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 하는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요일4:7-21/어린이,학생설교/2002-08-1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요일4:7-21





우리는 연약한 인간인지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쉽게 좌절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 43:5의 말씀은 이러한 자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 길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찬양해야 합니다. 기도하며 찬양하는 가운데 주님이 주신 평안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체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평안함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기도가 응답되어질 때, 그 응답의 기쁨과 심령의 평안함이 청년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주에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요일 4:7∼21의 말씀을 근거로,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우리는 한결같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인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어떻게 사랑하실 수 있을까요?



여러분에게 사랑스런 부모님이 있지요.

그런데 자녀 된 여러분이 언제나 부모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만 하나요?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적이 한번도 없습니까? 불순종 할 때는 없나요? 그런데도 왜 여러분의 부모님은 자녀들을 포기하지 않습니까? 부모님은 자녀를,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자식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당히 관대하며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합니다. 자녀들이 때로는 부모님이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나쁜 일을 저지를 때에도 부모님은 자녀들을 용서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분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 아바 아버지 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사랑이 많고 자비하신 분입니다.



아르헨티나에 있는 어느 교회 바로 앞집에서 무서운 일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한 소년이 외조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집으로 가서 마약 살 돈을 요구했습니다. 외조부모님이 그런 곳에 쓸 돈을 주실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러자 그 소년은 외조부모님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그들은 바로 자기를 낳아 준 어머니의 부모님이셨는데도 말입니다. 물론 그 소년은 감옥에 갔고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죽어 마땅하다고 욕했습니다. 특히 이웃 사람들은 그의 식구들까지 무서워하며 멀리하려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다니시는 교회의 목사와 그의 어머니가 함께 감옥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그 목사는 그곳에서 정말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보자마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은 그래도 그를 용서하며 사랑한다는 말을 연거푸 했습니다. 아들이 감옥에 간 이후 그녀는 매일같이 감옥을 찾아갔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감옥 안에서 주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매일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면회를 간 것입니다.



여러분, 이해할 수 있나요?

그녀는 그 소년의 어머니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도 이러한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오죽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모두 그 소년과 같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님이라면 자녀가 죽었을 때 그냥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에게 생명을 살릴 만한 능력이 있다면, 그 소년을 살려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여기 있는 청년들 중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이 계십니까?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다 이루었다”(요 19:30)고 말씀하셨을 때 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손들은 끝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아담의 모든 후예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흘리신 보혈의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류의 대표자가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옛 창조는 종결되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이 되셔서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셔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새로운 아담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2:1에서 언급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는 말의 의미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까?

어느 정도의 죄를 용서하셨습니까?

성경에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저에게 범한 모든 죄를 용서했습니다”라고 제가 여러분에게 말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죄와 제가 방금 말한 ’모든’ 죄의 의미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죄란 우리가 지금까지 범한 죄뿐 아니라 앞으로 범할 죄까지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모든 죄는 오늘 현재까지의 죄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말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까지도 다 용서해 주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죄를 용서하셨을까요?

바로 우리의 모든 죄악입니다.

우리가 아직 범하지 않은 죄까지도 포함해서 십자가상에서 다 해결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용서해 주셨음을 믿고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베푸시는 용서의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얼마만큼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해답은 바로 우리가 아직 범하지도 않은 모든 죄까지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십자가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다가옵니다. 그밖에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만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바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빚 문서를 제하여 버리셨다고 합니다. 빚 문서는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의 목록인데, 하나님은 우리의 빚 문서를 제하여 버리셔서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그럼, 사망으로 인도하는 죄의 목록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천국에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생명책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하는 것에서부터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의 신상 명세서 첫 페이지에는 ”너는 … 해서는 안 된다”라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이 실려 있고, 그 다음 페이지에는 제가 이 계명들을 어길 때마다 범한 죄가 하나씩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의 신상 명세서는 상당히 두꺼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 일겁니다.

