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믿음 (3)
모세의 믿음(3)
출2:1-10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눈치없이 무식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눈치가 없으면 유식하든지 무식하면 눈치라도 있어야 하는데 눈치없이 무식하면 이 사람은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운동경기를 할 때에 서로 실력이 비슷해야 재미가 있습니다. 기본기가 갖추어져 있는 사람들끼리 운동을 하면 재미도 있지만 묘기 또한 속출합니다. 그러나 한쪽은 잘하는 선수인데 한쪽이 기본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 운동경기는 아무런 재미가 없습니다.
축구에 \'페인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속이는 동작을 통해 공을 몰고 가는 기술입니다. 그런데 이 페인팅도 축구를 할 줄 아는 사람들끼리 경기를 해야 묘미가 있습니다. 기본기가 없는 사람한테는 아무리 페인팅 기술을 해도 상대방이 속지 않습니다. 마구 덤비기 때문에 마구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한테는 기술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화있는 관계
제가 자랄 때에는 연애편지 문화가 그 나름대로 있었습니다. 연인들이 서로 사랑하다가 손수건을 선물하면 헤어지자는 뜻입니다. 또한 상대방의 의사를 받아들이거나 또 선을 보고 넥타이를 선물하면 내가 목을 걸고 당신을 섬기겠다는 뜻입니다. 넥타이는 수용의 뜻이고 손수건은 이별의 뜻입니다.
그런데 그 뜻도 모르고 상대방으로부터 손수건을 선물 받았는데 이 정신 빠진 남자가 \'손수건 칼라가 내 마음에 듭니다. 나도 손수건을 지금 하나 사야 되는데 어떻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았습니까? 우리는 아무리 보아도 천생배필입니다\' 이런 답장을 쓴 남자와 혼인하면 평생 짐이 됩니다.
만사는 조화가 필요합니다. 조화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 기본이 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은 조화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하나의 특출함을 가지고 전체를 평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조화 있는 삶으로 평가하십니다.
제가 모세의 생애를 다루면서 모세 부모의 믿음을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의 생애는 파란만장한 여러 가지 사건을 겪지만 모세를 가능케 했던 믿음을 놓치면 모세를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통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세 부모의 믿음을 소개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 단계의 삶
모세는 세 단계의 삶을 살았습니다. 첫 단계의 사십년은 애굽의 왕자로 살았습니다.
둘째 단계의 사십년은 미디안 광야의 목자로 살았습니다.
세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출애굽의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이렇게 세 단계가 명백하게 구분되어 있으며 각각 다른 인생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생활을 할 때는 목자의 개념이 전혀 그 속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을 해방시키는 출애굽의 지도자된 모습은 왕자시절에는 전혀 없었습니다. 세 단계의 모세의 생애는 각각 세 사람의 인생입니다. 한 사람은 왕자로 살다가 생을 마쳤고 한 사람은 목자로 살다가 생을 마쳤으며 한 사람은 출애굽의 지도자로 살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이와 같이 모세의 생애는 각각 세 가지의 인생을 살았지만 이것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미국의 부흥사 디엘 무디는 모세를 연구하면서 대단히 흥미있는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왕궁에서 왕자로 살았던 초기 40년의 모세를 가리켜 섬씽(Something)의 인생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무언가를 갖춘 대단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이 볼 때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Something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Something의 인물이 애굽 왕궁에서 추방을 당합니다.
그리고 미디안 광야에 가서 목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 광야에서 사는 모세의 모습을 낫씽(Nothing)의 인생이라고 묘사를 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인생입니다. 애굽 왕궁을 떠나온 모세는 별 존재가 아닙니다. 그저 양떼를 모는 목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모세에게는 자기가 Nothing의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광야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이후 모세는 에브리씽(Everything)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가능했던 능력자로 살았다고 묘사를 했습니다.
