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산사람이 소망 했던것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소망했던 것/ 히11:1-40/ 2002-08-26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 소망했던 것
히11:1-40





1.방해받는 믿음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살다간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믿음으로 산 의인들이었습니다(히10:38). 그들이 열망했던 것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류의 것들을 더 많이, 그리고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에 그 방해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정욕」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때때로 성령이 시기하실 정도로 그 정욕에 빠져 허덕일 수도 있습니다.

「핍박」도 믿음을 방해합니다. 한 때, 교회의 역사 속에서는 로마 황제나 카톨릭의 핍박으로 인해 믿음을 방해받았던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보여준 대로(히11:36-38) 그들 중에 얼마는 잔혹한 조롱과 채찍질뿐만 아니라, 결박, 옥에 갇히는 일, 돌로 맞고 톱으로 잘리는 일, 칼로 살해당하며 이리 저리 쫓겨다녀야 하는 일 등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잘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을 확장해간다든지, 명성과 지위를 얻게 되면 우리들 중 어떤 분은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 중에 하나가 될 수 도 있습니다. 반대로 「가난하고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든 것」도 믿음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먹고사는 문제들 때문에 믿음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하자”고 뒤로 미루다가 결국, 영원히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의 지혜로운 사람은 그의 평생에 이런 기도제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주께 두 가지를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거절하지 마소서. 내게서 허황된 것과 거짓을 제해주시고, 나를 가난하게도 마시고 부하게도 마시며 내게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소서. 이는 내가 배불러서 주를 부인하며 말하기를 주가 누구냐? 할까 함이며, 또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함이니이다』(잠30:7-8)

「재미있는 일거리들」이 생겨서 믿음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연애하는 재미, 비디오나 영화를 보러 다니는 재미, 춤이나 오락을 즐기는 재미, 어떤 운동이나 사교에 빠진 재미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시간마저 빼앗아가므로 우리의 믿음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아예 모든 여가생활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도가 지나쳐서 주님보다 우선시 하게 될 때, 우리들의 믿음은 곤두박질 하고 말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내와 자녀와 형제와 자매와 참으로 자신의 생명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느니라』(눅14:26)

이 말씀이 부모와 처자식, 그리고 형제들에게 등을 돌리라는 뜻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고 하셨습니다(롬12:18). “모든 사람에 대하여 선한 것을 추구하라”고 하셨습니다(살전5:15). 그런 주님께서 어떻게 이런 “미워하라”는 말씀을 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주님의 제자들에게 주님보다 우선시 되는 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주님과의 관계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 관계를 방해할 만한 모든 재미난 일들이나 관계들은 다 믿음을 방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모릅니다. 모든 방해들로 인해 우리의 믿음이 뒤로 물러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믿음에 파선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뒤로 물러가면, 내 혼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이를 자들이 아니요, 오직 믿어 혼의 구원에 이를 자들이니라.』(히10:38-39)

뒤로 물러가지 않는 믿음을 갖고자 하십니까? 그 어떤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게 되기 바라십니까? 믿음의 선진들이 열망했던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2.더 좋은 본향을 사모한 자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더 좋은 본향을 사모했습니다. 곧 하늘을 사모했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heaven)의 본향이라. 이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예비하셨음이라』(히11:16)

아브라함은 「떠나온 본향」이 있었고 「찾아가는 본향」이 있었습니다. 전자는 자기 아버지 데라를 통해서 알게 된 본향이고 후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본향이었습니다. 앞에 나오는 것은 온갖 우상숭배와 죄에 연루된 본향이었고 뒤에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구별하심 속에서 거룩하게 나아가는 본향이었습니다. 하나는 이미 그 실체를 잘 알고 있는 본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본 적이 없는 본향이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만이 그 본향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에 순종해나가던 아브라함은 더 이상 옛 본향에 미련이 없었습니다. 그가 돌아가고자 했더라면 얼마든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나(히11:15) 그는 죽기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며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떠나온 본향은 어디입니까? 아브라함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죄에 익숙한 본향에 살았습니다. 거짓과 미움, 음란함과 더러운 욕망, 우상과 포악함의 본향에 살았었습니다. 정욕, 혹은 탐심의 노예로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상숭배를 했던 곳에서 살았던 것처럼 우리는 탐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하여 새로운 본향을 향해 가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 우리의 생활(our conversation)은 하늘에 있습니다(빌3:20)

