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소망/벧전1:3-9 2008-06-17 13:44:37 read : 149
김민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수이기도 하고, 작사와 작곡을 하기도 하고, 요즘은 학전이라는 극장과 극단의 대표로 있는, 말하자면 문화예술인이라고나 할까요? 여러 해 전에 박세리가 유에스오픈에서 연장전 끝에 우승할 때 그 경기에서, 공이 하필 연못가에 떨어져서 양말을 벗고 연못물에 발을 담그고 공을 치던 장면이 한동안 많이 방송됐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배경으로 흘러나오던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하던 노래가 바로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였습니다.
김민기의 노래 가운데 “친구”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습니다. 바다에 갔다가 물에 빠져서 죽은 친구를 그리며 만든 노래라고 하는데요, 가사가 이렇게 됩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요 어디가 물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친구가 물에 빠져서 죽었는데, 그 친구가 죽은 건지, 사실은 이 땅에 살아있는 내가 죽은 건지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레옹이라는 영화 많이들 보셨지요?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 뤽 베송이라는 사람인데요, 그 사람이 만든 영화 중에 그랑 블루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어려서 고아가 돼서, 바다에 잠수하는 걸 유일한 낙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폐와 심장의 기능이 특수해서, 남들보다 몇 배는 더 오랫동안 숨을 안 쉬고도 버틸 수가 있었고, 그래서 바다 속에서도 남들보다 훨씬 오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잠수 대회 챔피언이기도 한 주인공은, 땅 위에서는 깊은 고독 속에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는 바다속에서 살기로 하고 바다로 들어갑니다. 주인공을 사랑하는 여주인공이 붙잡아 보지만, 그는 결국 바다로 떠나고 맙니다. 아무리 숨을 오래 참을 수 있어도, 사람은 바다 속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랑 블루의 주인공에게는, 땅 위에서 사는 건 죽은 것과 같았습니다. 오히려 물속에서 다시 나오지 못하더라도, 거기 있는 것이 그에게는 사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라는 노래도 그렇고, 그랑 블루라는 영화도 그렇고, 우리에게 심각한 질문을 던져줍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의 경계가 어디인가.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인가. 가끔 우리는 그런 질문을 받기도 하고 하기도 합니다. 사는 게 뭐냐? 무엇이 사는 것이고 죽는 건 또 뭐냐? 심장이 뛰고, 숨을 쉬면 사는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겁니까? 뇌사라는 게 있지요. 우리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살아있는데, 의사는 죽었다고 판정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보기에는 영락없이 죽은 사람인데, 병원에서는 살아있다고 하면서 결국 살려내기도 합니다.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거냐는 질문은, 살아있음과 죽음의 경계선이 모호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도 하고, 또 산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을 무 썰듯이 확실하게 나눌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 중에도 그런 말 자주 하지 않습니까? 이게 사는 거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든지,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이라든지,
산송장이라든지, 육신은 죽었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있다든지, 하는 말들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 생활 속에서 사는 것과 죽은 것의 경계는 생각처럼 그렇게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묻게 됩니다.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은 것입니까? 무엇을 가리켜 살아있다고 하고, 무엇을 가리켜 죽어있다고 합니까?
사형판결을 받은 죄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형집행이 확정되었습니다. 내일이 될지 모래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조만간 사형이 집행될 겁니다. 이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입니까?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살아날 아무런 희망도, 가능성도 없다면, 이 사람은 죽은 사람과 무엇이 다를까요?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는 말을 합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어야 할 이유도, 의미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가 하면, 이런 일도 있습니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공명이 죽은 다음에 사마중달이 공격해올 것을 대비해서, 자기가 죽지 않은 것처럼 위장해서 가마에 태워서 맨 앞에 세우도록 합니다. 제갈공명이 죽은 줄만 알고 공격해왔던 사마중달이 제갈공명의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도망갑니다. 이 일을 두고서 죽은 제갈공명이 살아있는 사마중달을 물리쳤다고 하는 고사가 생겼습니다.
요즘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이 공천 때문에 어려움이 많지요?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한 사람들이 당을 나와서 친박연대라는 당을 만들어서 총선에 출마를 하는 모습을 봅니다. 친박연대라는 건 박근혜씨하고 친하다는 건데요, 그만큼 박근혜씨의 영향력이 막강하다는 걸 말하는 거겠지요.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영향력이 박근혜씨의 영향력이라기 보다는 고박정희 전대통령의 영향력이 아닐까요? 지금 박근혜씨에게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대개 그 사람 자신보다 그 아버지 박정희 전대통령 때문이라는 거지요. 그렇게 본다면,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들보다 더 영향력이 크다는 건데요, 그러면, 그분은 죽은 겁니까, 살아있는 겁니까?
