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와 같은 축복을 받자

야베스와 같은 축복을 받자! (역대상 4:9~10)

 

“성령 충만 하십시오! 신앙의 길을 잘 달리시길 바랍니다. 결코 물러서지 말고, 이 번 한 주간도 하늘의 큰 면류관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어떤 학생이 학기말 시험을 앞에 두고 공부는 하지 않고, 딴 일에 몰두하다가 드디어 시험 날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앞에 놓여진 시험문제의 답을 모르는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그냥 시험지만 붙들고 있다가 ‘그래도 백지로 낼 바엔’하는 궁여지책으로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라고 써 놓고는 교실을 나왔습니다.

잠시 후, 시험지를 회수한 교수는 우습기도 하거니와 너무나도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학생의 답안지에 이러한 채점기록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100점’ ‘학생은 0점’ 즉,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니 100점이시지만, 학생은 아무것도 모르니 0점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학생의 재치도 일품이거니와, 그 교수님은 더욱 훌륭한 답을 내리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성도들에게는 이 이야기를 그냥 유머어로 넘기기엔 많은 여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주변에는 자기 자신의 편리한 대로 생각을 하면서, 형식적인 믿음의 신앙생활을 하는 잘못된 신앙인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세상일에 몰두해서 주일을 잘 지키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내 바쁜 형편과 사정을 다 아실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하면서 혼자서 판단을 내리기도 합니다.

또한 물질에 인색하여 헌금을 잘 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은 부자이시니까 괜찮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으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들의 이제부터라도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달란트를 받았던 사람은 결국, 그의 태만함으로 인해 주인으로부터 저주를 면치 못했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온전한 믿음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 자체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심을 기억하면서, 앞으로는 힘써서 노력하여 선한 열매를 맺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브루스 월킨슨이 쓴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라는 조그만 책자를 쉽게 접할 수가 있습니다. 언젠가 저는 그 책을 읽어 보던 중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책이 첫 출판한지 1년 만에 서른 세판이나 찍었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하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야베스라는 이름은 신학교에서 성경을 전공한 사람, 그리고 매일 성경을 읽는 교역자들도 야베스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아주 희소한 이름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를 살펴봐도 야베스라는 지역은 나오는데, 야베스라는 이름을 쓰는 사람은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그 사람의 이름은 오늘 본문인 9절로 10절인 두절에만 등장했다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 때문에 이 책으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요?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내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기도의 원리’라고 씌어져 있어서 아마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보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야베스는 오래 전 이스라엘 족장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오늘날 우리들처럼 성령의 충만함을 아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읽으며 교회에서 말씀을 배워 영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기도가 오늘날 우리들의 기도처럼 수준 높은 영적인 기도는 아니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도는 다분히 인간적이요, 현실적이었기에 그런 형식적인 기도를 가지고 너무 영적으로 깊이 해석하려고 하는 것은 무리가 따르겠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책에 기록된 기도의 내용을 읽으면서 무언가 내 심령 속에 성령님께서 깨우쳐주시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참으로 인간적인 기도구나!’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을 보면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라고 했는데, 그 기도 자체가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소박한 기도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절 끝을 보면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야베스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가 인간적인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소박하고 진실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린 후, 기도의 응답을 받아 복을 누린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이 본문을 좀 더 깊이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야베스를 놓고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선택한 유대나라 사람들은 다 존귀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 자체가 존귀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보다도 야베스를 더 존귀한 자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바로 온전한 기도를 통하여 항상 영광스럽고 존귀하신 하나님과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때문에 온전한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는 유대나라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선택을 하셨기 때문에 존귀하였지만, 본문의 주인공인 야베스처럼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께 부지런히 나와 엎드리는 사람을 더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하신 하나님을 수시로 만나는 사람이기에 자연히 더 존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 모두도 야베스처럼 더 존귀한 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를 똑같이 믿어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 존귀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릎을 꿇고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엎드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존귀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존귀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어떤 사람이 되시길 원하십니까? 하나님께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더욱더 존귀한 자로 인정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야베스와 같은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려고 야베스의 기도를 묵상하면서 ‘나도 이제부터는 이런 기도를 해야 겠구나?’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요즘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기업체나 사업장, 그리고 여러 가지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IMF이후에 혹독한 불경기를 체감하고 있다고 합니다.

때문에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 느끼는 취업난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저와 여러분들은 모두 어떠한 믿음의 성도들이 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야베스처럼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문제를 들고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삶을 책임져 주시도록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이런 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존귀한 자로 대접을 해주시면서, 야베스에게 응답해 주신 그러한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내려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도 역대상을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1장부터 9장까지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족보에 대한 말씀이 계속 이어지는데, 이 내용을 제대로 읽는 성도들이 드물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몇 절씩 건너뛰기도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지만 무려 500명 이상의 이름이 나열되기 때문에, 한명 한명씩 신경을 써가면서 읽기가 매우 어렵고 지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베스의 이름에 이르러서는 대부분 조금 멈칫하고 다시 한 번 주목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족장들은 그냥 이름만 언급하고 지나치는데 비해, 야베스에게 영적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가며 읽어 보면, 뭔가 다른 데가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행적과 기록을 영적으로 살펴보면, 3가지 독특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자신의 어머니가 아주 고생하면서 낳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특별히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를 많이 했던 사람이라는 것이었고, 셋째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그대로 응답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믿으십니까?

