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상속

믿음의 상속
출2:1-10





레위 가문의 어떤 남자가 레위 가문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여자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 남이 모르게 석 달 동안이나 길렀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를 구하여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이를 거기에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 두었다. 그 아이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 보고 있었다.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려고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이 강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공주가 갈대 숲 속에 있는 상자를 보고, 시녀 한 명을 보내서 그것을 가져 오게 하였다. 열어 보니, 거기에 남자 아이가 울고 있었다. 공주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면서 말하였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그 때에 그 아이의 누이가 나서서 바로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서,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아기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데려다 드릴까요?\" 바로의 딸이 대답하였다. \"그래, 어서 데려오너라.\" 그 소녀가 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 왔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나를 대신하여 젖을 먹여 다오. 그렇게 하면, 내가 너에게 삯을 주겠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젖을 먹였다. 그 아이가 다 자란 다음에, 그 여인이 그 아이를 바로의 딸에게 데려다 주니, 공주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공주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다\" 하면서, 그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다.

서신서의 말씀: 히브리서 11:2 3 ~ 26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믿음으로 그 부모는,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겼습니다. 그들은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바로 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불리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는 잠시 죄의 향락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학대받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모욕을, 이집트의 재물보다 더 값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장차 받을 상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복음서의 말씀: 마태복음서 15: 21 ~ 28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그 때에 제자들이 다가와서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돌려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하셨다. 그러나 그 여자는 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아이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시니, 그 여자가 말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그제서야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야,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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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어버이주일이기 때문에 성서에 나오는 어버이 몇 명을 소개할까 합니다. 먼저 출애굽기에 나오는 유명한 모세의 출생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유명한 사람의 출생을 보면 기구한 운명 속에 출생한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모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모세라는 이 이름은 ‘물가에서 건졌다’라는 뜻인데, 문제는 이 모세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하나님도 아니고 부모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압제하면서 노예처럼 부리던 이집트 왕가의 공주가 지어 준 이름입니다. 이방인 압제자가 지어 준 이름, 이방인의 이름을 타고난 모세가 이방인과 맞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위대한 공적을 세웁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누가 이름을 지어 주었든지 간에 모세라는 이름은 귀중하게 성서 말씀 중에 전수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름은 누가 지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사람이 한 일에 따라 이름이 사라질 수도 있고 지속될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왕의 경우 별도의 이름을 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왕의 이름은 ‘바로’(파라오)입니다. 바로라는 이집트 왕의 이름은 특정 임금의 이름이 아니고 모든 왕의 공통되는 이름입니다. 이 바로 왕 때에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이집트의 왕조를 따져서 모세가 태어날 때의 바로 왕은 바로 왕조 18대에 속하는 왕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 왕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공주입니다. 이 공주는 아마도 그때까지 아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집트 사람들은 장대한 나일 강에 여러 가지 신화적 장소들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들이 아이를 갖기 위해서 기도드리는, 다산을 위한 기도처가 있어서 여인들은 이런 곳에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또 왕실에 있는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 목욕처도 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왕실에 속한 사람들이 와서 목욕하는 목욕처 근방에 지금 공주가 와 있는 장면입니다. 그 옆에 갈대밭이 무성했습니다.

모세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는데 너무나 잘 생기고 기특하여 어떻게 하든지 이 아이를 잘 키워야 하겠다고 마음먹고서 석 달 동안을 잘 길렀습니다. 그런데 석 달이 지나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커집니다. 그 당시 이집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죽이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어머니는 석 달 동안 숨겨서 키우다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서 더 이상 집 안에서 기를 수가 없어서, 이 아이를 갈대 상자에다 역청과 송진을 발라 물이 들어오지 않게 해서, 그 속에 아이를 넣어 왕실사람들이 목욕하는 갈대밭에다 갖다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누이가 멀리 숨어서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공주의 시녀 하나가 그 갈대밭에 있는 상자를 발견하고 공주에게 보였더니, 공주가 히브리 출신 사내아이인 줄 알면서도 불쌍히 여겨서 데려다가 기르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때 누이 미리암이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가 공주 앞에 나타나 말합니다. “이 아이를 젖 먹여서 키울 유모 하나를 제가 소개하여 드릴까요?” 그러자 공주가 대답합니다. “그렇게 해라.” 그래서 모세를 낳은 친어머니가 유모가 됩니다. 모세의 생모가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자기가 젖을 먹이고 잘 키워서 다 키운 다음에 공주에게 데려가자, 공주가 그 아이를 양자로 삼습니다. 이것이 모세의 출생에 얽힌 출애굽기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어 드린 히브리서를 보면, 모세가 태어났을 때 모세의 어머니는 믿음으로 석 달 동안 아이를 숨겨 키웠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를 잘 키워서 하나님 백성의 지도자가 되게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자기가 낳은 자식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 누구 손을 통해서든지 잘 자라서 훌륭한 일을 하리라는 확신이 있었고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 점을 강조합니다. 누군들 자기 자식을 믿음 속에서 기르지 않겠습니까만,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자기가 낳은 자식, 후에 공주가 이름 지어 준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해서 반드시 큰일을 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고, 이 믿음 하나로 아이를 갈대 상자에 담아 강에 버립니다.