우리의 빚 문서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실려있을 것입니다. ”아무개가 첫 계명을 8,222번 범했고, 두 번째 계명은 580번, 세 번째, 네 번째 계명은 … 번 범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개를 버릴 경우에는 즉시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빚 문서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갚아야 할 모든 빚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빚을 갚고 난 뒤에는 그 빚 문서를 어떻게 합니까?

물론 찢어 없애 버립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아무 소용없는 휴지 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진 빚에 대한 증서일 뿐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우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골 2:14)

우리가 갚아야 할 죄의 빚을 예수님이 피로 대신 갚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서류철에서 빚 문서는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의하십시오. 왜냐하면 사탄이 복사기로 그것을 복사해서 여러분에게 엄청난 양의 빚 증서를 보여 주며 고소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의 죄를 정죄 하는 데 성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빚 문서의 원본이 말소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다시 전략을 바꿔 나의 서류철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가서 보여 줍니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의 서류철을 나에게로 가져옵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는 서로를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예수님이 이미 우리의 빚 문서를 말소하셨는데, 왜들 서로 헐뜯고 있습니까?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문서를 말소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서류를 보관해 놓은 방으로 가십니다. ”음, 어디 보자. 아무개의 서류철은 어떤가. 오호, 깨끗하구나. 나의 일을 충성스럽게 한, 참으로 멋진 종이로구나.” 내가 하나님에게 충성스러운 종으로 인정받는 것은 순전히 예수님이 대신 빚을 갚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밖에 무슨 공로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어디에 서류철을 놓아둘까? 쓰레기통에?’ 예수님은 우리의 빚 문서를 처리하는 데는 자신의 십자가 위에다 같이 못박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우리를 위한 영원한 용서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방해물들을 다 거두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더 이상 따지고 들것이 없으며, 더 이상 정죄함도 없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버림받은 자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완전한 화평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모든 죄의 문서를 찢었으며, 그저 현재 나의 그대로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셨습니다. 나의 잘못된 모든 부분을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토록 나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나의 추한 모습을 받아들이십니까? 저는 제 자신을 나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문제점, 결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주님이 얼마나 거룩한 분이신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이런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코 제 자신의 이런 모습을 스스로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데 어떻게 이런 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무개야, 들어보아라. 나는 네가 네 자신을 아는 것보다도 더 너를 잘 알고 있다. 너도 네 자신을 악하다고 자책하는데 실제로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한 존재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너의 행위나 업적 때문이 아니라 내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너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했다. 내 아들 예수의 피를 내가 흡족해 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었이냐?”

하나님이 나를 용납하시는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다른 근거를 찾으려고 합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에 따라 용납 여부를 결정하신다면, 우리가 발붙일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율법의 요구에 다 순종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내가 너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너를 받아들인 것처럼 너도 네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네 자신을 용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나는 언제나 나를 질책만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아주 거칠게 대했습니다. 내 생각에 나의 인생은 탈을 쓴 위선자처럼 보였습니다. 내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언제나 잘못을 범했습니다. ”너는 그런 짓을 해서는 안돼. 왜냐하면 너희 목사들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야. 너는 기도도 충분히 하지 않고, 금식하는 면에서도 언제나 미흡했어. 남에게 베푸는 것에도 인색했고, 매일 아내 속을 태우지 않았니?”

이 때 하나님은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스런 아들아! 나는 네가 범한 모든 죄를 용서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다 용서한다. 이제는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이며 나는 너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 같은 인간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강단에서 설교를 하고 있는 내 모습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내 아내는 내가 나 지신을 아는 것처럼 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내 아내보다 훨씬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 자신을 아는 것 이상으로 나를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용서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다른 근거에서 우리와 화목하기를 원하신다면 우리는 버림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로서 용납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이제 내 자신을 용납해야 합니다. 하나님도 죄 많은 나를 용서해 주셨는데 왜 내가 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겠습니까? 나의 영혼 속에는 강 같은 평화가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나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한 평안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평안을 소유하길 바랍니다.



