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복음의 알파를 더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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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알파를 더하라. 히브리서9:11-22 2010.1.24주일설교 오늘의 강단에서 심각하게 문제로 떠오르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강단의 세속화입니다. 둘째는 강단의 타락화입니다. 셋째는 강단의 비복음화입니다. 이런 중에서도 가장 문제되는 것이 구원의 메시지의 결여입니다. 기독교의 참 복음이 전달되지 않고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메시지가 선포되지 않고 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는 예수님이 선포하던 첫 복음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거듭남과 죄 사함」입니다. 기독교는 윤리나 도덕을 강론하며 교양과 수양을 훈련시키는 곳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아라. 용기를 갖고 살아라. 도와주면서 살자는 원리를 가르치는 곳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정수는 거듭남과 죄 사함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살리는 문제를 다루는 종교가 기독교입니다. 죄 사함을 통해 생명운동을 일으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 오신 예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상징은 불타는 가시덤불도, 아니며 십계명이 새겨진 두개의 돌 판도, 일곱 기둥의 촛대도 아닙니다. 누가 뭐라도 신구약 성경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그 무서운 형벌의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며 성경의 Message입니다. 바울은 이 십자가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갈라디아6:14절에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갖가지의 은혜를 체험한 바울이 다른 자랑거리도 많았습니다. 죽을병이 든 사람을 살린 것이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아시아 지역에 교회를 여럿 세운 것은 자랑거리가 못되었습니다. 옥문을 열리게 하는 지진을 불러온 것도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삼층 천을 본 것은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수많은 체험과 감동적인 기적들을 경험했지만 십자가 은혜의 체험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이토록 십자가만을 고집하고 자랑했을까요? 고린도전서1:18-25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바울이 체험한 십자가는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십자가는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십자가 보다 더 자랑할 것이 없음을 고백했습니다. 기독교의 자랑거리를 말하라고 할 때 십자가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 믿고 제일 감동적인 사건 하나를 간증하리라고 할 때 십자가 사건이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어떠한 체험도 십자가의 체험보다 위대한 체험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한 십자가를 자랑하는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계시하고 있는가? 구약에서 말하는 십자가의 내용부터 풀어보십시다. 구약 시대의 사형제도는 돌로 치는 것입니다. 신명기21:20-21절에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이렇게 죄를 저지른 사람을 돌로 쳐서 처형합니다. 그런 다음 죽은 시체를 나무나 기둥에 매달았습니다. 신명기21:22-23절에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아주 중요한 십자가를 푸는 말씀입니다. 죄인은 반드시 죽어야하고 죽은 후 십자가에 달려 하나님께 저주받게 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아담의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죄인 아닌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불순종의 아들들입니다. 죄인은 모두가 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신약으로 설명한다면 이렇습니다. 로마서5:12절에 “이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또 거쳐야할 곳이 있다는 말입니다. 죽은 다음에 뭘 압니까? 이생에서의 관리도 힘든데 골치 아프게 무슨 사후관리를 합니까? 그러나 저는 골치 아픈 얘기를 더 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생의 삶보다 거기서 살아야 될 날이 훨씬 더 길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도 억울한데 죽은 후에 당신의 영혼이 저주받은 곳에서 계속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합니까? 끔찍하지만 아담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여전히 죽음과 저주 아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저주를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은 이 길을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준비하신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13-14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자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얼마나 완벽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입니까? 인간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보다 법을 지켜야하고 거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인간 대신 저주를 받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당해야 될 벌을 대신 당하도록 하셨다는 것이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에베소서2:16-18절에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완벽한 구원의 파노라마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계획해 놓으신 구원의 여정입니다. 이보다 더 완전하고 더 완벽한 구원의 계시를 이 세상에서는 들어볼 수 없기 때문에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해야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발견한 바울은 이렇게 확신된 「구원의 복음」을 갖고 있습니다. 로마서6:5-14절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찌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법아래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죄가 그리스도인을 법 앞에 끌고 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최초의 법인 죽음과 저주 앞에 그리스도인을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성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은혜 아래서만 사는 것」입니다.(14)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은혜입니다. 십자가가 없었다면 인간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을 살리는 최고의 축복이며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어떻게 은혜가 되는 것입니까? 십자가가 주고자하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본문 9:19-22절을 보시면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위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고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음 즉 사함이 없느니라.”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의 제물이 된 「제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이 범죄하고 속함을 받기 위해 반드시 피의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17: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피의 제사란 생명의 제사이며 사람을 살리는 제사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다는 것은 사람들을 위한 인류의 제물이 되셔서 생명을 구원케 하신 것입니다. 내가 제물이 되어야 마땅한데 예수께서 제물이 되셨으니 은혜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께서 죽었다는 의미보다 인간 구원을 위해 완전한 피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죄의 소멸」, 「죄로부터의 해방」을 확증케 하는 선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다 쏟으심으로 인간은 더 이상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이 구원을 위해 해야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인간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구원을 완성시킨 예수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십자가의 사건을 믿는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능력이며 가장 큰 은혜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란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은혜의 절정이며 하나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사람은 구원받는 근거가 되고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곧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근거임을 확신하며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를 기억합시다. 가장 완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원리와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지혜를 십자가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십자가를 자랑하며 그 능력을 힘입어 구원받은 감격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