살아있는 것과 죽은 것의 경계가 애매해진 건 우리 머릿속에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실제로 생명과 죽음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애매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죽음의 세상에서 다시 살아있는 자의 세계로 돌아오셨기 때문에, 삶과 죽음의 경계는 아무도 넘지 못하고 넘을 수 없는 철통같은 장벽이 아니라, 그저 굳이 구별해야 하니까 그어 놓은 경계선 정도라는 겁니다. 우리도 이제 예수님처럼 언제든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넘나들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에 나가려면 배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은 일본이나 중국에 배를 타고 가는 길이 많이 열렸지만, 옛날에는 여행을 목적으로 출국하는 길은 비행기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비행기는 출입국절차가 상당히 복잡합니다. 여권 심사부터 시작해서 보안절차가 까다롭지요. 짐 검사도 다 해야 하고요. 그런데, 유럽에 있어보니까, 거긴 국경 넘어가기가 공항에 들어가기보다 쉽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거나 승용차를 타고 가면 여권만 보여주면 되니까요.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 정도야 아니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생각해 온 것처럼 그렇게 소통 불가능한 영역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건 뭐고, 죽었다는 건 뭘까요? 무엇을 살아있다고 하고, 무엇을 죽었다고 하는 걸까요? 오늘 읽은 베드로전서 1: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주셨으며,”
이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에게 산 소망을 갖게 해주신 것이라는 말은, 우리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 있지 않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우리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 거니까요. 예수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 계실 때, 우리도 거기 있어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거기서 그냥 죽은 채로 계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고, 거기서 부활하셔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으니까, 우리도 살아날 수 있다는 소망을 우리가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망은 막연한 꿈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에, 살아있는 소망, 산 소망이라는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고, 우리도 계속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죽어 있지 않고 예수님처럼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살아있다는 것과 죽었다는 것의 기준이 좀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는 그 나름대로 과학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아있다, 죽었다를 판가름하겠지요. 하지만, 그것 가지고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우리의 생명은 육체의 생명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말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생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먼저 밝혀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가지고 태어난 자연적인 생명이 있고, 거기 더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부활의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의학이나 생물학 가지고는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자연적인 생명밖에는 측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앞으로 백년 후에 우리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때도 우리가 여전히 살아있을까요? 아니면 그 때는 이미 우리가 죽은 후일까요? 육신으로 말하자면, 백년 후에는 여기 있는 분들 아마 거의 다 이 세상을 떠난 후일 겁니다. 그러면, 백년 후에는 죽어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살아있으니까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요? 의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백년 후에 죽어 있을 거라면, 이미 죽은 거라고 성경은 보는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죽어 있으니까 백년 후에도 죽은 사람으로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살아있다면, 백년 후에도 살아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야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가 죽어서 슬퍼하고 있는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 베드로전서에서도, 우리가 썩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고 낡아 없어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받는다고 하십니다.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유산이 필요한 건, 우리가 그렇게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니까, 우리는 백년 후에도, 천년 후에도 살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런 모습으로, 이런 세상에서 사는 건 아니지만, 그 때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고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어쨌든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우리가 앞으로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줄곧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한 2년 외국에 나갔다 온 것 빼고는 항상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지방에서 살면서 서울 구경을 와서 며칠 자고 내려갑니다.
저하고 그 사람하고 서울이 주는 의미가 같을 수 있을까요? 똑같은 서울인데,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같은 걸 보고 있어도 저하고 그 사람은 같은 걸 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보이는 게 다르고, 그것이 주는 느낌이 다릅니다. 지난 번 숭례문이 불에 탔는데,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이 보는 것과, 외국에서 잠깐 관광왔다가 마침 그 장면을 보게 된 사람이 보는 것이 똑같을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똑같은 모습을 보고 있어도, 기분, 느낌,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을 겪게 됩니다. 기쁜 일도 만나게 되고, 슬픈 일도 당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고 괴로운 일들도 많이 겪어야 하지요. 그게 인생 아닙니까? 그런 기복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을 만났을 때, 그런 아픔과 슬픔과 고난과 시련을 겪을 때, 그 일을 바라보는, 그리고 그 일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는 모두 같지 않습니다. 