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변형을 위한 예배의 자세 대상16:1-3
이번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제 옆 침대에는 통도사 근처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계셨습니다. 무릎관절을 수술하신 분으로 이전에 8개월 내과병동에서 입원하셨다가, 이번에 정형외과 병동에 2개월 정도 입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항생제 등을 먹으니 속이 아프고, 또 먹지 않으니 다리에 염증이 생기고 너무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 따님이 절에 다니시는데 스님을 모시고 온 것입니다. 목사로서 스님은 어떻게 심방하는가 궁금하여서 주의깊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좀 나누더니 봉투를 하나 주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밤에 잠을 주무실수가 없어서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집사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기도를 해드려도 되겠느냐라고 하자 흔쾌히 응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기도했고, 그분은 그날 잠을 잘 주무셨습니다. 다음 날 얼굴 표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집사람이 취미를 붙였는지 집에서 병실에 오면 자기 환자는 돌볼 생각하지 않고, 늘 저에게는 엉덩이만 보이고 나이드신 할아버지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늘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 우리 만남은 우연히 아니요...\" 뭐 그런 가사처럼 \'이렇게 예수 믿는 저희를 만난 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리고 밤마다 기도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분이 퇴원을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꼭 한번 시골에 놀러 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랑이 많은 것 같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제 마음속에 내가 어려울 때 기도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감격할 수가 있었습니다. 주지 스님고 할 수 없는 것을 평신도가 대제사장이 되어서 기도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전 한 청년이 사무실에 왔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과거 다녔던 사람입니다. 제가 우리 교회 왔을 때 주일에는 예배를 드리지도 않았고 평일에 사무실에 종종 들리던 친구였습니다. 몇 번이고 권면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간증을 하는 데 어느 교회를 억지로 끌려갔는데 예배를 드리는데 자신도 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말로는 \"그래 니가 이렇게 은혜받고 달라져서 너무 기쁘다\"라고 말을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왜 우리는, 아니 나는 그렇게 해줄 수가 없었는가 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왜 변화는 더딘가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어디에서 올 수 있는가? 그것은 예배이다. 예배를 통하여 변화되고 새 생명을 얻는 사람이 있을 때이다 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좋은 하나님을 믿고 있노라 하면서 얼마나 달라지셨습니까? 달라진 증거는 무엇입니까? 신앙을 얼마나 성숙하여 지셨습니까? 이리 오랫동안 예배는 드렸지만 왜 변화가 없는 것입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가 바른 자세로 예배를 드린다면 삶이 변화되고 변형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을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Ⅰ.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1절에 \'하나님의 궤를 메고 드러가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통일 왕국을 이루고 블레셋을 물리침으로 나라가 안정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외적으로 보면 안정적이며 잘 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모시고자 애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온 백성들은 언약궤를 수레로 운반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소들이 뛸 때 웃사가 손을 펴서 법궤가 떨어질까봐 그것을 붙들게 되었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로 죽임을 당하는 참담한 실패를 경험하였습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위엄이 궤에 상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손을 대지 아니하고 채를 꿰어서 레위인들 중에 고핫 자손들이 어깨로 메어 운반을 해야 만 했습니다. (출25:14-15) 그리고 말씀에 하나님의 성물을 함부로 만지지 말도록 했습니다. (민4:15) 만지면 죽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삼상3:1절에 \"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의 궤가 엘리시대 블레셋 사람에게 빼앗긴 후 오랫동안을 기럇여아림에 방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삼상4, 5장) 하나님을 찾기보다 신접한 여인을 더 찾았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말씀 앞에 있지 않았기에 전에 블레셋인들이 옮긴 방식 그대로 아무 생각없이 수레로 옮기려 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피상적으로 보면 웃사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이 열심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었습니다. 지식이 없을 뿐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손으로 궤를 잡은 것입니다.
