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요일3:13-18

사망에서 생명으로/요일3:13-18
2001-09-12 10:03:24 read : 146

I. 서 론

 1. 중국 사람들의 말에 \"종록자 불견산\"란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슴을 따라가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몇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눈 앞의 작은 이익과 즐거움을 구하는 자는 인생 전체를 볼 수 없고, 현실의 만족과 성공만 추구하면 결국은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빠르게 도망하는 사슴 한 마리를 잡으려고 막 쫓아가는 사람에게 산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눈에 보이지 않고 마지막까지 따라가다 죽을 것을 모르고 자기가 죽을 자리로 들어갑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끌고 가는 것은 욕심이란 본능입니다.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열 살 때에는 과자에 움직이고, 이십대에는 연인에 끌리고, 삼십 대에는 쾌락에 끌리고, 사십 대에는 야심에 끌리고 오십 대에는 탐욕에 끌린다. 그러나 이렇게 무엇엔가 끌리고 있는 동안 인간은 허수아비일 뿐이다.\" 여러분들을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욕망의 포로가 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습니까? 우연이 젊은이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얘! 나 엎그래이드 하려다가 엎어졌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내어 도전하였지만 역부족이 되어 인생에서 넘어지거나, 재미 좀 보려다 재미 커녕 별 볼일 없는 결과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되는 것은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의식을 가질 때, 그 때부터 인간입니다. 그러나 참된 인간과 삶에 대한 바른 해답을 얻지 못하면 그것은 살아간다 해도 인간적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드리는데 습관적으로 조는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항상 조는 집사님을 깨우기 위해 설교 중에 \"천국가고 싶은 사람은 다 일어나시오\"하였습니다. 그러자 다 일어났는데 졸던 집사님은 일어나지 못하고 당황하였습니다. 다음 다시 졸 때 목사님은 \"지옥가고 싶은 사람은 일어나시오\"했더니 다 가만히 있는데 벌떡 일어났습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당황하여 앉으면서 집사님은 \"뭐 나 혼자 서 있는게 아니네!\"라고 하였습니다. 목사는 항상 진리를 말하지만 자신은 준비되지 않음을 꼬집어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그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정 삶의 의미를 알고, 목표와 사명을 발견하여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자가 되었다고 설명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넘침으로 우리는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참 생명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인생의 의미를 알고, 생명을 아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명을 가진 자가 되었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II. 본 론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 생활 속에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나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예수님을 모셨고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 첫째는 세상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미움으로 가득합니다. 12절에 보면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가인은 세상에 속한 자의 표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영적이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자들이며 저 안에 영생이 거합니다. 반면에, 가인에게 속한 사람들은 \"사망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죄악가운데 여전히 죽은 자들이고,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저들 가운데 영원한 생명의 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삶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귀에서 속한 자로, 악한 자에게 속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삶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이고 자신만을 주장합니다. 이것이 사탄을 근본적으로 타락하게 한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타락하였습니까? 그것은 자기 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자신이 더 많은 관심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영위해 나가고 이기적인 삶을 택한 것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인 생각과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나만이 옳고 내 생각이 옳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기주의가 관철되지 않으면 시기 질투하는 마음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을 합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두 친구가 수도자를 도와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두 젊은 친구는 한 사람은 욕심이 많고 한 사람이 시기 질투가 많습니다. 해질 녘이 되었을 때 수도자는 동행한 것이 고마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자네들의 소원을 들어 주겠네. 그런데 딱 한 가지만 말하게. 한 사람이 소원을 말하면 다음 사람은 자기가 구하지 않아도 자연히 먼저 소원을 구한 사람의 두 배를 가지게 되네.\" 그런데 처음 말한 사람은 하나를 받고, 그 다음은 배를 받게 된다니까 이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욕심과 시기 질투가 많아서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욕심많은 사람이 시기 질투 많은 사람에게 협박을 했습니다.\"이 놈아, 먼저 말해. 아니면 죽일거야!\" 그랬더니 이 시기 많은 사람이 \"내 눈 하나 빼 주세요.\" 정말 눈 하나가 빠졌습니다. 그리고 두 배를 받을 사람은 눈이 둘 다 빠졌습니다. 이것이 세상이고 인간입니다. 욕심을 부리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속한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싫어하고 선한 것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항하였고, 마귀에게 속한 자도 역시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의 백성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아벨 두 형제가 모두 제사를 드렸는데 가인의 제사는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은 화가 났습니다. 급기야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적인 삶입니다. \"내가 얼마나 정성껏 예배드렸는데 난 거들떠도 보지 않고 아우 것만 받으시다니...\" 이런 관심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2. 세상에 나가면 세상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미워합니다. 13절의 말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인이 곧 세상이 아벨을 그리스도인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요셉과 형제들의 경우를 봅니다. 다윗과 사울의 경우를 보아야 합니다. 사울은 철저하게 자기를 중심으로 삽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합니다. 사울은 얼마나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악하게 대하였습니까?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세상의 사람들은 \"저를 못박으시오!\"라고 외쳐 댔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싫어합니다. 그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싫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며 저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소유한 생명 때문에 우리를 미워합니다. 주님은 한번도 나쁜 일을 하시지 않으셨고, 죄가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은 주님을 싫어하였습니다. 주님은 완전하셨고, 그들의 잘못된 부분을 정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착하게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계신 그리스도인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미움당해도 기죽지 말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핵심은 우리가 의로운 자가 되고,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격이 있다 없다 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가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포기하지 말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부가 아니고 절대적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 앞에서 자기 부족을 느끼면 느낄수록 더 감사해 하고 감격해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제 그 사랑은 성자 하나님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이 사랑이 필요한 형제들을 향해서 이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여러분은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미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본성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이것을 부여받았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본성을 부여 받음으로 이전에는 결코 소유해 보지 못한 생명의 원리를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 가운데 보여지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소유하고, 같은 인생관을 소유하고, 같은 소원을 가지고 사랑으로 삽니다. 사랑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습니다. 기쁘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기뻐하며 책임을 다하는 신앙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간혹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에 보니 사랑하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정작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랑이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라고 하면 \"내가 지금 빚을 많이 지고 있는데 예수 믿는 채권자들이 사랑하라, 사랑하라, 하면서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아요\"라고 식의 대답을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왜 저 사람이 사랑하지 않나?\' 용서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저 사람은 왜 용서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들은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용서하고, 내가 봉사하고, 내가 희생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사랑이 없고, 목사, 장로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바르게 믿음의 성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두 기독 청년이 같이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친구에게는 먹을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먹습니다. 그래서 빵을 좀 나누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안 줍니다. 그래서 \"넌 그리스도인이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는 말씀도 모르냐?\"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하는 구절도 있지 않느냐?\"고 하더랍니다. 이 친구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사랑을 질문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어디에 있습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개의 손을 주셨다. 하나는 받기 위한 손이요, 하나는 주기 위한 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생활 속에서 얼마나 구체적으로 나누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 의사요 상담자인 폴 트루니에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받는 데서 약간의 기쁨을 느낀다. 그러나 주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지고의 희열을 주는가?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웃에게 베풀 때에 거기서 사랑을 경험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을 제공해 줍니다. 이 사랑의 정신이 신앙의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 계명에는 하나님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웃 사랑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눅10:27). 이 계명을 말하던 서기관이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 그는 어쩌면 이 명령을 회피하려는 요량으로 신학적 논쟁을 노렸는지도 모릅니다. 이때 예수님은 유명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이 비유에 따르면 내 옆 집에 사는 사람만 내 이웃이 아니고 내 가족만 내 이웃이 아닙니다. 어느날 내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는 그가 내게 관심을 요구하고 내 애정을 요구하고 도움을 구한다면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이웃입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만나 쓰러져 피흘리는 이웃 그가 우리의 사랑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습니다.

