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1:1-4 나타난 생명 2002-03-09 09:58:16 read : 41
본문 : 제목 : 나타난 생명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책에 보면 사람들은 돈을 투자 할 때에 95%는 눈으로 하고 5%만 머리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눈으로 보는 것 외의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한데 사람들은 단지 그냥 보는 것만으로 판단하고 투자를 하기 때문에 실패를 많이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집을 하나 사려하여도 그냥 눈에 보이는 것 만 보아서는 집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습니다. 여러 번 방문하여서 이곳 저곳을 잘 살펴야 하고 시간에 따라서 집에 가서 햇빛이 드는 정도도 보아야 하고 그리고 그 주변의 환경이나 그리고 앞으로의 변화가 있을는지 . . . 단지 복덕방 사람들의 말만 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더 많은 관심과 생각을 집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저지르게 되는 많은 실수들을 가만히 생각하며 보면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결정을 하고 판단을 하여 버리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 뒤에 있는 진실을 볼 수 있는 눈들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많은 기적과 이사를 보이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예수님에 대해서 사람들의 평가는 아주 다양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 목수라고 생각하였고 어떤 사람은 혁명가로 어떤 사람은 구세주로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준 이 요한일서의 저자인 요한은 과연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보았을까요?
우리가 살펴보게 될 이 편지의 시작은 다른 편지들과 많이 다릅니다. 다른 편지들은 거의 편지를 적은 사람을 소개하고 안부를 묻고 그렇게 시작하고 있는데 이 편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마 아주 급한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가현설을 주장하는 도케틱주의자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난 것은 실제가 아니고 영적인 존재로 육체적으로는 이 땅에 오지 않으셨다는 이론입니다. AD60년경에 퍼진 이단이었는데 이 이단의 잘못된 사상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답답하고 안타가운 마음으로 편지를 쓰다보니 서론도 없고 바로 본론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누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지금 글을 적고 있는데 이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생명의 말씀이다. 말씀이라는 말은 logos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당시에 사람들이 추구하던 최고의 선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당시의 사람들에게 소개를 하면서 이 예수님은 당시의 사람들이 이해라는 최고의 선인 분인데 이 분은 생명의 logos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분을 어떻게 설명해 가고 있습니까?
1절에는 태초부터 있는 3절 아버지와 함께 하시던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참 진리이신 참 선이 되시는 예수님은 태초부터 있었던 분이라는 것입니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과 함께 하였던 그 분 즉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요한은 계속적으로 반복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도 3절에서도 우리가 본 바, 들은 바, 보고들은 바를
이단들이 예수님은 그냥 영으로만 온 것이지 실제로 육체로 온 것은 아니라고 하는데 아니다 우리가 들었고 보았고 우리가 손으로 만지면서 지냈던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부의 사람들 성경의 내용은 그들의 신앙 고백이지 실제는 아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은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부활을 하였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 바를 적은 것이지 실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증거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였던 분으로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한 분이라고 증거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진 그 분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생명으로 본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 가운데서 보고 듣고 같이 있던 사람들 중에도 그냥 목수의 아들이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고 그냥 조금 특별한 선지자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일부는 그냥 혁명가로 누구는 좋은 선생으로 그렇게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그의 글을 읽고 그리고 그에 대해서 연구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생각은 다양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의 4대 성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선생이었다. 좋은 도덕 선생이었다. 누구는 그냥 기독교인들이 만들어 낸 인물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생애와 그리고 그의 부활까지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이 많은 선지자 중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는 절대로 믿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증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러한 말을 하고 저러한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들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무엇으로 믿고 있는가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많은 분들이 교회에 옵니다. 목적이 다 다릅니다. 사업차, 교제를 위하여, 아이들 교육을 위하여, 병을 고치기 위하여, . . .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생각들도 다양합니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지만 그냥 좋은 선생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가면 예수님 말씀 들으면 좋은 것이니까, 마음의 위로를 받기 위해서, . . .
그러나 기억하여야 합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는 생명의 주입니다. 그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곳에 오신 가장 큰 이유를 우리가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좋은 도덕을 가르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위로를 얻게 하기 위하여 오신 분도 아닙니다. 물론 이러한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이유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요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딤전1:15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그를 믿는 것은 우리가 생명이 그에게 있음을 믿는 것이며 그 생명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가 하나님이시며 그에게 생명이 있기에 우리가 그를 믿고 그에게 나아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어떻게 우리가 알게 되어졌습니까? 2절에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 생명이 나타난 바 되어졌다고 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요한이 찾아 발견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나타난 바 되어졌다고 합니다. 이 생명이 사라졌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었던 영원한 생명이 사라졌었습니다.
