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말하라 막7:24-30
오늘 이 시간에는 \"희망을 말하라\"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 면 감사하겠습니다. \"희망을 말하라.\" \"희망을 말하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희망을 마음에 품고, 희망을 말하고 사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또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삶이 말에 의해서 좌우된다는 것을 확실히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서 18장 21절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할 때, 어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나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은 나도 죽고, 남도 죽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절망 중에 처한 여인이 희망을 말함으로 말미암아 기적을 체험한 사건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은 헬라인이다, 그랬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다, 그랬습니다. 그녀는 예수님 당시에 헬라 사람이요, 수로보니게 여인이다는 말은 수준있는 여인이라는 말입니다. 배움도 있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문제가 있습니다. 절망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린 겁니다. 아무리 치료해도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절망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누구를 찾아갔습니까?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환경이 절망이지만, 그녀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 무릎을 꿇고 그녀는 말합니다.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습니다. 나를 불쌍히 보시고 내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옵소서.\" 그런 마음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또 그 여인에게 절망의 말을 합니다. \"주인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줌이 마땅치 않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방 여인, 헬라 여인을 가리켜서 예수님은 \"개\"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너는 해당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절망에 처했을 때, 그 여인은 다시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다시 희망을 말합니다. \"옳소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단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네 딸이 흉악한 귀신에서 놓였느니라.\" 그랬습니다. 그 즉시 그 여인이 집에 돌아가 보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같은 시간에 흉악한 귀신이 그 딸에게서 나갔습니다.
절망에 처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갔고, 예수님을 찾아갔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절망에 말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을 말한 것입니다. 희망을 말한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과 희망의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의 소망을 해결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절망에서 기적으로 인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우리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시간 모든 면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 어떻게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실패할 것이냐, 성공할 것이냐가 달려 있습니다. 오늘 몇 가지로 나누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환경은 절망이다
첫째로, 우리의 지금 환경은 절망입니다. 지금 우리의 환경은 절망이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3년 전에 IMF 경제 체제에 들어갔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많이 절약했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다시 다 잊어먹었어요. 개인도, 기업도, 기업 운영하는 사람들도, 근로자들도, 정치하는 사람들도, 국민들도 언제 IMF가 왔느냐 그러면서 까맣게 잊어먹었고, 허랑 방탕하게 삽니다. 그래서 다시 또 어려움이 왔습니다.
우리가 환경을 바라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가불안, 그뿐이 아닙니다. 대기업 퇴출. 그뿐이 아닙니다. 이번 주에는 은행 문제도 생길 것입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실직을 당하고 고통을 당했으며, 또 실직에 대한 공포, 적어도 10만 명 이상이 실직을 또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이 사회가 어두워져가고, 또 썩어져가고, 청소년 범죄, 그 뿐이 아닙니다. 러브호텔 같은 문제, 금융비리 사건 같은 일들. 예수님 조차도 우리를 외면하시는 것 같은 절망이 들 때가 있는 것이 오늘 현실입니다.