 

III. 결 론

 지난 월요일에는 한 모임에서 여자 목사님의 간증을 통해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김태완 목사님은 유교의 가정에서 자랐고, 교회를 다니다 반대에 부딪쳐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공부도 별로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이러다가 진학하기도 힘들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학을 못하면 꼭 해보고 싶은 미팅을 할 수 없겠다 생각이 들어 공부했습니다. 결국 진학을 했습니다. 원하고 원하던 미팅을 해보았는데 별로 마음에 드는 사람도 없고, 2차를 청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미팅을 해도 별 만족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인생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풀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서오경을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책 중에 공자에게 제자가 질문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선생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4대성인 중 한 사람이지만 생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대목에서 더욱 미궁에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한 모임에서 성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성경 표지에 \"만일 이 책을 읽다가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며 이리로 연락을 주시오.\"라고 써 있었습니다. 이 책에 인생의 의미가 있다고 해서 성경을 읽어나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이 읽기 어려운 책입니다.

 그러다가 욥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자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이다\"(1:21)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을 내셨다는 부분에서 깨달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로구나, 그렇다면 자기는 공자보다 더 위대하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현재 교도소의 죄수들에게 성경을 전하고 쓰게 하는 방법으로 전도를 하고, 광주에서 옥합교회를 시무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를 찾았는데 하나님을 만나며 참 생명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영혼을 찾는 일에 그의 인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가 진정 찾고자 하는 것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가운데 에릭 흐롬과 프로이드가 있습니다. 이들의 인간관은 매우 비슷합니다. 두 사람은 모두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기적 인간이 추구해야할 삶의 모습을 설명하는데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이기적 본능을 충족시키는 데서 인간다움의 의미를 찾아내려 합니다. 반면 기독교적 가치관에 가까웠던 에릭 프롬은 오히려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서가 아니라 그 욕망을 부인하는데서 인간은 인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목적적인 삶이라고 말합니다. 프로이드가 본능적인 삶을 인간다움의 충실한 삶으로 보는데 반해 프롬은 고상한 목적을 위해 자기의 욕망을 부인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사회가 어두운 사회는 아닙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주의 사람들이 일어난다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당신을 드린다면 세상은 밝아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대강절을 맞아 어떤 사랑으로 주님을 맞이할 것인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