여러분이 저를 아무리 잘 봐주더라도 저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나도 나 자신을 사랑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부부가 결혼을 해서 신혼 여행을 다녀오면 흔히 농담식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자 쪽에서는 ”우리가 방금 결혼을 했지만, 앞으로 그가 변함없을지 누가 보장하겠어요?”라고 말합니다. 남자 쪽에서도 그와 똑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보통 아내들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는 변하지 않을거야. 지금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용납할 수 있는 여유가 나에게는 있어.” 그러나 상대방이 완전한 인격을 갖추기만을 기대한다면 이혼을 생각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누구나 흠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용납할 때 행복한 가정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상대방의 행위대로만 평가한다면 우리는 매시간 이혼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러분들, 우리는 서로를 현재의 모습 그대로 용납해야 합니다.

나의 아내가 내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였을 때, 그리고 내가 그녀를 현재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 부부 사이는 그 이전보다 훨씬 좋아집니다. 우리는 서로의 결점 때문에 괴로워할 필요도, 그것을 용서해 주려고 안간힘을 쓸 필요도 없게 됩니다.



상담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95% 정도는 인간 관계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장과 직원, 이웃 사람……누구나 할 것 없이 인간의 관계 속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서 서로를 용서하고 인정할 때의 그 기쁨이란 세상 사람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받아들입시다.



교회에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교리가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교리에 의해서 의인과 악인을 가려낸다면, 누가 의인의 자리에 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분명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가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를 용납하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용기를 가지십시오. 상대방을 용서하는 근거를 세상 사람들처럼 행위에 두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님의 보혈 위에 두십시오. 그밖에 다른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나에게 축복을 주시는 그 하나님이 상대방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내리시며, 나를 구원하신 그분의 사랑이 상대방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 시간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집사님, 장로님, 목사님, 어느 누구라도 좋습니다. 여러분 좌우 앞뒤의 청년인가요? 아무든지 좋습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라 예정을 입어 기업이 되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당신’도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이 되어 그분의 영광을 찬송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축복하시는 내용이 있는 성경에서 이름이 나올 때마다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의 이름을 그곳에 넣어 읽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이 좋아하지 않는 그 사람을 위해서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와 똑같은 축복을 여러분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함께 ’오늘 나는’이란 찬양을 하겠습니다.

이 찬양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시시하고 별 것도 아닌 일로 한 형제와 언쟁을 벌였고, 그 일로 마음이 상한 채 벌써 며칠이나 보냈습니다. 물론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눈만 감으면, 먼저 그에게 손을 내밀고 화해를 청해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수 일째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말인가 하는 따위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끝내 먼저 손해보기를 거부하고 있던 그때의 어느 날 밤, 결국 그가 먼저 나를 찾아와 손을 내밀고 말았습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그는 나보다 나이도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밤, 새벽 4시까지 이 노래를 지어 부르며 가슴을 쳤습니다.



♬내가 먼저 손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웃음주지 못하고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네

그가 먼저 손내밀기 원했고 그가 먼저 용서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웃음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간교한 나의 입술이여 오 옹졸한 나의 마음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내가 먼저 섬겨주지 못하고 내가 먼저 이해하지 못하고

내가 먼저 높여주지 못하고 이렇게 고집부리고 있네

그가 먼저 섬겨주길 원했고 그가 먼저 이해하길 원했고

그가 먼저 높여주길 원했네 나는 어찌된 사람인가

오 추악한 나의 욕심이여 오 서글픈 나의 자존심이여

왜 나의 입은 사랑을 말하면서 왜 나의 맘은 화해를 말하면서

왜 내가 먼저 져줄 수 없는가 왜 내가 먼저 손해볼 수 없는가

오늘 나는 오늘 나는 주님 앞에서 몸둘 바 모르고 이렇게 흐느끼며 서있네

어찌 할 수 없는 이 맘을 주님께 맡긴 채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더럽고 추하고 부족함이 많은 우리를 현재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는 말씀에 의지해서 여러분이 미워하는 자들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