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생명을 외쳐라 눅3:1-9
어떤 아내가 남편이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자, 친한 친구 3명에게 팩스를 보냈다고 한다. 우리 남편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혹시 그곳에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랬더니 세 친구에게서 다 팩스가 왔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우리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이곳에 와 있으니 내일 아침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것을 친구의 의리라고 생각한다.
해지고 어두워지면 생각나는 곳이 어디인가? 집, 부부, 자녀들, 부모들이다. 그런데 해지고 어두워지면 생각나는 곳이 술집이나, 도박하는 곳이나, 무엇인가 숨어서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병든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가정에서는 건강한 신앙이 나올 수 없다. 그리고 건강한 신앙이 되어야 가정이 건강해지는 것이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집이 생각나고 부모가 보고 싶은 것처럼, 우리 인생에 연륜이 더할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인간이 생각하는 것은 돌아갈 곳이다. 내가 왔던 곳, 내가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육신은 왔던 데로 흙으로 가지만 내 영혼이 갈 곳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더 들수록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것이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두워졌는데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비참한 것이 없다. 그런데 또한 해가 졌는데, 집으로 가지 않고 다른 곳에 가는 것처럼, 인생의 황혼이 졌는데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다른 곳을 기웃거리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다. 나이와 연륜이 깊어갈수록 더 믿음에 깊이가 더해지는 것이 축복인 것을 믿기 바란다.
사람들은 나이가 먹으면 자기가 갖고 있는 신앙에 더 철저해진다고 한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도 나이가 들면 힘이 없어지고 여러 가지 능력에 제한을 받게 되고 입지의 폭이 좁아지고, 불안해진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신앙에 더 집중하게 되고, 그래서 열심을 갖게 된다. 하지만 잊지 말 것은 절대로 믿음이 깊어지는 것은 나이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많아진다고 무조건 열심 있는 신앙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의 체험들과 신실한 노력들을 통해, 성령의 은혜로 믿음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 믿음이 깊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젊은 나이에 깊은 믿음가지고 능력 있게 주의 일을 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는 것이 이 다음의 일이 아니라, 지금 결단하고 지금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만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은 나이나 경험이나 지식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은총으로 얻게되는 확신이다. 그 결심으로 주 앞에 선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귀한 영혼구원의 역사를 일으켜 가는 것이다. 예수 안의 믿음을 그저 하나의 종교적인 현상으로 치부해 버리려는 마음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른다.
메시아로 오실 예수를 증거하면서 세례요한은 회개하고 천국을 믿으라고 외친다. 그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으며 예수를 증언했고, 옥에 갇힌 후 순교하게 된다. 그는 구약최후의 선지자요 구약과 신약을 잇는 가교로서,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다가 그 분의 출현과 함께 조용히 사라져간 오직 예수만을 위해 산 인물이었다. 성경은 그런 요한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요1:6-8)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
성경에 이토록 예수를 위해서 산 인물에 대한 완벽한 묘사는 없다. 철저하게 예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인생으로 요한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예수를 위해 산 사람들의 인생이 그렇듯이 그의 인생도 세상적인 성공과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것은 스스로 원했는데 갖지 못한 것과는 다른 스스로 선택한 빈곤과 청빈의 삶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오직 예수만을 위하여 산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세상을 사는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소유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예수 안에서 존재하려는 것을 위해 살았다는 것이다. 존재를 깨달은 이에게, 다시 말해 사명을 깨달은 이에게 소유라고 하는 것은 전혀 간절함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이것은 마치 밭을 갈다 보화를 발견한 사람이 온 재산을 다 드려 그 밭을 산다는 말씀과 같은 것이다. 가장 귀한 것을 발견한 자의 관심은 오직 그것에만 가 있는 것이다. 예수를 발견한 자의 흥분과 기쁨을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 믿는 자의 희생과 헌신이 꼭 세상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 인정이 없다하여 속상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 오직 예수만을 위해 사는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야말로 광야에서 외치는 세례요한의 외침의 요지는 이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눅3:7-9]
성경을 자세히 보면, 광야에 외쳤던 것은 세례요한만이 아니었음을 본다. 그의 사촌이었던 예수도 마찬가지로 또 다른 광야에서 외치고 있다. 비록 예수가 외친 곳은 풀과 바람만 있는 곳이 아니라, 군중 속에서 외치고 있지만, 듣는 이와 깨닫는 이가 없는 그곳은 또한 광야와 다름 아니었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왔으니 회개하고 천국을 믿으라 외치는 것이고, 예수는 그 사명을 마치고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다 이루었다고 외친다는 것이다.