언제 사라졌습니까? (창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 3:23)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인간이 범죄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생명을 이어가는 생명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그 생명 나무가 사람들에게서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생명이 다시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곳에 있으면서 안타까운 것은 아이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입니다. 대충 보면 알지 않습니까? 저렇게 하여서는 안되지 저것은 길이 아닌데 저렇게 살다가는 망하지 . .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충은 압니다. 저것은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고 보고 있으면 대충은 맞습니다. 아이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어떤 때는 길이 안 보입니다. 방법이 없는 것이죠! 그러다가 길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방법이 생기게 되는 때도 있는데 그 길을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끔적도 않고 제 길을 갑니다. 안타가운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전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영원한 생명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길이 나타난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 분이 길을 보여 주면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길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생의 길이 지금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길을 보지 못하고 그냥 자기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다. 이 나타난 생명을 요한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주 흔한 것은 그냥 쉽게 가르쳐줍니다. 예를 들자면 이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개 밭은 누구에게나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전복이 많은 곳을 발견하였다 그러면 잘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지금 우리에게 이 귀한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답답하지 않습니까? 생명의 길이 있는데 죽음의 길들로 가고 있으니 답답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바른 길임이 분명한 확신이 있으면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히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서 바른 길로 가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죽음의 길로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전도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새 사람들이 너무 똑똑하고 잘나서 쉽지 않습니다. 아쉬운 것도 없고 힘든 일도 없고 다 똑똑하니 . . 그러나 우리가 할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합니다.
특별히 나의 주위의 분들에게는 반드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내가 누구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긴다면 반드시 그 사람에게는 이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교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길이 다른 것입니다. 생명길이 있고 죽음의 길이 있는데 이것은 삶에 있어서 방향이 다른 것입니다. 한 명은 크라이스쳐치로 가고 한 명은 인버가길로 가면서 우리 계속 만나서 교제하자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같은 길을 가야 바른 교제가 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것은 무엇인가 핀트가 맞지 않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교회에는 오는데 믿음이 없는 학생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왜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 중요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깊은 사귐을 위하여 우리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자임들을 늘 확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요한이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쓰는 이유는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여 지기 위함이다. 충만하여 지다 라는 말은 헬라어로 plhrovw 로 의미는 가득하게 하다, 가득 차게 하다, 완성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전함으로 이것을 너희들에게 씀으로 나의 기쁨이 완성되고 충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기쁨이 언제 완성되어지는가? 나 혼자 생명의 길을 가고 있을 때에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 너희들은 다 죽음의 길로 가라 잘 가고 있구나 아 기쁘다 그러한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보통 때는 어떠합니까? 그렇게 말하였는데도 안 듣고 하면 그래 할 수 없지 그래 한 번 혼나봐라 그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잘 안되는 것을 보면 조금은 고소하고 잘 됐다 말 안듣더니 그래 한 번 혼나봐라 그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나 만 듭니까?
그런데 예수 안 믿고 . . . 그런데 그 사람이 예수 믿고 다시 돌아 왔어요. 나로 인하여 한 영혼이 돌아 왔을 때에 그 기쁨. 지금 요한 사도는 그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가 가장 기쁠까요? 생명이 태어날 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머리 나뿐 사람들이 어머니들입니다. 왜냐하면 아기를 낳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한 번의 고통으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열 달 동안을 아이를 배속에 넣고 다니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이 듭니까? 처녀 때 그 아름답던 몸매도 다 망가지고 가고 싶고 먹고 싶은 것도 많지만 못 먹고 못 가고 그냥 화장실에 들락날락하여야 하고 무엇하나 편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해산의 고통은 어떠합니까? 그런데 또 다시 낳습니다. 금붕어보다 더 기억력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합니까? 그 열 달의 고생과 해산의 고통이 새로운 생명을 보는 순간에 다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 고통과 힘들었던 순간이 그 순간 다 잊어버릴 정도로 큰 기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을 우리가 구원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왜 내가 저 사람에게 이렇게 고분거리고 시간을 투자하고 그렇게 하여야 하는지 참 안심하게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옛날처럼 예수 천당 불신 지옥 하던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은 얼마나 한 영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난 한 영혼의 새로운 탄생은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됩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게 되고 다시 힘을 들려서 그 생명의 탄생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탄생의 경험하며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는 늘 푸른 가족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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