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교제, 기쁨

생명, 교제, 기쁨/요일1:1-4

생명, 교제, 기쁨/요일1:1-4
2001-11-28 20:06:43 read : 410

생명은 소망이지만 죽음은 절망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시간 생명이 끊어지면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맙니다. 마음이 서로 통할수 없고 대화를 나눌수 없습니다. 생명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극과 극을 말해줍니다. 백년안에 사는 우리의 육적인 생명도 이렇게 중요합니다.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투자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생명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래서 본문은 첫째로 생명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절에 보면 서두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예수님의 별명입니다. 말씀으로 잠자는 영혼을 깨우칩니다. 말씀으로 죽은자를 살립니다. 말씀으로 천국의 복음을 전파합니다.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습니다<2절>. 에수님은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마다 육적인 생명을 떠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인생은 육적인 생명의 문제가 다는 아닙니다. 죽음의 절망을 이길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나, 어떤 철학이나, 어떤 사상으로도 해결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을 잡고 가는 자들은 절망의 문이 앞에 가로막혀 있어도 그 빗장을 열어제치고 죽음의 다리를 능히 건너 생명으로 나갈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자들의 영적인 자긍심입니다. 물론 믿는 자들이 윤리적으로도 탁월하고 예의바른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것보다 \'영적인 생명이 있느냐?\'하는 것이 예수 믿는자의 진정한 시금석이 됩니다. 윤리적으로 흠이 있어도 영적인 생명이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존경할만한데 주님을 만난 경험이 없고 영적인 생명이 없이 주님을 등지고 살면 불쌍한 인생에 불과합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등지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자기 스스로 득도할려 하고, 이 세상을 자기것으로 살려고 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올 한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체험하며 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중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 두셨을까요? 주의 복음을 잘 간수해서 후대에게 물려주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의 육적인 생명을 먼저 취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복음 뿐 아니라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지상의 생명이 끝나면 천상의 생명이 어떻게 연결이 되는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요한은 생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요한이 표현한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시고 생명의 말씀이시라면, 이 생명은 나타나질때에만 인간이 알수 있고 깨달을수 있습니다. 감춰진 비밀은 알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생명을 스스로 나타내셨습니다. 귀로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을 정도로 나타내셨습니다. 내 마음을 열기만하면 구체적으로 내 삶에 개입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사도요한이 서겼던 주님을 이런 모습으로 섬기기를 원합니다. 종교적인 의식으로가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 생명의 관계가 있어서 내 영혼이 살고 이 생명이 충만하고 확산되는 은혜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 성도들 가운데 이 생명의 샘물이 고갈되어 있다면 생명의 영이신 성령께서 생명의 권능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권이요 주님의 소원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체험할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요한이 증거합니다.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바를 전함은\"이라고 했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믿는 즐거움과 예수믿는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이 생명을 아직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강력하게 전해주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교제에 대하여 말씀합니다<3절>.

\'사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살아 있을 때 교제가 가능합니다. 죽어 있으면 교제라는 말이 있을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교제라는 말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빚어서 만들어 세워놓은 말 못하는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의 생각과 소원을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미래를 다스리기를 원하십니다. 잠자는 하나님, 죽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우리 영혼과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기를 원하시는 좋으신 분이십니다. 교제를 누리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사귐\'이라는 단어가 베드로후서1:4에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아 가는 것\'을 말합니다. \'참여\'라는 단어가 본문의 \'사귐\'이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공통의 것을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잇을 때 우리는 주님과 교제할수 있고 주님의 생명을 받아 나누는 새로남교회 모든 교우들이 함께 교제할수 있습니다. 말을 한다고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해도 안목이 다르고 문화와 가치관이 다를때는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 생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에 믿음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고백할수 있고 주안에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눈수 있습니다.

새로남교회 믿음의 가족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과의 교제가 어느정도 깊습니까? 어떤 분은 아직도 마음의 현관문조차 열지 않은 분이 있을것입니다. 주님은 안방문까지 열어 놓으시고 나와 더불어 격이 없는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을 좀더 풍성히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명목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주님과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부담스럽고 물질에 손해를 볼 것 같고 직분이 올무가 될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귀찮게 하시고 괴롭게 하실려는게 아닙니다. 우리 삶을 풍성케 하실려고 만반의 준비를 해놓으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따의 기름진 복으로 우리 삶을 채워주실려는 좋으신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좋으신 주님의 심정을 알지 못하고 문밖에 세워둘때가 많습니다. 직분 때문에 체면으로 마지못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가지고 좀 더 깊은 관계로 만나야 합니다. 솔로몬의 자기 아들 르호보암이 대인관계가 좋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잠언1:10에 \"내 아들아 악한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말라\"고 했습니다. 솔로몬 자신이 결혼후에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빠져 나올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이방여인들과 정략적으로 결혼할 때 그들이 섬기던 우상을 들고 왔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과는 교제가 멀어지고 우상숭배하는 여인들과 교제하다 보니까 우상화 되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순전한 마음이 나뉘어졌습니다. 우리 새로남교회 교우들은 어떤 사람들이라도 여러분을 사귐으로 믿음이 생기고 증진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피조물의 영광은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기쁨에 대하여 말씀합니다<4절>.

생명이 있기에 교제가 가능하고, 교제가 있어야 기쁨충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주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눌 때 우리 속에 기쁨이 흘러 넘치게 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15:11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6:24에는 주님께 기도하는 자들에게 응답과 더불어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기쁨은 환경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 때문에 생기는 기쁨입니다. \'교제\'가 외롭고 고독한 삶에 대한 주님의 처방이라면, \'기쁨\'은 공허하고 무가치한 삶에 대한 처방입니다. 우리의 기쁨을 앗아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 때문에,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기쁨을 상실하고 허탈한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은 시편16:11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믿는자의 외적인 표지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다른 것 강조하지 않고 주님의 생명과 주님과의 끈기있고 은혜로운 사귐과 그 사귐을 통한 기쁨충만의 열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때마다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새벽에 기도의 무릎을 꿇을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기쁨충만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쁨이 충만하면 이 기쁨을 잃어버리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도 사도요한 처럼 영적으로 도전할 수가 있습니다. 권면하고 새 생명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새로남교회는 주님의 생명이 약동하는 교회, 주안에서 끊임없는 사귐이 있는교회, 예수믿는 기쁨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