사람은 한 때 Something의 인생인 줄로 착각하고 우쭐거립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 것도 아니구나,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연약한 존재구나 라는 것을 바로 깨닫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지도자가 될 때에 그는 Everything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Nothing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보배를 가질 때에 \"이는 능력의 힘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보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좌정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Everything의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까? Something의 인간으로서 혹시 자만하고 있습니까? 내가 이 정도면 제법 된 줄로 생각하는 오류가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Nothing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로 담겨지지 않으면 질그릇 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좋은 부모
요즘 CEO 최고경영자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서 「CEO가 되는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기에게 심어준 비전을 이야기하면서 그분들의 좋은 부모됨을 자랑하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최고의 복은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정말 좋은 부모를 만났습니다. 이 역사 속에 모세의 부모가 최고의 부모라고 추천하기에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믿음의 조화를 갖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레위인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혼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정에서 모세라는 아이가 났습니다. 그때 모세의 부모는 그 아이를 보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겨서 기필코 살리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고 그 아이를 살려내는 놀라운 집념과 놀라운 믿음과 놀라운 실행을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정말 복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이 역사 속에 가장 좋은 부모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야곱을 보면 야곱이 자라던 가정환경은 상당히 불리했습니다.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는 좋은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가정에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장자 에서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사랑하더라도 이렇게 편애를 하면 그 자녀들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도전과 갈등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가정환경은 야곱이 자라나는데 상당히 불리하였습니다. 부모의 편애가 가득 찬 가정환경이 결국 형이 자기를 죽이는 원수로 변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요셉도 가정에서 자라는데 불리한 면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열두 아들 가운데 열한번째 요셉을 특별히 편애하였습니다. 이것이 형들로 하여금 요셉을 헤치는 늑대로 만들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서 힘들어 할 때에 아버지가 야속했을 것입니다. 왜 아버지가 나를 무조건 편애했는가? 왜 어머니가 나를 그렇게 편애했는가? 형들을 향하여 이를 가는 적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내가 언젠가는 복수하리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만큼 요셉은 그 가정에서 자라나는데 불리한 여건이 있었습니다.
신앙의 유산
그러나 모세의 가정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아이들을 편애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가장 균형잡힌 믿음의 부부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 부모를 통하여 모세를 만들었습니다. 후에 모세는 이런 믿음을 고백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 이하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이 네 가지 신앙의 요소를 말합니다.
믿음은 거절해야 될 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다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거부해야 할 것을 거부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금하는 것은 거부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되는 일은 거부해야 됩니다. 모세는 그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세는 좋아할 것을 좋아하고 받아들일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또 모세는 무엇이 더 큰 가치가 있는가 판단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받는 것과 애굽의 왕자로서의 영광 중 어느 것이 더 큰 가치가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크게 여겼던 모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상을 바라보는 모세의 믿음은 그 부모의 믿음의 유산이었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2절에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라고 했습니다.
준수한 아이
레위 가정의 두 남녀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첫째 아이는 아닙니다. 아론도 낳았고 미리암도 낳았는데 세 번째 아이로 모세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났을 때에 이 아이에 대해서 그 부모의 믿음의 관점을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모세 부모의 믿음의 눈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한자말로 번역을 할 때 \'준수\'하다고 했고 우리말로 번역할 때 \'아름답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말에서는 아름답다, 준수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말들은 비록 단어가 다르더라도 그 의미는 다 같습니다.
히브리적 의미는 매우 영적입니다. \'아름답다\'라고 하면 보기 좋다, 조화미가 있다는 탁월한 어떤 의미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준수하더라\'는 말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가장 확실한 뜻은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하더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 쓰시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여호와가 쓰시는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든 쓰시기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영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좋아야만 하나님이 언제라도 우리를 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부질없이 아이가 나면 사내냐 계집애냐에 관심이 많습니다. 무엇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인생이 되느냐 안되느냐를 믿음으로 보는 부모가 되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임신했을 때는 출산을 위해서 기도했는데도 사내아이가 아니라고 그동안 기도했던 것을 다 잊어버리고 돐이 다가오는데도 섭섭하다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모세를 낳아 놓고 부모들은 모세를 볼 때 하나님이 쓰실 아이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쓰실 아이로, 우리 가정에 태어나는 생명으로 보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
이제 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합시다. 모세 부모가 아이를 낳아 놓고 보니까 이 아이는 이 시대에 특별히 쓰시려고 보낸 아이 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는 기어코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 달을 숨기다가 아이의 울음소리가 커지고 인기척이 나니까 도저히 더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역청과 진을 칠하여 갈 상자를 만들어 모세를 담고 뚜껑을 덮어서 갈대 숲이 있는 나일강 하숫가에 이 아이를 버렸습니다. 바로왕의 어명을 어기면 모든 혈족이 다 몰살하기 때문에 이 아이를 갈 상자에 담아 띄웠습니다. 그리고는 누이 미리암을 보고 저 아이가 어떻게 되는가 지켜보라고 망을 보게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여기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모세 부모는 여기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 모세를 위해서 해줄 일은 없습니다.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이 해주셔야 됩니다. 이 아이를 강물에 띄워놓고 지켜보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이 아이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수중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때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러 나와서 강가를 거닐게 되었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니까 히브리인의 아이였습니다. 그때 망을 보고 있던 누이 미리암이 재치 있게 뛰어 나가서 \"내가 가서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라고 하니까 빨리 가서 아는 유모를 불러오라는 말에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9절에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그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결국 모세는 생모를 만났습니다. 누구의 솜씨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세 어머니는 젖을 먹여 아이를 키우면서 바로 왕궁에서 삯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머니로서 아이 젖먹일 때 삯을 받고 먹였습니까? 삯을 받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 어머니는 자기 아이에게 자기 젖을 먹이면서 바로 왕궁으로부터 삯을 받았습니다. 덤으로 누린 복입니다.
