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부름심의 알파를 더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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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심의 알파를 더하라. 요한복음 21:15-23 2010.1.17주일설교 세계적인 신학자 화울러 교수는 신앙은 6단계로 성장해 간다. 는 신학이론을 발표했습니다. 1단계는 원초적 단계로서 징계와 벌을 피하는 방식으로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단계라 했습니다. 2단계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단계로 물질적인 혜택이나 물리적 혜택을 받는 것이 목표로서 교회에 가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이득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단계입니다. 3단계는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애정을 받는 단계로 자기위치를 확인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4단계는 법을 지켜야 한다는 단계로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단계입니다. 5단계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근거해서 행동하는 단계로 하나님과의 계약을 중시여긴 신앙생활을 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6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단계로 이상적인 그리스도인 신앙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신앙의 단계에서 말하기를 대부분의 신자들은 1에서 4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사랑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은 어느 단계에 있습니까? 얼마나 성숙되고, 성장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벌이나 징계가 무섭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믿는 것입니까? 아니면 무엇인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내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서 교회를 선택한 것입니까? 자신의 영적인 수준이 어디까지 왔으며 어디에서 멈춰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열두 제자 중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본명은 시몬이었으나 주님을 만났을 때 「반석」이란 뜻으로 베드로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신앙은 자주 흔들거렸고 안정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쓰라린 과거를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평생을 두고 후회하며 잊지 못할 지난날의 실수에 대해 회개하며 살았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평생을 닭이 우는 소리가 날 때마다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지난날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 옵니다. 수제자로써 예수님 곁을 늘 따라다녔던 그가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그물을 던져버리고 부모까지 버리면서 주님을 좇았던 사람입니다. 주를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내놓겠다고 장담했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버릴 수 있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본문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7) 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요?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리고 디베랴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 베드로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요21:6)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혔고 큰 것만 153마리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다에 오셔서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주님을 버리고 옛 생활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지금 베드로에게는 풀 수 없는 수수깨끼가 있습니다. 왜 예수님을 부인했으며, 예수를 버리고 옛 생활로 되돌아 왔을까? 입니다. 주님의 제자의 길로 가기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았던 지난 세월은 모두 무엇이었는가? 지난 3년 반 동안 예수를 좇았던 그때는 무엇이 그를 사로잡았었는가? 이 문제가 언제나 베드로의 숨통을 막고 있었으며 이 문제를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습니다.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다면 그 해답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위기 환경을 생각해 보십시요? 큰 배를 몰며 물고기 많이 잡는 것이 행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에 물고기를 가득 채웠다고 해서 즐겁고 기쁜 것이 아닙니다. 어떡하면 예수를 부인했던 나의 신앙의 문제를 풀 수 있을까? 예수를 버리고 옛날로 돌아와야만 했던 나의 믿음에 대해 치료받는 것이 최대 소원입니다. 신자가 당하는 가장 가슴 아픈 통곡이 무엇입니까? 돈이 벌리지 않아서 원통합니까? 직장에서 진급 안 된 것이 분합니까? 남편이 넉넉하게 쓸 돈을 벌어다 주지 않아서 속상합니까? 남보다 덜 가진 것이 분합니까? 신자들이 언제 분합니까? 내 신앙이 고작 요 정도 뿐이 안 되는가? 하고 느낄 때 분한 것 아닙니까? 참아야 될 때 참지 못하고, 결심했던 것이 깨지고, 주를 위해 뭔가 해보겠다고 했는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믿음과 결심이 시들어 버릴 때 분한 것 아닙니까? 이것을 「성숙된 신앙」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화를 내고 시원하다고 생각하는 신자가 있다면 신앙에 병든 것입니다. 내가 마음먹고 그대로 살겠다는 결심이 깨졌는데도 기분이 괜찮다고 느낀다면 병중에 중병이 든 것입니다. 기도 응답이 없는데도, 설교가 들리지 않는데도 상쾌하다고 생각한다면 병든 신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버리고, 제자의 길을 포기했을 때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다.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지만 제 정신이겠습니까? 만일에 목사가 어떤 어려움 때문에 목회를 포기하고 낚시를 하며 쉰다고 할 때 정말 속이 편하겠습니까? 집사가 신앙생활도 안 되고 믿음이 뒤숭숭 할 때 머리를 식힌다고 드라이브한다면 바람이 시원할까요? 아닙니다. 옛말에 손발이 따로 논다는 말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 상태는 바로 마음 따로 손 따로 입니다. 주님은 이런 원한에 사무친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고 찾아오셨으며 고기 잡는 사건을 통해 근본적인 그의 아픔과 고민에 대해 질문을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의 질문에는 지난날의 베드로의 실수, 실패, 부인, 제자 됨의 포기라는 문제에 대한 평가가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사랑의 결핍 때문에 너는 나를 부인했고, 나를 버렸고, 나를 포기했다는 진단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지면 예수도 부인하게 되고 버립니다. 어제까지 아무리 확실한 믿음위에 서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오늘의 사랑이 부족하면 누구든지 하나님과 멀어질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계시록2:5절에 보면 에베소교회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수고도 있다. 인내도 있다. 부지런 했다. 거짓은 용납하지 않았고, 처음 사랑을 버렸다. 주님이 보실 때는 회개할 사람들이 모인 교회라고 오히려 책망을 합니다. 다른 것이 아무리 풍성 할지라도 주님에 대한 사랑이 기초되지 않는다면 어떤 수고와 진리를 수호하는 일도 죄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일이든 예수를 따르는 일이든 기초는 주를 사랑하는 믿음에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거나 하찮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꼭 특별하고 희한한 일이 일어나야만 예수 잘 믿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정말 예수 잘 믿는 것이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첫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첫사랑이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마태복음22:37,38절에서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능력 받아라! 교회를 져라! 