그러면 왜 웃사는 그렇게 한것입니까? 웃사는 아비나답의 손자입니다. 그 집에 하나님의 궤가 70-80년간 있게 되었습니다. 자기 집에 궤가 오래도록 있었기에 즉 가까이에 오랫동안 있었기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사라졌버렸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소홀히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실패 이후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 그분을 말씀을 기초로 하여 어떻게 섬겨야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레위인들을 세워서 그들로 어깨에 궤를 메고 장막가운데 들이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웃사의 예배는 인간적으로는 선한 의도가 있는 것처럼 보이나 아직 성화되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하겠다고 덤벼드는 자세입니다. 종교생활에 너무 가까이 있었기에 영적인 비밀과 경외심을 상실하게 된 종교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막연하게 감정적으로 좋아하거나, 자기 열심히만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말씀에 근거하며 그 말씀 앞에 순종하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가인의 제사가 왜 문제입니까? 계시에,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생각보다는 자신의 방법과 생각을 앞세우며 하나님은 자신이 드리는 제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인본주의적인 예배이기에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14:21절에 \"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없이 상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는 열심은 오히려 무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없는 예배는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누가 신앙에 제일 은혜를 못 받을 확률이 큰지 아십니까? 목회자 가까이에 있는 분입니다. 중직자들의 가족, 사무원, 직원 등입니다. 인간적인 목회자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많이 듣기에 사람만이 보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정말 위험한 것은 안다는 것이 신앙의 비밀들을 보지 못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행복한 세상]이란 책에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시골 어느 집에 한 군인이 찾아왔습니다. 낯선 군인이 전해준 것은 아들의 전사통지서였습니다. 전쟁터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아들의 모습을 떠올라 어머니의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파했습니다. 어머니는 \" 아! 하번이라도 아들을 볼 수만 있다면, 단 5분 만이라도\" 하면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한참을 있다가 군인이 위로하고자 \" 아들을 단 5분 동안 만날 수 있다면 어머님이 만나고 싶은 아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라고 하자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했던 지난 날들을 떠올렸습니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우던 어릴적 천진한 모습, 학교 단상에 올라가 우등상을 받던 자랑스런 모습도 ... 그러나 어머니가 다시 보고 싶어하는 아들은 그때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군인이 조심스럽게 \" 군인으로 용감하게 싸우던 모습인가요?\" 그러자 어머니가 \" 아닙니다. 내가 만나고 싶은 아들의 모습은 언젠가 아주 큰 잘못을 저지르고 어쩔 줄 몰라하며 울던 그때의 아들과 단 5분 만이라도 만날 수 있었으면.....\"하며 다시 우는 것이었습니다. \" 아이는 그때 너무 어려서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지요\" 어머니는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아들의 얼굴을 닦아 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때의 아들을 다시 만나 품에 안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고 싶다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가? 그것은 내가 잘나서 자랑할만한 것이나, 어떠한 신앙적인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너무 부족하여 회개하며 눈물로 간구하는 모습, 겸손한 마음을 가진 모습을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모든 것을 보지 마시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실 수가 있기 바랍니다. 겸손의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은혜가 있고, 내 영이 충만함으로 내 삶이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 우리가 말씀대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Ⅱ. 내 중심이 죽어지고 부서지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장막에 모시고 먼저 번제를 드렸습니다.
번제는 소, 양, 염소 중 먼저 흠없는 온전한 제물을 골라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자가 직접 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며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 후 번제물을 잡습니다.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졸졸 따라왔고, 초롱초롱한 눈망울, 주인의 몸에 접촉하며 기대보려는 살아있는 어린 양의 목을 치는 것을 상상하여 보십시오. 통회하며 괴로운 심정으로 목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린 양의 피가 사방으로 뛰기게 됩니다. 흠없는 짐승을 죽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내 안의 자아와 죄된 습관과 고집과 더러운 죄를 발견하며 철저하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제물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후 가죽을 벗기고 피를 빼고 각을 뜨고 내장을 갈라 물로 씻습니다. 내 안과 밖을 온전히 바치는 마음으로, 더 이상 죄악을 품지 않겠노라, 죄의 도구가 되지 않으리라 라는 결단으로 짐승을 씻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불에 완전히 태우게 되어집니다.
자신의 죽음과 함께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다시 한번 내 삶 전체를 헌신하겠습니다. 결단하며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8장 보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며 외적으로 드러나는 헌금 및 금식 등 종교행위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온 바리새인이 있습니다. 따로 서서 자신을 과시하며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내가 죽어지는 예배를 드린 세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의롭다함을 받고 내려갔습니다. 사람마다 한번씩은 이러한 죽음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헨리나우엔은 예수회의 사제이며 심리학 교수입니다. 예일대학교수로 재직하다 1981년 그 자신의 풍요로움에 대한 죄책감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페루의 빈민가에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어집니다. 그후 하버드에서 강의하다가 또 다시 정신 박약 장애자 공동체 라르쉬에서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어집니다. 그가 어느 추운 겨울날 장애아를 데리려 가다가 교통사고로 비장의 엄청난 출혈로 죽음의 문턱을 경험하게 되어집니다. 그후에 그 경험을 글로 쓰게 되어집니다. 그것이 [거울너머의 세계]라는 책입니다. 그것이 이분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 인생이란 하나의 긴 준비의 여정, 즉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죽을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하는 여정이다. ....그 길목을 지나는 동안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찾아온다. 즉 내가 원하는 것은 권세인가 섬김인가? 내가 바른 것은 드러나는 것인가, 숨겨지는 것인가? 나는 소위 출세를 원하고 있는가, 아니면 소명에 충실하려 하는 가? 이런 물음들은 계속 우리를 찾아와 쉽지 않은 선택을 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인생이란 자아에 대해서 죽어 가는 기나긴 여정이라 말할 수 있다 \"
\" 마취에서 깨어나 하나님의 집에 와 있지 않고 아직도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즉각적으로 사랑에 주리고 목말라 있으면서도 결코 그것을 줄 수 없는 세상에서 그 사랑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모두를 품어주시는 아버지의 그 사랑을 알게 하라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이 분은 자신이 죽음을 경험한 후 그 삶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게 됩니다.