왜 우리의 환경은 이렇게 절망적일까요?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절망적인 것은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절망이 오냐구요? 죄 때문에. 인간이 지은 죄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뿐만이 아닙니다. 조상이 지은 죄 뿐만이 아닙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죄. 나의 죄, 너의 죄, 우리 모든 인간이 죄를 짓고, 죄를 해결하지 못했고, 죄를 용서받지 못했고, 또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시대가 변하면 인간도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인인 것과 죄의 결과는 사망이라는 것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또 죄의 삯은 사망인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적인 환경을 바꿀 수 있다고 하나, 죄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는 누구나 다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적인 성취와 업적은 결코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소망과 기쁨을 줄 것이라고 믿는 세상의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의 왕 되신 솔로몬 왕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1장 2절입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지혜의 왕의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잠언서를 기록한 솔로몬이 전도서도 기록했습니다. 그 지혜의 왕 되는 솔로몬 왕이 전도서에 기록한 말입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으면 우리의 환경은 절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환경은 모두가 다 절망이다, 그 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간 방황한 것은 약속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에게 \"이미\" 주어진 약속이었습니다. 주어진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순종했습니다.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출애굽한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다 광야에서 죽었고, 2세대들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1세대 중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들어간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뿐인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약속을 믿기만 하면 분명히 우리는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절망적인 환경은 우리의 \"밥\"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환경과 어려움 때문에 이제 죽었다.\" \"이제 절망이다.\" \"이제 끝장 났다.\" \"이제는 정말 살길이 없구나!\"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이 오히려 그것이 \"밥\"인 것입니다. 민수기 14장 9절 말씀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그뿐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바울이 말을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삼중축복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자에게 절망은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주님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66권 모두가 다 크게 나누면 두 가지 말씀입니다. 명령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입니다. 명령의 말씀은 \"아멘\"하고 순종하면 됩니다. 약속의 말씀은 \"아멘\"하고 믿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 66권의 말씀은 명령의 말씀도 아멘, 약속의 말씀도 아멘. 명령의 말씀을 아멘하고 실천하고 순종하면,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며 복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약속의 말씀을 아멘하고 믿으면 주님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형통하고 강건한 축복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믿어야 되는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거예요.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1장 23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세상 사람들은 절망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세상 사람들은 절망이라고 말합니다. 절망의 환경을 보고 \"절망이다\", \"끝장이다\", \"죽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사람들이 절망을 말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만 믿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 것은 믿음도 아닌 것입니다. 믿음이 뭐냐? \"눈에 안 보여도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믿는다.\" 이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믿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영의 눈이 먼 것입니다. 영의 눈이 뜨여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저 보는 것만 믿고 삽니다. 보이는 것이 있으면 있는 것으로 알고, 보이는 것이 없으면 없는 것으로 알고, 보이는 것이 절망이면 죽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은, 영의 눈이 떠진 사람은 영의 귀가 열린 사람은 보이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하나님 말씀하셨으면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이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와 애굽 군대 사이에 놓여 있을 때,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면서 절망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았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간다고, 이제 애굽에서 출애굽 했는데 앞에 보니까 홍해가 딱 가로막혔습니다. 뒤를 보니까 자기를 잡으려고 오는 바로가 보낸 애굽 군대가 있었습니다. 앞을 보니 홍해, 뒤를 보니 바로가 보낸 애굽의 군대.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 절망합니다. 홍해를 보고 절망하고, 바로가 보낸 군대를 보고 절망합니다.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불평합니다. 낙심합니다. 죽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들은 너무 잘 잊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신 하나님을 그들은 벌써 잊어먹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당시에 모든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 생명의 피를 뿌린 이스라엘 백성은 한 사람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을 벌써 그들은 까맣게 잊어먹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느끼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다의 어려움과 또 군대만을 본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쉽게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고 계산합니다. 심지어 자녀에게서조차도 미래의 가능성을 보지 못합니다. 지금 공부를 못하면 끝장 난 것으로 압니다. 