기도를 해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첫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상의 위치에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그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부인하고 버린 것입니다. 현대 신자들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깊이에 비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회복되어야 할 믿음은 하나님 사랑의 회복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들도 뜨겁게 사랑하던 그 믿음이 식어졌습니다. 주를 위해 열심히 살았던 그 믿음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베드로처럼 디베랴 바다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 베드로의 무너진 믿음, 배신의 믿음, 잃어버린 믿음을 치유하시고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주님을 영접하십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진단하신 병명은 「첫사랑 결핍증」이란 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현재성을 묻고 있습니다. 주님은 과거에 네가 나를 버렸기 때문에 오늘은 제자가 될 수 없다가 아닙니다. 과거의 실수보다도 오늘 이 자리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오늘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사람은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릅니다. 은혜를 받았다가 잃어버리기도 하고, 순종을 잘하다가 들이받기도 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세상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동일하게 묻기를 오늘 이 자리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입니다. 과거에 사랑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나를 사랑하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기에 이 질문에 막연한 대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옛날처럼 주님을 사랑한다고 무조건 쉽게 대답할 수도 없습니다. 15절을 보시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헬라어로 「아가파스 메 플레온 투톤」이라 했습니다.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각주에 보면 ‘것들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는 뜻이 됩니다. 이것들은 지금 잡아온 물고기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여기 오셨나요? 물고기 잡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까? 헛수고하며 밤이 새도록 던졌던 그물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까? 신자들이 하는 것을 보면 얻는 것이 없으면 교회 안 오실 사람들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고기가 없어도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득이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밤을 새우면 어떻고, 손에 피가 나며 고생한들 어떻습니까? 주님 만나기 위해 「절대믿음」 「절대고백」 「절대사랑」이 필요합니다. 베드로는 드디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렸고 그가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절에 주님은 “내 어린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심정에서만 내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이후로 얼마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 모습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성전 미문 앞에서 만난 앉은뱅이에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은과 금은 없었지만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사로잡았던 나약하던 것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생애에 전부일 뿐입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높입니다. 예수님뿐이 없습니다. 예수님만 보입니다. 이때부터 주님은 베드로를 쓰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믿음이 기적을 만들어 내고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쓰임 받지 못하고 능력이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주를 향한 뜨거운 고백과 뜨거운 예수 사랑이 확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쓰임을 받고 주의 능력을 행함이 나타납니다. 베드로가 주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확인하신 다음 예수님께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죽음」과 「따르라」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사람은 죽음의 길을 가야하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야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사랑 없이는 죽지 못합니다. 예수님 사랑 없이는 예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순교가 사랑의 절정이요 사랑의 폭발입니다. 베드로에게 죽음이란 반복해서 듣기 싫은 혐오스런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성전 뜰에서 고통당하실 때 죽는다는 것에 대해 이미 비겁한 행동을 한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 이후에 베드로는 이제는 다릅니다. 얼마든지 죽을 수 있겠고, 어떤 죽음의 자리라도 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인생 황혼기에 고백했던 말을 들어보십시요. 베드로후서3:8-13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서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 드러나리로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도다.” 그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았고 사모했습니다. 죽음을 피했고, 희생의 자리에서는 도망자였던 과거의 베드로 이제는 죽음을 사모하고 희생을 기다렸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거꾸로 십자가에서 순교하므로 예수의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이런 믿음을 승화된 믿음, 제자 된 자의 믿음, 성숙된 믿음이라 정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따른다면서 고생은 없었으면 하십니까? 주의 일을 쉽고 편하게 하시려고 생각하셨습니까? 너무 예수 믿는 것이 힘들고 무겁다고 느끼십니까? “진실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는 주님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실 것입니까? 주님을 사랑하지만 희생만은 싫습니다. 주님을 따르기는 하겠지만 고생은 안 된다고 하겠습니까? 헌신 없이 주의 길을 못 갑니다. 희생 없이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죽을 각오 없이 면류관은 없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그 길을 가야합니다. 「주를 위하여 희생해야 될 자리」가 있다면 찾아가십시요. 「주께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서둘러 가십시요. 내게 이득을 따지기 전에 희생을 먼저 따져 보기 시기 바랍니다. 내게 편한 길을 선택하기 전에 주의 길을 선택 하십시요.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우선순위에 두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실패가 많았던 사람입니다. 휘청휘청 거리며 평생을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러나 마지막은 화려했습니다. 집사로서, 목사로서, 성도로서 명예를 더럽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뀐 뒤부터는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길을 걸었던 베드로처럼 삽시다. 우리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야합니다. 그리고 주의 일을 뜨겁게 하다가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의 일 하고 계십니까?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주를 따르시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을 쓰실 것입니다. 어느 교회, 어떤 자리에 있든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을 주님은 쓰십니다. 그러나 내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이고,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고 영광된 쓰임을 받는 자리에 있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