같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백년을 미처 살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사람과, 부활의 생명으로 천년 후에도 여전히 살아있을 사람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루살이하고 모기가 만나서 사랑에 빠졌습니다. 하루 종일 데이트를 하고 나서 저녁이 되니까 모기가 하루살이에게 인사를 합니다. 아쉽지만 오늘은 그만 헤어져야겠다. 이젠 나도 피 빨아먹으러 출근해야 하거든. 그럼 내일 다시 만나자. 그랬더니 하루살이가 하는 말이, 내일이 뭔데? 그러더라지요. 사실은 하루살이가 정말로 하루만 사는 건 아니랍니다. 아무튼, 그렇다고 치고, 하루살이가 바라보는 세상하고, 모기가 바라보는 세상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세상에서 살다 가는 게 전부인 사람, 육신의 생명이 끝나면 다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도록 되어 있고,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똑같이 고난과 슬픔과 시련을 겪어도, 그로 인해 느끼는 아픔과 상처는 같을 수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컵에 물을 담아놓고 거기 소금을 한 숟가락만 넣어도 물맛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지만, 바다에 소금 한 숫갈 넣는다고 바닷물맛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한 푸대를 갖다 부어도, 한 트럭을 들이 부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크기가 다르고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지요. 컵 속의 물에 비해서는 소금 한 숫갈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만, 바다의 입장에서는 그거나 그거나, 넣은 것이나 넣지 않은 것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다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교회를 다녀도, 세상을 살면 고난과 시련이 있습니다. 그게 세상이고, 그게 인생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과, 예수를 믿는 사람의 차이는 거기 있지 않습니다. 그 일을 대하는 자세, 그 일을 견뎌내고 이겨내는 방식이 다른 겁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고난을 당하고 시련 속에서 슬픔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거나 넘어뜨릴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부활의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그럴 수 있지만, 부활의 생명,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우리에게는 그게 별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건 우리가 살아갈 영원한 생명 가운데 찰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100년을 사는 동안 10년 동안 고난을 당한다고 하면 고난이 우리 인생의 10분의 1이지만, 우리가 영원을 산다면 10년은 시간으로 잴 수도 없는 짧은 순간인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통의 크기가 달라지는 건 아니겠지요. 막상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우리도 힘들고 아프고 슬픕니다. 그건 당연한 겁니다. 하지만, 그게 우리 삶 전체도 아니고, 우리의 삶 전체를 망쳐놓을 수는 없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일들은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고 우리 영혼을 더 정결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대장간에서 칼을 만듭니다. 단단한 칼, 다른 칼을 잘라버릴 정도로 강한 칼을 만들려면 쇠를 불에 잘 달궈서, 망치로 잘 두드려야 합니다. 칼을 만드는 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건 칼이 칼로서 사용되는 긴 세월 가운데 아주 짧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불에 달궈서 망치로 두드리다 말고 쓰레기통으로 가는 칼에게는 그 시간이 인생의 전부이겠지만 말입니다.
진통을 하고 아기를 낳는데 걸리는 시간이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몇 시간에서 길면 하루 정도 걸리지요. 아기를 낳는 일은 대단히 고통스럽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아기를 낳는 고통이 남자들 군대 3년 갔다 온 것보다 더 크다고 하는 분도 있던데, 그분은 아마 군대도 갔다 오고 아기도 낳아 본 모양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고통스러운데도 아기를 낳는 건, 아기를 낳기 위해 고통을 겪어야 하는 시간이 아이를 기르고,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느끼는 행복과 보람에 비하면 아주 짧은 순간이기 때문일 겁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난과 시련과 아픔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어떤 자세로 맞이하고 있습니까? 부활의 생명을 가진 우리가, 백년을 살고 죽으면 모든 게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하고 똑같다면, 그래서 구별이 되지 않는다면, 이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삶이 다른데 말입니다. 삶 전체 가운데 고난이 차지하는 비중도 다르고, 고난을 통해 거두게 될 열매도 다른데 말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열매를 거두기도 전에 생명이 끊어지는 육신의 삶뿐만 아니라, 고난을 통해 더욱 투명해지고 단단해지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부활의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부활의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부활도 없고, 하나님 나라도 없고, 지금 여기가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하고 별로 다를 바가 없다면, 그들처럼 고난을 두려워하고, 고통으로 인해 낙심하고, 흔들리고, 포기하고, 주저앉는다면, 우리는 우리 믿음에 대해 심각하게 되돌아보아야 하는 겁니다.
오늘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잠시 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살다가 고달프고 힘들 때가 왜 없겠습니까? 이대로 살아서 뭐하나 할 만큼 괴롭고 견디기 힘든 때도 있을 겁니다. 때로는 다 포기하고 다 그만두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때야 말로 우리에게 있는 부활의 생명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 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살아있어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미 옛날의 우리, 육신의 생명에 제한된 우리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그런 한계를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새털같이 많은 날들 가운데 오늘 하루 힘들다고 낙심하고 원망하고, 주저앉는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우리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부활의 생명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 힘으로 모든 시련과 아픔을 이겨냅시다. 고난은 현실이지만, 그러나 금방 지나갑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겪어야 하는 아픔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건 우리 생명이고, 그런 일들은 찰나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고난을 이겨내는 힘입니다. 살아있는 소망으로 순간의 아픔을 이겨내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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