최초의 도성(city)을 지었던 사람은 가인이었습니다(창4:17).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망을 상실했기 때문에 이 땅에 소망을 두어야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나간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했던 것은 「정착」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감에 대해 잊는 거였습니다. 그의 재물을 쌓을 창고가 필요했고, 그의 가진 것들을 지킬 울타리가 필요했고, 그의 힘을 드러낼만한 위대한 건축물들이 필요했습니다. 그의 모든 세상에 대한 애착을 그대로 표현할 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를 낯선자요 나그네로 고백하면서 살았습니다(히11:13). 그는 언젠가 불타 없어질 이 세상(벧후3:7)에 대해 미련이 없습니다. 이 땅에서 육신적으로 잘되고 화려해지는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아직 이르지 않았고 보이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더 좋은 본향을 사모했습니다(계21:3). 성경은 그곳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 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데,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2)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거룩한 도시는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답게 보이고자 꾸미는 순간은 결혼예식을 위해서일 것입니다. 몇 주전부터 피부 맛사지를 합니다. 피부미용에 신경을 쓰는 거죠. 이빨도 스캘링을 합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웨딩 드레스를 구합니다. 머리도 비싼 돈을 들여 꾸밉니다. 이미 그 분야에서 탁월한 전문 메이컵을 하는 사람들에게 화장을 맡깁니다. 반짝이는 악세사리들, 더욱 이쁘게 보이는 보조 장식품들을 답니다. 신랑 뿐만 아니라 참여한 하객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보이고자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이 남편을 위한 단장입니다. 우리에게 준비된 더 좋은 본향, 더 좋은 도성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나서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주하시리니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계21:3)

장차 주어질 본향은 이 세상에서 처럼 죄악이 관영한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처럼, 말그대로 거룩한 도성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곳에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죄악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죄에 대한 심판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죄 때문에 갈등하는 고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곳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사모하는 본향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지긋지긋하고 혐오스러운 죄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온전히 그 분안에 쉬게 되는 그날을 우리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매 다시는 죽음이나 슬픔이나 울부짖음도 없고 다시는 고통도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음이라』(계21:4)

눈만 뜨면 고통스러운 소식들이 대중매체를 통해 전달됩니다. 하루에도 어마어마한 숫자가 죽음으로 이 불결한 도성에서의 삶을 끝냅니다. 슬픔과 울부짖음 고통이 가득한 곳이 바로 여깁니다. 그러나 그 도성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서 죄와 싸우며 거룩한 길을 갔던 성도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는 영원한 위로가 넘칩니다. 그곳을 사모하지 않습니까?

불신앙의 사람들은 이 땅에 화려한 탑을 세우고자 삽니다. 그들의 힘을 과시할 도성을 짓습니다. 그들의 욕정과 집착을 그대로 표현할 도성을 짓습니다. 마치 언제까지나 거기 있을 것처럼....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삽니다. 그들은 잠시 머문다는 생각을 갖을 뿐입니다. 언제까지나 여기 이곳에 안주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외모로 보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이 땅에 잠시 머물러 있는 동안 두려움 가운데 지내라』(벧전1:17)
『지극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낯선 자와 나그네와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혼을 거슬러 전쟁하는 육신의 정욕들을 삼가라』(벧전2:11)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더 좋은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았습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니라 돌아갈 본향이 있는 나그네였습니다. 이 세상을 지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뜻이 「행인」 곧 「순례자」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 많은 욕심을 부리지 맙시다. 애착을 갖지 맙시다. 이 세상에서 화려한 것을 남기려고 신앙마저 외면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그런 삶을 위해서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좋지 않은 본향에서부터 꺼내셨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본향을 예비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요14:2).

3.더 좋은 상을 중요하게 생각한 자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더 좋은 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이 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약속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보상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고(히11:6).