이 버림은 요즈음의 버림과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알다시피 아이를 남의 집 대문 앞에 갔다 버리고, 그래서 버려진 아이를 외국으로 입양시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달리, 믿음으로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모세 어머니의 심정! 어머니 되신 여러분, 혹은 아버지 되신 여러분 한번 꼭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낳은 자식을 더 이상 집안에서 숨겨 기를 수가 없어서 누군가가 살려 주기를 고대하면서 강가 갈대밭에 버려두어야 하는 그 심정을 말입니다. 그러나 요게벳은 죽음의 강가에 아이를 두고서도 ‘내 아이는 안 죽는다. 누군가는 반드시 강물에서 건져 살려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복을 받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강물위에 누워서 위험에 처한 줄도 모르는 모세를 갈대밭에 숨어서 지켜보는 누나의 떨리는 눈망울, 딸을 내보내고서 아이와 나는 한 몸이라 생각하며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니의 사랑, 이 모든 사랑과 기도 안에서 모세는 살아갑니다.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 아이가 반드시 성장하고 성공해서 훌륭한 일을 하게 되리라고 믿는 어머니의 심정, 이 심정을 오늘 성서는 하늘을 향한, 창조주를 향한 어머니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이 이스라엘의 모세를 만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믿음과 누나 미리암의 순종과 뜻하지 않은 이방인 공주의 아기 사랑이 모여서 지도자 모세를 만들었습니다.

믿음이 사람을 키웁니다. 믿음이 사람의 생명을 보장합니다. 믿음대로 될 수 있습니다. 진실로 믿고 의지하면! 이것이 오늘 모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한 이방 어머니에 관한 것입니다. 이 어머니한테 하나밖에 없는 딸이 있었는데, 이 외동딸이 불행하게도 귀신이 들렸습니다. 귀신 들린 고통이 얼마나 큰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귀신 들린 이 딸의 아픔은 고스란히 어머니의 아픔입니다. 딸은 어머니의 소산이고 딸의 아픔과 슬픔, 딸의 고민은 곧 어머니의 슬픔이요 고민이요 아픔입니다. 어머니의 심정이란 자기 몸을 찢어서라도 딸이 나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여인은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천민으로 취급받던 가나안 족속에 속했습니다. 감히 유대인과는 접촉도 하지 못하는 그런 천민에 속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예수라는 사람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는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나타났습니다. 이 어머니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습니다. 가서 예수 앞에 엎드려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내 딸이, 하나밖에 없는 딸이 어릴 때부터 귀신이 들렸습니다. 미쳤습니다. 제발 좀 고쳐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께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간절한 호소에 무관심과 냉대로 대하십니다. 뜻밖입니다. 그 어머니가 하도 따라오니까 제자들도 곤란해서, 이 여자가 계속 따라오는데 귀찮으니 무슨 좋은 말이라도 해서라도 돌려보내자고 스승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말이 없습니다.