공부를 못한 것뿐이지, 그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공부를 못하면 무엇인가 공부 외에 다른 것, 잘 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부는 못하더라도 다른 것에 무엇인가 잘하는 것이 있다고, 분명히 희망을 가지고 보면 그 자녀를 볼 적마다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고,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바라보고 믿어 줄 때, 그 자녀는 분명히 공부하나는 못했다 하더라도, 다른 것을 더 잘해서 하나님 앞에 쓰여지는 큰 사람으로 주님이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현재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해서 절망의 말을 퍼부어 대는 어리석은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위\"를 쳐다볼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삽니다. 그러나 위를 쳐다볼 수 없는 인생은 영원히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위를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땅만 보지 말고,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시편 기자가 말합니다. 시편 121편 1절에서 2절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그랬습니다. 그렇게 고백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지켜주었다(시 121:3-4)고 그랬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땅만 보지 말고, 현실만 보지 말고, 어두운 것만 보지 말고, 눈을 들어서 하늘을 보는 겁니다. 눈을 들어서 높은 산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십자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하나님 음성의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바라보며 살아갈 때, 우리에게 있는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고, 진실로 꿈을 가지고 힘있게, 복되게, 용기 있게, 자신 있게 우리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 다 가지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이 아니라 절대 믿음을 갖는 일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랬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이 아니라 절대 믿음을 갖는 일이다. 계산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삶의 목적과 사명이 있으면 어떤 형편과 사정에 처해 있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삶의 목적이 있는 사람, 또 삶의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기를 출산한 엄마는 죽을 것 같은 아픔이 있습니다. 보통 괴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아기를 낳는 산모, 엄마는 몸이 아플 뿐이지,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몸이 아플 뿐이에요. 아픈 것은 그렇게 아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기를 낳는 희망이 있습니다. 또 아기를 기르는 산모는 돈이 없을지라도, 혹시 남편이 없을지라도, 환경이 어려울지라도, 그러면 고생은 하죠. 자식을 길러서, 교육을 시켜서, 혼자 사람답게 키우려니까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몰라요. 남편 없는 아내가 자식 기르기가 힘들어요. 고생스러워요.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몰라요. 그것은 고통이지, 그것은 어려움이고, 힘이 드는 것이지 그렇다고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기 때문에 고생스러운 그 어머니는, 절망하지 않기 때문에 고생스러운 그 아버지는 희망을 갖고 사는 줄 믿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친척을 구원하기 위해서, 친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웃을 구원하기 위해서 전도하는 사람은 힘이 들어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구역장은 구역을 부흥시키려고 하는 구역장은 힘이 들면 절대로 힘이 드는 것이지, 때로는 멸시도 받고, 천대도 받지 그러나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 사명이 있는 사람, 목적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하였습니다. 더구나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로마밖에 있는 교인들에게 권면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 17절, 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 보니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그랬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빌립보 감옥에 갇혀 있는 매맞고 피투성이가 된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 되어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 내가 감옥에 들어온 것은 내가 매를 맞았을지라도, 피투성이가 되었을지라도 내가 이 감옥에 있는 간수장과 감옥에 있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가 되었다.\" \"나는 복음을 전할 사명을 감당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요? 복음을 전할 사명과 목적이 있는 사도 바울은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 18절에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매를 맞아 전하던지, 뭐 피투성이가 되어서 전하던지, 감옥에 있어서 전하던지, 그저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니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본문의 이방여인도 헬라여인이고, 수로보니게 여인도 흉악한 딸을 고쳐준다는 이 목적, 자기 딸을 정말로 건강하게 해야 한다는 이 목적, 이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 여인은 절망할 수가 없었어요. 다른 방법을 다 써보았어도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누구를 찾아갔습니까? 예수님을 찾아갔어요. 예수님을 찾아가는 것은 뭡니까?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꿈을 가졌기 때문에,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찾아갔습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고쳐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지 마땅치 않다\"고 그랬습니다. 그 때 이 여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자기 사랑하는 딸이 귀신들렸어요. 치료해주어야 되겠다. 고쳐주어야 되겠다. 귀신을 떠나게 만들어주어야 되겠다. 이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 여인은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끝까지 희망을 가지고 나가서,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딸은 깨끗하게 치료함을 받은 줄 믿습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 \"절망\"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사명과 목적은 \"희망\"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사명, 이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절망하지 않습니다. 자녀를 기르는, 자녀를 교육시키고, 키우는 부모는 절망할 수가 없습니다. 훌륭한 지도자는, 사명 받은 지도자는 아무리 환경이 어려워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희망과 꿈을 가지고 앞장서서 나가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합니다. 따라합시다.