 어린 모세는 그 말을 다 소화해 내지는 못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애굽 사람이 아니라는 의식,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소속감은 모세로 하여금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나중에 애굽의 수많은 교육을 받았겠지만 그런 지식도 모세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소속감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릴 때 자녀들을 믿음으로 키운다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자녀들이 사회로 나가기 전에 가정 안에서 믿음으로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어릴 때의 말씀교육은 세상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어릴 때의 말씀교육, 어릴 때의 하나님 은혜의 체험은 환경을 뛰어넘게 만듭니다. 혹시 때때로 부모의 기대처럼 우리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고통스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모가 눈물로 심은 자녀들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사도행전7:23에 보면 모세가 어느 날 자기 민족,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위대한 사명을 걸머지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아마 한동안 모세도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의 신앙교육이 생각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세의 마음에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지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야, 이스라엘 사람이야” 보십시오 모세는 사십이 되어서 비로소 어릴 때의 믿음이 살아났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기도, 부모의 신앙교육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방법



우리의 믿음의 삶에서 우리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소속감을 갖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믿음은 소속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방법을 따르면 실패할 수 있습니다. 계속되는 본문은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11절을 보면 모세가 장성하게 되었을 때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는 그 고통의 현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형제라는 말은 가까운 친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인 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인들을 형제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관심이 얼마나 자기 민족에게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말입니다.

자 형제들에게로 갔던 모세는 무엇을 보았습니까? 그는 한 애굽 사람이 아마 노예 감독관이었겠지요,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때 자신도 모르게 모세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이럴 수 없어 저런 놈들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거야! 저런 놈은 죽여야 돼’ 마침 좌우를 살펴보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이고 아무도 모르게 모래에 감추었습니다. 좌우를 살폈다는 것은 모세의 떳떳하지 못한 모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는 좌우만 살폈지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튿날 다시 나가 보니까 이번에는 히브리인들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보니까 분명히 잘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른 자에게 “네가 어찌해서 동포를 치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말에 대한 그 사람의 반응은 너무나 상상 밖이었습니다. 14절을 보면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모세의 책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애굽사람 죽인 것을 들먹이면서 위협하고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고 바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됩니다. 바로는 모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저 미디안 광야로 도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하나님의 방법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분명히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고통받는 히브리인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지위와 권력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살겠다는 목표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사용한 방법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방법과 자기의 계획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순간적으로 모세는 이런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애굽 사람을 죽이고 비록 탄로가 나더라도, 여기 노예 생활하는 우리 동족들은 나를 옹호해 주겠지 그러면 내가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바로 왕과 대결해서 이 민족을 해방시켜야겠다’ 모세가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수 있게 하는 말씀이 사도행전 7:25에 나옵니다. 이 때의 모세의 마음은 이랬다는 것입니다. 보십시다.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참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모세는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줄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옹호해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을 드러내고 고발하였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계획이 아니라 자기 계획, 자기 생각대로 행하는 것은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시키게 됩니다.



미디안 광야, 하나님 체험의 장소



왜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로 인도했을까요? 왜 모세에게 40년의 광야가 필요했을까요? 40년은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있어서는 가장 황금과 같은 시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로 가게 하시고 40년의 시간을 그곳에서 지내게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위대한 설교자 C.S 루이스는 “고통이란 귀먹은 세상을 일깨우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미디안 광야로 보내어 자기 신화를 깨뜨리셨습니다. 인간적인 가능성을 완전히 깨뜨렸습니다. 모세는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을 모아서 군대를 만들고 그 군사력을 가지고 바로를 대항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힘으로 하려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광야로 보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세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이 학문이었습니다. 많이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애굽의 학문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모세가 내 세울 것은 애굽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권력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아무도 모세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비로소 지금까지의 자기의 경험 자기의 계획이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것을 위해 모세를 광야로 보낸 것입니다. 혹시 우리 중에는 모세처럼 자기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시간들을 보내는 분이 있습니까? 혹시 병실에 갇혀있거나 부도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알아야 합니다.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모세처럼 훈련받고 있습니다. 내 힘, 내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모세와 같이 쓰임받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전도자였던 무디는 모세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모세의 인생에서 처음 40년, 애굽에서의 40년은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즉 “I am some-body”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의 두 번째 40년, 미디안 광야에서의 40년은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즉 “I am no-body”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고 난 후 마지막 40년은 ‘나는 하나님 안에서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I am God\"s buddy(친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야 합니다. ‘nothing\" 이던 사람이 하나님 만나고 \"everything\"이 될 수 있습니다. 광야은 모세로 하여금 철저하게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했습니다. 그 때 그는 출애굽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모세에게 광야의 삶이 필요했던 두 번째 이유는 오직 하나님만을 대면하며 살게 하기 위해섭니다. 사람을 의지하거나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아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면 금방 좌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대면하고 하나님의 위로로 힘을 얻는 자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를 광야로 보냈습니다. 광야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 외로운 곳입니다. 모세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공주의 아들이니까 잠시도 혼자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런 가운데 모세는 자기신화, 자기 능력, 자기 힘을 믿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부패시키는 것은 사람에게 미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에게 너무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들만 가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모세는 이 광야에서 비로소 하나님 앞에선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바로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게 될 때였습니다. 혹시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습니까? 사람들의 칭찬을 기대하십니까? 사람들의 말에 실망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스스로 질문을 해야 합니다. “과연 나의 소속은 어디냐?”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의 삶을 포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관심이 있었고 마음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애굽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는 곳에 속하려고 하고, 자기가 손해 보지 않을 곳에 소속하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합니다. 모세는 부귀영화를 포기할 정도로 하나님의 백성에 소속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곳에 바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좀 어렵게 보여도 예수에게 속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좀 힘들어도, 예수 때문에 좀 손해 보더라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때 모세처럼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주님께 헌신할 수 있는 복된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