새 이름
그리고 아이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습니다. 모세라는 말은 이집트의 상형문자 가운데 \'메스\'라는 말로 건졌다는 의미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메스\'라는 말을 이름에 쓰는데 아주 익숙합니다. 그래서 애굽의 유명한 왕 중에 투터 모세라는 말이 있습니다. 람세스가 라모세 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아모세 라는 왕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라는 이름은 가장 존귀한 아이에게 많이 활용합니다. 그래서 모세에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10절에 보면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제 모세에게 큰 변화가 왔습니다. 애굽 왕궁에 입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의 아들로 입적이 되었습니다. 이제 법적인 어머니는 바로의 딸입니다. 모세는 바로 왕가의 혈족으로 등록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모세 부모의 믿음이 모세를 살리는데 어떻게 역사 했느냐 하는 것을 주목해야 됩니다. 모세를 살려낸 것은 모세 부모님들의 믿음입니다. 그 당시 모세가 태어났던 환경은 모세라는 한 아이가 생존하고 자라가기에는 너무도 벅찬 환경입니다. 모세는 그 환경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모세라는 사내아이가 그 시대에 히브리인의 아이로 태어나서는 살아날 수가 없는 시대입니다. 이 절박한 환경을 이겨냈던 요인은 모세 부모의 믿음이었습니다.
부모의 믿음
그러므로 부모의 믿음은 아이들이 자라나는데 힘든 여건, 장애물, 고통 이 모든 것들을 극복하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동반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세 부모의 믿음을 두 가지로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들은 치밀한 기도와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모세를 살려냈습니다. 모세를 살려내는데 있어서 모세 부모는 치밀한 계획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치밀한 기도를 했습니다. 목숨을 건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계획과 기도가 병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무계획한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계획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철저한 기도를 요구합니다. 그저 믿는다 하면서도 내 중심을 토하는 기도가 없다면 믿음의 능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능력이 일어나는 믿음은 계획과 기도가 병행하는 것입니다. 모세 부모의 믿음은 이 두 가지 조화에서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먼저일까요? 계획이 먼저입니까? 기도가 먼저입니까? 그것은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기도하면서 계획하고 계획하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 중에 생각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계획한 것을 붙잡고 기도하면 더 좋은 계획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조화가 우리의 믿음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일으키기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말은 지혜로운 계획을 가지라는 것이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믿음을 요구하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께 맡길 것과 내가 힘쓸 것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맡길 것을 붙잡고 있을 때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내가 힘써야 할 것을 손놓고 있을 때도 그 믿음은 갈등을 유발시킵니다.
시편 55편 22절 \"내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리로다.\" 히브리말로 \'맡겨 버린다\'는 말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로 던져 버리라는 뜻입니다. 다시는 주워올 수 없는 저 깊은 언덕으로 내 짐을 던져 버리라는 뜻입니다. 정상에서 무거운 돌을 아래 골짜기로 굴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 돌은 아무도 다시 주워 올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언제 붙잡아 주십니까?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버릴 때 하나님이 붙잡아 주십니다. \'하나님, 이것은 내가 도저히 못 놓습니다\'라고 한 모퉁이라도 내가 붙잡고 있는 한 여호와의 손길은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 구조가 얼마나 수학적이고 과학적인지 모릅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왜 이 말씀을 먼저 요구합니까? 내가 너를 붙들어 주겠으니 짐을 맡기라 성경은 이렇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먼저 네 짐을 맡기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붙잡아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길 것과 내가 노력할 것을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맺는 말
여러분, 월드컵 16강은 행운입니까? 실력입니까? 두 가지가 다 있어야 됩니다. 운동경기는 행운이라는 게 있습니다. 행운은 그 날의 컨디션도 되고 어느 선수가 이상하게도 그 날은 잘하는 선수가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운도 반드시 따라야 됩니다. 그리고 실력도 겸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겸해져야 16강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훈련은 직접하지 못하지만 행운이 따라 오도록 그 날에 선수들의 컨디션이 좋고 연습한 것이 잘 발휘될 수 있는 크리스천 선수를 하나님이 높이 들어주시도록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행운과 실력을 함께 병행해야 16강이라는 영광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 앞에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월드컵 16강만 열광할 게 아니라 지금까지 예선도 통과하지 못했던 우리의 신앙생활들이 16강으로 도약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결승까지 가길 바랍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후대에 월드컵에 우승하는 계기가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는 내년에 16강을 기어코 경험해야 되는 것입니다. 16강을 통과하지 않고 어떻게 8강, 4강으로 갑니까?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제는 결승으로 가기 바랍니다. 그런 축복을 누리는 미래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