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희망을 말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사단이 사용하는 무기 중에서 최고의 무기는 \"절망과 포기.\" 사단은 우리에게 어찌하든지 절망하게 합니다. 포기하게 합니다. 또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들이 내일을 희망하지 못하게 합니다. 내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내세의 희망을 꺾어 놓으려고 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삶을 포기하지만, 꿈이 있는 백성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우리의 희망입니까? 예수님이 곧 희망이시자, 예수님만이 희망입니다. 예수님이 희망이고, 예수님만이 우리의 희망인 것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절망은 희망으로 바뀝니다. 죽음은 영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말할 때, 예수님은 희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야이로의 딸은 \"죽었다\"고 말할 때, 야이로의 딸을 \"죽었다\"고 말할 때, 예수님은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잔다\"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죽었다\" 그랬어요. \"절망이다\"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니다, 잔다.\" 그랬습니다. 자면 깨어납니다. 잔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보고 예수께서 그렇게 매맞으셨습니다. 그렇게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 이제는 죽는 시간만 기다렸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저 예수가 구세주라고 말했는데, 사람을 구원해 준다고 말했는데, 결국 저 사람은 실패자구나!\" \"남을 구원하기 전에 너나 구원하고, 그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보라. 이 실패자야, 실패자 예수야\"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 아랑곳하지 아니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양손에 손 박히신 예수님, 양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머리에 가시관 쓰신 예수님, 옆구리에 창을 찔리신 예수님,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다 이루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실패자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다 이루어 드렸다\", \"인류의 구원의 길을 다 완성해 놓았다\", \"내가 다 이루었다.\"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말고, 문제를 통해서 축복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삽시다. 성경은 말을 합니다. 시편 146편 5절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로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말씀했습니다.
또 우리가 믿음으로 희망을 고백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희망을 고백하고 선포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이방 여인의 \"말\" 때문에,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 7장 29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이 뭡니까?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 희망의 말을 했습니다. 그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말을 했으니, 네가 믿음의 말을 했으니, 네가 희망의 말을 했으니, 내가 너의 딸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주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의 말을 하면 눈물과 좌절뿐이지만, 믿음으로 희망을 선포하면 주님의 은혜를 누리 며, 체험하며, 베풀어주며 살 수 있는 것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잠언서 18장 20절입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케 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우리는 \"산 소망\"을 소유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눈에 아무 것도 안 보여도, 내 귀에 아무 것도 안 들려도, 내 손에 아무 것도 안 잡혀도, 내 앞길이 칠흙같이 어두워도 우리는 다 하나님 아들되었고, 예수님 믿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산 소망을 소유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 3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살 희망)이 있게 하시며}. \"산 소망, 살 소망\"이 있게 하셨다고 그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산 소망이 있습니다. 살 소망이 있습니다. 그 소망을 가지시고, 희망을 말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절망스러워도 우리가 기뻐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살 소망이 있다\", \"살 소망이 있다\", \"살 소망이 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희망\"이신 \"예수님\"을 증거함으로, 좌절과 절망과 죽음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인생들에게 희망을 주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세상은 결코 희망을 줄 수가 없습니다. 희망을 주실 분은 오직 한분, 예수님 뿐이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밖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권세, 명예, 건강, 물질 다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 밖에는 절망이요, 예수 안에는 희망이 있는 것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까지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딸을 흉악한 귀신으로부터 치료받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우리들도 환경이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희망을 전하며 살아가는 희망의 메신저, 희망의 전도자가 다 됩시다.
우리는 없는 자가 아닙니다. 있는 자들입니다. 없는 것을 보고 낙심하지 마세요. 없는 것 보고 절망하지 마세요. 최상의 좋은 것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의 희망입니다. 성경 66권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있다는 것, 희망인 것입니다. 여러분 각자 가정이 있잖아요. 남편이 있잖아요. 아내가 있잖아요. 자녀가 있잖아요. 부모님이 계시잖아요. 그러므로 가족이 있다는 것, 가정이 있다는 것 희망으로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 절망은 생각도 하지 말고, 희망을 생각하고, 희망을 품고, 희망을 말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럴 때, 나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습니다. 이 사회를 맑고 밝고 환한 사회 만들 수 있습니다. 환경보고 절망하지 말고, 예수님 바라보면서, 예수님 안에서 희망을 말함으로 말미암아 희망이 그대로 현실로 이루어지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인 것입니다. 예수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 다 되시기를, 희망을 성취하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세상은 절망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망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끝까지 희망을 말하며, 희망을 전하며, 희망을 성취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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