언제나 들어주는 이 없는 광야의 외침은 외롭고 쓸쓸하고 공허한 것이다. 그래서 죽는다.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절망하고 죽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아내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무시되기 시작하면 죽는다. 늙은 부모에게 그저 밥만 주고 얼마간의 용돈만 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으면 부모는 죽어 가는 것이다. 매일 같이 하시는 말씀이라도 잘 듣고 인정해드리면 사시는 것이다. 자녀들의 이야기도 부모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무시되면 자녀의 건강한 자아와 인격은 죽어 간다. 세상에 인정받지 못하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인간은 어디에서건 인정받아야 살 수 있는 존재이다. 교회도 부자나 가난한 자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동일하게 인정이 되어야 하고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선거에 실패한 사람들이 큰 병을 얻고 죽는 일도 많다고 한다. 분명히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최선을 다해 인사하고 다니며 노력했는데, 대중에게 자기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며 절망하는 것이다. 즉, 내 말이 먹혀 들어가지 않고, 내가 생각하는 만큼 내가 세상에 인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에 스스로의 존재의 터전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이든 최선을 다했을 때는 결과가 있고 보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결과가 참담한 것, 소용없는 것, 의미가 없었던 것을 느끼면 절망한다. 그래서 선거에 실패한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민심을 알게 되었다 하는 소득 아닌 소득을 이야기하며 자위하는 것이다. 완전하게 믿고 생명을 드린 것이 무너질 때 사람이 무너지는 것이다.
그런데 광야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자기의 어떤 목적을 가지고 소리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내가 기대해서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직 외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외치면 다 돌아올 것이다. 다 내편이 될 것이며,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는 계산이 없다. 그저 내가 외치는 것이 내 사명이고, 그 사명을 통해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일 뿐이다. 그래서 공허하지 않고 사명 감당한 것에 기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외치는 자가 아무리 광야 같은 곳에서 듣는 자 없이 쓸쓸히 외친다 할지라도, 그 외치는 자의 마음은 절대로 광야와 같은 마음일 수 없다. 광야에서 외칠 수 있는 자의 심령은 진리로 가득 차야만 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확신, 철저한 믿음의 고백이 없이는 절대로 광야의 외치는 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이 없는 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두렵고 떨리고 부끄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너무도 공허하고 쓸쓸한 메아리 없는 외침이기에 도망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할 수 있는 일, 성령의 은혜가 내 심령 속에서 흘러 넘칠 때 그 힘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용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령충만의 기초는 순종이다. 예수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는 그 힘을 위해, 십자가에 매달릴 수 있는 것을 위해, 자신에게 침을 뱉고 조롱하며 못을 받는 이들을 위해 오히려 저들이 하는 일을 스스로 알지 못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할 수 있는 것을 위해, 그 순종을 위해 겟세마네에서 40일을 기도한 것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어야 한다. 철저하게 준비된 사명이었다. 사명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것은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산다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세상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 없이 그저 생존하는 것에 만족을 두어 육체적인 쾌락과 즐거움을 목표로 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존재의 깊은 깨달음으로 육신적인 것, 정신적인 것을 벗어나 영적인 세계를 사모하며 사는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사모할 뿐 그 영적인 세계를 살아갈 능력이 없어, 냉소적이고 패배적인 삶을 살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예수는 인류구원의 위대한 사명 앞에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생명을 다해 기도하면서 광야에서 외치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향해 생명을 드리는 순종은 내 생각으로 판단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전적인 인도하심과 힘주시는 은혜로 할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의 은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것을 드려 헌신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처럼, 그분에게도 생명을 드리는 것이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분이 순종하여 구원을 이루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기도하며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것에 승리하여야 할 줄로 믿는다.