세상에는 상도 많습니다. 조금 있으면 시드니 올림픽이 열립니다. 아마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걸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과학자,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노벨상은 일생을 빛내줄 상이 될 것입니다. 노래하는 사람들이나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상들은, 그들에게 기쁨을 안겨다 줄 것이며 그들이 수고한 것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부지런한 사람들이 저마다 나름대로의 위치에서 보상을 얻기 위하여 부지런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들이 받아 누리게 될 상들이 결국 썩어 없어질 것이 된다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상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습니까? 그분은 분명히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어질 월계관을 얻기 위하여 하되, 우리는 썩어지지 아니할 왕관을 얻기 위하여 하느니라』(고전9:25)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구원받은 것으로만 만족하지 마십시오. 상 받기를 사모하십시오.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 선수들이 실지로 막상 메달을 못 따게 되더라도 저마다 한마디씩 경기에 임하는 각오를 물을 때, 최선을 다해 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오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는 경주에 임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상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올림픽이 끝나면 메달을 땄던 사람들의 명승부의 장면과 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들을 편집해서 「자랑스러운 한국인」들이라고 며칠씩 텔레비젼에서 방영을 해줍니다. 음악도 감동적인 것들로만 골라서, 감동적인 표정들만 모아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끔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한가지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 상주시는 날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 올림픽에서의 감동의 순간보다도 더 진한 감동의 순간이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날을 바라보고 부지런히 영적인 경주에 임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많은 것들이 우리의 믿음의 경주를 방해하려고 달려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거대한 구름같은 증인들이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떨쳐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경주로를 달리며』(히12:1)

100m 경주 선수가 핸드폰을 목에 걸고 달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초를 다투는 그 싸움에서 그는 승리하기를 포기한 사람이 뻔합니다. 넥타이를 차고 달리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나만의 멋인데 하면서... 이기기를 원한다면 최대한 간단하게 해야합니다. 버릴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자주 넘어뜨리는 반복적인 죄는 우리의 영적인 달리기에 있어서 가벼움을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치고 나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훌륭한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그 상을 바라보고 현재의 편안함을 포기했습니다. 잠시 죄의 쾌락들을 즐기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당하기를 택했습니다.

『잠시 동안 죄의 쾌락을 즐기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당하기를 택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치욕을 이집트에 있는 보화들보다 더 큰 부로 여겼으니 이는 그가 보상받을 것을 중시함이라』(히11:25-26)

우리들의 눈을 현란케 할 많은 유혹거리들이 있고 또 그것들이 우리들의 믿음을 방해하려 할지라도 더 좋은 상을 주시는 그분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그분을 믿는다면 항상 올바른 것을 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저는 앞에 있는 기쁨을 바라보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히12:2).

4.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 했던 자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되살려 받기도 하며 다른 이들은 고문을 당하되 구출을 받으려하지 아니 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더 좋은 부활을 얻으려 함이었으며』(히11:35)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시체가 되었든, 혹은 살이 완전히 흙이 되어버렸든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리스도와 연관된 생명으로의 부활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시 드러나게 되는 것에 대해 「사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분명히 언젠가 바다가 그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내어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몸둥이가 다시 사는 때죠. 사망과 지옥도 그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넘겨줄 때가 있을 겁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그들은 거기서 석방되는 게 아닙니다. 넘겨지는 것입니다. 불못으로 넘겨지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망이라는 용어로 확정짓습니다. 이른바 둘째 사망이라고(계20:13-14).

첫째부활은 복된 것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는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이들에게는 둘째 사망이 권능을 행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이 되어 천년 동안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라』(계19:6)

이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임하게 될 때, 그분의 영화로운 몸과 같이 우리도 변하게 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장차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계신 그대로 볼 것임이라』(요일3:2)

왜 많은 순수한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들의 박해나 로마 카톨릭의 정죄 아래서도 그들의 믿음을 굽히지 않고 죽어갔습니까? 그들에게는 더 좋은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핍박이나 종교적인 정죄가 우리의 믿음을 방해할 수는 없습니다.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하는 자마다 믿음에 있어서 뒤로 물러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더 좋은 부활을 약속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4-25)

5.결론

우리의 눈을 땅에 두지 맙시다. 위에 것들을 추구하고 땅 위에 있는 것들에 애착을 두지 맙시다(골3:1-2). 더 좋은 것을 사모하며 나아갑시다. 주님께서 준비한 더 좋은 본향, 더 좋은 상, 더 좋은 부활을 생각하고 우리의 믿음을 더 굳건히 하는데 하나님 앞에 헌신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