한신교회의 이중표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3차례의 담석제거 수술을 하면서 사경을 헤맨적이 있습니다. 그후 그분의 자유주의 신학노선에 있지만 별세의 신앙을 외치면 목회를 하게 되어집니다. 別世 는 인간의 정과 욕심, 죄악된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은 영적인 죽음을 뜻하는데 죽은 후에 천국만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에서부터 별세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처럼 희생하는 삶을 살 것을 설교하였습니다. 전혀 삶과 목회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번에 저도 수술대에서, 목회의 길을 설수 없을 지 모른다는 의사의 말속에서 죽음을 경험하였습니다. 죽음을 경험하니 보는 눈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졌습니다. 아내도 죽었던 남편을 보니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니 한번은 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회복될수록 다시 옛 자아가 살아남을 보면서 아! 날마다 나를 죽여야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정말로 내가 죽어지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완전히 굴복되어지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를 구경하러 오지 마십시오. 목사가 설교 잘하나 못하나 판단하면서 설교를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옛자아가 부서지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많이 부서지기를 바랍니다. 주님 나를 고쳐 주세요, 주님 나를 새롭게 해주세요 라는 마음으로 예배들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 나의 죽음도 유익함이라 \"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날마다 내가 죽어지는 예배와 삶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은 죽어서,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서 나가시는 것임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어지는 것을 경험한 자는 어떠한 예배와 삶으로 나아갈까요?)
Ⅲ. 화목의 삶, 축복하는 삶으로 마무리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다윗은 화목제을 드렸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화목제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번제처럼 예물을 가져온 사람은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제물을 잡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 예물의 피를 받은 아론의 자손들은 제단에 피를 뿌립니다. 왜 이런 희생과 함께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생긴 장벽 즉 죄 때문인 것입니다. 숨겨진 죄 때문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하고, 하나님 앞에 나서기가 두렵고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정죄감으로 얼굴이 굳어집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이때 화목제를 드리게 됩니다. 이 화목제는 파괴되어진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화목 제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 되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특히 신약에 와서 화목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육신를 찢어 산 제물이 되어주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로마서 3:25-26절에서 \"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화목의 경험은 반드시 성도와 이웃과의 화목으로 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누린자는 용서와 자비를 이웃에게도 나누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 제사(\"communion sacrifice\"), 친교의 제물(\"fellowship offering\"), 화목의 제물( \"peace offering\"), 나눔의 제물( \"shared-offerings\")로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사와 다르게 화목제는 하나님께 바쳐지는 부분, 제사장 몫, 예배자의 몫으로 세 구분하여 집니다. 가슴과 오른쪽 뒷다리는 제사장에게 존경과 감사마음으로 드리게 되어집니다. 그 외 모든 부분은 예배자가 이웃과 함께 나누어 먹게 되었습니다. 음식을 같이 먹는 다는 것은 서로에게 교제하며 용납한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7:15-18절에 의하면 화목제물은 그날에 최소한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다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남아있으면 불태워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제사가 열납되지 않으며 죄를 당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재철 목사님의 [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삶] 이란 책의 \'예배\'라는 부분에 보면 아주 놀라운 통찰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법칙을 했느냐하면 이웃과 반드시 나누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소 한마리가 1500근 정도 나가는데 이것은 며칠 상간에 나누기 위해서는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다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누구에게 까지 나누어야 하느냐 하면 내가 섭섭한 사람, 미워하는 사람, 마음에 상처를 준 사람, 정말 다시는 보기 싫어지는 사람까지 나누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면서 단지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와 화목으로 끝나는 것을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하셔서 이렇게 한 것임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극 정성으로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고서 삶으로, 이웃으로 연결되지 않은 예배는 온전한 예배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화목제를 드린 후 다른 사람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식에 참예한 사람들에게 떡과고기와 건포도떡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화목케되는 기쁨을 경험하십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내 마음에 드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마음에 품고 그를 위해 축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편한 사람과 화목을 시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쉽게 분이 풀어지고, 오해가 풀어지지 않더라도 먼저 주님의 이름으로 용서하시며 손을 내밀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때만이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다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셨습니까? 하나님께 열납되는 예배를 드리셨다면, 하나님과 같이 교제를 나누셨다면 그것은 형제를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면 우리의 예배는 도루묵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도 초대교회 교인들은 \"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서로 교제하고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들은 재산과 모든 소유를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함께 모여 기쁘고 순수한 마음으로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고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늘어나게 하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그들안에 놀라운 변형의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을 세상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목의 제사를 드리실 수 있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두고 계속하여 씹고 또 씹고 있는 그 대상을 오늘도 예수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교제를 회복하고 축복하며 나눌 때 우리 안에 진정한 변형이 삶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 두 손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오직 주만이 나를 다스리네.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다\"
말씀에 근거한 예배를 드립시다. 예배때마다 우리가 죽어지고 부서지길 원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이제 예배를 드림으로 받은 은혜로 형제를 축복하실 수 있는 삶을 사실 수 있기 바랍니다 | |