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이 주간은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며 슬퍼하고 애통하는 기간이 아니다. 그분의 순종을 따라 우리도 순종하는 용기를 회복하는 절기이다. 그 분처럼, 순종을 준비하는 겟세마네의 기도가 오늘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줄로 믿는다. 그 분이 죽으심을 통해 온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오늘 우리의 정욕과 욕심을 죽이고 순종하여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나아갈 때,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생명력 있게 이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디에 섰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고 선 땅은 광야이다. 예수 이름으로 살려고 하면 언제나 말 할 수 없는 공격들이 있고, 그 이름을 지키는 것에도 수 없는 비난과 조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전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하셨다. 사명을 주셨을 때에는 사명을 감당할 능력도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들고 설 때마다 찬바람이 부는 광야를 느낄 때가 참으로 많지만, 그러나 결국은 그 광야의 외침들을 통해서 기독교의 위대한 역사는 이어져 왔고, 지금도 성령충만의 뜨거운 마음을 품고 그 광야 같은 세상에서 힘써서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주의 역사는 이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홈페이지에 올라온 간증 하나를 소개한다. 이 간증은 사이버 가족에 실린 글로 미국에서 함께 신앙 생활하던 한 집사님의 이야기다. 여러 자매들 중에 큰언니가 그들 가족의 신앙의 기둥역할을 한다. 그런데 그 남편은 소위 명문대를 나와서 앞길이 촉망되는 사람이었고, 기대에 맞게 대기업에 입사하여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믿음이 좋은 이 언니는 남편을 구원하려 너무도 오랫동안 기도했고 애써왔지만, 남편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광야였다. 무려 22년 동안 남편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며 애써 왔다. 배울 만큼 배우고 자타가 똑똑하다고 인정하는 남편은 늘 하나님을 믿느니, \\\'걸어 다니는 사전\\\'인 자기를 믿으라고 했다.
아내가 교회에 드리는 십일조가 못마땅해서, 차라리 십일조 내는 걸 보느니, 월급 안 타오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그 말대로, 노사분규에 휘말려, 그 달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월급을 못 받고 나서도 월급 못 받은 것보다는 십일조 안내는 걸 보니 오히려 살맛이 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식 귀한 집에 불공 드려 태어난 자식이니 만큼 교회가면, 부처에게 벌받아 죽을 것이라며 조카들까지 교회 못 다니게 집요하게 훼방 놓았다. 그 남편을 위해, 아내는 물론 그 자매들이 비록 같은 장소에 있지는 않더라도, 밤 10시만 되면 합심하여 형부를 기억하고 기도했다.
22년이 흘렀고, 이제 그 언니가 하는 이야기이다. 살다보면 옛말 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하더니만, 요즘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22년 동안, 주위에 함께 앉아 예배드리는 부부들을 보면서, 부러움에 눈가가 짓물도록 눈물 흘리던 자신이었는데, 자신이 선택한 불신자와의 길이었기에, 가정의 사역을 담당하려고 몸부림치던 세월이었는데, 이제 그토록 교만하고 똑똑한 척 하던 남편이 세례학습을 받는다고 좋아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남편스스로 특별헌금 할거라고 예쁜 봉투 열심히 고르는 그 모습이 너무 행복해서 울었다고 한다.
이 메일은 이렇게 끝난다. \\\"인생이란 지내온 날들의 합계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 바라는 삶의 합\\\"입니다. 이 봄날, 꽃보다 더 예쁜 웃음을 지으며, 믿음 안에서 꼭 승리하시길, 아카시아 향기를 맡은 것 보다 더 아찔한, 예수의 향기에 취해봅니다. 이 봄날에~~~~~~~.
아무리 광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황량한 곳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주시는 능력으로 애써 말씀을 전할 때 그 외침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믿어 애써서 사명 감당하는 여러분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주님이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이 경건한 절기에, 그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며, 그리고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을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그리고 힘있고 능력 있게 믿는 자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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