이 여인이 또다시 간청합니다. “주님, 주님, 제발 좀 도와주십시오.” 그제야 예수께서 입을 여시지만, 그것은 냉정한 거절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만 보냄을 받았지, 당신과 같은 이방 여인에게는 보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잘 알고 있는 민족간의 차별, 종족간의 차별을 예수께서 확인합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다시 요청합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께서 아주 인간적인 모멸을 줍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너는 개다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먹는 빵, 생명의 빵, 영원한 빵을 어찌 개 같은 이방 여자인 너에게 줄 수 있느냐? 그렇게 못한다. 이 모멸은 종족간의 차별, 인간적인 차별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견디기 힘든 모욕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여기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습니까? 빵을 잘라서 주지 않더라도 부스러기는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이라도 주시면 내 딸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드디어 말씀하십니다. “여인이여 네 믿음이 딸을 구하였도다.” 이렇게 말하는 즉시 귀신들린 딸이 나아서 정상적인 인간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생모와 귀신 들린 딸을 가진 어머니, 이 두 여인의 믿음이 자녀들을 살렸습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자식에 대해서, 자식의 현재 일에 대해서, 자식의 장래에 대해서 얼마만큼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내 자식은 분명히 잘 된다, 믿고 맡겨도 된다, 그런 믿음 가지고 계십니까? 자식은 내가 낳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믿음, 인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당신의 피조물을 살피시니 나는 내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자식이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 자식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커 갑니다. 자식은 혈육으로는 나와 관계가 있지만, 믿음으로 보면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자식의 장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십시다.

부모님들, 자녀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그냥 어버이가 아니라, 자식들의 어머니, 자식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부모가 되신다면 자녀들은 여러분의 무게를 인정할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을 저울로 다는데, 저울 한 쪽에는 지구를 얹고 다른 쪽에 어머니 아버지를 올린다면 저울추가 오히려 부모님 쪽으로 기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수량적인 표현은 아닙니다.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진실, 믿음, 사랑, 친절, 긍휼, 그 무엇으로 표현하든지 그것이 지구보다도 훨씬 더 무겁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자녀 여러분,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무겁게 느껴졌습니까? 부모 여러분 우리는 그만큼 자식들에게 무겁게 느껴지는 진실한 부모입니까?

성서에 나온 얘기 말고 우리나라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3월 30일자 동아일보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이름은 김순금이라는 여자의 이야기인데, 나이는 마흔 다섯 살, 주소지는 경기도 부천입니다. 이 여자는 19살 된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한 자식을 키우던 어머니입니다. 강원도 쪽을 남편과 함께 여행하다가 속초에서 너무 두통이 심해서 쓰러져서, 병원 중환자실로 갔는데, 바로 심장이 정지되고 호흡이 정지되어서, 부랴부랴 심폐소생술을 받고 겨우 목숨만 건졌습니다. 그러나 의식이 없는 뇌사 상태였습니다. 물론 일주일 뒤에 목숨이 끊어졌습니다만, 뇌사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자, 아내와 늘 함께했던 남편은 아내의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단합니다.

그래서 뇌사 상태에서 목숨이 살아 있는 동안에 장기 이식을 했는데, 서울 삼성 병원에 간 하나를 기증하여 이식했고,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 신장 두 개를 기증하여 두 사람에게 이식했고, 강릉 아산병원에 각막 두 개를 주어 두 사람에게 이식했습니다. 모두 다섯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이 여인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내는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 때문에 늘 가슴 저려 했으며, 어떻게 하면 이 아들이 평생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를 걱정해 왔는데, 이제 평생을 청각장애로 살아갈 우리 아들에게, 어머니를 진지한 사랑을 실천했던 분으로 기억하면서, 자기의 처지를 이기고 감사하며 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인간은 죽게 되면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이웃과의 관계도 끊어집니다. 자연과의 관계도 끊어집니다. 어쩔 수 없는 종결이자 단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도 끊어집니다. 자기 자신과의 단절, 세상과의 단절, 자연과의 단절, 하나님과의 단절, 그걸 이름하여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창조주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한 가지만은 단절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우리가 단절되더라도 하나님은 다시 이어주십니다. 뭘로 이어주십니까?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죽은 이후도 우리와 자신을 이어주십니다. 그러면서 영원한 생명을 제공하십니다.

거기에는 요구되는 조건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구세주 예수, 보혜사 성령, 그분이 우리와 늘 함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사랑으로 연결해 주신답니다. 모든 부모에게 모든 자식들에게 이 선물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죽은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살아 있는 자에게는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아름다운 생명을 사랑으로 베풀어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더러 하나님을 믿듯이 자식을 믿어 주고, 부모를 믿어 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식과 부모를 옭아매고 구슬처럼 꿰어서 우리 가족들을, 교회를 하나로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건 믿음뿐, 다른 조건이 없습니다. 믿으시면 오늘 우리 자식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 부모들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부모가 됩니다. 이 믿음의 기적이 오늘 부모 된 여러분, 자식 된 여러분, 모두의 복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