저가 알기로도 우리나라도 지금부터 50년 전 만해도 어머니가 자식을 낳을 때, 잘못 되어 죽음을 맞이하거나, 죽을 고비를 넘기는 산모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인 고대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더욱 비일비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왜 야베스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내가 수고로이 고생을 하면서 아이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혹시 거꾸로 나왔는지, 아이를 낳기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지,

또는,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집안에 감당할 수 없는 우환이 닥쳤는지, 정확한 사연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고생 중에 야베스를 낳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생각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야베스의 어머니는 얼마나 고생을 하면서 이 아이를 낳았는지를 자신의 아들이 평생 동안 이런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즉, ‘야베스’라는 말은 ‘고생 또는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좋은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죽을 고비를 당하면서 힘들게 그 아들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어머니가 자식에게 자신의 고통을 잊지 말라고 해서 그 고통을 꼭 기억해주기를 바란다고 그런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것은 당시 유대의 풍습에 의하면 이름까지 그렇게 짓는 것은 좀 무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나라에서는 사람의 이름이 팔자를 정하고, 팔자 때문에 운명이 달라지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룻기서에 보면,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타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이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서 ‘허약하다.’라는 뜻을 지닌 ‘말론’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도 마찬가지여서 ‘수척하다.’라는 뜻을 지닌 ‘기룐’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때문에 이렇게 두 아들을 다 ‘허약하다,’ , ‘수척하다.’라고 지어놓았으니 어떻게 그들이 잘되겠습니까?

때문에 두 아들은 성장하여 나중에 결혼을 했는데, 큰아들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자식도 후손도 없이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들도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똑 같은 운명을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에 그렇게 지었지만, 어떻게 인간적인 상식으로 보면, 이름 때문에 그들의 운명이 그렇게 됐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솔로몬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평화’라는 이름의 의미 그대로 한평생 전쟁 한번 치르지 않고, 팔자 좋은 인생을 살다가 간 사람이었습니다. (부연 설명)

그만큼 사람 이름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아서 야베스처럼 ‘고통’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야베스가 어릴 때는 잘 몰랐지만, 그는 점점 성장하면서, 그 이름이 항상 자기 뇌리 속에서 불길한 생각을 갖도록 만든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이 이름대로 살아야 될 팔자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 이름 때문에 평생 고생하다가 인생을 끝낼지 모르겠다.’라는 어떤 불길한 생각이 계속 그를 사로잡았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그의 눈앞에 있는 환경과 가정 형편도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현실을 보면, 넘어야 될 산들이 첩첩산중이었으며, 자기 이름은 불길하게 ‘고통’이기 때문에 과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인생을 살 것인지 고민을 많이 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야베스가 고민을 했다고 단정하는 이유는 그가 기도하기로 작정한 것을 보면, 한동안 고민을 했기에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본문에서는 “야베스가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라는 점잖은 표현을 썼지만 원래의 뜻은 ‘부르짖는다. 소리를 지른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야베스가 왜 갑자기 ‘하나님 앞에 나가서 한번 부르짖어야 되겠다. 하나님의 옷깃을 붙들고 좀 매달려야 되겠다.’라고 절박하게 느낀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그것은 바로 무언가 자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매사에 평안을 누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특별히 기도해보겠다고 작정하는 성도들이 그리 많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일이 터지면, 뒤늦게서야 후회를 하면서 금식이다. 새벽기도다. 작정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과거 일제 시대 때, 기도하던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나, 5~60년대 먹고 살기가 힘들어 교회 바닥에 가마니 깔고 눈물로 예배하며 기도하던 우리의 신앙 선배들보다 지금의 우리들이 예배와 기도를 중요시 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믿음이 성도들이 그만큼 사정과 형편이 좋아지고, 걱정거리가 적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눈물로 기도하고 싶은 절박감이 별로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본문의 말씀 중에서 야베스의 기도를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 심정이 얼마나 절박한 가를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혀 주옵소서! 하나님, 제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소서! 내 지경을 넓혀주세요!”라는 절박하고 긴박한 심정이 그의 기도에 담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의 이름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대로 나가다가는 자신이 인간으로서 쓸모없이 망할 것 같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졌기 때문에, 그가 간절한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비록 그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이름을 물려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을 바꾸어 복으로 전환시켜 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의 조상들은 자신에게 복을 안겨주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고통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부르짖기만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통을 바꾸어 반드시 복으로 안겨 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도 야베스와 같은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들에게도 후히 주시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가 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을 통한 축복을 얻기 위해서는 항상 담대한 믿음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위해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응답 주시기를 간절히 간구하여

그동안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저주와 불행을 끊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주님처럼 자신의 십자가, 저주의 십자가를 스스로 지고서 날마다 때마다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도 야베스와 같이 고통과 환란 중에 있을지라도 앞으로 존귀한 자들이 되려면,

첫째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탁월한 비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존귀한 자가 되기 위해서 한계를 뛰어넘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존귀한 자가 되려면 날마다 때마다 간절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시기 축원합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 속에서 야베스에 대하여 꼭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온전한 믿음을 통하여 영적으로 깨닫기 바랍니다.

오늘의 본문인 역대상 4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이름정도만 소개되었지만, 비록 짧은 2절의 말씀이었지만, 야베스를 하나님께서는 존귀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예배를 통하여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그가 존귀한 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도 이 육신의 삶 속에서 기왕이면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영원히 존귀한 온전한 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